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대 내부의 시계는 모두 서로 다른 시간을 가리켰다.
일층 작업대에 달린 초침 없는 시계는 아침 여덟 시, 계단 중간의 안전 기록계는 오후 세 시 십이 분, 꼭대기 등화실의 분침은 어느 방향으로도 움직이지 않았다. 창으로 들어오는 실제 햇빛만이 현재가 늦은 오후라는 사실을 알려 주었다.
“멈춘 시계가 여러 개라면 결국 시계가 없다는 말과 비슷하네요.” 라일이 말했다.
오렐이 그를 돌아보았다. “시계는 멈추더라도 멈춘 순간을 기록할 수 있어요. 그걸 버리면 사고 원인을 찾기 힘들죠.”
진혁은 조금 전 위에서 떨어진 쇠구슬을 목제 접시에 올려놓았다. 구슬의 숫자는 현재 날짜와 일치했지만, 각인에 남은 금속 가루는 오래된 황동 산화물이었다. 날짜만 새로 새겼거나, 날짜가 바뀌는 얇은 띠가 구슬을 감싸고 있는 셈이었다.
카렌이 등화실에 먼저 올라간 뒤 아래를 향해 외쳤다. “사람은 없습니다. 하지만 누군가 밥을 먹은 흔적은 있어요.”
세리아와 진혁이 계단을 올랐다. 위층에는 유리관이 층층이 꽂힌 선반과 낡은 방풍막이 있었다. 빈 통조림 두 개와 물이 반쯤 든 컵 하나가 계기판 뒤에 놓여 있었다. 컵 가장자리는 마르지 않았고 바닥에도 최근 밟은 흔적이 남아 있었다. 백칠성의 눈썹이 떨렸다.
“관리인 말고 누군가 여기서 지낸다니….”
“최근에 들어왔다고 단정하지 마세요.” 카렌이 말했다. “바깥에서 열리는 문 외에도 내부 배수로가 있잖아요.”
소담은 계단 아래쪽의 공기 흐름을 확인했다. 썰물 때 내부 배수로로 바람이 들어오면, 물이 차올랐을 때는 역류할 수도 있었다. 어느 쪽이든 사람을 통과시킬 만큼 크다면 안전 점검이 먼저였다. 일행은 장비를 철제 난간에 매고 전원은 낮은 층에서 끊어 두었다.
진혁은 꼭대기 중앙의 흰 렌즈를 바라봤다. 놀랍게도 커다란 유리 안에는 해초 같은 실금이 여러 겹이었다. 렌즈를 돌리는 원형 받침대의 구멍 네 곳 중 한 곳이 검은 고무로 막혀 있었다. 그것이 이전 경매에 나왔던 회전 고리의 빈자리와 같은 방향을 향했다.
“저쪽은 어디를 비춥니까?” 진혁이 물었다.
백칠성이 창밖을 가리켰다. “첫 번째는 먼 바다, 두 번째는 외항의 항로, 세 번째는 긴급 피난 표지. 네 번째는….”
그는 말을 멈췄다.
“루멘이겠죠.” 세리아가 대신 말했다.
백칠성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예전엔 루멘 지하에 연결된 제4안전로의 출구 쪽을 비췄어. 경매장 자체가 아니라 그 안에 갇힌 사람들이 나올 수 있는 방향이지.”
등대의 의미가 처음부터 달라졌다. 흰 빛이 루멘의 심장을 깨우는 명령이라면 모두에게 위험했다. 그러나 그 빛이 안전로를 찾는 신호였다면 그걸 끄는 것 역시 위험할 수 있었다. 진혁은 자신의 수첩에 두 가능성을 나란히 적었다.
진혁은 바닥의 먼지에 남은 발자국을 확인했다. 등화실 중앙을 돌며 생긴 것은 사람의 구두 자국과 작은 금속 바퀴 자국이었다. 구두의 앞코는 최근 닳은 듯했으나 다른 곳은 소금이 덮고 있어 오래된 흔적과 구분하기 어려웠다. 그는 손바닥 능력으로 단숨에 범인을 찾으려는 충동을 참았다.
“사람이 있었다는 것과 그 사람이 기계를 움직였다는 건 다른 얘기네요.” 그가 말했다.
카렌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최근에 있었다고 해도 살아 있는 사람인지, 지금 위험한 상태인지 확인해야죠.”
