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레온의 아침 바다는 바람이 강했다. 외항의 방파제에는 물보라가 눈처럼 날렸고, 어선들이 고동을 울리며 좁은 수로를 통과했다. 루멘 경매장은 여전히 항구 북쪽에 서 있었다. 석조 외벽에 붙은 오래된 장식은 멀리서 보면 파도가 깎아 놓은 조개껍데기 같았다. 그러나 서진혁은 이제 그 건물이 잠든 고대 괴수의 껍질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사람이 만든 벽보다 오래된 표면 안쪽으로 미세한 떨림이 흐르곤 했다.
세리아는 정문 앞에 서서 경매장의 간판을 올려다봤다. 지난 몇 달 동안 그녀는 수도 없이 그 간판을 고쳐 달았다. 누군가 보수 공사비가 비싸다고 하면 직접 계산서를 들고 장인을 찾아갔다. 지금까지는 건물을 지킨다는 말이 곧 자신의 사업을 지키는 일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오늘은 달랐다. 왕국 전체의 거절을 임시 보관하려는 회선이 루멘의 심실을 통해 움직이고 있었다. 간판을 지키려다 항구 전체를 위험에 빠뜨릴 수는 없었다.
“제일 안쪽 심실만 폐쇄하면 안 됩니까?” 벨라가 물었다.
“정확히 그 심실에서 항만 방벽의 긴급 회신도 나가.” 해린이 대답했다. “문을 닫는다고 기능이 멈추는 구조가 아니야. 오히려 출입할 사람이 없어지면 이상 신호가 쌓일 수 있어.”
진혁은 지하계단을 내려갔다. 습기와 오래된 금속 냄새가 섞여 있었다. 처음 이곳에서 구리 반지를 보았을 때는 계단 끝이 이렇게 복잡한 공간으로 이어진다는 사실을 몰랐다. 오늘은 복도마다 누가 어느 설비를 관리하는지 적힌 작은 표찰이 보였다. 사람들의 이름과 책임이 하나씩 붙자 미로 같던 경매장은 조금 다른 모습이 됐다.
심실 외곽에서는 모라가 기다리고 있었다. 모라는 사람의 형태를 완전히 갖추지 못한 희미한 빛이었지만, 이미 여러 차례 자신의 의사를 말하고 기록했다. 진혁이 들어서자 작은 목소리가 울렸다.
“여기, 너무 시끄러워.”
벽 뒤에서는 낮고 규칙적인 울림이 계속됐다. 모라에게는 그 소리가 거절들이 서로 부딪히는 소리처럼 들린다고 했다. 그녀는 자신을 지키기 위해 세워 둔 장치가 다른 사람의 목소리를 묶는 데 쓰이는 일을 원하지 않았다.
“네가 동의하지 않으면 이 장치를 네 이름으로 돌리지 않을 거야.” 진혁이 말했다.
모라가 한동안 침묵했다. “그 말, 이번에도 기록해?”
“기록해도 될까?”
“응. 그런데 내가 대답하지 않을 땐, 대답 안 했다고만 써.”
그 대답에 세리아는 잠시 눈을 감았다. 유나가 남긴 수많은 기록도 이처럼 단순한 허락에서 시작되었을지 몰랐다. 누구도 대신 말하지 않는 것. 아무리 좋은 목적이라도 상대가 대답할 시간을 남겨 두는 것. 그녀는 몇 년 동안 유나의 흔적을 찾아다니면서 때로는 자신도 그 원칙을 잊고 살았다는 생각을 했다.
심실 하부의 점검문은 오래전 창고에서 본 열쇠 구멍 모양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진혁이 손을 대자 열리지 않았다. 문 옆에 작은 창이 하나 있었고, 그 안쪽으로 책상과 의자가 보였다. 도면을 살피던 해린이 말했다. “이 문은 열쇠로 밀어 여는 구조가 아니라 반대쪽에서 확인해야 열리는 구조예요. 제7봉인은 접근권을 줄 뿐, 안에 있는 것의 소유권을 주지는 않습니다.”
세리아는 낡은 직원 명부를 펼쳤다. 그곳에는 루멘의 초창기 접수인 가운데 이름이 지워진 한 사람이 있었다. 손등에 열쇠 구멍 모양 화상을 입었다는 정비 기록이 남아 있었다. 진혁은 첫날 지하 창고에서 반지를 던져 주던 노인을 떠올렸다. 자신은 노인을 단순한 감정 보조 담당자로 생각했지만, 그는 반지가 어디에 쓰이는지 알고 있었을 가능성이 높았다.
“그분을 찾을 수 있을까요?”
