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갑 하나가 사람을 범인으로 만들 수 있을까.
서진혁은 밤새 그 생각을 했다. 자신의 장갑과 같은 색, 같은 길이의 가죽 장갑이 찍힌 영상판은 마치 범인이 자백한 뒤 남긴 흔적처럼 선명했다. 하지만 선명하다고 진실은 아니었다. 첫 월급도 받기 전에 산 낡은 감정용 장갑은 흔한 제품이었다. 같은 날 같은 가게에서 팔린 것만 해도 열 켤레가 넘었다. 어제 왕실 광장에서 새로 덧댄 손가락 끝만이 그가 가진 장갑의 특징이었다.
아침이 되자 일행은 강유리의 보관실로 갔다. 유리는 책상에 영상판 두 장을 세워 놓았다. 첫 장에는 도장을 든 접수자가 보였고, 두 번째 장에는 뒤에서 종이를 내미는 사람이 보였다. 둘 다 얼굴이 가려져 있었다. 경비실 등불이 낮아 빛이 고르지 않았다.
“이건 움직이는 영상을 그대로 저장한 물건이 아니에요.” 강유리가 설명했다. “몇 초 간격으로 빛을 기록한 정지 판 세 장을 순서대로 놓은 것입니다.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남아 있지 않습니다.”
카렌은 바로 시각 표식을 확인했다. “여기 열한 시 사십오 분이고, 다음 판은 열한 시 사십구 분. 그 사이에 누가 나갔는지 모르겠군요.”
“더구나 장갑의 손끝이 보이지 않습니다.” 진혁이 말했다. “이 사진으로는 제 것이라는 말을 못 하겠어요.”
권해성이 문에서 다가왔다. “그 정도 설명이라도 공식 회의에서 해야겠습니다. 누군가 당신을 대표 응답인으로 확정하려는 준비를 계속하고 있습니다.”
“제가 직접 대답하지 않겠다고 했는데도요?”
“그러니 위조된 동의를 증명하려는 거겠지요.”
강유리는 봉인 장부의 간격을 보여 주었다. 접수 도장을 보관하는 함에는 원래 장부와 자물쇠 열쇠가 각각 다른 관리자에게 맡겨져 있었다. 열두 해 전의 사고 이후 만들어진 규정이다. 그러나 최근 인사 이동으로 한 관리자가 두 업무를 겸임한 날이 있었다. 사고가 발생한 바로 그날이었다. 유리는 그것이 자신의 관리 책임이라고 인정했다.
“인원을 줄이자는 지시가 왔을 때 비용이 아껴지겠다고만 생각했습니다. 보관 체계가 왜 그렇게 복잡한지 뒤늦게 기억한 거죠.”
진혁은 유리의 말에 쉽게 괜찮다고 답하지 않았다. 잘못된 판단은 실제 피해로 이어질 수 있었다. 다만 책임을 인정한 사람에게 필요한 일은 더 정확한 기록을 남기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날 함께 일한 두 관리자를 따로 면담할 수 있을까요? 서로의 답을 들은 뒤 말이 바뀌면 안 됩니다.”
카렌이 고개를 끄덕였다. “진술은 조사관이 받고, 우리는 장치의 작동 방식만 확인해요.”
조사관을 기다리는 동안 진혁과 카렌은 보관동 옥상에 잠시 올라갔다. 옥상에서는 왕도 서쪽의 굴뚝과 왕궁 첨탑이 함께 보였다. 아래 도로에서 마차가 방향을 틀 때마다 바퀴가 돌바닥을 긁는 소리가 길게 올라왔다. 벽 난간에는 눈 녹은 물이 얼었다 녹았다 한 흔적이 하얗게 남아 있었다.
카렌은 진혁의 장갑을 빌려 안쪽 수선 자국을 살폈다. 원래 검은 실로 이어야 할 부분에 갈색 실이 섞여 있었다. 왕실 광장의 수선공이 급히 수리하면서 자기 가게에 남은 실을 섞어 쓴 결과였다.
“영상에는 이 안쪽이 안 보여요. 그러니까 영상 속 장갑이 당신 것이란 증명도, 아니란 증명도 안 됩니다.”
“저도 알아요. 근데 누가 저런 연출을 했다는 생각은 지워지지 않네요.”
“그럴 수 있죠. 하지만 화가 난다고 바로 한 사람을 찍을 순 없어요.”
그녀는 장갑을 돌려주면서 진혁의 손가락을 잠깐 잡았다. 진혁이 놀라 고개를 들자 그녀는 괜히 장갑의 솔기를 다시 눌렀다.
“당신이 계속 남의 물건만 지키려고 해서요. 자기 손도 좀 챙기세요.”
진혁은 아무 말도 못 했다. 소란스러운 경매장에서는 금화 수백 닢을 두고도 유창하게 말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이런 순간에는 겨우 한마디를 고르는 일이 더 어려웠다.
“손은 지킬게요. 대신 카렌 씨도 자꾸 앞에만 서지 마세요. 검사라고 칼 맞을 순 없잖아요.”
