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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으로던전 경매장의 말단 직원입니다 · 17화
PAYLUA ORIGINAL · 제17화

17화. 금화 한 닢의 주인

던전 경매장의 말단 직원입니다 · 5,920자

오프라인 책장
검은 경매의 대홀에는 시계가 없었다. 높다란 천장의 유리 구체들이 일정한 간격으로 빛을 바꾸었지만, 지금이 밤 몇 시인지 알 수 있는 장치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진혁은 입구를 지나올 때부터 경매가 얼마나 이어지고 있는지 손가락으로 헤아리고 있었다. 순풍 계약에 십이 분, 종이배 기억에 칠 분, 그리고 등록번호 999의 입찰이 시작된 뒤 대략 오 분. 실제로는 한 시간도 지나지 않았겠지만 느껴지는 시간은 훨씬 길었다. “화장실 좀 다녀오겠습니다.” 그가 일어나자 라일이 능청스럽게 말했다. “이런 분위기에서요? 긴장했나 봐요.” “화장실은 누구나 가야 할 때가 있죠. 특히 이렇게 돈 많은 사람이 모이면 더요.” 카렌은 검을 만지는 손을 멈췄다. 진혁이 눈짓으로 커튼 뒤쪽을 가리키자 그녀도 이해했다. 이안에게 다가갈 통로를 찾으려는 것이다. 세 사람이 동시에 자리에서 일어나면 의심받기 쉬우므로 라일은 남아 객석의 움직임을 살피기로 했다. 대홀의 옆문에는 검은 망토를 걸친 수행원 둘이 서 있었다. 하나는 출입 표찰을 확인했고 다른 하나는 손님들이 들고 있는 봉투를 만져 보았다. 진혁은 자신의 수석 감정사 동판을 잠깐 보여 줬다. “소화 시설도 확인하러 왔습니다. 저는 경매장 직원이라 이런 게 눈에 잘 들어오거든요.” 수행원이 고개를 갸웃했다. “여긴 화재가 나지 않습니다.” “불이 안 나는 물건이라도 손님은 불이 날까 겁낼 수 있죠.” 두 사람은 그 말을 이해하지 못한 듯 서로 눈을 마주쳤다. 그 사이 카렌이 반대편 손님에게 길을 물었고, 수행원이 잠깐 시선을 돌렸다. 진혁은 그때 열려 있는 작은 서비스 문 안으로 미끄러지듯 들어갔다. 복도는 대홀과 달리 꾸밈이 없었다. 천장에 매달린 마정석 등불은 빛이 약했고, 장화 밑에서 거친 석분이 밟혔다. 누군가가 이동시킨 목재 상자들이 벽 쪽에 쌓여 있었으며, 바닥에 흩어진 봉인 실의 잘린 끝이 서걱거렸다. 이 화려한 경매도 결국 어두운 복도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손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진혁은 이안을 알아보기 전에 먼저 손목의 은색 인장을 보았다. 정상적인 직원 표찰이라면 이름과 근무 시간이 적혀 있어야 하지만, 저 인장은 글자가 거의 보이지 않았다. 종업원이 움직일 때마다 작은 점들이 반짝였고, 점 사이의 간격은 일정하지 않았다. 하루 근무 시간이 기록되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의 심장 박동이 담보로 잡혀 있는 것 같았다. 카렌이 복도 모퉁이에 손을 짚었다. 며칠 동안 가족을 찾겠다고 잠도 제대로 자지 못했지만 지금만큼은 움직일 수 없었다. 손을 뻗기만 하면 닿을 거리에 이안이 있었다. 그녀가 알고 있던 동생보다 조금 마르고, 키는 아주 약간 커진 모습이었다. 소년의 왼쪽 귀에는 여름에 다쳤던 작은 상처가 남아 있었다. 그 상처를 보는 순간 카렌은 눈앞의 아이가 누군가 만들어낸 환영이 아니라는 확신을 얻었다. “이안.” 그녀는 거의 소리 없이 이름을 불렀다. 진혁은 카렌이 그 이름을 부를 때마다 두 가지 감정이 동시에 묻어나는 것을 느꼈다. 오랜 시간 품은 걱정과 이제야 마주하게 된 기쁨이었다. 그러나 기쁨이 조금이라도 앞서면 그녀는 곧장 이안에게 달려들 것 같았다. “숨 한 번 고르세요.” 진혁이 작게 말했다. “명령하지 마요.” “명령이 아니라 부탁입니다. 여기까지 왔으니까 반드시 말을 들어야죠.” 그녀는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 잠시 뒤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복도 끝에서 쟁반을 든 이안이 나타났다. 소년은 카렌을 보는 순간 발걸음을 멈췄다. 쟁반 위의 잔들이 작은 종소리를 내며 흔들렸다. “누나?” 카렌은 한꺼번에 달려가고 싶었지만 진혁의 말이 떠올라 겨우 걸음을 늦췄다. “이안. 나야. 괜찮아?” 소년은 미소 지으려 했으나 입꼬리가 올라가지 않았다. 오른쪽 손목에 굵은 은색 인장이 감겨 있었고, 그 끝에서 검은 실이 천장으로 이어졌다. “왜 여기 있어? 