그들은 창가의 작은 작업 장부를 살폈다. 장부 맨 위에는 매달 등불을 닦을 때 필요한 기름과 천의 양이 적혀 있었다. 바로 아래에는 화재 당시의 점검 기록이 중간에서 끊겨 있었다. 마지막 정상 기록의 서명은 백칠성. 그 다음 줄에는 다른 사람의 필체로 ‘제4안전로 접근 금지’라는 글이 있었다.
백칠성의 얼굴이 굳어졌다. “저 글을 본 적 없네.”
오렐은 잉크의 종류를 따졌다. 정상 기록의 검은 잉크는 지워져 회색이 됐고, 그 아래의 진한 글씨는 이상하게 새로웠다. 그렇다고 위조라고 단정하진 않았다. 보존약을 바르면 오래된 글씨도 선명해질 수 있었다. 확인을 위해 그는 종이의 가장자리에만 보존약 반응 시험을 했다.
다른 층의 바닥에는 좁은 천 가방 하나가 놓여 있었다. 안에는 마른 빵, 방수 성냥, 해안청의 오래된 임시 출입표가 들어 있었다. 날짜가 최근 며칠 안에 맞춰져 있었고 이름 칸은 물에 번져 읽기 어려웠다. 누군가 여기를 은신처로 사용하고 있음은 분명해 보였다. 문제는 그 사람에게 도움을 줄 것인지, 경고를 해야 할지, 그가 위험한 장치를 조작했는지는 전혀 다른 질문이었다.
라일은 낡은 식량 꾸러미를 들고 말했다. “이 정도면 한 사람이 먹은 것 같아요. 여러 명이 있었다면 더 빨리 비었을 텐데.”
카렌이 꾸러미를 제자리에 내려놓게 했다. “추정은 좋아요. 하지만 본 적 없는 사람의 음식을 함부로 가져가진 맙시다.”
진혁은 벽에 남은 좁은 홈을 손가락으로 따라갔다. 홈이 끊기는 곳마다 안쪽의 공명이 달랐다. 사람이 숨을 쉬면 소리가 조금 먹혀 들었고, 빈 공간에서는 차갑게 울렸다. 등화실의 가장 낮은 곳에서 뜻밖의 기침 소리 같은 반향이 한 번 돌아왔다. 그는 고개를 들었지만 다른 사람들은 바깥 파도 때문에 듣지 못한 듯했다.
“여기 아래에 아직 공간이 있습니다.”
오렐은 도면을 다시 폈다. 공식 도면에는 수리용 통로 한 칸만 표시돼 있었다. 그러나 백칠성이 들고 온 구형 도면에는 그 옆에 ‘비상 하강’이라는 작은 표식이 있었다. 그 순간 진혁은 왜 예전 기록에 네 번째 길이라는 말을 반복해서 남겼는지 조금 이해할 것 같았다. 등대는 빛을 보내는 탑인 동시에 밖으로 나가는 길의 일부였던 것이다.
소담이 창밖에 줄을 묶던 순간, 벽 안쪽에서 금속이 긁히는 소리가 났다. 긴 원통 축이 아주 느리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등화실의 나침반 바늘이 흔들리고, 유리관 안에 남아 있던 은빛 액체가 한쪽으로 쏠렸다.
“누가 전원을 넣었습니까?” 오렐이 외쳤다.
“아무도요!” 카렌이 답했다.
기계는 두 번 짧게 떨리고 멈췄다. 대신 계단 아래쪽에서 작은 폭음이 났다. 누군가 아래의 수동 압력 밸브를 연 듯했다. 오렐이 계측기를 들여다보았다.
“외부 전원이 아니라 수압입니다. 물이 차오르면 저 축을 돌릴 수 있게 설계했어요.”
“만조까지 얼마나 남았죠?” 진혁이 물었다.
소담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여기서 예측하는 조수보다 빨라요. 외항에서 큰 배가 방금 지나가면 수로 압력도 달라집니다.”
진혁은 등화실 유리창에 손바닥을 대고 외항을 바라봤다. 바깥에서는 수리선이 물결을 타며 좌우로 흔들렸고, 선미에 달린 작은 붉은 깃발이 거의 수평으로 펼쳐졌다. 소담은 아래에서 손을 흔들어 바람이 강해지고 있다는 신호를 보냈다. 아무리 중요한 증거가 이 안에 있어도 지금 여기서 시간을 더 끌면 구조선까지 위험해진다.
세리아는 기술관들의 기록지를 모두 확인했다. 실험하지 않은 기계는 전원과 압력 연결을 분리해 두었고, 사진을 찍은 뒤 봉인을 다시 붙였다. 작업 장부는 원위치에 두고 사본만 가져가기로 했다. 라일은 자기 장갑에 붙은 작은 금속 가루를 털며 투덜거렸다.