“그 말이 이제야 나옵니까?”
두 사람은 잠시 웃었다. 옥상 문을 여는 소리가 들리자 손을 놓았고, 마침 올라온 라일은 둘을 번갈아 보며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었다. 진혁은 그가 무슨 말을 하기도 전에 물었다.
“여기 공기가 좋아서 올라왔는데 왜요?”
“아무 말도 안 했는데요. 두 분이 참 진지한 감정 절차를 밟고 계셨네요.”
카렌이 손잡이를 잡았다. “라일, 당신의 예전 배달인 조직에 대한 진술도 곧 시작합니다. 농담할 시간 있으면 기억나는 일을 정리하세요.”
라일의 웃음이 조금 잦아들었다. 그는 난간 너머를 바라봤다. 언제나 쉽게 웃고 빠져나가던 사람에게도 자기 이름 앞에서는 무거운 침묵이 남았다.
그날 오후 별도의 면담에서 새로운 사실이 나왔다. 사라진 접수 도장은 누군가 훔쳐 간 것이 아니라 '정비 요청'이라는 명목으로 이관됐다는 서명이 있었다. 신청한 사람의 이름은 비어 있었고, 긴급 수리라는 글자만 큼직했다. 그런데 수리를 맡았다는 공방은 이미 석 달 전에 폐업한 곳이었다. 등록 주소에는 지금 작은 보육원이 들어서 있었다.
일행은 보육원까지 직접 찾아갔다. 왕도 서쪽 골목은 궁전과 달리 길이 좁았고 비가 오면 마차가 빠져나오기 어려웠다. 창문 아래에서 아이들이 나무토막으로 탑을 쌓고 있었다. 회색 앞치마를 두른 원장이 갑자기 찾아온 낯선 사람들을 경계했다. 카렌은 신분증과 조사 목적을 보여 주고, 업무에 필요 없는 아이들 이름이나 개인 기록은 묻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원장은 한참 살펴본 뒤 창고를 열어 줬다. 예전 공방의 물건이 조금 남아 있었다. 굴뚝에는 못질한 나무판이 걸렸고, 벽에 고정된 오래된 철제 선반에는 홈이 파인 원통 몇 개가 놓여 있었다.
진혁이 정식 동의 아래 원통 하나를 만졌다.
[감정 대상: 구식 봉인 도장 고정틀.]
[표면 가치: 동화 한 닢.]
[잔류 이력: 황실 접수 도장과 동일 지름의 교체 작업.]
[최근 사용 흔적: 없음.]
여기서는 최근 범행의 결정적 증거를 얻을 수 없었다. 그러나 도장 고정틀이 표준 규격이었다는 사실은 알게 됐다. 같은 모양의 도장을 만들기 쉬웠다는 뜻이었다. 진혁은 억지로 오래된 물건에서 비밀을 캐려 들지 않았다. 대신 장부를 대조하기 위해 공방이 폐업할 때 남긴 인수 목록을 요청했다.
그 과정에서 예상하지 못한 문제가 생겼다. 보육원에는 통합 정리 예비 고시가 이미 전달돼 있었다. 건물에 남아 있는 오래된 공방 설비가 왕실의 '미청구 유물'로 분류될 수 있다는 통지였다. 원장은 그것 때문에 밤잠을 설쳤다. 보육원 안의 선반과 낡은 수레를 빼앗길 경우 아이들의 침대와 급식 창고까지 옮겨야 할지도 몰랐다.
“낡은 철통 몇 개 가져가면 그만 아니냐는 사람도 있었어요.” 원장이 말했다. “하지만 그걸 꺼내 가려면 벽을 뜯어야 합니다. 아이들 방 바로 옆이에요.”
진혁은 순간 분노가 치밀었다. 통합 정리라는 이름이 붙은 사건은 벌써 사람들의 생활을 흔들고 있었다. 아직 아무 물건도 낙찰되지 않았는데, 소문과 통지만으로 누군가의 잠자리가 불안해진 것이다.
카렌은 원장이 받은 통지를 살폈다. 소유권이 확정되지 않은 설비와 현재 보육원의 임차권은 별개였다. 따라서 설비의 이전은 건물 사용 안전을 해치지 않는 범위에서만 심사돼야 했다. 진혁은 원장에게 안심하라고 장담하지 않았다. 대신 이의 접수에 필요한 서류와, 건물주에게 요청할 안전 점검 항목을 정확히 적어 주었다.
돌아가는 길, 라일이 물었다. “저 아이들은 왜 이렇게 겁을 내야 합니까? 우리가 할 일은 경매장에 있는 놈들을 잡는 거 아니었어요?”
“그게 맞는데.” 진혁이 한동안 골목을 돌아봤다. “그놈들이 경매장 바깥까지 팔려고 하니까 일이 커지는 거죠.”
