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작품, 이어지는 이야기 · 페이루아에서 다음 페이지를 만나보세요
작품으로던전 경매장의 말단 직원입니다 · 15화
PAYLUA ORIGINAL · 제15화

15화. 아버지가 남긴 두 번째 검집

던전 경매장의 말단 직원입니다 · 5,953자

오프라인 책장
마레온 시립 기록관의 지하 유품실은 햇빛이 들지 않았다. 낮이면 출입 창구에서 인장이 찍힌 종이를 들고 사람들이 줄을 섰지만, 계단 아래로 내려갈수록 바깥의 소음이 멀어졌다. 유품실 문에는 오래된 구리 명패가 걸려 있었고, 안쪽에서는 방습 마석이 낮게 웅웅거렸다. 수십 개의 철제 서랍과 좁은 통로가 한 치 오차 없이 늘어서 있었다. 누군가의 최후가 이런 곳에서 번호 하나로 정리된다는 사실이 카렌의 마음을 불편하게 만들었다. “레온 하르트. 유품 접수 번호 4417.” 기록관 직원이 말했다. “이미 유가족에게 인계 완료된 물품인데 재확인 요청이 들어왔습니다. 본인이 가족임을 증명하십시오.” 카렌은 신분증과 아버지의 첫 번째 검집을 내놓았다. 손가락이 조금 떨렸다. 아버지가 죽은 지 오래됐지만 그의 물건을 확인하러 오는 일만큼은 아직 익숙해지지 않았다. 철제 서랍이 열리고 오래된 기름 먹인 천이 모습을 드러냈다. 천 안에는 손잡이도 검날도 없는 검집 하나가 들어 있었다. 길이는 팔뚝만 했고, 검을 넣기에는 입구가 터무니없이 좁았다. “검집이 아니라 서류통이네요.” 진혁이 말했다. “겉보기에는 그렇겠지만 분류가 검집으로 돼 있어요.” 직원이 서류를 가리켰다. 카렌은 손을 뻗었다가 멈췄다. 검집의 금속 장식은 자신이 어릴 때 아버지의 작업대에서 본 모양과 같았다. 집에서는 아버지가 작은 쇳조각을 망치로 펴는 소리가 자주 들렸고, 그럴 때마다 이안은 문지방에 앉아 아버지의 흉내를 냈다. 레온은 웃으면서도 검집에 손을 대는 것은 말리곤 했다. “저건 아버지가 혼자 만든 물건이에요.” 카렌이 조용히 말했다. “가족에게 남길 편지일지도 몰라요.” 진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감정은 물건의 과거를 들여다보는 힘이지만 그것이 남의 사생활을 마음대로 열어도 된다는 허락은 아니다. 그는 카렌에게 먼저 물었다. “확인해도 되겠습니까?” “네. 하지만 내용은 먼저 저에게 보여 주세요.” 진혁은 기록관 직원의 입회 아래 검집을 받았다. 손끝에 닿는 가죽은 낡았지만 이상하게 차가웠다. [대상: 레온 하르트의 제2검집.] [실제 용도: 계약서 운반용 보호 용기.] [보관 조건: 직계 가족의 자발적 열람.] [재료: 염해를 견디는 해저철과 보존 가죽.] [잔류 기억: ‘내가 돌아오지 못한다면 읽어라.’] 검집의 입구에서 작은 금속 쐐기가 풀렸다. 카렌은 그 안쪽에서 얇게 접힌 종이를 꺼냈다. 종이는 방습 가죽에 감겨 있었고, 겉면에는 레온의 손글씨가 남아 있었다. ‘카렌에게. 그리고 이안을 지켜야 할 사람에게.’ 카렌은 첫 줄을 소리 없이 읽었다. 손바닥으로 입을 가린 채 잠시 숨을 고르더니 옆에 있는 의자에 앉았다. 진혁은 다른 쪽을 바라봤다. 읽어 달라는 말이 없었기에 기다릴 뿐이었다. 얼마 뒤 그녀가 고개를 들었다. “같이 봐요. 아버지가 우리만을 위해 쓴 편지는 아닌 것 같아요.” 