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창고의 문이 열리는 시각은 해가 지고 부두의 마지막 작업 종이 울린 뒤였다.
그날 진혁과 일행은 창고 앞에서 무턱대고 기다리지 않았다. 난다는 조합 관리자 자격으로 시의회 이사벨 검사장에게 서면 통지를 보냈고, 헥터는 항만 경찰에 야간 순찰 강화를 요청했다. 위험한 일을 벌이면서도 경비를 부르는 습관을 버리지 않는 진혁을 라일은 끝내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누군가 살아 돌아오지 못한다면 마지막으로 남을 것은 증인이 작성한 기록뿐이었다.
해 질 무렵, 진혁은 카렌과 라일을 데리고 제3창고 옆 골목으로 들어갔다. 이번에는 검은 초대장 아래에 작은 원형 글씨가 나타나 있었다. ‘가격 없는 선택, 예비 인정.’ 그들이 가져온 것은 유물이나 금화가 아니라 진혁이 스스로 정한 한 문장의 약속이었다. 그는 자기 손으로 초대장을 접고 가슴 안쪽 주머니에 넣었다.
“오늘은 들어갑니까?”
카렌이 물었다.
“입장과 거래는 다르니까요. 구경은 해봐야죠.”
“그 말만 믿고 따라가도 될까요?”
“저도 오늘 수상한 말을 좀 하네요.”
라일은 웃었지만 손가락에는 작은 쇠바늘 두 개를 감추고 있었다. 그는 문을 열려고 가져온 것이 아니라 필요하면 닫기 위해 가져온 것이라고 설명했다. 도둑이 자물쇠를 잠그는 일은 드문 일이지만, 누군가의 이름이 빠져나가는 길을 막아야 할 때도 있었다.
골목의 그림자가 길어지자 대낮에는 없던 검은 돌바닥이 드러났다. 양쪽 창고 벽은 서서히 회색 천막으로 바뀌었고, 멀리서 낮은 음악과 잔 부딪히는 소리가 들렸다. 지난번의 거울 가면 안내인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가치 산정이 불가능한 물건을 가져오셨습니까?”
진혁은 초대장을 내밀었다.
“물건은 없습니다. 제 약속을 가져왔습니다.”
안내인은 종이를 펼쳤다. 글자가 천천히 흐르더니 그의 가면에 희미하게 비쳤다.
“증명을 요구받으면 그 약속을 지켜야 합니다.”
“그럴 생각입니다.”
“어기면 값으로 정해지지 않았던 것이 값으로 환산됩니다. 잃을 것을 알고 들어오십시오.”
진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협박인지 규칙인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초대장의 뒷면에는 계약이라고 부를 만한 조항이 아무것도 없었다. 그는 그 사실을 큰 소리로 확인했다.
“제 이름과 기억을 담보로 제공한다는 데 동의하지 않습니다. 당신들이 그것을 약관으로 넣었다면 지금 거절합니다.”
안내인의 입술이 희미하게 움직였다. 마치 의외의 질문을 들은 사람 같았다.
“방문 의사만 접수하겠습니다.”
골목의 끝에 검은 문이 열렸다.
문 너머에는 마레온의 어떤 건물보다 화려한 홀이 있었다. 천장은 물속처럼 어두운 남색으로 반짝였고, 천천히 움직이는 유리 구체들이 샹들리에 역할을 했다. 바닥은 검은 대리석이었으며 그 아래로 금빛 글자가 흐르는 것처럼 보였다. 객석마다 깊은 붉은색 의자가 놓였고, 손잡이에는 금화가 아니라 이름을 적을 수 있는 얇은 금속판이 붙어 있었다. 손님들은 얼굴을 가리는 가면을 쓴 채 서로에게 인사했다. 귀족의 망토를 걸친 사람, 상인의 검은 조끼를 입은 사람, 낡은 노동자 옷차림의 사람까지 섞여 있었다.
화려한 시설과 달리 공기는 이상하게 차가웠다. 향수와 해초 냄새가 동시에 났고, 말소리는 크게 울리지 않았다. 누가 웃어도 바로 옆 사람만 들을 수 있는 음향 결계가 객석 사이마다 설치돼 있었다.
진혁은 마음속으로 구조를 그렸다. 입구에서 경매대까지 직선 통로, 양옆에 퇴장문 두 개, 발코니로 오르는 작은 계단, 대기실로 이어질 듯한 커튼. 혹시 밖으로 나갈 일이 생기면 누가 길을 열어 주어야 할지 먼저 알아둬야 했다.
무대 위에서 진행자가 인사를 시작했다.
“여러분, 가격을 매길 수 없는 것들의 밤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이곳에서는 아직 오지 않은 행운과 이미 잃어버린 후회를 거래합니다.”
객석에서 조용한 박수가 났다. 진행자는 검은 장갑을 끼고 있었고, 목에는 은색 고리 일곱 개가 이어진 목걸이가 걸려 있었다. 마지막 고리만 거꾸로 뒤집혀 있었다.
