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레온으로 돌아가는 새벽 열차의 창은 소금기가 낀 것처럼 뿌옇게 흐렸다.
서진혁은 창가에 앉아 왕도에서 받은 종이봉투를 세 번째 펼쳤다. 네 가닥 흰 실은 풀 때마다 서로 다른 방향으로 당겼다. 낡은 종이에 남은 문장은 짧았다.
‘백색 등대에 들어가는 날, 루멘의 심장이 다시 움직일 것입니다.’
문장의 끝에는 서명도 발신 주소도 없었다. 대신 봉투를 봉한 풀에서 바다 조개를 끓였을 때 나는 엷은 냄새가 났다. 진혁이 그 냄새를 맡고 고개를 갸웃하자, 맞은편에서 졸고 있던 라일이 한쪽 눈을 떴다.
“협박장에 향수까지 뿌린 겁니까? 요즘 범인들은 취향이 고급스럽네요.”
“향수가 아니라 방수풀 같은데. 항구에서 서류를 물에 젖지 않게 보낼 때 쓰잖아.”
“그런 걸 어떻게 알았어요?”
“경매장 입사 첫 달에 배송장 이백 장을 다시 썼거든. 그때 종이에 물이라도 닿으면 급여에서 잉크 값을 뗀다고 했어.”
세리아가 커피 잔을 내려놓았다. “그런 규정은 누가 만들었지?”
“사장님이요.”
“아. 그건 폐지해야겠군.”
카렌은 가볍게 웃다가 다시 봉투로 시선을 옮겼다. 농담을 할 여유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상대가 그들의 이동 경로를 정확히 알고 있었고, 백색 등대와 루멘의 심실을 동시에 언급했다는 사실만은 변하지 않았다.
열차가 평야 끝의 낮은 교량을 건널 때, 진혁은 지도 한 장을 폈다. 마레온은 서쪽으로 바다가 트인 항구도시였다. 북쪽에는 오래전 매립한 갯벌과 소금 창고가 이어지고, 외항 끝에는 등대 두 개가 마주 보고 섰다. 지금도 불을 밝히는 붉은 등대와 열두 해 전 폐쇄된 백색 등대. 지도에는 둘 사이를 잇는 뱃길이 점선으로 표시돼 있었다.
“폐쇄 이유가 기록마다 달라.” 세리아가 말했다. “항만청 문서에는 지반 침하, 등화국 장부에는 예산 축소, 루멘의 오래된 설비 대장에는 ‘안전로 이관 완료’라고 적혀 있어.”
“셋이 동시에 사실일 수도 있지 않습니까?” 카렌이 물었다.
“그럴 수도 있어. 그래서 아직 누구 말이 거짓인지 모르는 거지.”
진혁은 지도 위에 손가락을 올렸다. 백색 등대 주변에는 해안선처럼 보이는 가느다란 곡선이 세 겹 그려져 있었다. 만조 때 물이 차는 경계, 간조 때 드러나는 돌길, 그 아래 오래된 배수로였다. 서도원이 남겼다는 네 번째 길의 도해와 모양이 비슷했다.
[감정 대상: 항만 안내도 복제본.]
[제작 목적: 항해 안내 및 임시 피난로 표시.]
[누락 정보: 구 판본에 있던 네 번째 접근 표시 삭제.]
그는 문구를 수첩에 옮겼지만 지도를 근거로 바로 침입할 생각은 하지 않았다. 감정 능력이 보여 주는 것은 지도에 관한 정보였다. 실제로 길이 안전한지는 물때와 현장 상태를 봐야 했다.
객실 끝에서는 어린 짐꾼이 손바닥에 구리 동전을 세고 있었다. 마레온에서 일자리를 구하러 간다는 소년은 배에서 일하던 아버지가 돌아오지 않아 가족이 부두 근처로 이사했다고 말했다. 진혁은 괜히 말을 보탤 수 없어 소년의 무거운 가방을 선반에서 내려 주었다. 가방 안에서는 오래된 항해용 나침반이 짤랑거렸다.
“이런 건 이제 안 쓰지 않나요?” 진혁이 물었다.
“아버지가 쓰던 거예요. 고장이 나서 북쪽도 가리키지 않지만 버리긴 싫어요.”
진혁은 나침반을 들여다보자고 하지 않았다. 본질을 볼 수 있어도 상대가 소중히 간직한 것을 함부로 감정할 이유는 없었다. 그는 대신 소년에게 마레온의 부두 일자리 게시판 위치를 알려 줬다. 열차가 곧 멈춘다는 안내방송이 나오자 소년은 고개를 숙였다. 가방을 메고 내리는 작은 등이 한동안 진혁의 눈에 남았다.
세리아가 그 모습을 보며 말했다. “우리 경매장에도 짐꾼 하나가 필요하긴 해.”
