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경매의 대홀 한복판에 작은 의자 하나가 생겨났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무대 뒤편에는 경매품을 올려놓는 높은 진열대와 커튼밖에 없었다. 그런데 노인이 ‘아흔여덟 번째 자리’라고 말하자 바닥 아래에서 검은 원형 판이 돌아가더니 오래된 나무 의자가 올라왔다. 손잡이는 사람 손에 닳아 매끄러웠고, 등받이에는 희미한 바다 조개무늬가 새겨져 있었다. 다른 객석의 붉은 의자와 달리 화려한 장식이 전혀 없었다.
누군가가 그곳에 앉아야 했던 흔적만 남아 있었다.
진혁은 의자에 가까이 다가가기 전에 좌석 배치도를 다시 떠올렸다. 레온이 남긴 기록에는 아흔일곱 개의 자리 바깥에 증인석이 그려져 있었다. 거래를 정하는 사람이 아흔일곱이라면, 마지막 한 명은 기록에서 빠진 사람을 찾아내기 위한 자리였다. 그 의자를 없애면 사람들은 문서에 적힌 이름만 셀 것이다.
“이 자리는 누구 겁니까?”
그가 물었다.
노인은 진혁을 바라봤다. 눈동자 속에 겹쳐 보이던 그림자들이 천천히 움직였다.
“자리에 앉았던 사람은 많았지. 그러나 누구도 끝까지 앉아 있지 못했다.”
“그럼 처음 앉았던 사람은요?”
“그 이름을 묻는 순간 자네도 값을 치러야 한다.”
진혁은 의자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진혁은 의자 주변 바닥을 먼저 관찰했다. 검은 대리석에는 금박 줄이 빗살처럼 뻗어 있었다. 그중 일곱 줄은 오래된 루멘의 봉인 문양과 닮았지만 나머지는 뒤에서 억지로 덧댄 흔적이었다. 각 줄은 객석의 이름표와 연결되어 있었고, 누군가 앉을 때마다 작은 불빛이 의자로 모이는 구조였다.
“저 의자는 원래 관찰하는 자리지, 대금을 내는 자리가 아닙니다.”
그가 혼잣말처럼 말했다.
라일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전에 데브가 그런 말을 했어요. 누군가의 이름을 장부에 넣기 전에 마지막에 확인하는 사람의 자리가 있다고. 그 사람이 거절하면 거래는 끝나지 않는다고요.”
“그럼 왜 지금은 마지막 사람에게 책임을 넘기는 장치가 됐죠?”
“누군가 ‘확인할 책임’을 ‘대신 갚을 책임’으로 바꾼 거겠죠. 법률 문장 하나만 잘못 고쳐도 사람이 죽잖아요.”
라일의 말투에는 농담기가 없었다.
진혁은 오래된 계약서의 한 구절을 떠올렸다. 직원의 이름을 장부에 등록할 때는 그 직원의 동의를 받는다는 원칙이 있었다. 하지만 어느 시점부터 ‘원권리자 확인’이라는 조항이 ‘대표자의 확인’으로 바뀌었고, 그 뒤에는 아예 대표자가 다른 모든 권리를 가진 것처럼 적혀 있었다. 모든 것은 아주 작은 언어의 차이에서 시작되었다.
“저 의자에 앉기 전에 무슨 서류가 필요한지부터 찾아봅시다.”
그가 말했다.
카렌이 낮게 웃었다.
“마법 의자한테까지 계약서를 요구하네요.”
“앉는 순간 목숨을 빼앗긴다면 충분히 요구할 만하죠.”
“그 말은 맞아요.”
진혁은 다시 장부의 표지를 바라봤다. 손을 대기만 하면 모든 답을 얻을 수 있다고 믿던 때가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답을 아는 것보다 확인할 수 있는 질문을 만드는 편이 더 중요했다. 그것이 그가 위험한 감정 능력을 쓰면서 배운 몇 안 되는 원칙이었다.
