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자기 이름을 쓰는 데 보통 몇 초밖에 걸리지 않는다.
그러나 이안 하르트가 검은 경매장에 처음 들어왔을 때 서류 한 장에 이름을 쓰는 데는 꼬박 한 시간이 걸렸다고 했다. 그는 같은 이름을 반복해서 쓰고 또 지웠다. 손목에 감긴 은색 인장은 글자를 쓸 때마다 조금씩 따뜻해졌고, 누군가가 옆에서 ‘그건 네가 원하는 일’이라고 속삭였다. 이안은 누나를 돕고 싶다는 마음을 가진 아이였고, 어른들은 그 마음을 아주 훌륭하게 이용했다.
진혁은 경매장 내부의 회계실에서 그 계약서 사본을 다시 읽었다.
그곳은 대홀의 화려함과 정반대인 공간이었다. 벽에 검은 장부가 빽빽하게 꽂혀 있었고, 등불은 책상 위의 작은 마정석 두 개뿐이었다. 낙찰된 물건들은 이 방을 거쳐 대금이 결제됐고, 금화가 아닌 기억이나 권리로 대금을 치른 경우에도 같은 원부에 기록됐다. 종이 냄새와 기름에 절인 가죽 냄새가 진하게 났다.
라일은 문밖에서 누가 오는지 살피고 있었다. 진혁이 서류를 읽는 동안 카렌은 의자에 앉아 두 손을 꽉 쥐었다. 그녀는 처음부터 계약을 찢어 버리고 싶은 충동을 여러 번 눌렀다. 하지만 레온의 편지에는 ‘998을 먼저 취소하지 말라’는 말이 있었다. 동생의 이름이 그 계약에 붙잡혀 있다면 찢는 행동 자체가 위험할 수 있었다.
“여기 보세요.”
진혁은 열 번째 조항을 가리켰다.
‘채무자가 지정한 보호자가 채무 상환을 거부하면 해당 보호자의 이름 사용권을 자동으로 이전한다.’
“저는 그런 조항에 서명한 적 없어요.” 카렌이 말했다.
“서류에는 동생의 필체만 있습니다.”
“그럼 제 이름을 저 애가 넘겼다는 겁니까?”
“그렇게 적고 싶은 사람들이 있는 거죠. 하지만 본인에게 없는 권리를 남에게 넘길 수는 없어요.”
진혁은 계약서의 서명 시각을 살폈다. 이안이 처음 도장을 찍은 날은 의료소에서 고열로 쓰러진 다음 날이었다. 환자의 치료비를 담보로 한 노동 계약이라면 법적 보호자가 설명을 듣고 동의했어야 한다. 그러나 서명란에는 이안의 이름만 있고 입회 의료인의 서명은 흐리게 번져 있었다.
[감정 대상: 이안 하르트 치료비 대체 계약.]
[원금: 금화 30닢.]
[실제 상환: 금화 21닢.]
[현재 장부 금액: 금화 80닢.]
[추가 금액 근거: 야간 연장 위약금 및 신분 관리 비용.]
[불리한 조항 설명 여부: 확인 불충분.]
[대리 서명 권한: 없음.]
“원금은 아홉 닢 남았네요. 하지만 그 사이 발생한 치료비와 이자가 정당한지도 봐야겠습니다.”
진혁이 말했다.
“그걸 증명하면 동생을 데리고 나올 수 있나요?”
“이안이 보호자의 신원을 넘길 권한은 없다는 건 입증할 수 있어요. 다만 노동 계약 자체는 따로 따져야 합니다.”
카렌은 고개를 숙였다. ‘그냥 아무것도 없었던 일로 해 주세요’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러기에는 현실이 복잡했다. 그녀는 동생이 병으로 고생하던 겨울을 기억했다. 방 안에 뗄 나무가 없어 젖은 이불을 겹쳐 덮였고, 약방에서는 금화가 없다면 더는 약을 내줄 수 없다고 했다. 돈을 빌린 선택을 후회한다면 결국 그 겨울의 자신을 탓해야 하는 것 같았다.
