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 열한 시 사십 분, 황실 제1경매원의 긴급 접수창구에는 불이 꺼져 있었다.
사람 키보다 높은 문에는 '정규 접수 종료 오후 여섯 시'라는 표지판이 붙어 있었다. 계단에는 하루 동안 사람들이 흘린 진흙과 끈 조각이 남아 있었다. 왕국의 모든 권리 문제를 담당한다는 기관이 누군가에게 자정까지 대답하라고 통지하면서, 정작 대답할 창구를 닫아 버린 셈이었다.
진혁은 표지판을 읽고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
“이건 너무하잖아요. 대답할 권리는 있다면서 문은 잠그고요.”
라일이 문손잡이를 흔들었다. “제가 잘하는 방법 하나 있는데요.”
“문 따기는 안 됩니다.” 카렌이 곧장 대답했다.
“말도 안 했는데요?”
“표정으로 했습니다.”
일행은 등불이 켜져 있는 측면 경비실로 향했다. 경비원은 업무가 끝났다는 말만 반복했다. 세리아가 왕실의 접수 규정집을 펼치자 태도가 조금 달라졌다. 긴급 출품 이의는 정규 창구가 닫힌 뒤에도 보관 경비실에 서류를 남길 수 있었다. 단, 접수시각을 나타내는 황동 도장이 있어야 정식 기록으로 인정됐다. 경비원이 난처한 표정으로 빈 책상을 가리켰다.
“도장은 본관에 보관합니다. 오늘은 누가 가지고 갔는지 모르겠습니다.”
카렌은 목소리를 낮췄다. “규정을 만든 사람의 뜻은 하나였을 겁니다. 밤에도 접수할 길을 남겨 놓으라는 거죠. 도장을 치운 사람이 그 길을 막고 있어요.”
서진혁은 위조된 추천장을 경비실 탁자에 놓았다. 종이에는 정교한 인장이 찍혀 있었고 서명도 진혁의 필체와 비슷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그런 글씨로 끝부분을 올려 쓰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었다. 다른 사람의 눈에는 작은 차이였지만 장갑을 고쳐 쓰던 손의 버릇은 마음대로 바꾸기 어려웠다.
“서명 비교 원본을 여기 놓겠습니다. 거절 의사도 분명히 밝히고요. 접수 도장이 없다면 경비 일지에 시각을 적어 주십시오.”
경비원은 망설이다 일지의 빈 칸을 폈다. 강유리가 원격으로 보내 준 지침도 도착했다. 접수 도장 분실 자체를 감사 대상으로 보고, 경비실에 접수된 시각을 보조 증거로 남기라는 내용이었다. 진혁은 촛농을 떨어뜨린 서류 옆에 장갑 낀 엄지로 자기 이름을 똑바로 썼다. 밤 열한 시 오십칠 분이었다.
“세 분 남았네요.” 라일이 시계를 보았다.
“세 분이 아니었으면 못 한 일도 아니에요.” 카렌이 말했다. “그저 누군가 세 분처럼 보이게 만든 거죠.”
이튿날 오전, 위조 추천장은 효력을 확정하지 못한 채 심사 보류됐다. 그러나 진혁은 안도할 틈이 없었다. 그동안 우편국과 왕실 보관동 사이에서 쓰이던 접수 도장이 사라진 사건이 두 군데에서 동시에 신고됐다. 둘 다 에르딘의 대리인 사무소 직원이 출입한 뒤였다. 다만 출입했다는 사실만으로 도장 절도를 증명할 수는 없었다.
일행은 약속대로 우편국의 금요일 폐기품 경매에 참석했다. 왕실의 화려한 경매실과 달리 그곳은 역 뒤편 작은 창고였다. 천장의 창을 통해 겨울 햇살이 먼지 낀 광목천 위로 떨어졌고, 번호표 대신 나무판에 새긴 기호를 들고 입찰했다. 통로 끝에서는 증기난방관이 쉭쉭 소리를 냈다. 경매사는 매물에 붙은 사용 불가 표식을 먼저 읽은 뒤 가격을 불렀다.
첫 번째 물건은 부러진 책상 다리였다. 두 번째는 종이 구멍을 뚫는 기계였다. 세 번째로 낡은 우편 도착 확인판 열두 장이 나왔다. 다른 입찰자들은 고철 값 이상으로 살 이유가 없다는 표정이었다. 진혁은 실제 상태를 보기 위해 정식 입회 아래 한 장의 홈을 만졌다.
[감정 대상: 구식 우편 도착 확인판 일괄품.]
