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홉 날.
황실 제1경매원의 서쪽 종탑이 아침 여섯 시를 알릴 때, 서진혁은 그 숫자를 수첩 맨 위에 적었다. 왕도 에르반의 지붕에는 간밤의 비가 얇게 고여 있었다. 빗물이 처마에서 흘러내려 대리석 계단의 홈을 타고 내려갔고, 통합 경매 예비 고시를 읽으러 온 시민들은 젖은 신발을 문턱에서 털었다. 거리의 제과점은 막 화덕을 열었지만 빵 냄새보다 사람들의 낮은 말소리가 먼저 광장에 번졌다.
“보관할 권리라.” 카렌이 말했다. “거절을 없애는 게 아니라 맡아 둔다고 주장한다는 거죠?”
“그렇다고 해 놓고 돌려주는 날을 자기들이 정할 겁니다.” 진혁은 가방에서 전날의 출품표 사본을 꺼냈다. “사람이 거절했다고 기록되는 순간을 늦추면 그 사이에 모든 망치를 내릴 수 있으니까요.”
세리아는 대답 대신 두꺼운 외투 단추를 잠갔다. 평소라면 행사장 입구의 관리인을 나무랐을 사람인데 오늘은 낯선 사람들의 표정을 살폈다. 정리위원회 앞에서 쟁기 한 자루를 되찾아 온 노인도 있었고, 수문 관리권이 넘어가면 일자리를 잃는다고 불안해하는 젊은 기술자도 있었다. 그들에게 보관권은 지루한 법률 용어가 아니었다. 내일 자기 집 열쇠가 들어가지 않을 수도 있다는 뜻이었다.
강유리가 안내한 제0호 보관실은 경매장 바닥보다 두 층 아래였다. 유리 벽 너머로 거대한 황동 원판이 보였고, 그 주위에 작고 얇은 서랍이 방사형으로 놓여 있었다. 서랍마다 이름 대신 지역 번호와 마지막 회신 시각이 새겨져 있었다. 원판 가운데에는 의자 하나가 비어 있었다. 오래 써서 가죽이 패인 팔걸이가 이상할 만큼 소박했다. 진혁은 금박으로 장식한 위층의 귀빈석보다 그 낡은 의자가 더 비싸 보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이 누구의 물건인지는 아직 알지 못했다.
“장치의 원래 기능은 거절이 접수된 순간 연결 경매를 중단하는 것입니다.” 유리가 설명했다. “다만 기계가 전국의 회신을 한꺼번에 처리할 때 압력이 지나치게 올라가면 몇 초 동안 임시 저장할 수 있어요. 사고를 막기 위한 완충이었죠.”
노해린이 옆에서 회로도를 펼쳤다. “몇 초짜리 저장을 아홉 날짜리 위탁 관리로 바꿔 놓았다는 건데, 이 선을 보세요. 정상 회신 경로는 파란색이고 새로 덧댄 회선은 붉은색입니다.”
진혁은 손바닥을 원판에 대지 않고 가까운 고정쇠를 살폈다. 녹슨 나사 사이로 최근의 흰 가루가 박혀 있었다. 금속을 다시 갈아 낸 흔적이었다. 눈앞에 문장이 떠올랐다.
[감정 대상: 제0호 보관실 완충 원판.]
[본래 목적: 회신 손실 방지.]
[후대 추가 기능: 권리 회신을 경매 종료 시각까지 지연.]
[경고: 현재 유효한 저장 권한은 확인되지 않음.]
진혁은 정보를 곧장 정답처럼 외치지 않았다. 지난 몇 달 동안 배운 가장 중요한 원칙이었다. 자신이 본 문장은 감정의 출발점이지 누구나 인정하는 증거가 아니었다. 해린은 나사에서 시료를 채취했고, 윤담은 오래된 설계도의 눈금과 새 회선의 간격을 비교했다. 세리아는 그동안 독립 증인 두 명이 과정을 지켜보도록 조치했다. 경매장에서는 증거를 만들어 내는 방법만큼 그 증거를 누가 보관했는지가 중요했다.
측정이 끝났을 때 새 회선은 일곱 갈래였다. 각각 마레온, 화령, 북쪽 폐광, 남관역, 왕도와 두 지방의 회신 중계소로 이어졌다. 단순한 기계 고장이 아니었다. 누군가 왕국의 서로 다른 지역에서 도착할 거절을 하나의 문턱에 모으려고 했다.