약은 제대로 먹었니?” “누나, 나는 괜찮아. 그런데 내가 여기서 나가면 누나 이름이….” 이안은 말을 멈췄다. 그의 눈앞에서 보이지 않는 장치가 반짝이더니 손목 인장이 조여 들었다. 소년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진혁이 다가가 인장 가까이 손을 대려 하자 이안이 겁에 질려 뒤로 물러났다. “만지지 마세요. 내가 오늘 여기서 서빙을 끝내지 않으면 다음 계약자가 바뀐다고 했어요.” “누가 바뀐다는 겁니까?” 이안이 카렌을 바라봤다. “누나가요.” 진혁은 손끝을 거두었다. 인장 장치의 작동을 정확히 확인할 수 없는 상태에서 강제로 떼어 내면 누구에게 어떤 피해가 돌아갈지 알 수 없었다. 그는 소년과 눈높이를 맞추기 위해 무릎을 굽혔다. “이안. 저는 서진혁입니다. 루멘 경매장에서 일해요. 당신이 원한다면 오늘 이곳을 나가는 방법을 같이 찾겠습니다.” “알아요. 누나가 편지에서 얘기했어요.” 카렌이 놀라 물었다. “내가 보낸 편지를 받았어?” “절반만요. 나머지는 검은색으로 가려져 있었어요. 그런데 누나 글씨인 건 알았어요.” 소년은 쟁반 아래에서 접힌 작은 종이를 꺼내 보였다. 편지에는 카렌의 글씨로 ‘약을 먹고, 무리하지 말고, 어딜 가든 이름을 적어 두라’는 말이 있었다. 나머지 부분은 먹으로 지워져 있었다. 진혁은 이안의 손목을 살폈다. 인장에는 길게 이어진 작은 숫자들이 새겨져 있었다. [노동 위탁 보조 계약.] [표면 채무: 치료비 금화 80닢.] [실질 담보: 채무자와 보호자의 ‘이름 이전 허용권’.] [현행 노동: 대가 없이 계속 연장 중.] [불리한 약관 고지: 불충분.] “치료비가 팔십 닢이라고요?” 카렌은 이를 악물었다. “저는 금화 서른 닢을 빌렸어요. 그중 스물한 닢은 이미 갚았고요.” 진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계약서상의 이자와 벌금이 원금보다 몇 배로 늘어난 것이다. 그렇다고 숫자가 틀렸다는 사실만으로 인장을 떼어 낼 수는 없었다. 누가 새 조건을 더했고 누구의 동의 없이 적용했는지 밝혀야 했다. 복도 반대편에서 수레가 덜컹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이안은 깜짝 놀라 편지를 숨겼다. “여기 오래 있으면 안 돼요. 저를 감시하는 사람이 있어요.” 카렌은 손을 뻗었다가 멈췄다. “집으로 돌아오자. 내가 무슨 일이 있어도….” “누나.” 이안이 고개를 저었다. “누나가 또 나 때문에 모든 걸 버리면 안 돼.” 두 사람 사이에 짧은 침묵이 흘렀다. 동생은 아프고 어린 사람이었지만, 동시에 누나가 무엇을 희생해 왔는지 알고 있었다. 진혁은 그 사실이 이안의 선택을 무효로 만들지 않으면서도, 협박 아래 놓인 선택은 자유로운 동의가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당신 의견을 먼저 적어 주세요.” 그가 메모장을 내밀었다. “누나를 지키기 위해 여기 남는 것 말고, 아무 협박이 없다면 어떻게 하고 싶습니까?” 이안은 잠시 펜을 쥔 채 망설였다. 손목 인장이 희미하게 떨렸다. 그는 종이를 세로로 접고 등 뒤에서 한 줄을 적어 진혁에게 건넸다. ‘집에 가고 싶어요. 누나랑 저녁을 먹고 싶어요.’ 진혁은 종이를 작게 접었다. 소년의 글씨는 조금 삐뚤었지만 마지막 문장의 획은 단단했다. 수레가 가까워졌다. 진혁과 카렌은 봉인 마석함 옆으로 몸을 숨겼다. 흰색 작업복을 입은 여자가 지나가다가 그들을 보고 눈을 크게 떴다. 진혁은 들킨 줄 알고 가슴을 움켜쥐었다. 그러나 여자는 쟁반을 든 이안에게만 말을 걸었다. “다음 손님들 잔을 채워. 가격이 오르면 다들 술을 더 찾거든.” 이안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를 따라갔다. 카렌은 마지막까지 동생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진혁은 그녀가 무너져 내리지 않도록 조용히 옆에 서 있었다. “제가 너무 늦게 온 것 같아요.” 카렌이 말했다. “오늘은 찾았잖아요.” “찾기만 했죠. 아직 데리고 나오지도 못했고.” “그래도 이름을 알고 있고, 자신이 뭘 원하는지도 말할 수 있습니다. 그걸 서류로 남겼어요.” 카렌은 눈가를 문질렀다. 평소 다른 사람 앞에서 우는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 애썼지만 이번에는 손끝이 젖었다. 두 사람은 홀로 돌아가기 전에 서비스 복도의 끝을 살폈다. 그곳에는 작은 거래 계산소가 있었다. 