“찾아 왔어.” 낯익은 목소리가 뒤에서 들렸다.
계단 아래에는 옛 정비복을 입은 노인이 서 있었다. 짙은 장갑을 벗자 손등의 화상이 보였다. 노인은 진혁을 보더니 작게 웃었다. “쓰레기라더니 아직도 들고 다니나?”
진혁은 놀라서 대답을 놓쳤다. 노인이 처음 가져왔던 반지는 자신에게 남아 있지 않았다. 그러나 그때 생긴 손바닥의 글씨와 제7봉인 열쇠의 관계는 몇 달 동안 단 한 번도 사라지지 않았다.
노인은 경매장의 전직 접수인이라고 밝혔다. 정식 이름은 최연묵이었다. 그는 오래전 잘못된 회신을 접수했다가 그날 이후 이름을 명부에서 지웠다고 했다. 지웠다는 말은 스스로 떠났다는 뜻이었지만, 기록의 상당 부분은 누군가 후대에 변조했다. 그가 이곳에 돌아온 이유는 세리아나 진혁에게 소유권을 넘겨주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원래 문 안에 있어야 할 사람이 돌아왔으니까.”
최연묵은 눈에 익은 점검 노트를 펼쳤다. 문 안쪽에 붙인 이름표는 비상상황을 맡는 일시 접수인이 교대할 때마다 바뀌었다. 그런데 마지막 이름표는 한 번도 교체되지 않았다. 열두 해 전 서류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유나. 제7봉인 외곽 원본 회신 감시. 교대 미완료.'
세리아가 노트를 받아 들었다. 그녀는 손을 떨지 않으려 애썼지만 종이 가장자리가 작게 흔들렸다. 유나가 살아 있는지 확정할 수는 없었다. 그래도 그녀가 마지막으로 어디에 있었는지, 무엇을 지키려고 했는지는 조금 더 분명해졌다.
“들어갈 방법이 있습니까?” 세리아가 물었다.
“있지. 다만 먼저 경매장을 하루 비워야 해.”
그 말은 단순한 문 닫기가 아니었다. 항구 최대의 중립 거래소가 하루 영업을 중단하면 상인들의 화물이 창고에 쌓였고, 경비 인건비와 안전 보관료는 계속 나갔다. 세리아는 계산서를 받아 들었다. 손실액이 생각보다 컸다. 건물에 붙은 간판을 지키려다 사람의 목소리를 묶게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떠올린 그녀는 잠깐도 망설이지 않았다.
“휴장 공고를 내.”
벨라가 눈을 크게 떴다. “사장님, 거래 수수료만—”
“알아. 손실 보전이 필요한 위탁자들부터 연락해. 보관 중인 물건은 소유자 동의 없이 다른 곳으로 옮기지 말고.”
직원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장부와 상자가 제자리를 찾아갔고, 경매장에 남은 상인들은 영수증을 확인한 뒤 천천히 밖으로 나왔다. 세리아는 마지막까지 지하 복도에서 기다렸다. 문을 지키는 것이 소유권을 지킨다는 뜻이 아니라는 걸 이제는 알고 있었다.
휴장 소식은 빠르게 항구에 퍼졌다. 어떤 상인은 분노했다. 이미 멀리서 유물을 실어 왔고 숙박비까지 냈는데, 갑자기 하루 동안 창구를 닫는다니 손해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세리아는 그들을 회의실로 불러 출품 계약에 명시된 보관비와 취소 수수료부터 확인했다. 원래 경매장이 물어야 할 책임을 국가 비상사태라는 말로 없앨 생각은 없었다.
“사장님이 하는 일은 이해합니다.” 한 도자기 상인이 말했다. “하지만 제 가족은 여기서 물건을 팔아야 빚을 갚습니다.”
세리아는 바로 죄송하다고 말한 뒤 그의 계약서를 펼쳤다. 경매장 측이 일방적으로 휴장을 결정할 경우 보관료 일부를 돌려주고 정식 대체 날짜를 제공해야 했다. 그녀는 여기에 추가 손실 보전 절차를 제시했다. 벨라는 서류마다 지급 근거를 남겼고, 직원 두 명은 현장에서 사인을 받았다. 서류를 읽지 못하는 상인을 위해 다른 독립 직원이 조항을 읽어 주었다.
진혁은 그 과정을 지켜보면서 문득 옛 자신의 모습을 떠올렸다. 얼마 전까지는 수수료만 많이 벌면 경매장이 잘 운영되는 줄 알았다. 하지만 거래를 미루는 순간 발생하는 비용까지 감당하지 않으면, 사람의 동의를 지키겠다는 말은 빈 약속이 된다. 사업을 책임진다는 것은 사장이 가장 먼저 좋은 자리에 앉는 일이 아니라, 문을 닫았을 때 누가 어디서 추위를 맞는지 아는 일이었다.