“일곱 곳을 아홉 날 안에 다 확인할 수 있을까요?” 벨라가 물었다.
라일이 팔짱을 꼈다. “제가 빨라도 왕복을 세 번 하면 열흘이에요. 사람들이 편지를 읽는 시간도 있어야 하니까.”
“우리가 대신 읽을 수도 없지.” 카렌이 말했다.
그 말은 진혁에게 유난히 무겁게 들렸다. 자신은 물건의 과거를 읽을 수 있지만 사람의 의지를 대신 결정할 수는 없었다. 어제의 공개 심사가 바로 그 사실을 증명한 자리였다. 서진혁 일행이 새로운 왕이 되어 모든 계약을 무효라고 선언해 버린다면, 에르딘이 하려던 일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그들이 보관실을 나서려 할 때 한 여자가 복도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는 북시장 식료품점을 운영한다고 했다. 양손에 쥔 서류는 비에 젖어 모서리가 구겨져 있었다. 어제 통합 정리 회의에 참석했지만 발언 순서가 오기 전에 돌아갔다고 했다. 집에 어린아이를 혼자 두고 올 수 없었기 때문이다.
“저는 거절하고 싶은 게 하나 있습니다.” 여자가 말했다. “가게의 냉장 보관 유물을 다른 회사가 관리하는 건 상관없어요. 대신 물건이 상하면 누가 배상하는지 적어 달라는 겁니다. 그런데 제 서류에는 그냥 ‘일괄 동의’라고 찍혀 있어요.”
카렌은 그녀의 서류를 받아 바로 취소라고 적지 않았다. 먼저 원본을 열람할 수 있는 접수창구와 담당자를 설명했다. 여자의 필체가 있는 문서와 인쇄된 안내문이 서로 다른 내용을 담고 있으면 정식 이의를 제기할 수 있었다. 진혁도 자기가 대신 해결할 수 있다고 말하지 않았다. 오래 걸리더라도 다음에 어디로 가야 할지 정확하게 안내했다.
여자는 조금 실망한 눈치였다. 영웅이 나타나 서류를 찢어 주기만 하면 모든 문제가 사라진다고 기대했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잠시 뒤 자신의 가방에서 작은 장부를 꺼냈다. 지난 열다섯 해 동안 매일 고장 난 냉각함의 온도를 기록한 것이었다. 날짜 옆에는 잉크가 번진 숫자들이 촘촘히 적혀 있었다.
“이것도 증거가 될까요?”
윤담이 기록을 살폈다. “될 수 있습니다. 최소한 실제 관리와 수리의 경과를 확인할 출발점은 됩니다. 같은 날 수리공이 발행한 영수증도 있으십니까?”
여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진혁은 그녀가 서류를 다시 소중하게 접는 모습을 지켜봤다. 세상에서 가장 비싼 계약과 싸우고 있는 와중에도 증거는 대개 이런 모습이었다. 음식을 상하지 않게 하려고 적은 평범한 기록. 자기가 마법으로 보지 못했던 시간들이 사람의 손글씨로 남아 있었다.
계단 위에서는 왕궁 기사가 도착했다. 그는 임시 보관권 심사 준비가 예정대로 진행 중이라는 공문을 건넸다. 뒤편에는 회신이 밀려 있을 경우 ‘중앙 처리 우선’을 인정한다는 새 조항이 추가돼 있었다. 권해성은 그것을 읽고 즉시 접수 시각을 표시했다. 조항의 정당성을 검토하기 전에는 누구에게도 자동으로 효력이 생기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진혁은 시장 여자를 다시 바라봤다. “아까 말씀하셨죠. 배상할 사람을 확인하고 싶다고.”
“예.”
“그 질문이 빠진 채 어떤 권리가 팔린다면, 그건 우리 모두가 다시 확인해야 할 일이겠네요.”
여자는 처음보다 단단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럼 저도 다시 오겠습니다. 다음엔 장부를 전부 가져올게요.”
정오 무렵 권해성이 비상 운영회의를 열었다. 창밖에서는 수레가 지나가고 장사꾼들이 통행을 막지 말라며 실랑이를 벌였다. 회의에는 기술관과 배송조합, 지방 대표, 왕실 기록관이 함께 앉았다. 누군가는 아홉 날의 유예가 있으니 충분하다고 했고, 누군가는 통신망을 전부 끊어 버리자고 주장했다. 해린은 마지막 제안에 반대했다. 마레온 항만 방벽과 북쪽 폐광의 환기 경보가 같은 망의 안전 신호를 이용하는 상황에서 회선을 마구 끊으면 실제 피해가 날 수 있었다.