그날 밤 세리아는 루멘 직원들에게 추가 공지를 보냈다. 이번에는 안전 설비를 점검할 수 있는 독립 감정사 명단과 공개 설명회 날짜가 들어 있었다. 중요한 것은 자신이 잘 알고 있다는 말을 반복하는 대신, 다른 사람도 확인할 길을 마련하는 일이었다. 모라도 메시지를 전해 왔다. 루멘 심실에서는 그동안 '제0호'를 부르던 짧은 진동이 멈췄다고 했다. 대신 왕도 방향에서 들려오는 긴 호출음이 늘어났다. 아직 출처를 확인할 수 없으니 함부로 응답하지 않겠다는 내용도 덧붙였다.
진혁은 그 말을 듣고 어린아이처럼 안도했다. 모라가 자기 뜻으로 대답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은 지난 여러 사건을 거쳐 가장 어렵게 지켜 낸 변화였다.
보육원에서 돌아온 뒤 일행은 허름한 국숫집에 들렀다. 이른 저녁이라 좌석은 절반쯤 비어 있었다. 솥에서는 뼈를 오래 끓인 국물 냄새가 났고, 주인은 겨울철이라 손님이 줄었다고 투덜거렸다. 진혁은 아이들이 먹던 저녁 식사 이야기를 떠올리다 자신도 모르게 국수 한 그릇을 더 주문했다.
“누구 줄 건가요?” 세리아가 물었다.
“라일이요. 오늘 점심도 제대로 못 먹었잖아요.”
라일이 젓가락을 들었다가 멈췄다. “제 얼굴에 그렇게 배고프다고 쓰여 있습니까?”
“네. 가끔은 농담보다 먼저 보여요.”
진혁은 빙긋 웃었지만 곧 다시 생각에 잠겼다. 보육원의 낡은 공방 설비를 철거하라는 서류는 근거가 빈약했다. 만약 보관권을 되찾겠다고 달려드는 사람이 생긴다면 아이들의 침실부터 위험해질지 몰랐다. 카렌은 정식 시설 안전 점검을 요청해 두었다고 말했다. 이 문제는 그들이 직접 법을 대신하는 방식이 아니라, 현재 거주자의 권리를 확인하는 과정으로 해결해야 했다.
세리아는 창밖에 걸린 노란 깃발을 바라보다 작게 말했다. “전에는 경매장이 물건을 안전하게 보관하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했어. 이제 보니 보관한다는 말이 누구에게는 보호이고, 다른 누구에게는 감금이 될 수도 있네.”
“그러니까 사장님이 처음부터 저한테 너무 많은 일을 맡기셨던 거죠.” 진혁이 말했다.
“월급 인상 요구는 지금도 기각이야.”
“이렇게까지 분위기를 읽으실 줄은 몰랐습니다.”
사람들이 웃었다. 그 짧은 웃음이 사라진 뒤에도 각자 할 일은 남아 있었다. 진혁은 자신의 영수증과 왕실 영상판을 함께 보관할 계획을 세웠다. 출처가 분명한 서류와 그럴듯하게 생긴 서류를 섞어 두면, 나중에 어느 것이 진짜인지 자신도 잊을 수 있었다. 그는 봉투를 서로 다른 색으로 나누고 날짜를 큰 글씨로 적었다. 무거운 비밀을 다루는 사람에게도 이런 단순한 습관이 필요했다.
밤늦게 강유리가 다시 영상판을 보내 왔다. 이번에는 보관실에서 먼지를 털어 낸 원본이었다. 윤담은 두 판의 반사 각도를 겹쳐 비교했고, 진혁은 손가락으로 책상 가장자리를 짚었다. 장갑을 낀 사람의 몸이 아니라, 그 옆에 비친 손잡이 모양이 눈에 들어왔다. 평범한 가방 같았지만 금속 장식이 아주 특이했다.
“라일, 이것 좀 봐 줘.”
라일은 화면을 보는 순간 장난기 없는 얼굴이 됐다. 금속 장식은 반송 장부를 운반하던 오래된 배달인 조직의 표식이었다. 하나의 원이 아래쪽에서 열리고 세 갈래 선이 안으로 향하는 모양이었다.
“이건 제 옛 이름을 아는 사람들이 쓰던 표시입니다.” 라일이 말했다.
“그럼 누가 왔는지 알겠어?”
“확실하게는요. 하지만 딱 한 사람이 이 장식을 거꾸로 달았어요.”
진혁이 기다렸다. 라일은 기묘하게도 웃었다. 오래전 창고에서 마지막으로 자신을 쫓던 사람이 떠오른 것이다.
“그 사람은 물건을 훔치러 다니지 않았습니다. 훔친 사람이 누구인지 대신 기록하는 일을 했죠.”
그는 서류 아래에 짧은 이름을 적었다.
'백란.'
왕실의 통합 정리를 준비하는 사람들 사이에, 라일의 과거를 기록했던 배달인이 다시 나타나 있었다.
제184화 댓글 0
댓글·공감·신고는 로그인 후 이용할 수 있습니다. 이전 익명 댓글은 그대로 표시됩니다.
댓글을 불러오는 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