그는 손바닥을 가까이 댔지만 쉽게 닿지 못했다. 이름을 읽는 능력은 과거의 파편을 보여 줄 뿐, 어떤 기억을 보는 것이 위험한지 미리 알려 주지 않았다. 그가 지난 며칠 동안 겪은 두통과 손바닥의 통증은 분명한 경고였다.
“사람의 이름을 돈 대신 요구하는 것은 거절하겠습니다.”
“자네는 항상 거래를 거절하면서 이 안에 서 있군.”
노인이 말했다.
“그것도 좋은 구경이지 않습니까.”
진혁이 대꾸하자 객석에서 낮은 웃음이 흘렀다. 노인은 웃지 않았다. 대신 커튼 뒤쪽을 가리켰다.
“그렇다면 물건을 보게. 998번의 원본 장부다.”
두 명의 수행원이 검은 책을 들고 나왔다. 책은 오래된 선박용 쇠사슬로 둘러싸여 있었다. 표지는 물에 젖었다 말라붙은 듯 울퉁불퉁했고, 책등에는 아흔일곱 개의 작은 홈이 파여 있었다. 마지막 홈은 비어 있었다. 진혁은 본능적으로 라일을 보았다. 라일은 자리에서 일어나 있었다. 그는 금방이라도 뛰쳐나갈 듯했지만 카렌이 검을 살짝 들이밀어 말렸다.
“지금 뛰어들면 기록은 저쪽 손에 남아요.”
“알아요.”
라일이 이를 악물었다.
진행자가 장부를 펼쳤다. 첫 장에는 오래된 경매장 기록이 적혀 있었다. 모라를 보호하기 위해 아흔일곱 명이 자신의 노동과 수명을 나누어 봉인 장치를 만들었다는 내용이었다. 처음에는 모두 자발적으로 이름을 적었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 관리자들은 그들이 남긴 계약을 돈으로 환산했고, 누가 책임을 이어받을지 다시 계산했다. 마지막까지 책임질 한 명이 없자 장부가 닫히지 않았다.
“그래서 제998호 증인이 필요하다?”
진혁이 물었다.
노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경매가 끝나도 책임을 떠안을 누군가는 남아야 한다. 자네가 보기에 누가 좋겠나?”
“그런 사람을 임의로 정할 권한이 누구에게 있습니까?”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서 자리에 앉는 게 감정사지.”
진혁은 다시 장부를 봤다. 눈앞에 문장들이 떠올랐다.
[대상: 제998호 잔여 책임 원부.]
[기원: 루멘 초기 보호 계약의 기록 체계.]
[현재 기능: 동의하지 않은 사람에게 미결제 책임 배분.]
[핵심 결함: 책임 대상자의 갱신 절차에 자유로운 의사 확인이 없음.]
[연결된 생명 신호: 다수.]
[강제 파기 시: 연결된 이름 표지 및 기억 손상 가능.]
역시 단순히 없애면 안 되는 장부였다. 실종된 직원 셋, 라일의 본래 이름, 그리고 이안의 노동 계약까지 모두 연결되어 있을 가능성이 있었다. 그러므로 증거를 분리해 안전한 장소에 옮기고, 각각의 동의를 다시 확인해야 했다.
진혁이 말했다.
“장부 원본을 독립된 기록관에 옮겨 보관하십시오. 이 거래장 관리자만 열람하면 안 됩니다.”
진행자가 웃었다.
“우리는 거래를 하는 곳입니다. 자선 구호소가 아닙니다.”
“기록은 자선이 아니라 거래의 기초입니다. 원본을 공개하지 않는 이유가 있겠죠.”
객석의 한 상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오늘 입찰에 참여하지 않은 듯 두 손을 무릎 위에 올려놓고 있었다. 그러나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 역시 검은 경매를 이용해 물건을 샀을 것이다. 진혁은 그에게 말했다.