“거절을 빼앗기지 않으려다 사람의 생명 신호부터 잃을 수는 없습니다.” 해린이 말했다.
진혁은 벨라에게 계산서를 빌렸다. 독립 확인용 신호판, 이동 중계기, 긴급 운송비가 적힌 서류였다. 전부 합치면 자신들이 최근 여러 경매에서 벌어들인 이익을 넘어설 수도 있었다. 그는 돈의 숫자 앞에서 한참 말이 없었다. 영웅답게 재산을 모두 내놓겠다고 말하기는 쉬웠지만, 운송을 담당하는 사람들에게 임금을 지급하지 못하면 계획은 그날로 끝이었다.
“시장에 나와 있는 중고 부품부터 다시 감정해 보죠.” 진혁이 말했다. “통합 장치를 무작정 새로 만드는 건 불가능해도, 한 회선에만 붙이는 분리판은 구할 수 있을 겁니다.”
세리아가 눈썹을 치켜올렸다. “왕국 전체가 흔들리는데 중고품 경매를 다니겠다는 거야?”
“사장님이 늘 그러셨잖아요. 돈 없는 사람은 가격표보다 물건을 자세히 보라고.”
“내가 그런 좋은 말을 했다고?”
“월급 올려 달랬을 때 하셨습니다.”
탁자 끝에서 웃음이 새어 나왔다. 회의실의 긴장이 조금 느슨해졌다. 진혁은 그 웃음이 고마웠다. 두려움을 잊어서가 아니라, 서로 같은 편에서 여전히 농담할 수 있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오후에는 윤서하와 서도원이 찾아왔다. 서하는 보조대가 감긴 손목을 움직이며 원판을 멀리서 보았다. 그녀는 스스로 공개를 허락한 부분에 대해서만 말하겠다고 다시 확인했다. 도원은 말없이 회로 옆 작은 가죽 의자에 서 있었다. 두 사람이 열두 해 동안 서로에게 하지 못했던 말을 여기서 대신 하게 만들 이유는 없었다.
“제0호는 감정사의 왕좌가 아니었어요.” 서하가 말했다. “다른 사람의 거절을 더 늦추지 못하게 마지막 한 번 멈추는 자리였죠. 안전장치가 사람을 묶는 도구로 바뀌는 순간, 그 의자는 비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누군가 코드 000으로 새 명령을 내렸습니다.” 유리가 말했다.
“코드는 누구나 베낄 수 있어요. 그 명령을 내릴 자격은 따로 검증해야 합니다.”
해가 저물자 진혁은 광장으로 나왔다. 떨리는 손으로 쟁기 손잡이를 쥔 노인이 아직도 경매장 계단에 앉아 있었다. 지방에서 온 사람들은 가까운 여관을 구하지 못해 창고의 빈 바닥에서 밤을 보내야 했다. 카렌은 그들을 위한 임시 숙소 명단을 정리했고, 라일은 관청보다 길을 잘 아는 배달원들을 만나러 갔다. 세리아는 현장에서 일할 사람의 임금 지급 보증서에 서명했다.
진혁은 자신의 수첩 맨 위에 적었던 숫자를 다시 봤다. 아홉 날. 그중 하루가 거의 지나가고 있었다. 그런데 보관실에서 마지막 검증 결과가 도착했다. 일곱 회선 중 하나에서 이미 시험 신호가 시작됐다는 내용이었다.
그 회선의 발신지는 루멘 경매장. 시험 기록의 수신자 칸에는 낯선 문장 하나가 있었다.
'제7봉인의 열쇠가 최종 보관인이 되면, 다른 모든 거절은 한꺼번에 접수된 것으로 처리한다.'
그들은 물건을 낙찰받기 위해 진혁을 필요한 게 아니었다. 그 자신을 보관함의 뚜껑으로 쓰려 했다.
진혁은 접힌 종이를 다시 펼쳤다. “제가 그 자리에 앉으면 편해지는 사람이 있겠네요.”
카렌이 물었다. “그럼 어떻게 할 겁니까?”
“앉지 않을 겁니다.”
그는 젖은 광장을 가로질러 중고품 경매 목록을 받으러 갔다. 아홉 날의 첫날이 끝나기 전에, 값비싼 권력을 막을 값싼 부품 하나부터 찾아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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