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쪽 폐광에서 왕도까지 가장 빠른 편지는 닷새가 걸렸다. 날씨가 좋고 다리가 온전할 때의 계산이었다. 그보다 북쪽의 산간 마을은 아침에 길을 나서더라도 해가 지기 전에 다음 역참에 닿지 못했다. 제국의 지도에서는 모든 길이 얇은 선으로 연결돼 있었지만, 길 위에 사는 사람들은 그 선 하나에 산사태와 비, 배고픈 말, 얼어붙은 손이 숨어 있음을 알고 있었다.
왕도의 임시 회신소가 세워진 날, 라일은 배송조합 사무실에서 방대한 노선표를 펼쳤다. 장부에는 마을의 공식 이름보다 사람들이 사용하는 별칭이 많았다. 그는 어린 시절 배달인들에게 배운 방식대로 표시를 고쳐 그렸다. 낮에 햇빛이 닿지 않는 협곡, 소금이 귀했던 어촌, 신호종이 망가져 소식을 받지 못한 공방 마을. 지도 위에 연필이 지나갈수록 행선지는 단순한 숫자가 아니게 됐다.
“여기에는 등록자가 일곱이라고 적혀 있는데 실제 가구는 스물하나예요.” 라일이 말했다.
백란이 대답했다. “그건 일곱 사람만 공식 서류를 쓰는 법을 배웠기 때문이지. 스물한 가구가 일곱 사람에게 전부 맡겼다는 증거는 아니야.”
라일은 펜을 내려놓았다. 오래전 같았으면 그는 그 차이를 이용해 비밀 화물을 빼돌리는 방법부터 생각했을 것이다. 이제는 다른 생각이 먼저 들었다. 저 스물한 가구에게 서류를 읽어 줄 사람을 어떻게 보내야 할까.
카렌은 일행을 세 팀으로 나눴다. 강유리와 윤담은 왕도의 독립 기록기를 맡고, 세리아와 노해린은 마레온의 안전 회선 유지와 경매원 대응을 맡았다. 라일과 백란은 민간 배달망을 통해 지역별 접수인을 찾았다. 서진혁은 남관역으로 가는 이동 경매대에 동행하기로 했다. 모두가 왕도에 남아 있으면 중앙 장치를 지킬 수는 있겠지만, 사람들이 자기 의사를 밝힐 장소까지 마련해 줄 수는 없었다.
“혼자 가면 안 됩니다.” 카렌이 단호하게 말했다.
“혼자는 아니죠. 당신도 같이 오실 거잖아요.”
“그걸 대답이라고 합니까?”
“미리 일정표에 적어 놨습니다.”
카렌은 혀를 차면서도 일정표를 받았다. 진혁은 그녀가 종이를 접을 때 입가를 아주 조금 풀었다는 사실을 봤다. 전쟁처럼 큰 사건을 앞두고도 사람과 함께 가는 이유는 거창하지 않았다. 혼자라면 지칠 순간에 누군가 물 한 잔을 내밀어 줄 수 있다는 것. 서로가 위험한 결정을 하면 막아 줄 수 있다는 것.
남관역은 오후 열차가 들어올 때마다 시커먼 연기와 뜨거운 쇳가루를 뿜었다. 오래전 반송함을 찾으러 왔을 때 진혁이 보았던 창고는 아직 수리 중이었다. 새 기둥 사이에는 임시 지붕을 받쳐 놓았고, 작업자들은 붉은 끈으로 사람들의 동선을 분리했다. 안전 문제 때문에 행사장은 역 앞 광장으로 옮겨졌다. 접수인은 누구나 참석할 수 있는 공개 회의에서 선출됐고, 그의 임무는 다른 사람의 동의를 만들어 주는 것이 아니라 적힌 말을 훼손 없이 전달하는 것이었다.
“제 이름을 대문자로 써 주세요.” 백여명이 말했다. 북쪽 폐광에서 온 그는 손바닥에 남은 굳은살을 문지르고 있었다. “저는 제32후보라고 불린 적이 있지만 그건 제 이름이 아닙니다.”
진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백여명은 다시 여러 번 자기 문장을 읽었다. 그가 거절하는 것은 광산의 안전망이 필요한 때 잠깐 임시 관리자를 두는 일 자체가 아니었다. 자신의 이름을 근거로 누군가의 재산을 영구히 이전한다는 조항이었다. 두 의미를 섞어 놓으면 또 다른 오해가 생길 수 있었다.