진혁은 의자 앞에 놓인 안내서를 펼쳐 보았다. 일반적인 경매장에서는 입찰자가 돈을 내지 못하면 보증금을 몰수하고, 위탁인이 물건을 다시 출품한다. 하지만 검은 경매의 규정에는 돈과 함께 무형의 대가가 적혀 있었다. ‘손님이 제공한 기억은 낙찰 여부와 관계없이 거래 보증에 사용할 수 있다.’
진혁은 안내서의 다음 장을 살폈다. 이곳에서는 손님이 자신의 이름을 밝힐 필요가 없다고 했지만, 실제로는 의자 손잡이의 금속판이 손님의 심장 박동에 따라 빛을 바꾸고 있었다. 얼굴을 가린 가면보다 몸 안에 깃든 마력 흔적을 확인하는 편이 더 정확했다.
“익명이라고 광고해 놓고 다 기억하고 있네요.”
그가 속삭였다.
“익명은 손님들끼리만 해당하죠.”
라일이 대답했다.
“주최자는 모든 것을 알아야 손님에게 가장 비싼 물건을 팔 수 있으니까.”
“루멘이라면 이런 보증 방식은 허용하지 않을 겁니다.”
“그래서 검은 경매가 따로 있는 거죠.”
진혁은 금속판 위에 자신의 장갑을 얹었다. 빛의 변화가 멈췄다. 장갑을 통한 간접 접촉에는 기록 장치가 제대로 반응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는 조심스럽게 손을 거두었다. 대가를 내기 전에 보증금이 얼마나 붙는지 확인하지 않는 것은 감정사에게 가장 위험한 실수였다.
그 사이 카렌은 입구와 뒷문을 살폈다. 경비가 많아 보이지 않는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의자와 통로 곳곳에 작은 인장이 박혀 있었다. 사람들이 목소리를 높이거나 허락받지 않은 문을 열면 인장이 반짝였다. 폭력을 막는 장치처럼 보이지만 관객의 움직임을 통제하는 데도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다.
“나갈 때는 뒷문보다 들어온 문이 안전하겠어요.”
그녀가 낮게 말했다.
“동의합니다.”
진혁은 머릿속에 출입 구조를 다시 그렸다. 중요한 것은 빛나는 경매품이 아니라 어떤 문이 실제로 열리는지였다.
첫 번째 경매품은 황당할 정도로 소박했다. 유리 상자 안에 작은 종이배 하나가 놓였다. 진행자는 그것을 ‘어떤 상인이 열한 살 때 처음 만든 배의 마지막 기억’이라고 소개했다. 입찰가는 금화 스무 닢이었다. 진혁은 저걸 누가 왜 사나 싶었지만 객석 뒤에서 금화 쉰 닢이 올라왔다. 입찰자는 더 많은 돈을 주겠다는 사람에게 패배한 뒤 얼굴을 묻고 흐느꼈다.
“자기 기억을 팔고 다시 사려는 사람인가 봐요.”
카렌이 낮게 말했다.
진혁은 그 상인의 손목에 묶인 오래된 밧줄 자국을 보았다. 누군가에게는 하찮은 종이배가 평생 한 번 돌아올 수 있는 고향의 바다였을 것이다. 물건의 가치가 개인의 마음에 붙어 있다는 사실을 이용하면 사람은 얼마든지 무너질 수 있었다.
두 번째로 나온 것은 병 속에 담긴 푸른 빛이었다. 이름은 ‘내일 새벽의 순풍.’ 진행자는 그 바람을 낙찰받은 배가 아침에 무사히 출항할 가능성이 높아진다고 설명했다. 관객들은 웃으며 금화를 불렀고, 누군가는 자기 선단에 유리한 방향을 원한다고 소리쳤다.
진혁은 손바닥을 의자 아래에 대었다.
[대상: 예측과 재배분의 계약.]
[실제 효과: 특정 항만 방벽 구역의 마력 방향을 변경하는 권한.]
[예상 대가: 다른 구역의 경보 방어 감소.]
[원권리 동의: 확인되지 않음.]
“바람을 파는 게 아니에요.”
그가 말했다.
“다른 배의 안전을 빼앗아서 한 배에 몰아주는 겁니다.”
라일이 손바닥으로 의자를 가볍게 눌렀다.
“목소리 낮춰요. 여기 사람들은 알고 사는 사람도 있으니까.”
두 번째 경매가 끝나자 뒤쪽 객석에서 작은 소동이 일어났다. 검은 망토를 쓴 여성이 입찰 결과를 인정할 수 없다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녀는 자신이 산 것은 순풍을 부르는 권리이지 다른 사람의 항로를 막는 권리가 아니라고 주장했다. 진행자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계약서의 부속 조항을 안내했다. 작은 글씨로 적힌 ‘방벽 마력 우선 배정 시 상대적 손실은 손님의 책임이 아님’이라는 부분이었다.
여자는 글자를 읽고 얼굴이 굳었다.
“나는 다른 배가 위험해질 줄 몰랐어요.”
“설명서에 기재되어 있습니다.”
진행자는 미소를 거두지 않았다.
