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0호 감정대에 가격을 매기려면 먼저 감정대가 무엇인지 알아야 했다.
서진혁은 그 간단한 문제에 사흘 가까이 매달렸다. 루멘의 기록실에는 경매장 설립 때부터 남은 문서가 많았다. 그러나 ‘제0호’라는 표기는 감정사 명부보다 시설 인수 서류와 비상 계약 장부에 더 자주 등장했다. 어떤 기록에서는 장치의 이름이었고, 다른 곳에서는 서명해야 하는 사람의 직함처럼 쓰였다.
“사람이면 급여 내역이 있어야죠.” 벨라가 말했다.
“급여를 받지 않는 직책도 있을 겁니다.” 세리아가 답했다.
“그러면 출근 기록이라도 있어야 합니다.”
라일은 책상 위에 놓인 출입 장부를 넘겼다. “유령이라면 출근 도장은 잘 찍겠는데요. 안 늦으니까.”
카렌은 눈을 들지 않고 말했다. “유령에게 지각 벌금도 물리려면 먼저 법을 개정해야겠죠.”
진혁은 웃다가 다시 종이를 읽었다. 작은 농담이 길고 복잡한 문서를 보는 데 필요한 숨을 만들어 줬다.
오렐과 노해린이 별실에서 비교 시험을 준비했다. 아침 경매에서 확보한 균열 유리갓은 등대의 반사 프리즘과 비슷한 분광 특성을 보였지만, 원본만큼 먼 거리의 신호를 보낼 수는 없었다. 그 대신 실험실 안에서는 미세한 반사 방향을 분리하기에 충분했다. 기술관들은 사전에 정해 둔 세 종류의 목소리를 유리갓에 들려준 뒤 각각의 파형을 따로 기록했다.
첫 번째는 “예”, 두 번째는 “아니오”, 세 번째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침묵이었다. 실험 대상은 모두 사전에 절차를 이해하고 동의한 직원들이었다. 각 직원은 실험 전후에 자기 목소리가 어떻게 저장되는지 확인했다.
“놀라운 건 여기부터예요.” 해린이 말했다. “제0호 장치는 말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합니다. 단지 특정 표식을 읽어 ‘응답이 들어왔다’고 판단해요. 그래서 원래는 거절의 파형을 다른 통로에 별도로 남겼던 거죠.”
오렐이 작은 어댑터를 탁자에 올려놓았다. 백색 등대에서 발견된 비인가 장치였다. 그 속의 얇은 황동판을 바꾸자 ‘아니오’ 신호가 ‘확인 완료’ 표시로 바뀌었다. 말은 변하지 않았다. 오직 표시만 바뀌었다.
“이거라면 누가 거절해도 장부에는 동의했다고 남길 수 있겠네요.” 카렌이 말했다.
“그렇죠. 하지만 이건 설명 실험입니다. 과거에 실제로 그렇게 했다는 증거는 다른 기록에서 찾아야 해요.” 해린이 덧붙였다.
세리아는 책상 끝을 붙들었다. 유나가 심실 안에서 거절의 신호를 지키려 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뒤, 그녀는 밤마다 같은 꿈을 꿨다. 문이 닫히고 목소리는 끊기는데 그 이유를 알 수 없는 꿈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꿈보다 손에 잡히는 장치가 앞에 있었다. 그녀는 자신의 감정을 급히 감추지 않았다.
“유나가 지키려 한 게 사람을 안에 가두지 말라는 말이었군.”
해린은 조심스럽게 답했다. “그럴 가능성이 큽니다. 다만 그때 유나가 누구를 위해 남았는지는 아직 몰라요.”
정오 무렵 왕도의 하서린에게서 전보가 왔다. 그녀가 찾은 것은 제0호 감정인의 인사 기록이 아니라 보관 계약이었다. 계약서 첫 페이지에는 ‘일차 감정인부터 제구십구 감정인까지 판정 책임을 짊어질 수 있으나, 제0호는 어느 누구의 대리도 될 수 없음’이라고 적혀 있었다.
“제0호가 사람의 이름이 아니라는 뜻일까요?” 진혁이 물었다.
하서린은 답신에서 단정하지 않았다. ‘독립 판정 기록을 보관하는 자리일 수 있음. 직책이 아니라 절차의 공백을 나타낸 것으로 보임.’