“바로 뽑을 수는 없겠죠?”
“먼저 근무 조건과 나이부터 확인해야지. 제대로 일을 주는 게 좋은 일을 한다는 말보다 어려울 때도 있어.”
진혁은 그 말에 동의했다. 사람들에게 닥친 문제는 대단한 유물이 없어서 생긴 것만은 아니었다. 하루 일할 자리가 없거나 돌아올 배의 불빛이 끊겨서 생기는 경우도 많았다.
마레온역에 도착하자 비린내 섞인 바닷바람이 승강장 깊숙이 밀려왔다. 생선 상자를 내리는 수레가 줄지어 있었고, 젖은 마포 자루를 머리에 두른 노동자들이 조기 경매 시작 시간을 외쳤다. 도시의 아침은 조용히 열리지 않았다. 밧줄 끊어지는 소리, 경매 종, 철륜의 마찰음이 한꺼번에 몰려왔다.
루멘 경매장의 뾰족한 지붕이 운하 건너로 보였다. 진혁은 그 건물을 볼 때마다 이상한 감각을 느꼈다. 세상에서 가장 비싼 유물들을 사고파는 화려한 홀 아래, 이름조차 정확히 알 수 없는 고대 존재가 잠들어 있었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 위에서 오늘도 고장 난 솥이나 몬스터의 뼈를 사고팔았다.
세리아는 역마차 대신 걸어가자고 했다. 출근 시간의 정문 앞에는 직원과 상인, 물품 검수인이 뒤섞여 있었다. 익숙한 벨라가 등록대를 지키고 있다가 손을 흔들었다.
“사장님! 심실이 밤사이 두 번 울렸어요. 도르 씨가 교대 기록을 남겼고 오렐 기술관이 신호를 봉인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종소리보다 발걸음에 가까웠대요.”
“직원 대피는?”
“위험 구역만 막았어요. 손님들은 평소대로 받고 있고요.”
세리아는 그 말에 안도하기보다 먼저 서류를 받았다. 경매장을 멈추면 하루의 수수료 손실이 컸지만, 다치면 돈으로 돌이킬 수 없는 일이 생겼다. 그녀는 진혁을 별실로 데려가 증거를 펼쳤다.
도르가 그린 파형은 일정한 간격의 세 번 두드림 뒤 길게 늘어진 한 번의 울림이었다. 서른 해 동안 배관과 바닥을 살펴 온 노인은 그 소리가 기계 고장 때 들리는 충격과 다르다고 표시했다. 오렐은 ‘생물의 박동으로 단정할 수 없음’이라고 덧붙였다.
“봉투의 예언이 맞았다는 결론은 이르군요.” 진혁이 말했다.
“정확해.” 세리아가 답했다. “우리가 돌아온 시각과 파형이 달라진 시각도 다르니까.”
오전 감정 업무가 시작되자 진혁은 멀리서 온 손님 세 명의 물건을 차례로 확인했다. 첫 번째는 바닷물에 열흘을 담가 두었다는 마법석이었다. 손님은 돌을 손에 쥐면 병을 낫게 한다고 주장했지만, 공인 측정기에는 약한 열 신호밖에 잡히지 않았다. 진혁의 능력은 그것이 오래된 보온석임을 보여 주었다. 그는 손님에게 유망한 치료 유물인 척 비싸게 팔지 말고 겨울 어선의 보온 용도로 내놓으라고 권했다. 손님은 실망했으나 나중에는 웃었다.
“그럼 적어도 쓸 곳은 있겠네요. 사겠다는 사람이 전혀 없는 줄 알았거든요.”
두 번째 손님은 조난당한 형의 작은 나침반을 가지고 왔다. 바늘이 한쪽으로만 흔들려 고장이라 여겼다고 했다. 진혁은 나침반이 한때 백색 등대의 빛을 받은 흔적을 읽었지만, 그 사실을 곧바로 손님에게 말하지 않았다. 대신 나침반의 변형 시기와 마지막 항해 기록을 확인할 수 있는지 물었다. 손님은 젖은 항해일지 반쪽을 건네주었다. 거기에는 등대가 폐쇄된 다음 날의 날짜가 적혀 있었다.
“형은 그날 밤에도 흰 불빛을 봤다고 했어요.” 손님이 말했다. “다들 이미 꺼졌다고 했는데 말이죠.”
진혁은 일지를 복사해도 되는지 먼저 허락받았다. 손님이 허락하자 항로 표시와 시간을 따로 기록했다. 손님에게는 나침반을 가져가도 좋고 정식 감정을 맡길 수도 있다고 설명했다. 돈이 급하지 않은 사람의 추억을 강제로 증거로 빼앗을 이유는 없었다.
