마레온의 아침은 바닷물이 빠지는 속도로 시작됐다.
새벽 여섯 시가 되자 북부 부두의 나무 계단 아래로 조개가 드러났고, 하역 인부들은 물때를 계산해 짐수레를 밀었다. 폭풍이 휩쓸고 간 뒤 사흘째였다. 부서진 난간은 아직 마른 목재로 덧대어져 있었고, 항만청은 젖은 화물의 손해를 적은 종이를 게시판에 매달았다. 비린 냄새와 끓인 보리차 냄새가 엉킨 거리에서, 사람들은 전날의 피해보다 오늘 들어올 배를 먼저 이야기했다.
서진혁은 그 평범한 광경이 부러웠다.
그의 손에는 검은 경매 초대장의 뒷면을 베낀 종이가 있었다. ‘제998호. 아흔여덟 번째 의자의 첫 번째 소유자. 서진혁.’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한 채 이름을 열 번 넘게 들여다봤지만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그의 나이는 스물일곱이었다. 기록이 처음 만들어졌다는 시기는 적어도 삼백 년 전이었다.
“선조 중에 똑같은 이름을 가진 분이 있었을 수도 있죠.”
진혁의 옆에서 따끈한 설탕빵을 뜯던 라일이 말했다.
“저희 집안은 남에게 남길 유산이라곤 월세 독촉장뿐입니다.”
“그것도 훌륭한 전통 아닌가요. 대대로 갚을 것이 있다는 점에서.”
“아침부터 도둑한테 재산 교육을 받을 줄은 몰랐는데요.”
두 사람은 루멘 경매장의 동쪽 출입문 앞에 서 있었다. 지상 다섯 층짜리 건물은 갈색 석재와 푸른 구리 지붕으로 장식돼 있었고, 벽면의 유리 등잔들은 낮인데도 희미하게 빛났다. 예전 같으면 귀족의 마차와 용병의 짐수레가 한 줄로 늘어서 있었을 시간이었다. 그러나 검은 경매 사건 뒤 시의회가 특별 감사를 시작하면서 손님들의 수가 절반 이하로 줄었다. 입구에는 가격 보증을 요구하는 상인들이 모여 있었고, 정문에는 공적 보관 명령을 알리는 푸른 봉인이 걸려 있었다.
루멘 정문 위에는 원래 황금빛 저울과 검이 교차하는 장식이 걸려 있었다. 일주일 전만 해도 진혁은 그것이 경매장 사장의 허영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최근 들어 그는 저울의 접시 한쪽이 미세하게 기울어져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건물 자체가 살아 있다는 비밀을 들은 이후로 그런 사소한 비대칭이 자꾸 눈에 들어왔다. 빛이 들면 그림자가 대칭으로 떨어지지 않는 난간, 밤이면 미묘하게 울리는 배수관, 직원들이 무의식적으로 피해서 걷는 복도 구석까지. 모라가 숨 쉬는 곳은 겉보기보다 넓었고, 그 안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그것을 기묘한 건축상의 특성 정도로만 받아들이고 있었다.
입구 게시판에는 새 근무표도 걸렸다. 검은 경매 사건 뒤 사라졌던 직원 일부가 돌아왔지만 아직 자리가 빈 부서가 많았다. 감정 보조실 서기 두 명이 장부를 나눠 들고 뛰었고, 물품 등록 담당자는 고객의 항의에 목이 쉬어 있었다. 진혁은 그동안 남의 목숨과 권리를 구한다는 큰 문제에 매달려 자기 직장의 작은 균열을 제대로 보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감정 의뢰가 밀렸어요.” 서기가 그를 발견하고 말했다. “수석 대행님이 도장을 안 찍으면 창고 물건을 하나도 못 내보낸대요.”
“수석 대행이라는 직함은 좋아도 직원 수가 안 늘어나니 소용없네요.”
“그러니까 서류부터 보세요. 지난달에 맡긴 생선 비늘도 아직 있어요.”
“생선 비늘을 왜 경매에 맡겼대요?”
“용의 비늘이라고 우겨서요.”
진혁은 기록대에 쌓인 상자 하나를 들었다가 냄새 때문에 급히 내려놓았다. 만약 자기 이름이 삼백 년 전 원부에 실려 있다는 이유로 책임을 져야 한다면, 저 썩은 비늘을 방치한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 걸까. 그는 순식간에 품속 종이를 더 꽉 움켜쥐었다. 적어도 한 가지는 확실했다. 마법 장부는 그의 출근 시간을 고려해 주지 않는다.