항만 안전 담당자들은 외부 수로를 돌며 펌프와 밸브 상태를 확인했다. 루멘의 심실은 바닷물 수위와 연결돼 있어, 저녁 만조 때 내부 압력이 상승할 수 있었다. 해린의 조수는 압력계를 독립 기록기에 연결했고, 윤담의 동료는 예비 신호종을 시험했다. 경매장에서 보관 중인 고대 괴수 유물과 실제 살아 있는 건물의 반응을 혼동하지 않도록 장치마다 구분선을 그었다.
최연묵은 지하의 낡은 의자 앞에서 한참 서 있었다. 진혁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왜 처음 그 반지를 가져오셨습니까?”
“네가 아무것도 모르던 때였으니까.”
“그럼 능력도 알고 계셨습니까?”
“내가 알던 건 네가 반지를 보고 멈칫했다는 것뿐이야. 네 손에서 무엇이 보였는지는 네가 말하지 않으면 알 수 없었지.”
노인은 자기가 모든 것을 처음부터 계획한 사람처럼 보이기를 원하지 않았다. 그는 오래된 접수인으로서 필요한 물건이 제자리로 돌아오는지 확인하려 했을 뿐이었다. 능력이 나타난 이유와 시점에는 아직 확실한 설명이 없었다. 진혁은 그 사실을 받아들였다. 모든 비밀을 한 사람의 입에서 들을 수는 없었다.
“그때 왜 폐품이라고 적으라고 하셨습니까?”
“그렇게 적는다고 내가 정한 게 아니야. 네가 적겠다고 했지.”
진혁은 잠시 생각하다 웃었다. 맞는 말이었다. 그 순간의 선택은 겁먹은 말단 직원의 것이었다. 최연묵은 그 선택 뒤에 숨은 사정을 완전히 알지 못했다. 어떤 날의 실수도, 어떤 날의 용기도 남이 대신 가져갈 수 없었다.
지하의 마지막 직원이 도구함을 닫았다. 세리아는 손실을 감수하면서도 경매장 사람들을 먼저 내보냈다. 누군가는 오늘 장사를 접고 집으로 돌아갔고, 누군가는 야간 안전근무를 자청했다. 직원들은 업무 분담표에 자신이 맡은 일을 직접 적었다. 눈에 띄지 않는 그 종이가, 왕도에서 팔겠다고 나선 거대한 권리보다 오히려 믿음직해 보였다.
건물 밖에는 주민 몇 사람이 모여 있었다. 오래된 루멘이 살아 있다는 소문을 듣고 멀리서 찾아온 사람들도 있었다. 세리아는 소문을 부정하지도, 더 큰 이야기를 지어내지도 않았다. 아직 공개할 수 없는 안전 기록과 공개해야 할 영업 중단 이유를 구분해 설명했다. 주민 대표는 방벽에 문제가 생길 가능성이 있느냐고 물었다.
해린의 조수는 현재 수위와 압력계의 값을 직접 보여 줬다. 이미 정해 둔 위험 기준을 넘으면 어느 출입구를 통해 대피해야 하는지 지도도 붙였다. 소문에 대한 답보다 정해진 행동을 알려 주는 편이 필요했다. 주민들은 계속 불안해했지만 적어도 무엇을 확인해야 하는지는 알게 됐다.
세리아는 마지막으로 정문을 닫으며 오래된 간판을 쳐다봤다. 지금의 자신이 경매장을 떠날 수는 없었다. 하지만 경매장을 영원히 혼자 소유해야 한다고 믿을 필요도 없었다. 언젠가 다른 사람들이 각자의 책임을 맡아도 안전하게 돌아가는 곳이 되면 좋겠다는 생각을 처음 했다.
해질 무렵 마지막 서랍이 비워졌다. 최연묵은 점검문 옆 작은 창에 손바닥을 대고 안쪽을 향해 말했다. “교대를 요청합니다. 접수인 최연묵, 복귀했습니다.”
한참 동안 아무 반응이 없었다. 세리아가 입술을 깨물었다. 그때 문 안쪽의 붉은 표시등이 한 번 꺼졌다 켜졌다. 멀리서 희미한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교대 요청… 확인. 단, 아직 돌려줘야 할 편지가 있어요.”
세리아는 고개를 들었다. 그 목소리가 유나인지는 아직 확인되지 않았다. 그러나 닫힌 문 뒤에는 분명 누군가의 마지막 작업이 끝나지 않은 채 남아 있었다.
제195화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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