진혁은 그녀의 손등 근처에 계산 종이를 내려놓았다.
“돈을 빌린 건 잘못이 아닙니다. 설명하지 않은 권리를 가져간 사람들이 문제죠.”
“그래도 갚아야 할 돈은 남아 있잖아요.”
“그건 계산하면 됩니다. 돈은 숫자로 계산하라고 있는 거니까요.”
카렌은 그를 바라봤다. 진혁은 진지한 얼굴로 숫자를 적고 있었다. 영웅처럼 계약을 단칼에 베겠다는 사람보다, 손실과 책임을 항목별로 적는 사람이 지금은 더 믿음직하게 느껴졌다.
그때 회계실 안쪽에서 종이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났다. 장부장 아래의 작은 문이 열리더니 주근깨 있는 여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낮에 이안에게 술잔을 나르라고 지시했던 직원이었다. 여자는 그들을 보자 움찔했지만 비명을 지르지 않았다.
“찾을 줄 알았어요.”
그녀가 말했다.
“누구십니까?”
“저는 베라라고 해요. 서명 확인 보조죠. 사실을 적는 일을 했는데 언젠가부터 사실을 지우는 일을 하게 됐어요.”
베라의 손가락에는 잉크가 물들어 있었다. 엄지에는 깃펜을 오래 쥐어 생긴 굳은살도 보였다. 그녀는 계약 조항을 설명하는 일을 좋아해서 이 직업을 택했다고 했다. 글자를 읽을 줄 모르는 사람에게 계약서를 읽어주고, 어려운 단어를 쉬운 말로 바꿔 주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는 것이다.
“첫날엔 모두 제게 고맙다고 했어요.”
그녀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어부들에게 선박 보험을 설명해 주면 아내와 아이가 안심할 수 있다면서요. 그런데 상회에서 다른 업무를 맡긴 뒤로는 제가 어떤 부분을 설명하면 안 되는지부터 가르쳤어요.”
진혁은 봉투를 열지 않은 채 기다렸다. 베라는 손끝으로 표면을 몇 번 문질렀다.
“누군가 글씨를 모른다고 하면 이름 쓰는 칸만 알려줬습니다. 돈을 급히 빌려야 하는 사람에게 금방 끝나는 절차라고 말했죠. 제가 더 일찍 이상하다고 말했으면 그런 일은 없었을 거예요.”
“그때 무엇을 알았습니까?”
진혁이 물었다.
베라는 입술을 깨물었다.
“처음에는 잘 몰랐어요. 그 뒤에는 짐작했죠. 그런데 제가 그만두면 계약서를 아예 읽을 줄 모르는 직원이 들어올까 봐 버텼어요. 그건 변명이겠죠.”
“판단은 조사 끝에 해야죠. 지금은 원본을 갖고 계신 게 중요합니다.”
카렌도 고개를 끄덕였다. 베라가 만든 잘못의 흔적을 지울 수는 없지만, 지금 증언한다면 다른 피해를 막을 수 있었다. 한 사람이 죄책감을 느낀다는 사실만으로 모든 문제를 해결한 것처럼 말하는 건 오히려 쉽고 위험한 길이었다.
베라는 두 손을 무릎 위에 올렸다. 손가락 마디가 하얗게 질렸다. 그녀는 장부의 첫 페이지를 펴고 조용히 자신이 알 수 있는 부분과 모르는 부분을 구분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각 페이지의 수정 날짜, 인장을 찍은 사람의 근무 교대표, 원본이 회수된 이유까지 적은 메모가 나왔다.
진혁은 하나하나 확인했다. 어느 것은 베라가 직접 본 사실이었고, 어느 것은 동료에게 들은 말이었다. 증거를 만들려면 그 경계를 지키는 것이 중요했다. 베라가 용기 내어 말한 진술이 부풀려져 거짓말로 취급받는 일은 피하고 싶었다.