[보존 상태: 여덟 장 사용 가능.]
[숨겨진 가치: 안전망 수신 기록 검증에 사용 가능한 기준 시편.]
[주의: 일부 판은 홈이 최근 가공됨.]
‘최근 가공.’ 그 네 글자가 진혁의 관심을 끌었다. 단순히 오래된 부품을 확보하는 것만이 아니었다. 누군가 이 물건들을 일부러 손댔다면 통지의 도착 여부를 속이려 했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런 의혹을 입찰장에서 폭로하면 증거가 섞이거나 훼손될 가능성이 있었다.
“시작가 동화 네 닢.” 경매사가 외쳤다.
진혁이 패를 들었다. “다섯 닢.”
곧장 반대편에서 검은 외투를 입은 남자가 여덟 닢을 불렀다. 표정이 거의 변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라일이 고개를 숙여 속삭였다.
“저 사람, 처음부터 우리 쪽만 보던데요.”
“얼굴을 익혀 두세요. 다만 지금은 물건을 사야죠.”
경쟁은 생각보다 치열했다. 열두 닢, 스무 닢, 은화 한 닢. 고철을 모으러 온 다른 상인들이 웃음을 터뜨렸다. 진혁은 팔목이 저릿할 때까지 패를 들었다가 어느 순간 내렸다.
“더 안 부르세요?” 경매사가 물었다.
“예. 은화 한 닢이면 같은 규격 부품을 새로 만드는 비용을 넘습니다.”
검은 외투의 남자가 만족한 듯 웃었다. 망치가 내려갔다. 그러나 진혁은 한숨을 쉬지 않았다. 우편국 감독관에게 미리 확인해 둔 다른 품목이 있었다. 분리 판매 목록 끝에 작은 금속 케이스 하나가 남아 있었다. '도착 확인판 가공용 기준 틀. 파손.' 아무도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 이름이었다.
그는 케이스를 직접 검사할 수 있는지 물었다. 경매사는 정식 감정대 위에서만 접촉하도록 허락했다. 낡은 금속 틀 한쪽이 부러져 있었지만, 홈 간격을 표시한 은색 눈금은 남아 있었다.
[감정 대상: 우편 도착 확인판 기준 틀.]
[원래 용도: 사용 흔적 대조.]
[숨겨진 기능: 각 판의 가공 시점을 상대 비교할 수 있는 표준 홈.]
[주의: 절대적인 날짜 판정 불가.]
진혁은 입가를 살짝 올렸다. 누군가 도착 확인판을 모두 사들이더라도, 원래 기준 틀이 있으면 그 판들이 정상 규격과 다른지 확인할 수 있었다. 이런 장비의 값은 화려한 빛보다 정확한 눈금에서 나왔다.
“동화 두 닢.” 그가 불렀다.
다른 입찰자는 없었다. 경매사의 망치가 두드려졌다. 진혁은 낙찰표에 자기 이름을 적고 은화 한 닢이 아닌 동화 두 닢을 지급했다. 라일이 어깨를 흔들며 웃었다.
“비싼 건 남한테 넘기고, 남이 버린 파손품을 샀네요. 너무 전형적이라 화가 납니다.”
“아직 성공한 건 아니에요. 이게 실제로 맞는지 시험해 봐야죠.”
“아, 그 말은 정말 질리지도 않는군요.”
창고 앞에는 작은 철공소가 붙어 있었다. 진혁은 윤담에게 검증을 부탁했고, 윤담은 자기가 가져온 계측 장비로 기준 틀의 눈금 오차를 측정했다. 눈금은 거의 정확했다. 반면 현장에서 제공받은 도착 확인판 한 장과 비교하니 홈 사이의 폭이 이상하게 좁았다. 오래 닳아서 좁아진 것이 아니라, 금속을 새로 갈아 표식을 다시 찍은 흔적이었다.
“비슷한 판을 몇 장 더 검사해야 결론을 말할 수 있습니다.” 윤담이 말했다. “다만 누군가 오래된 판처럼 보이게 새 흔적을 남긴 건 맞아요.”
“그럼 누군가 우편물의 배달 기록을 바꾼 거군요.”
“그럴 가능성이 있다는 거죠. 어느 우편물인지 아직 모르고요.”
진혁은 기꺼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전 같으면 단서 하나만 보고 범인을 정했을지도 몰랐다. 지금은 누군가의 삶이 걸린 문제에서 정확히 어디까지 아는지 구분하는 일이 중요했다.