“손님도 원본을 확인하지 않고 금화 일만 닢을 낼 생각입니까? 어떤 권리를 사는지 알아야 손해를 피하지 않겠습니까?”
관객들의 분위기가 달라졌다. 누군가 먼저 장부 공개를 요구했고, 다른 누군가는 낙찰 보증금 반환 규정을 물었다. 돈을 위해 모인 사람들이었지만 손해를 보는 것은 싫어한다는 점만큼은 진혁도 잘 알았다.
라일은 그 소란을 틈타 무대 아래의 장부 지지대를 살폈다. 그는 장부를 훔치려는 것이 아니라 책과 바닥을 연결한 쇠사슬에 붙은 작은 고리를 찾고 있었다. 고리를 건드리자 벽면의 수많은 이름표가 잠깐 반짝였다.
그 사이 한 이름표에 작게 적힌 글자가 드러났다.
‘데브.’
라일의 손이 멈췄다. 그 옆에 두 개의 이름이 나란히 있었다. 벨트, 로아. 실종된 직원들 이름이었다. 표시등은 꺼지지 않았고, 아주 약하게 박동하고 있었다.
“살아 있어요.”
라일이 속삭였다.
“확실합니까?”
“적어도 아직 기억이 이어져 있어요. 누군가 저 이름을 붙잡고 있으니까.”
진혁은 무대 아래로 내려가 이름표를 확인했다. 감정 결과에는 ‘신체 위치: 추적 불가’라고 뜨면서도 ‘의식 반응: 지속’이라는 문장이 나왔다. 죽지 않았다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구조 가능성은 있었다.
그때 세리아의 목소리가 대홀 뒤편에서 들려왔다.
“원본을 제시한 이상 중복 등록 문제를 확인해야 해.”
사람들이 놀라 돌아봤다. 세리아는 시의회 감찰관 이사벨과 함께 서 있었다. 입구를 열 때 사용한 것은 검은 초대장이 아니라 임시 감정 보존 명령서였다. 난다의 증언과 이안이 작성한 자유 의사 확인서가 붙은 정식 문서였다. 시의회는 이곳의 물리적 위치를 특정할 수 없었지만, 제3창고에서 벌어진 공적 보관 계약 조작을 조사할 권한은 있었다.
“어떻게 들어오셨습니까?”
진행자가 물었다.
“조합 창고의 보관인인 난다가 정상 열쇠를 제공했어. 우리는 문을 부수지 않았지.”
세리아는 초대장을 들지 않은 손을 펼쳤다.
“위탁 계약을 증명할 소유자도 확보했고.”
이사벨은 원본 대조를 명령했다. 경매장 객석의 여러 손님이 즉시 고개를 숙였다. 가면으로 얼굴을 가렸다고 공적 기록을 피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이사벨도 이 장치가 도시의 법만으로 곧장 멈추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녀는 마법 인장 담당 공증인을 따로 데려왔고, 그 공증인이 장부의 현재 효력을 단계적으로 검증하기 시작했다.
노인은 그들을 바라보다 갑자기 웃었다.
“세리아. 오랜만이구나.”
세리아의 발걸음이 멈췄다.
“그 목소리….”
“네가 지키지 못한 사람의 목소리를 기억하느냐?”
노인이 고개를 들자 얼굴의 주름이 잠시 흐려졌다. 그의 목소리가 아주 짧게 젊은 여성의 목소리로 변했다가 원래대로 돌아왔다. 세리아는 한 손으로 가슴을 짚었다. 구리 반지가 뜨거워진 듯 손가락을 움켜쥐었다.
“유나?”
진혁은 처음 듣는 이름이었다. 세리아가 그렇게 부른 순간 대홀의 유리 구체들이 일제히 흔들렸다. 노인은 다시 쉰 목소리로 말했다.