베라는 손에 낡은 봉투를 들고 있었다. 그 안에는 원계약의 진짜 사본이 있었고, 날짜마다 다른 필체로 수정한 조항이 색깔별로 표시되어 있었다. 가장 나중에 추가된 것은 카렌의 이름 이전을 허용한다는 문장이었다.
“그걸 왜 가지고 계세요?”
진혁이 물었다.
“입회 서명을 요청받았거든요. 그런데 저는 그 자리에 없었어요. 누가 대신 제 이름을 썼는지 확인하려고 사본을 남겼죠.”
“그럼 공증 위조를 증언할 수 있겠군요.”
베라는 고개를 저었다.
“증언하면 제가 내일 아침 사라집니다. 계약서에 그렇게 써 있어요.”
진혁은 그녀에게 문서의 해당 조항을 보여 달라고 했다. 베라는 작은 종이를 내밀었다. 거기에는 ‘업무상 비밀을 누설하는 직원은 해당 정보를 알 권리를 포기한다’라고 쓰여 있었다. 진혁은 한참 읽더니 고개를 들었다.
“비밀 유지 의무와 기억을 빼앗는 일은 다릅니다. 누설 금지 계약은 민사상 손해배상 문제일 수 있지만, 기억까지 가져갈 수 있는 권리는 아니에요.”
“그런 게 여기서 통할까요?”
“여기만 아니라 밖에서도 통하도록 만들 겁니다.”
그는 베라에게 증언서를 작성해 달라고 부탁했다. 자신이 모든 것을 해결해 주겠다고 약속하지 않고, 시의회 이사벨 감찰관이 보호 가능한 범위와 위험을 먼저 설명할 것이라고 말했다. 베라는 오래 고민하다 펜을 들었다.
잠시 뒤 라일이 문틈으로 급하게 속삭였다.
“진행자가 이안을 부르고 있어요. 증인 등록 시각이 됐답니다.”
네 사람은 회계실을 나와 무대 뒤의 좁은 통로로 향했다. 바닥에는 무대를 이동시키기 위한 철제 선이 깔려 있었고, 천장에는 줄이 수십 가닥 늘어져 있었다. 이안은 검은 기둥 옆에 서 있었다. 소년은 카렌이 다가오는 것을 보고도 도망치지 않았다.
“이안.”
카렌이 조용히 불렀다.
소년은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손목의 은색 인장은 유리잔 위에 비친 불빛처럼 흔들렸다.
“내 이름을 판다고 했니?”
카렌이 물었다.
“아니.”
이안은 고개를 저었다.
“누나가 내 대신 돈을 갚지 않아도 되게 해달라고 했어. 그러면 누나가 위험한 일 안 해도 될 줄 알았어.”
“그런 조건은 없었어.”
“그랬으면 좋았을 텐데.”
소년은 입술을 깨물었다. 진혁은 이안에게 자신이 쓴 메모를 다시 보여 주었다.
“당신이 원하는 건 집에 가서 누나와 저녁을 먹는 거였죠?”
“네.”
“그 뜻은 바뀌지 않았습니까?”
“아니요.”
“좋아요. 그럼 오늘 무대에 올라가도 그 말을 하세요. 다른 사람이 대신 말하게 하지 마세요.”
이안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경매대에서는 최고 입찰을 확정하기 위한 증인 절차가 진행되고 있었다. 진행자는 객석 전체를 향해 말했다.
“모든 계약은 그 권리가 어디에서 왔는지 확인해야 합니다. 이에 제998호 최종 증인의 입회를 요청합니다.”
노인이 다시 무대 위로 올라왔다. 얼굴은 늙었지만 움직임이 일정하지 않았다.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잠깐 젊은 사람의 그림자가 겹쳐 보였다. 그 뒤로 이안이 따라 올라갔다.
진혁은 객석 뒤쪽에서 큰 소리로 말했다.
