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도 에르반의 아침은 종소리보다 먼저 종이 냄새로 시작됐다.
황실 제1경매원 앞 광장에는 밤새 붙은 고시문을 읽으려는 사람들이 길게 늘어서 있었다. 왕궁에서 고용한 서기들이 물에 번지지 않는 푸른 잉크로 동일한 문장을 수십 장씩 베껴 붙였지만, 모퉁이마다 글씨를 덧붙이는 손이 있었다. 어느 쪽은 '왕국의 모든 재산을 판다'고 썼고, 다른 쪽은 '빚진 상인들의 재산만 정리한다'고 주장했다. 실상 누구도 확실하게 알지 못했다. 여관 주인은 손님들에게 아침 식사를 내놓으면서 조상의 집문서도 빼앗기느냐고 물었다. 맨 앞에서 목발을 짚고 있던 노인은 자기가 만든 목조 의자가 왜 왕궁의 소유냐고 중얼거렸다.
서진혁은 고시문 아래에서 장갑 낀 손가락으로 구두의 먼지를 털었다. 밤새 잠을 설친 탓에 눈 밑이 어두웠다. 바로 옆에서 카렌이 사람들의 동선을 살피고 있었다. 누군가는 공고를 찢으려 했고, 누군가는 그 조각을 값비싼 기념품처럼 챙기고 있었다. 서로 다른 불안이 같은 장소를 점령한 셈이었다.
“사람을 이렇게 모아 놓을 줄 알았으면 안내판부터 세웠어야죠.” 카렌이 말했다.
“경매장이 원래 군중을 모으는 데에는 재능이 있죠.”
“지금은 농담할 때가 아닙니다.”
“농담 안 하면 겁이 날 것 같아서요.”
그 말에 카렌은 더 이상 다그치지 않았다. 진혁도 자기가 무슨 표정을 짓고 있는지 알고 있었다. 이제까지는 반지 한 개나 장부 한 장을 지키는 일이었다. 하지만 고시문에 적힌 '통합 정리'라는 말은 항만 방벽, 철도 신호, 광산의 공동 환기구처럼 누구 한 사람이 주인이라 말할 수 없는 설비를 한 꾸러미로 취급할 수 있었다.
세리아가 가져온 공식 문서에는 그런 것들이 조그만 글씨로 적혀 있었다. 그녀는 사람들이 몰린 광장보다는 맞은편 찻집의 뒷방을 선택했다. 창가에 놓인 뜨거운 주전자에서 김이 올랐고 오래된 나무 의자에서는 발목을 움직일 때마다 마른 소리가 났다. 벨라는 서류를 날짜순으로 펼쳐 놓았다. 라일은 접시 위 마지막 빵을 반으로 갈라 한쪽을 진혁에게 밀었다.
“일단 이건 분명히 합시다.” 벨라가 회계용 연필을 들었다. “왕국 전체를 한 번에 낙찰시키는 경매는 아닙니다. 등록 유물의 미확정 관리권을 분류한 뒤, 미청구 물품의 보관 계약을 다시 심사하는 절차예요.”
“그럼 왜 그렇게 무섭게 보이게 써 놨습니까?” 라일이 물었다.
“공고를 쓴 사람이 '분류'의 뜻을 잘 알았거나, 일부러 모르는 척했겠죠.” 세리아가 대답했다.
카렌은 두 번째 장의 맨 아래를 짚었다. '응답이 없는 공동 소유 대상은 왕실 지정 통합 관리인에게 임시 인도할 수 있다.' 그 아래에는 응답 기한이 스무 날로 정해져 있었다. 산속 광산 마을의 기록 한 장이 왕도까지 도착하는 데만 일주일 넘게 걸렸다. 회색 항로의 작은 섬들은 날씨가 나쁘면 배도 닿지 않았다. 스무 날이라는 시간은 왕도에서는 충분할지 몰라도 국경 바깥쪽에서는 편지를 받는 데 다 쓸 수도 있었다.
“이건 경매가 아니라 시간 싸움이군요.” 진혁이 말했다.
“그래서 무서운 거야.” 세리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기한이 지나면 침묵을 동의로 잘못 처리할 여지가 있어.”
진혁은 종이에 손을 댔다. 눈앞에 글자가 겹쳤다.
[감정 대상: 황실 통합 정리 예비 고시 제2호.]
[재질: 공인 인쇄지.]
[숨겨진 기능: 정본의 부속서류를 참조하도록 고안된 확인 표식.]
[주의: 문서가 합법적인지는 감정 결과만으로 판정할 수 없음.]