“이름 하나가 돌아왔군. 그러나 아직 나를 그런 이름으로 부르지 말거라.”
그는 가슴에 손을 얹었다. 몸속에서 서로 다른 사람의 목소리가 겹쳐 나왔다. 누군가는 살려 달라고 했고, 누군가는 계약을 끝내 달라고 했다. 제998호 증인은 단일한 노인이 아니라 많은 사람의 목소리를 한 몸에 묶어 둔 기록 장치에 가까웠다.
세리아는 눈물을 삼켰다.
“유나의 이름을 이런 식으로 쓰다니.”
“그 이름을 기억하는 것도 네게는 값이 될 수 있다.”
노인의 대답은 누군가를 비웃는 듯했다.
진혁은 세리아 앞에 섰다. 그녀가 지금 저 말을 따라가면 검은 경매가 원하던 대로 가장 아픈 기억을 담보로 내놓을 수도 있었다.
“사장님. 저 사람은 유나가 아닙니다. 유나라는 분의 목소리와 기록을 들고 있을 뿐이에요.”
세리아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대답은 늦었지만 단단했다.
“알아. 그래도 그 이름을 잊지 않았다는 건 알려 줘야겠어.”
그녀는 노인을 향해 말했다.
“누가 그 이름을 들고 있어도 유나를 물건으로 만들 수는 없어.”
장부 표지가 희미하게 갈라졌다. 그 사이로 작은 종이 한 장이 떨어졌다. 진혁은 그것을 주웠다. 종이에는 아흔일곱 번째 의자에서 아흔여덟 번째 의자로 이어지는 가는 선이 그려져 있었다. 선 끝에 단어 하나가 적혀 있었다.
‘대체 서명 금지.’
진혁은 문장을 읽는 순간 해답에 한 발 가까워졌음을 깨달았다. 누군가 마지막 책임을 지는 사람이 있어야 한다는 전제부터 틀렸을 수 있었다. 처음 아흔일곱 명이 만든 것은 한 사람에게 모든 빚을 떠넘기기 위한 장부가 아니라 모두의 자발적인 책임을 나누어 적은 기록이었다.
그런데 후대의 관리자들은 그 책임을 한 명에게 몰아넣었다. 금화가 부족하면 사람의 이름을, 사람이 없으면 미래의 안전을 담보로 삼았다.
“이 의자는 마지막 희생자를 위한 자리가 아니군요.”
진혁이 말했다.
“이 거래를 끝내기 전에 동의하지 않은 사람이 있는지 확인하던 자리였어요.”
노인의 눈이 잠시 흔들렸다.
“그럼 자네가 앉겠나?”
진혁은 의자를 바라봤다. 잠깐 앉아서 문서를 읽는 행동만으로도 마지막 책임을 전부 떠안을 수 있다는 위협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하지만 이번에는 서두르지 않았다.
“조건부터 확인하겠습니다.”
그는 말했다.
객석에서 누군가 실소를 흘렸다. 마지막 순간까지 계약서부터 보는 사람이라니. 하지만 진혁은 웃지 않았다.
“앉는 것과 책임을 승계하는 것은 별개의 행위입니다. 그 둘을 묶은 조항에 저는 동의하지 않습니다.”
의자가 아주 미세하게 떨렸다. 장부의 금빛 글자가 한 줄씩 사라지기 시작했다.
[제998호 증인석.]
[대리 책임 자동 승계: 이의 신청.]
[기존 거래의 최종 의사 확인 기능: 재가동 가능.]
아직 성공은 아니었다. 누군가가 끝까지 반대할 것이고, 장부에 묶인 사람들을 구해 내는 일도 남아 있었다. 그러나 진혁은 처음으로 검은 경매의 장치가 틀릴 수 있다는 증거를 자기 눈으로 보았다.
그때 대홀 바깥에서 큰 파도 소리가 터졌다.
마레온의 첫 번째 방벽 경고 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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