경비대장 헥터가 문 앞에서 출입 명부를 확인했다.
“오늘은 안으로 들어가기 전에 방문 목적을 적으시오. 세리아 사장도 예외 없다고 했소.”
라일은 펜 끝을 손가락으로 굴렸다. “도둑은 직업란에 뭐라고 적으면 좋습니까?”
“무직.”
“너무 냉정하시네.”
“수배된 직업이라고 적어 줄 수도 있고.”
라일이 재빨리 ‘유물 회수 협력인’이라고 적자 헥터는 한숨을 내쉬고 도장을 찍었다.
그들은 지하 기록실로 내려갔다. 붉은 양탄자와 금빛 샹들리에로 화려한 대홀과 달리, 기록실은 사람이 일하기 위해 꾸민 공간이었다. 층마다 좁은 철계단이 이어지고, 벽에는 수백 개의 납작한 서류함이 붙어 있었다. 움직이는 기록 선반이 방문자의 신분에 따라 길을 막기도 했다. 진혁은 처음 입사했을 때 이곳에서 장부를 옮기다가 손가락 세 개를 끼인 적이 있었다. 건물의 본질이 오래된 생명체라는 것을 안 지금도 그날의 통증은 생생했다.
세리아는 가장 안쪽 책상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는 평소처럼 결이 고운 검은 옷을 입었지만, 왼손에 낀 구리 반지는 장갑으로 가리고 있었다. 어젯밤에는 잠을 못 잤는지 눈 밑이 조금 푸르렀다.
“원본을 봐야겠어요.” 진혁이 말했다.
세리아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종이 위 이름을 읽었다. “네 이름이 삼백 년 전 기록에 있다는 걸 믿고 싶은 거니?”
“믿고 싶지는 않습니다. 오타면 좋겠는데, 마법 장부의 오타를 지워 줄 직원이 퇴사한 것 같습니다.”
세리아가 아주 짧게 웃었다. 웃음은 금세 사라졌다.
“원본은 아직 검은 경매의 봉인석에 있어. 시의회와 루멘이 공동 보관 중이야. 대신 원부의 전사본을 가져왔어. 공증인이 잉크 층위를 확인했지.”
책상 위에 놓인 얇은 유리판에는 오래된 책의 글자가 그대로 투사됐다. 종이는 누렇게 바랬고, 가장자리에는 짠물에 쓸린 흔적이 있었다. 진혁은 손바닥을 대지 않았다. 능력을 무리하게 쓰면 잔류 기억이 뒤섞인다는 것을 여러 차례 배웠다. 먼저 일반적인 감정부터 했다. 연대 표시, 보관 도장, 필체의 기울기, 낱장의 묶음 방식. 훈련받은 감정사라면 누구나 확인해야 할 순서였다.
“이상하네요.”
“뭐가?”
“‘서진혁’ 부분만 글씨가 너무 새것입니다. 나머지는 오래된 해초 먹으로 썼는데 여기에는 그을음 냄새가 남아 있어요.”
라일이 유리판으로 코를 들이밀었다. “유리판에서도 냄새가 나요?”
“감정용 투사라 미세한 잔향을 재현합니다. 비싼 장비예요. 만지지 마세요.”
“저보고 훔칠까 봐?”
“이미 손이 주머니에 들어가 있잖아요.”
라일은 빈손을 꺼내 흔들었다.
그때 진혁의 손바닥에 흐릿한 문자가 떠올랐다. 그는 허락을 얻은 뒤 짧게 능력을 열었다.
[제998호 증인석 원부 전사본.]
[기록 매체 제작 시기: 약 312년 전.]
[해당 이름 기입: 사흘 전.]
[기입 경로: 외부 명명 인장.]
[감정 불완전: 연결 대상의 과거를 원본과 동일시할 수 없음.]
진혁은 숨을 내쉬었다. 삼백 년을 살았다는 사실보다 최근에 누군가 자신을 겨냥했다는 사실이 훨씬 현실적인 공포로 다가왔다.
“제 이름은 옛날에 적힌 게 아닙니다. 누군가 사흘 전에 넣었어요.”
세리아의 얼굴이 굳었다. “누군가 네가 마지막 증인이 되도록 자리를 지정한 거군.”