예전에는 눈앞의 문장이 모든 답처럼 느껴졌다. 이제는 그 끝의 주의 문구가 더 중요했다. 그는 문서의 왼쪽 가장자리를 비스듬히 비췄다. 푸른 잉크 아래에 아주 연한 나무결 같은 무늬가 있었다. 손톱만 한 네모가 일정한 간격으로 반복됐다. 구식 감정대에서 '부속 목록 존재'를 표시하는 종이 무늬였다. 그런데 정본에는 부속 목록이 붙어 있지 않았다.
“안 보이는 장이 하나 더 있습니다.”
서도원이 찻집 문을 열고 들어왔다. 윤서하에게 받은 편지를 품에 넣은 채였다. 그는 진혁의 말을 듣고서도 바로 놀라지 않았다. 먼 길을 찾아온 사람이 보일 법한 담담한 얼굴이었다.
“그것 때문에 왔습니다. 열두 해 전에도 같은 방식으로 고시문을 만들었지요. 사람들이 보이는 한 장만 믿었고, 실제로 작동하는 내용은 다른 장에 있었습니다.”
“윤서하 씨에게 들었습니까?” 세리아가 조용히 물었다.
도원은 고개를 저었다. “아직 직접 만나지 않았습니다. 제게 온 편지는 답을 주기보다 제가 어떤 질문을 해야 하는지 알려 줬어요.”
그는 접힌 종이의 일부를 펼쳤다. 개인적인 문장은 가리고 한 줄만 보여 주었다. '누가 첫 번째 가격을 매겼는지보다, 누구에게 이의를 말할 시간이 주어졌는지 찾아보세요.' 진혁은 몇 초 동안 그 문장을 읽었다. 다른 사람의 말까지 자신이 대신 설명할 필요는 없었다.
찻집을 나서기 전, 진혁은 광장 옆 낡은 다리를 살펴보러 갔다. 왕도 사람들은 그 다리를 '두 번째 계단'이라고 불렀다. 물가에서 올라오는 짐수레가 반드시 거쳐야 했기 때문이다. 널빤지 사이로 물이 보였고, 난간의 손잡이에는 수십 년 동안 손이 닿아 광이 난 자리가 있었다. 다리 한쪽에 작은 동판이 박혀 있었다. 공사 비용을 모은 열여덟 가구의 성씨가 새겨져 있었다.
그 옆에서 짐수레를 끌던 여자가 물었다. “저 다리도 왕실 경매에 올라간다던데, 사실입니까?”
진혁은 대답을 서두르지 않았다. 등록 유물 목록에는 낡은 안전 손잡이 하나가 포함돼 있었다. 손잡이는 다리 전체가 아니었다. 하지만 손잡이를 뜯어 가면 어린아이들이 난간을 잡고 계단을 오르는 일이 위험해질 수 있었다.
“다리 자체가 경매 대상이라고 확인되진 않았어요. 다만 부품의 관리권이 목록에 들어갔을 가능성은 있습니다.”
여자는 한숨을 쉬었다. “우린 그런 어려운 말 몰라요. 어머니가 저 다리 놓을 때 돈을 보탰다는 것만 알아요.”
그 말은 진혁에게 중요한 질문을 남겼다. 장부에는 '공공 시설 부속 장치'라는 짧은 문구로 적혀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 문구 뒤에는 어느 집에서 얼마씩 모았는지, 누가 한겨울에 돌을 나르고 부러진 나무를 고쳤는지가 있었다. 진혁은 동판에 새겨진 성씨를 하나하나 적었다. 적어도 서류를 대조할 때 비용을 낸 사람들을 완전히 지우지는 않겠다는 마음이었다.
카렌은 다리 끝에서 아이가 넘어지는 것을 붙잡아 주었다. 아이가 다시 일어나 자기 길을 가자 그녀는 진혁에게 말했다. “이런 것을 봐야 저 공고가 왜 위험한지 알 수 있어요. 다리의 가격이 문제가 아니라, 손잡이를 누가 언제 떼어 갈 수 있느냐가 문제겠죠.”
진혁은 그 문장을 수첩에 적었다. 그가 처음 경매장 일을 배울 때는 좋은 물건을 싸게 사는 것이 가장 중요한 기술이라고 생각했다. 이제는 어떤 물건을 팔아도 되는지 따지는 일이 더 어려웠다. 그 차이는 거대한 고대 유물 앞에서가 아니라, 낡은 다리의 미끄러운 손잡이 앞에서 더 뚜렷해졌다.
