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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으로던전 경매장의 말단 직원입니다 · 189화
PAYLUA ORIGINAL · 제189화

189화. 출품품 제0호

던전 경매장의 말단 직원입니다 · 5,057자

오프라인 책장
왕도에서 가장 안전한 장소로 알려진 황실 기록관에는 창문이 거의 없었다. 벽은 두 겹으로 쌓은 회색 석재였고, 한쪽 복도에는 물기가 스며들지 않도록 바닥을 높인 선반이 이어졌다. 기록관을 지키는 사람들은 검이 아니라 번호가 적힌 장부와 작은 황동 열쇠를 가지고 다녔다. 종이 한 장을 꺼낼 때마다 누가 언제 열람했는지 확인해야 했다. 멀리서는 지루해 보이는 일이었지만, 수십 년 전 왕국의 약속이 지금도 효력을 갖고 있다는 사실은 그 반복 속에서 지켜지고 있었다. 서진혁은 그곳에서 '000'이라는 숫자를 바라봤다. 제0호 감정대의 코드와 같았다. 그러나 같다고 같은 사람의 명령인 것은 아니었다. 서류의 코드에는 그저 어느 회선을 통과했는지만 남을 수 있었다. 진혁은 그 차이를 확인하기 위해 기록관의 기술 담당자에게 오래된 송신 장치를 보여 달라고 요청했다. 기술 담당자는 털끝처럼 가는 은실을 손가락으로 잡아 올렸다. “코드 000은 출처를 정확히 모를 때 임시로 쓰던 번호입니다. 그걸 제0호 감정사 개인의 서명으로 읽으면 안 됩니다.” “그럼 누가 이 번호를 도용할 수 있습니까?” 카렌이 물었다. “옛 규격을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든 가능하죠. 지금은 이런 방식을 쓰지 않지만, 예전 기록이 남아 있다는 게 문제예요.” 진혁은 생각에 잠겼다. 사건을 좇는 동안 그는 숫자의 의미를 너무 자주 확신하려 했다. 제7봉인, 제998호 원부, 제0호 감정대. 숫자는 확실해 보였지만 그 뒤에 있는 사람들은 언제나 복잡했다. 진혁은 기록관의 기술자에게 시험 신호를 보내 달라고 요청했다. 정식 승인을 거친 작은 시험이었다. 담당자는 서로 다른 두 송신 장치에서 같은 번호가 나오는 과정을 보여 줬다. “보이시죠? 숫자가 같아도 서명이 같지는 않습니다.” 그는 부끄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거대한 장치의 본질을 읽을 수 있는 자신이, 가장 평범한 검증에서 다시 배워야 했다. 기록관 복도에서 기다리던 윤서하가 그를 불렀다. 그녀는 손목의 보조대를 조절하며 벽에 걸린 옛 왕국 지도를 바라보고 있었다. 지도에는 오래전 마레온과 왕도 사이를 잇던 안전로가 가는 붉은 선으로 표시돼 있었다. 지금은 철도와 도로가 바뀌었지만 긴급 회신망은 여전히 그 선을 따라 일부 작동했다. “서 감정사, 당신이 제0호를 잘못 이해한 건 아닙니다. 그 자리를 왜 만들었는지는 이미 아셨으니까요. 다만 누가 그 역할을 이용하는지는 별도의 문제예요.” “서하 씨는 그날 왜 원본 영수증을 지키려 했습니까?” 그녀는 오래 생각하다 대답했다. “그 영수증에 값이 적혀 있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첫 번째 낙찰자가 낙찰을 거부했을 때, 그 거절을 인정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에요.” “그런데 첫 낙찰자가 물건을 받지 않았다면 경매는 어떻게 끝났습니까?” “끝나지 않았죠. 당시 사람들은 그걸 실패라고 불렀어요. 저는 다르게 생각합니다. 누군가 원하지 않는 거래를 멈췄으니, 그 경매는 해야 할 일을 했던 겁니다.” 진혁은 한참 동안 그녀의 말을 곱씹었다. 모라가 자신의 소유자가 되겠다는 사람을 거절했던 날, 그들이 반드시 물건을 팔 필요는 없다는 걸 깨달았던 순간과 닮아 있었다. 