세 번째 손님은 항구에서 가장 싸게 팔리는 물건, 녹이 슨 닻줄의 작은 고리를 들고 왔다. 그 고리의 가치는 동화 일곱 닢이었다. 진혁은 흥정을 도와줬지만 가격을 과장하지 않았다. 세 사람의 감정을 마치고 나서야 그는 마음이 조금 가라앉는 걸 느꼈다. 거대한 비밀을 뒤쫓는 동안에도 자신이 하는 일의 절반은 평범한 물건을 정확한 값에 사고팔게 돕는 일이었다.
감정실 창밖의 풍경도 눈에 들어왔다. 갓 잡은 정어리를 내리는 어부들이 서로의 손을 붙잡아 미끄러운 판자를 건넜고, 빵을 나르는 아이가 수레바퀴에 달라붙은 해초를 떼어 냈다. 먼바다에서 구름이 몰려왔지만 항구는 아직 햇빛 아래였다. 그 많은 사람이 오늘도 돌아올 길을 찾아야 한다는 생각에, 진혁은 백색 등대 조사를 막연한 모험으로만 여기지 않게 됐다.
카렌이 감정실 문을 두드렸다. “왜 이렇게 조용해졌어요?”
“제가 등대를 어떻게 조사해야 하는지 생각했어요. 상인의 말만 듣고 움직이지 않기로요.”
카렌은 그가 들고 있는 항해일지 사본을 보았다. “좋은 시작이네요. 사람마다 다른 사정이 있어도, 시간과 물건은 차근차근 대조할 수 있으니까.”
그녀는 작은 메모를 내밀었다. 외항의 구조조합이 폐쇄된 백색 등대 인근에서 최근 한 달 동안 세 차례 방향을 잃는 사고를 접수했다는 내용이었다. 다행히 인명 피해는 없었지만, 매번 같은 수로에서 작은 배들이 제자리로 돌아왔다는 증언이 있었다. 원인은 아직 확인되지 않았다. 진혁은 기록의 날짜를 표시하고 감정 자료와 함께 별도 서류철에 넣었다.
점심이 가까워질 무렵, 외항에서 온 노인이 루멘의 접수대에 모습을 드러냈다. 바닷바람에 바싹 마른 얼굴, 흰 턱수염, 줄기가 다 닳은 목제 지팡이. 그는 자신을 ‘백칠성, 전직 등화관리인’이라 소개하고 고장 난 등대 렌즈 조각을 감정받고 싶다고 했다.
“등대는 폐쇄됐다고 들었습니다.” 진혁이 물었다.
“불은 꺼졌지. 하지만 빛이 없어졌다는 뜻은 아니야.”
노인은 포대 안에서 손바닥만 한 유리 조각을 꺼냈다. 유리는 흰색이 아니었다. 안쪽에 아주 옅은 푸른 선이 휘감겨 있었다. 진혁의 손바닥이 저릿했다.
[감정 대상: 백색 등대 보조 프리즘 파편.]
[표면 가치: 절단 유리 재료.]
[본래 기능: 신호 발신이 아닌 신호 반사.]
[주의: 원본 등화가 점등될 경우, 반사 대상의 응답을 촉진함.]
“등대에 들어가기 전에 묻겠습니다.” 백칠성이 물었다. “자네들은 불을 켜러 오는 사람인가, 끄러 오는 사람인가?”
진혁은 대답하기 전에 세리아와 카렌을 바라봤다. 등대를 조사할 필요는 있었다. 하지만 아직 그 빛이 무엇을 움직이는지도 모른다.
“지금은 확인하러 갑니다. 켤지 끌지는, 거기에 있는 사람들의 안전을 먼저 살핀 뒤 결정할 겁니다.”
백칠성은 오래 참아 온 숨을 내쉬었다. “그럼 한 가지를 먼저 해 주게. 내일 아침 폐등화 장비 경매가 열려. 거기서 등대의 목을 붙잡는 물건이 팔릴 거야.”
“어떤 물건인데요?”
“목록에는 녹슨 회전 고리라고 돼 있지. 하지만 그걸 잃으면 등대는 한쪽 방향만 비추게 돼. 하필 루멘이 있는 방향으로.”
진혁은 조각난 프리즘을 내려다봤다. 값싼 고철 하나가 다시 수많은 사람의 안전과 연결되고 있었다.
그날 저녁, 그는 새 물품 목록을 받아 들었다. 마지막 페이지에 흐릿한 사진이 있었다. ‘폐등대 회전 고리. 시작가 동화 열일곱 닢.’ 그리고 사진의 뒷면에 누군가 연필로 적은 글씨 하나.
‘낙찰자는 북쪽의 문을 열 수 있다.’
진혁이 수첩을 닫는 순간, 루멘 바닥 아래에서 길고 낮은 진동이 한 번 올라왔다. 마치 멀리 있는 등대를 향해 누군가 고개를 돌리는 소리 같았다.
제161화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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