오전 열한 시, 일행은 황실 제1경매원의 공개 접수실을 찾았다. 벽에는 왕실의 사자 문양이 걸려 있었고 안내 직원들은 쌓여 있는 문의서를 둘씩 나눠 처리하고 있었다. 서류를 제출하러 온 구두 수선공과 제복을 입은 귀족 관리인이 똑같이 작은 번호표를 들고 기다리는 모습이 기묘했다. 그러나 같은 번호표가 같은 대우를 보장하지는 않았다. 귀족의 시종은 금방 창구로 불려 갔고 구두 수선공은 점심시간까지 기다려야 한다는 말을 들었다.
카렌이 그 상황을 보더니 정식 이의 신청 창구 위치를 물었다. 창구 뒤에서 서류를 정리하던 젊은 직원이 곤혹스러운 얼굴을 했다.
“담당 심사관이 아직 배정되지 않았습니다. 통합 정리 전담반에서 지침을 기다리는 중입니다.”
“그럼 이의 신청서를 접수만이라도 해 주십시오.”
“나중에 다시 오시는 편이—”
“접수 시각을 남기지 않으면 기한을 지켰는지 확인할 방법이 없잖아요.” 카렌이 담담하게 말했다.
뒤에 서 있던 구두 수선공이 목청을 높였다. “맞습니다. 제가 여기에 서 있었다는 것부터 남겨 주세요.”
하나둘 사람들이 번호표를 흔들었다. 직원은 결국 접수일자와 순번이 찍힌 임시 수령증을 발급하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본 진혁은 이상하게 안도했다. 세상을 바꾸는 거창한 마법이 아니었다. 사람들이 자기 이름과 시간을 잃지 않는 사소한 절차였다.
그때 권해성이 접수실 안쪽에서 나왔다. 그는 평소 무대에 설 때와 달리 옷깃을 풀고 있었다. 밤새 회의를 했다는 기색이 역력했다.
“서 감정사님, 이쪽으로 오시죠. 오늘 오후에 특별 감정 시연이 잡혔습니다. 통합 정리의 첫 시범 대상은 루멘 경매장과 연결된 공공 설비입니다.”
세리아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루멘은 황실 관리 대상이 아닙니다. 공동 안전망의 일부일 뿐이에요.”
“그걸 분리해 보여 달라는 요구입니다. 이미 예비 목록에는 등록됐습니다.”
“누가 신청했죠?” 카렌이 물었다.
권해성이 잠깐 입술을 깨물었다. “명의는 '에르딘 대리 출품 사무소'로 되어 있습니다. 최종 출품자는 공란입니다.”
진혁은 손바닥을 폈다. 아무리 익숙해져도 그 이름을 들을 때마다 속이 쓰렸다. 권해성이 건네준 예비 목록에는 황금빛 줄이 그어져 있었다. 첫째 줄, '마레온 루멘 경매장 심실 관리 응답권'. 둘째 줄, '백색 등대 제4안전로 공동 회신권'. 셋째 줄에는 글자가 비어 있었는데, 무늬만은 남아 있었다.
그는 그 빈 줄에 손을 얹었다.
[숨겨진 연계 대상: 제998호 원부의 미답변 등록자.]
[계약 이동 조건: 통합 정리 개시 시점의 무응답.]
“이건 팔 물건이 아닙니다.” 진혁이 말했다. “사람들이 대답할 기회를 빼앗은 다음, 대답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가격을 붙이려는 거예요.”
권해성은 아무 말도 못 했다. 밖에서는 여전히 고시문의 문장을 읽는 사람들이 줄을 바꿔 서고 있었다. 그들 가운데 상당수는 자신들이 곧 어떤 물건의 '침묵한 주인'으로 기록될지조차 알지 못했다.
진혁은 목록을 돌려 세리아에게 보여 줬다. “스무 날이면 어렵겠지만, 모두에게 알려야 합니다. 그리고 저 빈 셋째 줄이 어느 사람들을 가리키는지 찾아야 해요.”
세리아는 계산서를 접을 때처럼 조심스럽게 문서를 접었다. “그래. 다만 우리가 그 사람들 대신 대답하지는 말자.”
진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광장 바깥으로 나가는 우편차가 출발을 알리는 종을 울렸다. 그는 순간 그 종소리를 경매 시작을 알리는 망치 소리처럼 들었다. 하지만 이번 경매에서 가장 먼저 확보해야 할 것은 금화가 아니었다. 각자의 목소리가 왕도에 닿을 시간이었다.
제181화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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