종이에는 레온이 근무했던 항만 방벽 관리단의 기록이 적혀 있었다. 수년 전 방벽 마력 계측표가 바뀌었고, 하룻밤 사이에 바다에서 밀려온 마력의 일부가 항구 상업 시설로 새어 들어갔다. 레온은 그것이 단순한 장치 결함이 아니라 누군가 의도적으로 결제 인장을 연결해 놓은 결과라고 적었다. “계약이 방벽의 힘을 끌어간다고?” 진혁이 물었다. “마법은 그냥 만들어지는 게 아니니까요. 항만의 바다 마력이 모라를 거쳐 방벽으로 전달되는데, 그 중간에 우회 장치를 붙인 겁니다.” “그럼 검은 경매가 도시의 미래를 판다는 말은….” “내일 필요한 안전을 오늘 빼앗는다는 뜻이겠죠.” 레온의 편지에는 방벽 관측대의 구조도도 그려져 있었다. 두꺼운 청동 관들이 항구의 수문과 이어지고, 중앙 계측기에서는 푸른 마력의 흐름을 측정했다. 어린 시절 카렌은 그 구조를 장난감처럼 보며 아버지가 왜 매일 같은 숫자를 기록하는지 묻곤 했다. 레온은 바다를 막는 일에는 영웅의 힘보다 날마다 똑같이 일하는 사람의 성실함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아버지는 폭풍보다 장부를 더 무서워하셨어요.” 카렌이 종이를 펼치며 말했다. “그땐 웃긴 말이라고 생각했어요. 파도를 막는 사람이 종이 몇 장을 두려워하다니.” 진혁은 그림에 적힌 수치를 살폈다. 시간대별 흐름을 나타낸 화살표 옆에 ‘최소 방어량’이 붉은 글씨로 표시되어 있었다. 일반 시설의 비용 절감을 위해 마력을 잠깐 전용할 수는 있어도 그 아래로 떨어뜨리면 사람을 태운 작은 배들이 항구 입구에서 보호받지 못하는 구조였다. “이 최소값을 아버님이 관리하셨군요.” “네. 폭풍이 오지 않아도 꼭 지켜야 한다고 하셨어요. 해가 맑을 때라도 배 하나는 언제든 돌아올 수 있으니까.” 진혁은 그 말을 종이 한쪽에 적었다. 보호란 평소에는 대단해 보이지 않는다. 사고가 일어나지 않으면 모두가 쓸데없는 비용이라며 불평한다. 그래서 가장 먼저 비용 절감 대상이 된다. 하지만 비상시에만 필요한 시설을 비상시까지 아껴 두는 것은 불가능하다. 기록관 직원이 따뜻한 차를 가져왔다. 보존실에서는 음식물 반입이 금지되어 있었으므로 그는 문밖 대기 의자에 찻잔을 두고 갔다. 카렌은 잠시 밖으로 나가 차를 마셨다. 마른 손끝에 온기가 스며들었다. 진혁은 일부러 유품을 만지지 않았다. 누가 기다려야 하는지, 누가 증거를 가져가야 하는지 구분할 때였다. “왜 편지를 다 읽지 않아요?” 카렌이 물었다. “제게 허락하신 부분은 같이 읽었습니다. 아버님이 딸에게 남긴 말은 직접 보는 게 맞겠죠.” 카렌은 손안의 찻잔을 내려다보았다. “당신은 가끔 너무 규칙적이에요.” “불규칙하게 살다가 계약서 때문에 죽을 뻔했거든요.” 그 말에 카렌이 잠깐 웃었다. 눈가에 맺힌 물기도 조금 가라앉았다. 카렌은 종이 아래쪽의 이름들을 읽었다. 그 가운데에는 오르텐 백작뿐 아니라 시의회의 과거 담당자들과 ‘998번 원권리 확인 담당’이라는 낯선 직책이 있었다. 이름 칸은 까맣게 번져 읽을 수 없었다. 레온은 그 옆에 작은 문장을 적어 두었다. ‘그 사람은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자가 아니다. 마지막까지 남겨진 자다.’ 라일이 종이를 보자 얼굴이 창백해졌다. “그 문장…. 내가 들은 적 있어요.” “언제요?” “이름을 잃던 날. 