검증이 끝나기를 기다리는 동안 진혁은 철공소 뒤편의 작은 마당에 나가 손을 씻었다. 마당에는 폐목재를 태우는 난로가 있었고 철을 자른 가루가 얕은 물웅덩이 위에 떠 있었다. 오랜 작업으로 손등에 굳은살이 생긴 장인은 진혁의 작은 기준 틀을 보며 시큰둥하게 물었다.
“그걸로 무슨 부자가 되겠다는 거요?”
“돈을 벌 수도 있겠지만, 일단 기록을 확인하고 싶습니다.”
“감정사들은 원래 진품 하나 찾으면 열 배 값으로 팔 생각부터 하지 않나?”
“저도 예전엔 그랬어요.” 진혁은 잠시 웃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물건을 사고파는 데 사람이 붙어 있더라고요. 그걸 모르는 척하면 거래가 쉬워지긴 하는데, 나중에 자꾸 문제가 생겨서요.”
장인은 눈금을 돋보기로 들여다봤다. 틀의 파손된 모서리는 오래전 충격으로 생긴 것이지만 기준선 자체는 멀쩡했다. 그는 고철 상자에서 비슷한 금속판을 하나 꺼내 주었다. 실험용으로 만든 새 판이었다. 윤담은 두 판을 같은 지그에 고정하고 간격을 반복 측정했다. 새 판과 기준 틀 사이의 값은 허용 오차 안이었다. 반면 경매장에 남아 있던 최근 가공판은 바깥 홈 하나가 눈에 띄게 달랐다.
“이제 적어도 측정 도구가 고장 나서 생긴 차이는 아니라는 뜻입니다.” 윤담이 설명했다.
진혁은 수첩에 숫자를 적었다. 그 기록이 누군가의 이의를 받아들일 이유가 될 수는 있지만, 아직 그 누가 조작했는지 알 수는 없었다. 장인은 결과를 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부자는 모르겠고, 장사꾼한테는 유용하겠소. 이 눈금 하나 때문에 거래를 멈춰야 할 때가 있을 테니까.”
진혁은 그 말이 마음에 들었다. 경매가 잘되는 날보다, 잘못되는 경매를 멈출 수 있는 날이 더 중요할 수도 있었다. 그는 철공소의 시험 비용을 계산서에 별도로 적고 영수증을 받았다. 애초에 싸게 산 물건도 검증하려면 비용이 든다는 사실을 남겨 두기 위해서였다.
검은 외투의 남자는 물건을 큰 상자에 담아 떠나려 했다. 카렌은 그가 경매장에서 나온 뒤를 몰래 따라가지 않았다. 대신 출품 목록과 수령인을 조회할 수 있는 정식 절차를 신청했다. 물건을 산 사람이 범인이라는 증거는 없었다. 단지 대량으로 같은 종류의 확인판을 확보한 이유를 확인할 필요가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우편국의 공식 통보가 왔다. 검은 외투 남자의 대리 낙찰 의뢰인은 예상대로 에르딘 사무소였다. 그러나 진혁이 눈여겨본 것은 그보다 뒤쪽에 붙은 한 줄이었다. 낙찰품 사용 예정지 '왕도 제1경매원 공인 통지 확인소'.
“왜 배달 기록을 확인하는 장소가 경매원 안에 있죠?” 벨라가 물었다.
세리아의 얼굴이 굳었다. “우리가 찾고 있던 보이지 않는 부속서류 때문일 거야. 통지 확인소가 정상적인 절차를 건너뛰고 응답 여부를 대신 결정하게 만들려는 거겠지.”
그날 저녁, 진혁은 기준 틀을 작은 천에 싸서 숙소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두 닢짜리 물건이었다. 그러나 값이 싸다고 해서 함부로 다뤄도 되는 것은 아니었다. 그는 눈금을 세 번 재고, 사용한 도구의 번호와 검사자의 이름까지 적어 두었다.
그때 강유리에게서 연락이 도착했다. '오늘 자정 긴급 접수 건의 보존 영상을 확보했습니다. 그러나 기록 속 서명자가 두 명입니다.'
진혁은 편지를 다시 읽었다. 자신의 서명을 위조한 사람이 한 명이 아니라는 뜻일까. 뒤이어 온 작은 봉투 안에는 영상판의 정지 화면이 들어 있었다. 접수 도장을 들고 있는 사람이 있었고, 그 뒤로 또 한 사람이 서 있었다.
두 번째 사람은 진혁 자신의 낡은 장갑과 꼭 같은 장갑을 끼고 있었다.
제183화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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