오후 두 시 무렵, 에르딘 사무소에서 긴급 신청서가 제출됐다. 왕실 통합 정리 본부의 명의로 최종 경매 심사를 앞당겨 달라는 요청이었다. 근거는 전국 안전망의 불안정과 기록 체계의 혼란이었다. 아직 통지가 도착하지 않은 지역이 있다는 반론은 '국가적 긴급 상황'이라는 말 앞에 밀려났다. 벨라가 신청서를 세 번 읽었다. “이 조항, 이상해요. 긴급 관리권이 필요하다는 것과 최종 소유권을 넘겨받아야 한다는 것이 한 문장 안에 묶여 있어요.” 세리아가 눈을 감았다가 떴다. “긴급 구조를 핑계로 물건까지 사들이려는 거야. 그리고 사고가 날수록 저 문장을 설득하기가 쉬워지겠지.” 진혁은 책상 위에 값싼 나침반과 우편 확인판 기준 틀을 올려놓았다. 두 물건 모두 다른 사람 눈에는 고철이었다. 그러나 하나는 신호가 지나가는 방향을 가리켰고, 하나는 도착 기록의 가공 흔적을 검증할 수 있었다. 두 물건을 함께 쓰면 통지 확인소에서 나온 신호 가운데 어느 것이 실제 우편 도착과 연결되는지 추적할 수 있었다. “심사장에서 이 자료를 공개합시다.” 진혁이 말했다. “에르딘 측이 가짜 증거라고 몰아갈 겁니다.” 카렌이 답했다. “그러니 우리 말만 믿으라고 해서는 안 되죠. 입회인을 더 부르죠. 마레온뿐 아니라 화령, 폐광, 역참의 감정사도요.” 그날부터 준비는 바빠졌다. 윤담은 같은 규격의 계측 장비를 세 곳에 나눠 보냈고, 서린은 통지 확인 경로를 읽을 수 있는 간단한 안내서를 만들었다. 벨라는 비용을 다시 계산했다. 돈은 넉넉하지 않았다. 세리아는 루멘의 운영비를 함부로 쓰지 않겠다며 직원 대표와 긴급 지출에 합의하는 절차를 밟았다. 아무리 좋은 목적이라도 다른 사람의 급료를 마음대로 가져올 수는 없었다. 백란은 북쪽 폐광의 배달원에게서 증언을 받았다. 그들은 기록상 통지가 도착했다고 되어 있는 날짜에 실제로는 길이 막혀 있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그러나 일부 지역에는 통지가 정상적으로 도착했다. 진혁은 그 기록도 그대로 남겼다. 모든 증거가 자신에게 유리하게 나올 필요는 없었다. 오히려 어떤 곳은 정상이고 어떤 곳은 아니었다는 차이를 밝힐 수 있어야 조작의 범위를 좁힐 수 있었다. 밤늦게까지 이어진 준비 회의는 작은 다툼으로 끝날 뻔했다. 루멘에서 온 직원 대표는 경매 대응 비용이 늘어나면 다음 달 급료 지급이 늦어질 수 있다고 걱정했다. 화령의 장인은 전국 회신망을 검증할 장비를 더 사야 한다고 주장했다. 백란은 증인을 보호할 숙소가 필요하다고 했고, 벨라는 지금 수중에 남은 돈으로는 세 가지를 전부 해결할 수 없다고 말했다. 진혁은 처음에 자기 급여를 반납하겠다고 했다. 그러나 직원 대표가 고개를 저었다. “당신 한 사람의 급료로는 해결되지 않아요. 그리고 다른 직원들도 필요할 때마다 급료를 포기하라고 할 겁니까?” 진혁은 그 말을 듣고 얼굴을 붉혔다. 선의로 하는 말도 다른 사람에게는 나쁜 선례가 될 수 있었다. 그들은 지출 항목을 나누어 다시 계산했다. 증인 보호 비용은 왕실 감사청의 임시 지원을 공식 신청하고, 기술 장비는 각 지방 감정 조합에서 대여받으며, 루멘의 운영비는 직원 대표가 승인한 범위 밖으로 쓰지 않기로 했다. “그럼 우리가 당장 쓸 수 있는 돈이 거의 없군요.” 라일이 말했다. “있어요.” 벨라가 낡은 계산기를 툭 두드렸다. “당신이 지난번에 받은 의뢰 수수료를 아직 안 썼어요.” “그건 제 돈인데요?” “그러니까 제가 마음대로 쓰진 않죠.” 라일은 잠시 망설였다. 그런 다음 은화 몇 닢을 꺼내 탁자에 놓았다. “정식 대여 계약으로 해 주세요. 이자를 받으려는 건 아니지만, 나중에 누가 제 선행을 잊어버리면 화가 나니까.” 사람들이 웃었다. 진혁은 그 웃음에 긴장이 조금 풀리는 걸 느꼈다. 위대한 영웅이 혼자 재물을 던지는 이야기보다, 서로 다른 사람들이 비용을 나누고 누가 무엇을 동의했는지 적는 일이 더 오래 지속될 수 있었다. 