누군가 내 귀에 똑같이 말했죠.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사람은 도망친 사람이 아니라 장부를 닫아야 할 사람이라고.” 진혁은 기록의 구조를 곰곰이 생각했다. 거래가 끝나려면 대금을 받고 물건을 넘기는 사람뿐 아니라 마지막에 서명할 책임자도 필요했다. 검은 상회는 책임자 이름을 지우거나 바꿔서 누가 빚을 갚아야 하는지 흐리게 만들었다. 레온이 쓴 ‘남겨진 자’라는 표현은 그것이 한 명의 사람을 선택하는 방식일지도 모른다고 암시했다. “이름을 없애는 게 목적이 아니라 책임을 떠넘길 마지막 사람을 정하는 거군요.” “그렇다면 누가 마지막 사람인지 알아야겠죠.” 카렌이 말했다. 기록관 직원은 서랍 안쪽에서 또 다른 보관봉투를 꺼냈다. 단순한 유품이 아니라 공증인이 봉인한 증거라는 표시가 있었다. “원래는 공개하면 안 되는 기록입니다. 그런데 사망 판정이 재심사에 들어가면서 열람할 수 있게 됐어요.” 그는 이사벨 론이 서명한 정식 열람 허가증을 내밀었다. 봉투 안에는 오래된 의자 배치도가 있었다. 둥근 회의실 중앙에 긴 탁자가 놓여 있었고 둘레에는 아흔일곱 개의 작은 동그라미가 그려져 있었다. 그 바깥쪽에 자리를 하나 더 그린 뒤 굵은 글씨로 써 두었다. ‘증인석. 누구의 자산도 아닌 사람.’ 진혁은 1화에서 보았던 구리 반지의 기억과 초청장에 나타난 의자 아흔여덟 개를 떠올렸다. 원래 일곱 명의 기록자와 그들을 도운 아흔일곱 사람이 있었는데, 검은 경매의 의자는 아흔여덟 개였다. 한 자리가 늘어난 셈이었다. “마지막 자리를 새로 만든 걸까요?” “아니요.” 세리아가 말했다. 그녀는 시의회 요청에 따라 기록관에 동행했고, 지금까지는 조용히 뒤에서 서 있었다. “우리가 잊어버린 자리야.” 세리아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그녀는 의자 배치도를 바라보며 장갑을 낀 손을 꽉 쥐었다. “옛날에 루멘에는 감정사가 아니라 기록을 끝까지 읽는 사람이 있었어. 거래에서 빠진 사람, 서명하지 않은 사람, 목소리를 잃은 사람의 이야기를 들었지. 누군가가 그 자리를 없앤 뒤로 우리는 돈을 주고받는 사람만 세기 시작했어.” “그 사람이 누구였습니까?” 진혁이 물었다. 세리아는 대답 대신 오래된 의자 그림의 가장자리로 손을 옮겼다. 그곳에는 ‘이름을 적지 말 것’이라는 문장이 있었다. “그 사람은 내가 지키지 못했어.” 카렌은 아버지의 편지를 다시 접었다. 세리아의 슬픔을 캐묻고 싶지는 않았다. 그러나 감정적 비밀이 사건의 열쇠가 되고 있다면 언젠가는 말해야 할 날이 올 것이다. “아버지는 그 사람을 찾아갔다고 적었어요.” 그녀가 말했다. “마지막 기록 날짜가 사망 신고 나흘 전이네요. 그러니까 아버지는 죽은 걸로 처리된 뒤에도 살아 있었어요.” “그건 이상하군요.” 기록관 직원이 눈썹을 찌푸렸다. “공식 사망일보다 나흘 전의 기록이 아니라, 사망 신고서가 작성된 날짜보다 더 뒤의 기록이라는 말입니까?” 카렌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순은 작은 숫자 차이가 아니라 누군가 사람의 생사를 문서로 먼저 결정했다는 증거였다. 진혁은 날짜가 적힌 편지의 잉크를 살폈다. 