진혁은 그 문장을 읽으며 처음 루멘에 들어왔을 때 자신이 본 문구를 떠올렸다. [소유자 권한 양도 준비. 대상자: 서진혁.] 그때 그는 경매장 자체가 자신에게 넘어올 수 있다는 생각에 겁을 먹었다. 지금은 달랐다. 누군가 사람을 보호하기 위해 남겨 둔 빈자리에 자신의 이름을 집어넣으려는 것일지도 몰랐다.
오후 실험 사이에 진혁은 유리갓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오래 바라봤다. 빛이 깨진 부분에서는 그의 얼굴이 둘로 나뉘었고, 중심부에서는 하나로 보였다. 해린이 손가락으로 유리의 선 하나를 짚었다. 마레온에서 사용한 비상 신호는 네 방향으로 분리되도록 설계됐는데, 그중 마지막 방향만 처음부터 사람이 손대기 어렵게 감춰 놓았다고 했다.
“왜 하필 네 번째일까요?” 진혁이 물었다.
“다른 세 길이 다 막혔을 때 쓰라는 뜻이었겠죠. 그런데 그 비상 수단을 평상시에 수익을 내는 도구로 바꾸면, 막상 정말 위험한 순간엔 아무것도 남지 않아요.”
진혁은 제4안전로의 존재가 그렇게 자주 등장한 이유를 떠올렸다. 그것은 특별한 보물 창고도, 강한 무기를 넣어 둔 곳도 아니었다. 누구도 함부로 통제할 수 없도록 남겨 둔 피난로였다. 마법과 기계가 복잡하게 얽힌 세계에서도 그런 기본적인 목적은 바뀌지 않았다.
도르가 옆에서 작은 종시계를 분해했다. 왕도에서 진혁이 낙찰받은 그 물건은 열세 분마다 멈췄다. 진혁은 오래 그 고장이 저주나 봉인의 징조일 거라 생각했지만, 도르는 태엽 뒤에 끼워진 얇은 압력판을 발견했다. 일정 시간 신호를 받고 멈추는 것이 원래 기능이었다. 시간을 알려 주는 시계라기보다 다른 장치가 신호를 보냈는지 확인하는 검수 도구였다.
“그런데 이런 걸 누가 종시계라고 팔았죠?” 라일이 물었다.
“겉모양이 종시계였으니까요.” 도르가 답했다.
“그렇다면 제 이름이 라일인 것도 겉모양 때문일까요?”
잠깐 웃음이 흘렀다. 그러나 라일이 자기 이름을 아직 확신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일행은 그 농담을 가볍게만 듣지 않았다. 진혁은 어쩌면 같은 세상에 서로 다른 방식으로 이름을 빼앗긴 사람들이 너무 많다고 생각했다. 누군가는 장부에서 지워지고, 누군가는 거래품이 되며, 누군가는 자신을 누구라고 불렀는지조차 기억하지 못했다.
“언젠가 네 이름도 찾아줄게.” 진혁이 말했다.
라일은 그를 한동안 보더니 대꾸했다. “찾으면 제 돈도 같이 찾아 주세요. 이름만 찾고 빚이 따라오면 곤란하니까.”
“빚은 네가 갚아.”
“아, 이런. 역시 감정사는 인색해.”
소박한 웃음이 실험실에 퍼졌다. 세리아는 그 광경을 멀리서 지켜보다 유나와 함께 일하던 시간을 떠올렸다. 유나 역시 서류를 들고 찾아와 무언가 심각한 말을 하다가도, 마지막에는 사장에게 값싼 빵을 사 달라고 했었다. 그때는 그런 시간이 영원히 반복될 줄 알았다.
세리아는 낡은 책상 위에 남겨진 이름들을 한 번 더 적었다. 유나, 레온, 제0호, 그리고 이제 서진혁. 그 이름들이 문서 안에서 무엇을 뜻하든, 자기 앞의 사람들은 종이보다 먼저 살아 있어야 했다.
진혁은 그 빈칸에 자기 이름을 써 넣어도 되는지 잠시 상상했다. 그러면 과거를 빨리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그 이름이 원래 기록에 들어가면 누군가에게도 자신을 책임자로 만들 구실이 생길 것이다. 이해할 수 없는 계약 앞에서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서명하지 않는 것이었다.