“그럴 권한이 있는 사람은?”
“그걸 알아내야지. 오래된 장부에 새 글씨를 넣으려면 기록망의 중계점이 필요해.”
이사벨 론 감찰관이 도착한 것은 그때였다. 그녀는 밖에서 묻어온 빗방울을 소매로 털며 얇은 서류 뭉치를 펼쳤다. 시의회 공증과는 두 번이나 전사본 대조를 거절했지만, 그녀가 ‘위임권 조작 사건’이라고 정식 접수하자 겨우 자료가 나왔다고 했다.
“원부에 이름을 추가하는 입출력 기록이 항만 시립 기록관을 경유했어요. 공식 명칭은 염문 보조보관소. 사용하지 않은 지 오래됐다는 건데, 지난달 관리 인력이 새로 배치됐더군요.”
“염문이 어디입니까?”
카렌이 뒤늦게 들어오며 물었다. 그녀는 전날 이안의 진료를 마치고 온 참이었다. 밤새 동생이 악몽을 꾸는 바람에 거의 쉬지 못했다. 평소 단단히 묶던 검은 머리카락 끝이 조금 흐트러져 있었고, 손에는 아직 약국 봉투가 들려 있었다.
이사벨이 벽에 지도를 펼쳤다. 마레온 외항 북쪽, 바닷물이 좁은 골짜기를 파고든 곳에 작은 등대가 그려져 있었다. 등대 옆에는 이쑤시개만 한 건물이 붙어 있었다.
“바닷물이 드나드는 염문. 예전에는 들어오는 모든 유물의 도착 기록을 한 번 더 보관하던 곳이에요. 삼백 년 전 루멘이 세워질 때부터 있었다죠.”
“지금은 폐쇄됐다는 곳이죠?” 세리아가 물었다.
“장부상으로만요. 누군가는 지난달부터 예산을 받아 문을 열고 있어요.”
진혁은 지도 위의 좁은 지형을 바라봤다. 가파른 절벽 사이로 바람이 몰리는 장소였다. 육지에서는 만조에 길이 잠기고, 배로 접근하려면 바위 사이 물살을 계산해야 했다. 그곳에 오래된 기록과 새로 입력된 자신의 이름이 함께 있었다.
“시의회 인력으로만 확인하면 안 됩니까?” 카렌이 물었다.
이사벨은 고개를 저었다. “기록관 직원들이 내준 자료부터 서로 다릅니다. 공개 감사팀이 들어가면 원본이 먼저 사라질 가능성이 있어요. 합법적인 열람을 청구할 사람이 필요합니다. 유물의 소유권과 감정 내역을 이해하는 사람이요.”
세리아가 진혁에게 시선을 돌렸다. 진혁은 불길한 예감을 느꼈다.
“설마 출장입니까?”
“공식 업무지.”
“출장비는요?”
“그 질문을 할 줄 알았어.”
그녀는 봉투를 하나 밀어 주었다. 여비와 안전수당이 적혀 있었다. 금화 두 닢. 진혁은 눈을 반짝였다가 봉투 뒷면의 작은 글씨를 읽고 표정이 구겨졌다. ‘유물 손상 시 통상 과실 책임 별도.’
“죽을 수도 있는 출장에 과실 책임까지 붙입니까?”
“죽으면 청구하지 않을게.”
“그게 위로가 되나요?”
세리아는 오랜만에 제대로 웃었다.
이사벨은 출입 명령과 함께 바닥에 세 장의 지도 사본을 펼쳤다. 첫 장은 삼백 년 전 소금 길의 도면이었다. 두 번째는 이십 년 전 화물 수송로를 정비할 때 작성된 항만청 지도였다. 마지막은 최근 관광객에게 팔고 있는 도시 안내도였다. 세 장 모두 염문이 표시된 위치는 같았지만, 세 번째에는 기록고 건물이 빠져 있었다.
“허가받지 않은 시설이라면 지도에서 지울 수도 있죠.” 라일이 말했다.
“그렇다면 누가 허가를 취소했는지 문서가 남아야 해요.” 이사벨이 대답했다. “폐쇄 결재 문서를 요청했더니 관리과는 관할이 아니라고 하고, 관리과가 안내한 다른 부서는 건물 자체를 모른다고 하더군요.”
카렌은 오래된 지도를 자세히 들여다봤다. “여기 선착장 옆에 작은 검 표시가 있어요.”