그날 밤 작업은 느렸지만 분명히 앞으로 나아갔다. 안전망을 누구에게 맡겨야 하는지 묻는 싸움에서, 그들은 자기들부터 다른 사람의 돈과 시간을 함부로 쓰지 않는 연습을 하고 있었다. 하루 뒤 왕도에는 여러 지역의 대표가 도착했다. 마레온에서는 루멘 직원 둘과 항만 안전 담당자가 왔고, 화령에서는 수리 장인과 지역 감정사가 왔다. 북쪽 폐광에서는 백여명의 확인서를 가진 대표가 도착했다. 그들은 각자 자기 일을 멈추고 먼 길을 왔다. 객실을 빌릴 형편이 안 되는 사람은 경매원 인근의 숙박소에서 여럿이 함께 묵었다. 누군가의 권리를 지키는 일이 이렇게 많은 사람의 시간을 요구한다는 사실에 진혁은 마음이 무거워졌다. “다들 저 때문에 온 건가요?” 그가 물었다. 화령의 장인이 웃었다. “우리가 자기 일 때문에 왔지, 당신 좋은 일 시키러 왔나? 다만 당신이 먼저 문제를 발견해서 길이 생겼을 뿐이야.” 진혁은 그 말에 고개를 숙였다. 오늘 하루 동안 자신이 받은 도움을 하나하나 돌려줄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적어도 그들의 이야기를 자기 승리담으로 바꾸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밤이 되자 권해성이 최종 경매 예비 심사의 진행표를 보내 왔다. 예상보다 빠른 날짜였다. 다음 날 정오, 황실 제1경매원에서 열린다고 했다. 통합 정리 자체는 여전히 스무 날 기한의 마지막 날에 효력을 발생하도록 되어 있었지만, 조기 심사에서 문제가 없다고 결정되면 그 기한이 남아 있는 동안 등록이 사실상 굳어질 수 있었다. “내일을 넘기면 사람들의 이의가 서류 더미에 묻힐 수도 있습니다.” 권해성이 말했다. 진혁은 마지막으로 제0호 원본 보관실의 유리판을 떠올렸다. '마지막으로 망치를 멈출 권리를 가진 자리.' 그것이 무슨 뜻인지 이제 조금 알 것 같았다. 그러나 자신의 손으로 망치를 치는 일과, 적법한 권한을 가진 사람이 망치를 멈추도록 만드는 일은 달랐다. 카렌이 작은 봉투를 건넸다. 안에는 진혁이 처음 루멘에 들어갔을 때 작성한 감정 보조 계약서 사본이 있었다. 계약서에는 월급과 근무 시간, 퇴직할 때의 조건이 적혀 있었다. 아무도 관심을 두지 않았던 하찮은 서류였다. “왜 이걸?” 진혁이 물었다. “내일은 당신이 누구인지 남들이 정하려 들 테니까요. 제0호 감정사인지, 열쇠인지, 왕국의 대표 응답인인지. 하지만 그 전에 당신은 자신이 동의해 취직한 사람이었죠.” 진혁은 계약서를 오래 들여다봤다. 월급이 정말 형편없었다. 그는 피식 웃었다. “이 정도 월급이라면 당장 이직하고 싶네요.” “지금도 늦지 않았어요.” “그런데 퇴직 전에 할 일이 하나 있네요.” 밖에서 종이 울렸다. 이번에는 경매를 알리는 종이 아니었다. 최종 심사에 참가할 사람들에게 배정된 입장 번호를 읽어 주는 소리였다. 진혁의 번호표에는 평범한 숫자 대신 구식 문장이 인쇄돼 있었다. '출품품 0. 왕국 공용 회신망의 미확정 관리권.' 그 아래에 작은 글씨로 추신이 붙어 있었다. '예상 시작가: 국가 보유 등록 유물 전체의 잔여 권리.' 진혁은 그 줄을 두 번 읽었다. 그들은 통합 정리 뒤에 남은 물건을 팔려는 게 아니었다. 가장 먼저 모든 것을 한 덩어리로 만드는 권리부터 팔려고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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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89화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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