“이안 하르트의 계약에 이의를 제기합니다!”
홀의 유리 구체들이 한꺼번에 밝아졌다. 진행자가 눈을 가늘게 떴다.
“본 경매의 초대 손님께서는 어떤 권한으로 방해하십니까?”
“이안의 노동 계약과 카렌 하르트의 신원 담보 조항 사이에 유효한 동의가 없습니다. 원본과 수정본을 대조해 보겠습니다.”
“지금은 거래 중입니다. 이의 신청은 사후에….”
“거래를 끝내기 전에 동의 여부를 확인해야 한다면서요. 방금 진행자께서 직접 하신 말씀입니다.”
객석 사이에 낮은 웃음이 퍼졌다. 부유한 손님들이 이런 소란을 즐기는 듯 보였지만 그중 몇 명은 조용히 출구로 움직였다. 진혁은 그들의 행동을 눈여겨봤다. 이미 돈을 낸 사람들이라면 계약에 결함이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손해를 볼 수 있었다.
이안은 진혁의 손짓에 따라 작은 단상 앞으로 걸어왔다. 카렌은 동생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소년이 한 번 숨을 들이쉬었다.
“저는 누나 이름을 팔겠다고 한 적이 없습니다.”
조용하던 대홀에 그의 목소리가 또렷하게 울렸다.
“저는 일해서 병원비를 갚겠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여기 남아 있으면 누나가 안전해진다고 해서…. 그 말을 믿었습니다.”
진행자의 가면에 검은 금이 생겼다. 객석의 몇 사람이 서로를 바라봤다. 이안의 손목 인장이 붉게 빛났지만 이번에는 조여 들지 않았다. 진혁이 들어 보인 두 장의 계약서가 빛을 발했기 때문이다.
[동일 계약 번호의 상이한 본문 발견.]
[본인 동의 범위 재확인 요구.]
[제삼자 이름 사용권 이전: 증빙 불충분.]
카렌은 두 손으로 입을 가렸다. 그녀는 몇 걸음 떨어져 있었지만 동생이 혼자 자신의 말을 했다는 사실에 가슴이 벅차올랐다. 그 말이 모든 것을 해결하지는 못한다. 다만 지금까지 남들이 대신 정해 놓았던 그의 의지가 처음으로 기록됐다.
진행자가 낮게 말했다.
“이의 신청을 접수합니다. 단, 아직 유효한 노동 계약과 미정산 금액이 있습니다. 인장을 당장 해제할 수는 없습니다.”
진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그 금액은 밖의 시의회와 대조하겠습니다. 그런데 사람의 이름이 담보가 될 수 없다는 부분은 지금 중지해야 합니다.”
잠시 뒤 이안의 인장에서 검은 실 한 가닥이 떨어졌다. 실은 바닥에 닿자 작은 재가 되어 흩어졌다.
[카렌 하르트 신원 담보 조항 효력 정지.]
[이안 하르트 노동 계약: 별도 정산 대기.]
카렌은 다리가 풀릴 듯했다. 그러나 이안은 아직 무대에 남아 있었다. 회수되지 않은 작은 인장이 그의 손목에 붙어 있었다.
“누나. 아직 집에 못 가.”
그가 말했다.
“알아.”
카렌은 눈물을 닦았다.
“하지만 이번엔 끝까지 같이 있을 거야.”
바로 그때 최종 증인 노인이 진혁을 돌아봤다. 노인의 눈동자에는 마치 수십 명의 얼굴이 겹쳐 있는 듯한 그림자가 일렁였다.
“이름 하나를 되찾았군.”
그가 말했다.
“그러나 남겨진 이름은 모두 내 장부에 있다. 그 장부를 닫으면 누군가는 이 자리에서 마지막 사람이 되어야 한다.”
진혁은 노인의 목에 걸린 빈 명패를 보았다. 명패 뒷면에 손톱으로 긁은 듯한 글자가 있었다.
‘아흔여덟 번째 자리.’
제18화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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