“들어오기만 하면 보물이 쏟아지는 장소는 이제 없습니까?”
“있죠.” 진혁이 답했다. “어제 일반 경매에서 산 동화 아홉 닢짜리 손잡이 같은 거요.”
“그걸 보물이라고 부르면 전 직업을 바꿔야 할지도 모르겠군요.”
카렌이 두 사람을 돌아봤다. “직업을 바꾸는 건 나중에요. 지금은 일층부터 다시 확인하고 철수합니다.”
그녀는 비상 출입문 옆에 있던 오래된 종을 한 번 눌러 봤다. 소리는 나지 않았다. 소리가 안 난다는 사실만으로 고장이라고 단정할 수 없었다. 그러나 실제 위급 상황에서 사람을 부를 수 없다면 분명한 위험이었다. 카렌은 그 사실을 기록한 뒤 줄 끝을 경고 표시로 묶었다. 그 순간에는 아직 누군가 밖에서 문을 잠가 두었으리라 생각하지 못했다.
그들은 조사 범위를 줄이고 철수를 준비했다. 하지만 일층으로 내려가자 외부 문이 닫혀 있었다. 잠금 장치가 저절로 내려온 것이 아니었다. 문 아래에는 방금 밀려든 진흙 자국과 부러진 봉인선이 있었다. 누군가 밖에서 걸쇠를 걸고 간 흔적이었다.
라일이 천천히 손을 들었다. “이럴 때 도둑이 필요하다는 말, 해도 됩니까?”
“당신이 문을 열 수 있어도 기록은 남겨야 해요.” 카렌이 말했다.
“알죠. 실력 발휘하기 전에 서명부터 하겠습니다.”
긴장이 최고조에 다다른 순간에도 라일의 농담은 사람들의 어깨를 조금 내려놓게 했다. 그는 자물쇠를 억지로 부수지 않고 걸쇠의 구조를 확인했다. 외부에서 잠긴 문은 안쪽의 비상 손잡이만 작동하면 열렸다. 문제는 그 손잡이가 열두 해 전부터 없다는 사실이었다.
진혁은 가방에서 동화 아홉 닢짜리 청동 손잡이를 꺼냈다.
“이게 맞을지 몰라요. 하지만 원래 자리에 끼운다고 바로 힘을 주지 마세요. 부러진 축에 연결돼 있을 수도 있어요.”
백칠성은 그의 손을 잡아 멈췄다. “그걸 어디서 샀나?”
“어제 경매에서요.”
노인은 손잡이의 조개 문양을 바라봤다. “안쪽에 있던 그 물건이 밖으로 나갔다가 돌아왔군. 그때와 똑같아.”
“열두 해 전에도 누가 이 문을 잠갔습니까?” 카렌이 물었다.
백칠성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 “그날 우린 안의 사람을 구하려 했어. 하지만 외부 문이 열리면 더 많은 사람이 위험해진다는 말을 들었지. 그래서… 나는 지시를 따랐네.”
진혁은 노인을 원망하고 싶었지만 그가 어떤 정보를 가지고 결정했는지 알지 못했다. 대신 눈앞의 문제를 해결하기로 했다. 오렐이 손잡이 축의 규격과 손상도를 확인하고, 카렌과 벨라가 입회한 기록을 남겼다. 소담은 배에 있는 대피 인원과 연결 줄의 위치를 다시 확인했다.
손잡이가 축에 들어맞았다. 진혁이 천천히 돌리자 철문 안쪽에서 딸깍 소리가 났다. 그러나 바깥문이 열린 것은 아니었다. 그 옆 벽이 안으로 살짝 밀리며 좁은 계단이 나타났다.
[감정 대상: 제4안전로 수동 개방부.]
[본래 목적: 외부 통로 봉쇄 시 내부 인원 보호 및 대체 피난.]
[상태: 일부 통과 가능.]
[경고: 하부 수로 접근 시 역류 위험.]
라일이 어둠 속을 들여다봤다. 계단 아래에서는 바닷물이 부딪히는 소리와 함께 누군가 기침하는 소리가 났다.
“사람이 있어요.”
진혁은 곧장 내려가지 않았다. 소담이 구조줄과 환기 상태를 확인했고 카렌이 먼저 이름을 불렀다. 잠깐의 침묵 뒤, 어둠 속에서 아주 작은 대답이 돌아왔다.
“불을… 켜지 마세요.”
백칠성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그는 그 목소리를 알고 있었다.
제164화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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