공증을 맡은 접수인은 두 기록을 나란히 적었다. 원본에는 당사자의 문장, 사본에는 전달 시각과 확인인의 이름이 남았다. 누구도 말의 내용을 더 유리하게 바꾸지 않았다. 한 글자가 잘못 적히자 백여명은 접수인에게 고쳐 달라고 말했다. 그 작은 장면을 지켜본 진혁은 이상하게 가슴이 뻐근했다. 몇 달 전만 해도 왕국의 기록은 절대 바뀌지 않는 돌처럼 느껴졌는데, 지금은 사람의 말 앞에서 잘못 적힌 한 글자를 고칠 수 있었다.
오후의 접수회는 예상보다 오래 걸렸다. 자기 이름을 적을 줄 모르는 노인이 있었고, 공동 창고를 형제 셋이 나누어 관리하는 가구도 있었다. 어떤 사람은 국가가 관리해 주는 편이 안전하다고 생각해 임시 운영에 찬성했다. 다른 사람은 금액이 아무리 커도 관리권을 넘기고 싶지 않다고 했다. 모두가 같은 말을 하지 않는다는 사실 때문에 오히려 회의가 믿을 만해 보였다.
진혁은 찬성한 사람의 서류도 꼼꼼히 확인했다. 그 사람이 실제로 어떤 조건에 동의했는지, 결정할 권한을 가졌는지, 계약의 기간과 책임이 분명한지 확인하는 절차는 거절을 지키는 일과 다르지 않았다. 카렌은 주변에서 떠돌던 소문을 바로잡았다. 거절하면 왕실의 지원을 모두 잃는다는 소문도 사실이 아니었고, 찬성하면 곧바로 모든 빚이 탕감된다는 소문도 거짓이었다.
역참 여관 주인은 넓은 식당을 접수인들에게 내주었다. 식탁에는 뜨거운 감자수프와 거친 빵이 놓였다. 여관 주인은 사람들이 식사도 하지 못하고 서류를 쓴다며 화를 냈다가, 누구보다 먼저 빈 그릇을 채워 주었다. 진혁은 그녀에게 대여비를 지급하겠다고 했다. 여자는 필요 없다며 손사래를 쳤지만, 벨라는 적어도 재료비만큼은 장부에 올려야 한다고 우겼다.
“남을 돕는다는 이유로 나중에 피해를 떠넘기지 말자는 거죠.” 벨라가 말했다.
여관 주인은 잠시 생각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수프값은 받겠어요. 대신 아이들이 먹은 몫은 내가 낼게요.”
그 말에 식당의 분위기가 풀렸다. 사람들은 각자 어떤 비용을 감당하고 어떤 일은 거절할지를 말하기 시작했다. 돈에 관한 대화였지만 이상하게 따뜻했다. 오랜 시간 말하지 못했던 생활의 조건이 서로의 입을 통해 들려왔다.
백여명은 식사 후 진혁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당신은 제 이름이 진짜라는 걸 어떻게 알았습니까?”
“처음에는 몰랐습니다. 당시 광산 명부와 당신의 증언을 대조했죠.”
“그런데도 저를 믿어 줬어요.”
“당신의 말을 무조건 믿은 게 아닙니다. 확인할 기회를 줬을 뿐이에요.”
백여명은 그 말을 듣고 오래 침묵했다. 그리고 자기 서명을 다시 연습했다. 손가락이 굳어 글씨가 삐뚤어졌지만, 접수인은 기다려 주었다. 진혁은 그 장면을 보고 다시 느꼈다. 가장 큰 경매를 막으려면 가장 느린 사람의 속도를 무시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을.
그날 저녁 남관역에서는 공개 소품 경매도 열렸다. 물류 시설 수리비를 모으기 위한 행사였다. 낡은 표지판과 고장 난 전등, 파손된 검수 자 등이 나왔고, 상인들은 적당한 가격에 물건을 가져갔다. 진혁은 그중 조그만 철제 봉랍 절단기를 눈여겨봤다. 마법적인 기능이 특별한 것은 아니었다. 다만 날이 닿으면 종이를 찢지 않고 봉랍만 떼어 낼 수 있었다. 과거 억지로 봉랍을 열다 고시문 원본을 망가뜨린 일을 기억했기 때문에 필요했다.
“동화 일곱 닢.”
“여덟 닢!”