진혁은 그 광경을 보며 자신이 루멘에서 처음 서류를 읽기 시작했을 때를 떠올렸다. 당사자가 내용을 이해하지 못했음을 알면서도 작은 글씨를 내세워 모든 책임을 떠넘기는 방식. 검은 경매는 그걸 마법으로 정교하게 다듬었을 뿐이었다.
여자는 결국 좌석에 다시 앉았다. 그녀가 항의한 기록은 객석의 음향 결계 때문에 몇 걸음 떨어진 손님에게도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진혁은 그 사실을 따로 적어 두었다. 거래 내역뿐 아니라 항의할 기회를 누가 차단했는지도 나중에 증명해야 했다.
세 번째 경매품이 소개되자 홀의 분위기가 바뀌었다. 진행자가 천으로 덮인 커다란 항구 모형을 드러냈다. 작은 배와 창고가 실물처럼 정교하게 배치되어 있었고, 바다 쪽에는 투명한 방벽이 둥글게 서 있었다. 모형 위쪽에 검은 명패가 나타났다.
[등록번호 999. 마레온의 내일.]
“관할 해안의 내일 하루, 방벽 보호권과 손실 우선 보상권을 묶은 특별 상품입니다.”
진혁은 숨을 삼켰다. 무대 위 모형은 단순한 지도보다 더 위험했다. 좁은 구역마다 작은 불빛이 켜졌고, 그 빛이 향하는 방향을 바꾸면 실제 마법 흐름도 달라지는 것처럼 보였다.
진행자가 말했다.
“내일 북부 부두에 예상되는 고위험 해일의 방벽 보호를 민간 출자자가 우선 구매합니다. 동시에 보호받지 못한 구역에서 발생하는 인양권과 재건 계약권도 낙찰자에게 부여됩니다.”
객석에서 누군가 웃었다.
“보호받을 사람과 손실을 입을 사람을 같은 계약으로 정한다는 거군.”
“그게 바로 위험 분산의 예술이지.”
다른 입찰자가 답했다.
진혁은 두 사람의 대화를 믿을 수 없었다. 그들은 사람의 생명을 두고도 이익을 계산하고 있었다. 원래 보험과 재건 계약은 재난이 일어났을 때 피해를 줄이기 위한 것이지만, 누군가 재난을 더 크게 만들 수 있다면 모든 게 뒤집힌다. 손실 보상권을 산 사람이 바로 손실을 키워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내일 폭풍을 직접 부르는 건 아니군요.”
진혁이 말했다.
“막을 수 있는 걸 일부러 막지 않는 거죠.”
카렌의 손이 검집으로 움직였다. 그녀는 인양권에 포함된 선박 목록에서 낯익은 이름들을 발견했다. 이안이 약을 받으러 다니던 항만 의료소의 보급선, 학교에 다니는 아이들을 태우는 작은 연락선, 난다가 관리하는 창고의 구급 물품 선박까지 있었다.
“저 사람들은 이 배들이 어디에 있는지도 알고 있어요.”
“네.”
진혁이 말했다.
“그래서 더 위험합니다.”
객석 위쪽의 발코니에서 긴 외투를 입은 누군가가 손을 들었다. 어두워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목소리는 익숙했다.
“최초 입찰, 금화 일만 닢.”
대홀의 공기가 일제히 흔들렸다. 보통 상인이라면 평생 만져보지 못할 돈이었다. 진행자가 웃으며 손을 들었다.
“일만 닢 나왔습니다. 다음 입찰은?”
진혁의 눈은 무대 아래의 작은 글자로 향했다. 판매 원권리자의 이름을 적는 자리였다. 거기에는 법적 소유자가 아니라 계약자 대리인 한 명의 서명만 있었다.
‘제998호 최종 증인.’
진혁은 고개를 들었다. 그들이 찾는 마지막 이름이 여기 있었다.
그때 무대 뒤 커튼 사이로 작은 그림자가 지나갔다. 검은 조끼를 입은 소년이 은쟁반을 들고 걷고 있었다. 창고 확인창 너머에서 본 이안이었다.
카렌의 호흡이 순간 끊겼다.
진혁은 그녀의 손등을 살짝 눌렀다.
“봤습니다.”
“지금 가요.”
“가요. 하지만 이안에게 먼저 물어봐야 해요. 뭘 두고 나오려는 건지.”
카렌은 주먹을 쥐었다가 천천히 폈다. 소년은 커튼 뒤로 사라졌다. 무대에서는 금화 이만 닢이 외쳐졌다.
진혁은 자신의 초대장을 쥐었다. 이곳에서 가장 비싼 것은 내일의 날씨도, 항구의 재산도 아니었다. 누군가 ‘나는 그 계약에 동의하지 않는다’고 말할 기회 자체였다.
그 기회를 한 번이라도 되찾지 못하면, 마레온의 내일은 이미 팔린 것이나 다름없었다.
제16화 댓글 0
댓글·공감·신고는 로그인 후 이용할 수 있습니다. 이전 익명 댓글은 그대로 표시됩니다.
댓글을 불러오는 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