그가 펜을 내려놓자 해린이 미소를 지었다. “좋은 감정사는 무엇이 적혀 있는지뿐 아니라 어디가 비어 있는지도 읽지요.”
진혁은 대답 대신 서류를 덮었다. 자신이 당장 알 수 없는 사실을 남겨 두는 용기가 어느새 조금 생긴 모양이었다.
그날 오후, 서도원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노인이 찾아왔다. 이전에 왕도 북관에서 만났던 사람이다. 진혁은 그를 마주할 때마다 묘한 마음이 들었다. 어릴 때의 냄새와 말투가 기억을 흔들었지만, 그가 실제로 어떤 관계인지 확인하지 못했다. 노인은 그 점을 알기라도 하듯 서두르지 않았다.
“정리한 기록이 많구나.” 그가 탁자 위 종이를 보며 말했다.
“노인장도 본 적이 있습니까?”
“한 번은 보았지. 열두 해 전, 제0호 장치를 시험할 때 그 옆에서 등불을 고쳤어.”
“그런데 왜 저를 가족이라고 부르는 서류가 있었나요?”
노인은 눈을 내리깔았다. “나는 그날 어린아이 하나를 안전로로 데리고 나왔네. 그 아이를 돌보는 사람에게 서명을 받아야 했지. 그런데 화재가 나서 원본이 사라졌어. 그 뒤 기록에는 아이가 내 가족인 것처럼 남았고.”
“그 아이가 저였습니까?”
“확신할 수 있는 자료는 아직 없어.”
진혁은 답답함보다 이상한 안도감을 느꼈다. 그는 이제 누구의 말이든 자기 과거의 진실이라고 빨리 믿고 싶지 않았다. 자신이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을 구분할 시간이 필요했다.
서도원은 작업용 주머니에서 작은 금속판을 꺼냈다. 양쪽 끝이 둥글게 닳은 판이었다. 진혁의 눈앞에 문장이 떴다.
[감정 대상: 비상 구조 인원 표식.]
[본래 기능: 보호 대상과 안내자를 구분하는 임시 명찰.]
[마지막 기록: 보호 대상 1명, 안내자 1명.]
[이름 기록: 고의로 공란 유지.]
“이름을 안 적었군요.” 진혁이 말했다.
서도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누가 아이의 이름을 빼앗으려 했거든. 빈칸으로 두면 그 사람은 아이가 누구인지 확정할 수 없었어.”
“그럼 누가 보호 대상이었는지도 아직 모릅니다.”
“맞아. 하지만 기록이 왜 비어 있는지 설명할 수는 있겠지.”
그 대화가 끝나기도 전에 경매장 정문에서 소란이 일었다. 왕립정리위원회 집행관 세 명이 임시 보관 명령서를 내밀고 있었다. 백색 등대에서 확보한 어댑터와 루멘의 제0호 관련 장부를 모두 왕도로 이송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카렌이 문서를 받아 확인했다. 서명은 있었지만 압수 대상의 범위가 지나치게 넓었다. ‘관련 물품 일체’라는 표현 하나로 수백 개의 증거를 가져갈 수 있게 되어 있었다.
“구체적인 목록을 다시 작성해 주십시오.” 카렌이 말했다.
“상부 명령입니다. 불응 시 방해 혐의를 검토하겠습니다.”
세리아가 앞으로 나섰다. “저희는 적법한 보전에는 협조합니다. 하지만 공개 감정 절차를 거치지 않고 모든 기록을 가져가겠다는 요구에는 동의할 수 없어요.”
집행관이 무거운 상자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상자에는 ‘제0호 임시 감정대’라는 명패가 붙어 있었다.
“그럼 이 물건부터 감정해 보시죠.” 그가 말했다. “내일 심사에서는 이것이 누구의 것인지 확인할 겁니다.”
진혁은 상자를 보자마자 낯선 문장을 보았다.
[감정 대상: 제0호 임시 감정대.]
[분류: 장치의 외형을 빌린 계약 접수기.]
[숨겨진 기능: 대리 서명자의 신원을 영구 고정.]
[현재 후보: 서진혁.]
그는 손바닥을 주먹으로 쥐었다. 상대가 드디어 ‘물건’을 내밀었다. 하지만 그 물건은 가격을 매길 대상으로 온 것이 아니라, 가격을 매기는 사람을 붙잡으러 온 것 같았다.
제168화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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