옆의 수리공이 아홉 닢을 불렀다. 진혁은 열 닢까지 따라갔지만 곧 손을 내렸다. 비슷한 절단기가 다음 목록에 있었고 무리한 낙찰은 계획에 도움 되지 않았다. 카렌이 고개를 끄덕였다.
“드디어 물러날 줄도 아는군요.”
“제 월급으로 배웠습니다.”
소소한 농담이 오가던 때 갑자기 접수소의 종이 울렸다. 벨라가 왕도에서 보낸 시험 신호였다. 그런데 붉은 불빛 아래 작은 글자가 떠올랐다.
'미수신 상태. 거절 문장 재전송 불가.'
독립 기록기에는 방금 백여명이 직접 적어 제출한 글이 남아 있었다. 하지만 중앙 회신망은 그것을 받은 적이 없다는 표시를 띄웠다. 더 나쁜 것은 다른 일반 안전 경보는 제대로 도착했다는 사실이었다. 누군가 거절 문장만 골라 사라지게 만들고 있었다.
진혁은 처음엔 구식 분리판을 의심했다. 그러나 윤담이 보내 온 기록을 대조해 보니 회선이 끊긴 곳은 왕도의 합류점이었다. 상대가 이용하는 것은 완전한 단절이 아니라 ‘거절만 임시 보관하고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는 새 경매품의 기능이었다.
그날 밤 카렌은 공식 조사 입회 신청서를 작성했고, 라일은 지워진 배송 기록을 찾으러 출발했다. 진혁은 백여명에게 실제로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설명했다. 분명히 보냈지만 아직 왕도 장치에는 반영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숨길 수 없었다.
“그럼 제 거절은 없는 겁니까?” 백여명이 물었다.
“아니요. 여기 있습니다.” 진혁은 독립 기록기의 종이를 들어 보였다. “우리가 증거를 보존하고 있습니다. 다만 왕도에 도착했다는 거짓말은 할 수 없어요.”
백여명은 오래 종이를 바라보다 손을 내밀었다. “그럼 한 장 더 써도 되겠습니까? 혹시 또 누가 지우면, 제 목소리가 다른 데에도 남도록요.”
서진혁은 그에게 새 종이를 건넸다. 창밖에는 밤 열차의 전조등이 철길을 따라 길게 번졌다. 그들이 지키려는 것은 위대한 영웅의 목소리가 아니라, 여러 곳에 남은 평범한 사람들의 말이었다.
남관역의 밤은 조용하지 않았다. 역참 숙소의 긴 복도에서 사람들은 자기 서류를 품에 안고 잤고, 교대 근무를 마친 철도원들은 손을 씻을 물을 아껴 썼다. 진혁은 벽에 걸린 지도를 보며 낮에 만났던 사람들의 얼굴을 떠올렸다. 위험한 광산을 떠나지 않겠다는 사람도 있었고, 아이의 교육비를 마련하기 위해 공방 일을 계속해야 한다는 사람도 있었다. 경매장에서 그들이 ‘미응답 등록자’라는 한 줄로 적히는 순간, 그런 생활의 구체적인 모양은 사라졌다.
카렌은 그에게 담요를 건넸다. “오늘은 자야 합니다. 내일 판단을 잘못하면 더 큰일이 나요.”
“지금도 한 사람의 거절이 늦어지고 있는데요.”
“그래서 자야 한다는 거예요. 밤을 새우고 영수증 날짜를 한 칸 잘못 적으면 누가 책임질 겁니까?”
진혁은 마지못해 담요를 받았다. 그는 여관 주인에게 아침 일찍 깨워 달라고 부탁했다. 주인은 이미 알고 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리 큰일을 해도 잠과 식사를 건너뛰면 사람이 버틸 수 없었다. 오늘 지킨 권리를 내일도 지키려면 자신들이 살아 있어야 한다는 말이 새삼 납득됐다.
새벽녘 마침내 왕도에서 급전이 왔다. 지연 중인 회신이 한꺼번에 중앙 보관실로 끌려가고 있었다. 곧 자동 보관 개시가 선언될 예정이었다. 그 순간, 아직 도착하지 못한 편지들은 모두 ‘보관인의 판단 대기’가 될 수 있었다.
서진혁은 객차 표를 쥔 채 카렌을 돌아봤다. “우리가 늦으면, 사람들의 대답이 다음 경매의 물건이 됩니다.”
카렌은 검집 끈을 조였다. “그럼 늦지 않게 갑시다. 대신 오는 길에는 누군가를 버려 두지 않는 겁니다.”
제193화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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