“그건 옛 검사단의 집합 장소예요.” 아벨이 설명했다. “그 당시는 장부가 옮겨질 때마다 현장 검사가 따라붙었으니까요.”
“그런데 지금 지도에는 빠져 있네요.”
진혁은 세 장의 지도를 나란히 맞추다가 더 중요한 변화를 발견했다. 원래 육지로 이어지던 보조도로의 끝이 최신 지도에서는 민간 사유지로 표시돼 있었다. 길을 없앤 것이 아니라 일반인이 찾아가지 못하도록 소유권 표시만 바꾼 셈이었다. 그는 날짜와 변경 기관을 수첩에 적었다. 어쩌면 그 작고 평범한 도로 표시가 앞으로 누군가에게 던질 가장 실질적인 질문이 될지도 몰랐다.
“그럼 정리하죠.” 그가 말했다. “우리가 아는 건 이름이 최근에 들어갔다는 사실, 출입 기록이 염문을 거쳤다는 사실, 그리고 공식 지도에서 시설이 없어졌다는 사실까지입니다. 그 밖은 아직 가설로 남겨 두죠.”
카렌이 그를 돌아봤다. “예전보다 훨씬 감정사답네요.”
“월급은 아직 보조 수준인데 말이죠.”
“그 말만 안 하면 좋았을 텐데.”
진혁은 세 장의 지도를 접으면서 이상하게 마음이 조금 편해지는 것을 느꼈다. 막연히 유령을 상대한다고 생각할 때보다, 누가 언제 어떤 종이를 바꿨는지 묻는 편이 훨씬 견딜 만했다.
진혁은 출장을 수락하기 전에 먼저 모라를 찾아갔다. 지하 심실은 경매장의 다른 곳보다 따뜻했다. 커다란 청록색 결정들 사이로 천천히 빛이 돌고, 물방울은 아래로 떨어지는 대신 허공에서 작은 원을 그렸다. 모라는 빛무리 속에 앉아 있었다. 진혁이 가져온 버터빵 냄새를 맡고 고개부터 들었다.
“이번엔 어디 가?”
“북쪽 염문이라는 곳. 혹시 알아?”
모라가 빵을 받아 들고 오래 생각했다. “문이 있지. 소금 냄새가 아주 짙은 문. 옛날에 사람들은 내가 잠들면 그곳에서 내 이름을 적었어.”
“무슨 이름?”
“그때마다 달랐어. 괴물, 보호자, 재산, 담보.”
그녀는 마지막 말을 하며 빵을 내려놓았다.
진혁은 곁에 쪼그려 앉았다. “이번에는 네 이름을 함부로 적지 못하게 하려고 가는 거야.”
“그럼 네 이름은?”
“그것도요.”
모라는 빵을 반으로 나눠 그에게 내밀었다. “사람은 자기 이름을 지키는 데도 돈을 내?”
진혁은 대답하기 어려웠다. 루멘에서 일하며 본 거래 가운데 가장 비싼 것들은 늘 누군가의 두려움에서 시작됐으니까.
“이번에는 안 내려 합니다.”
그가 빵을 받았다.
그날 저녁, 진혁은 시립 기록관의 출입 자료를 복사하면서 마지막으로 전사본을 살펴봤다. 빛을 비스듬히 비추자 이름 아래 보이지 않던 숫자 세 개가 나타났다.
‘031.’
수백 년 전의 연도도, 자신의 생일도 아니었다. 이사벨이 가져온 예산 문서의 관리 인원 수 역시 아니었다.
라일이 그의 어깨 너머에서 숫자를 보고 말했다.
“그거, 서류 번호가 아닌 것 같은데요.”
“왜요?”
“도둑들이 남기는 표식과 같아요. 훔치려는 대상이 아니라 훔치고 나서 비워 둘 자리의 번호.”
진혁의 손끝이 차가워졌다.
그가 원부의 여백을 감정하자 짧은 문장이 떠올랐다.
[명명 대상 031.]
[후보 확정까지 남은 기간: 23일.]
[대상 이탈 시: 예비 후보 호출.]
진혁은 자신의 이름이 적힌 종이를 다시 내려다봤다.
이름을 훔치려는 사람이 있었다. 그런데 그 사람에게 자신은 첫 번째도, 마지막도 아닌 서른한 번째 후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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