유리창 뒤에서 회계원이 금화를 세고 있었고, 책상 위에는 일일 낙찰 보증금 명부가 놓여 있었다. 진혁은 무심코 세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한 닢, 두 닢, 스무 닢. 값이 비싸질수록 계산하는 목소리는 더 작아졌다. 계산소 유리창 뒤에는 조그만 저금통도 놓여 있었다. 보통의 은행 저금통과 달리 여기서는 예치금을 빼지 못하면 잔액이 계속 쌓이도록 돼 있었다. 각 손님은 익명 번호만 남기고 출입하지만 그 번호에 연결된 장부에는 가족의 이름과 남은 수명 같은 것들이 적혀 있었다. 계산원은 아무렇지 않게 그것을 금화로 환산한 표를 펼쳐 보였다. “담보가 금화가 아닌 경우 계산이 좀 느려집니다.” “누가 이 가격을 정합니까?” 진혁이 물었다. “감정실에서 정하죠. 사람이 살면서 앞으로 쓸 수 있는 시간이나 다른 이에게 남긴 약속을 장부 가치로 바꾸는 겁니다.” “당사자가 그 가격에 동의했다는 표시는 어디 있습니까?” 계산원이 눈을 깜빡였다. “입구에서 처리합니다.” “입구에서는 입장 의사만 확인하던데요.” “그건 저한테 물을 일이 아닌데.” 계산원은 곤란하다는 듯 장부를 덮었다. 진혁은 더 묻지 않았다. 그녀 역시 지시받은 숫자를 적는 직원일 가능성이 컸다. 이곳의 문제는 계산원이 동전을 제대로 세느냐가 아니라, 애초에 없는 동의를 가진 것처럼 적는 사람이 누구냐에 있었다. 그때 바닥에 떨어진 금화 한 닢이 그의 발끝으로 굴러왔다. 어두운 복도에서는 누가 떨어뜨렸는지 보이지 않았다. 진혁은 금화를 주워 들었다. 동전은 오래된 것이었고 테두리에 작은 흠집이 있었다. 손끝에 닿자 눈앞에 짧은 기억이 나타났다. [대상: 마레온 금화 1닢.] [현재 소유자: 불명.] [직전 보유자: 북부 부두 하역 노동자 에른.] [잔류 기억: ‘내 딸의 배삯이다.’] 진혁은 가슴이 철렁했다. 검은 경매에서는 금화 일만 닢이 아무렇지 않게 오가고 있었지만, 이 동전 한 닢은 어떤 사람의 딸이 폭풍을 피해 떠날 수 있는 유일한 돈일지도 몰랐다. 소유자 이름은 기억의 파편에 남아 있었으나 그것만으로 진짜 주인이라고 확정할 수는 없었다. 그는 경매 계산소의 분실물 기록에 동전을 등록하고 증인 서명을 받았다. “이런 걸 왜 기록해요? 금화 하나인데.” 회계원이 물었다. “한 사람에게는 전부일 수 있어서요.” 진혁은 다음 날 에른이라는 사람을 찾아 원래 주인인지 확인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라일은 나중에 이야기를 듣고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우린 도시의 내일이 팔리는 장소에 잠입했어요. 그런데 서 감정사는 주인 잃은 금화부터 걱정하는군요.” “이런 데서는 오히려 한 닢의 주인을 확인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왜요?” “금화 일만 닢이 누구 것이었는지 묻지 않으면 이 사람들과 똑같아지니까요.” 라일은 대답하지 못했다. 한편 경매대에서는 새로운 조건이 발표됐다. 최고 입찰자인 검은 외투의 손님이 보호권 일부를 포기하는 대신 북부 부두의 인양 우선권을 독점하겠다고 했다. 진행자는 특별 결제 방식이라며 예비 증인의 동의를 요청했다. ‘제998호 최종 증인.’ 그 목소리가 울리자 천장의 유리 구체들이 모두 어두워졌다. 무대 뒤편에서 얇은 회색 손이 커튼을 젖혔다. 구부정한 노인이 느린 걸음으로 나타났지만 그의 목에는 이름표가 없었다. 얼굴은 늙었는데 손등에는 어린아이처럼 매끈한 피부가 드러나 있었다. 진혁은 순간 이름을 잃어버린 라일과 실종된 직원들을 떠올렸다. 이 사람의 시간은 정상적으로 흐르지 않는 듯했다. 노인이 입을 열었다. “전부의 이름을 아는 사람은, 전부의 책임도 짊어져야 한다.” 그 말에 객석의 검은 가면들이 일제히 고개를 숙였다. 진혁은 금화 한 닢을 기록한 영수증을 주머니에 넣었다. 대홀 중앙의 거대한 숫자와 좁은 복도의 작은 동전 사이에 같은 문제가 있었다. 누구의 것이며 누가 그것을 내놓겠다고 말했는가. 그것을 정확히 확인할 수 있다면, 거대한 사기 속에서도 한 사람의 내일은 되찾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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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화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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