시간이 지나 옅어졌지만 일부 글자만 유독 진했다. [추가 기록: 레온의 서명은 본인 작성.] [서명 시점: 사망 증명서 작성 이후.] [주의: 서명은 생존 증거이나 이후 행방은 확인 불가.] 진혁은 카렌에게 결과를 설명했다. 카렌의 눈이 흔들렸다. 아버지가 살아 있다는 뜻은 아니었다. 다만 죽기 나흘 전에 이미 죽은 사람으로 취급받았다는 뜻이었다. 누군가는 레온이 사라질 것을 미리 알았거나, 사라지게 만들려 했을 수 있었다. “그럼 아버지는 마지막까지 뭘 지키려 했던 걸까요?” “아마 우리가 지금 보고 있는 걸 겁니다.” 진혁은 편지 맨 끝의 작은 문장을 가리켰다. ‘이안을 지키려면 998을 먼저 취소하지 마라. 잘못 지우면 이름을 붙잡아 둔 사람이 함께 사라진다.’ 카렌이 손을 움켜쥐었다. “동생을 구하려고 거래를 부수면 오히려 동생이 사라질 수 있다는 거예요?” “그럴 가능성이 있습니다. 정확한 방식부터 알아야 해요.” 정확한 설명 없이 섣불리 마법을 끊지 말아야 한다는 결론은 모라의 봉인과 같았다. 눈앞에 위험한 계약이 있다고 해서 모두 찢어 버리면 연결된 사람까지 다칠 수 있었다. 진혁은 문서의 순서를 다시 살폈다. “가장 먼저 할 건 이안이 아직 자기 이름을 알고 있는지 확인하는 겁니다.” “알고 있을 거예요.” 카렌이 말했다. “그 아이는 이름을 잊으면 집에 못 돌아올까 봐 어렸을 때부터 자기 이름을 매일 썼거든요.” 진혁은 그 말을 듣고 잠시 웃었다. “그런 습관이 지금은 도움이 될 수도 있겠네요.” 기록관을 나올 때는 오후가 깊어 있었다. 계단 위로 비스듬한 햇살이 들어왔고, 광장의 분수에는 바람에 날린 낙엽이 떠 있었다. 카렌은 아버지의 검집을 가방에 넣었다. 단단한 가죽의 무게가 어깨에 실렸다. 그녀는 그 무게가 슬픔보다 조금 더 견딜 만하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적어도 아버지가 무언가를 남겼다는 증거였으므로. 루멘으로 돌아오는 마차 안에서 라일이 문득 말했다. “세리아 사장님. 그 증인석에 앉았던 사람이 사장님 가족이었습니까?” 세리아는 창밖을 바라봤다. 창문에는 도시의 풍경이 느리게 흐르고 있었다. 그녀는 긴 침묵 끝에 답했다. “그 사람이 내 이름을 불러 주었어.” “그게 무슨 뜻이죠?” “내가 나를 잊었을 때도 그 사람은 기억했지. 그래서 아직 내가 여기 있는 거야.” 진혁은 구리 반지에 비친 세리아의 눈을 보았다. 그녀가 무엇을 잃었는지 묻고 싶었지만 지금은 때가 아니었다. 그날 저녁, 두 번째 검집 안에서 다시 접힌 작은 종이가 발견됐다. 카렌이 집에 돌아와 가죽 안감을 다시 살폈을 때였다. 이번 종이에는 날짜도 문장도 없었다. 단 한 줄의 주소만 적혀 있었다. ‘검은 경매. 뒷문. 물에 잠긴 의자 아래.’ 아버지는 마지막 순간까지 누군가를 만나려 했던 것이 아니라, 누군가에게 돌아올 길을 남겨 둔 것이다.

PAYLUA 소설 본문은 인쇄가 제한되어 있습니다.

제15화 끝

읽은 위치는 이 브라우저에 저장되며 로그인 중에는 계정에도 동기화됩니다.
READER DISCUSSION

제15화 댓글 0

댓글·공감·신고는 로그인 후 이용할 수 있습니다. 이전 익명 댓글은 그대로 표시됩니다.

댓글을 남기려면 로그인해 주세요.로그인회원가입

댓글을 불러오는 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