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관의 네 번째 등불은 다른 등불보다 낮게 매달려 있었다.
대로의 번쩍이는 왕실 조명과 달리 작은 골목 입구에 달린 구식 석유등이었다. 유리갓 한쪽에 금이 가 있었고, 오래된 반사판에는 비가 마른 자국이 얼룩처럼 남아 있었다. 등불 아래 서 있는 노인은 두꺼운 갈색 외투를 걸쳤다. 벗겨진 장갑 사이로 거친 손마디가 보였다.
“서진혁.”
노인이 이름을 다시 불렀다. 골목 끝의 바람이 찬 기름 냄새를 밀어 왔다. 진혁은 그 냄새를 맡는 순간 어릴 적의 한 장면을 떠올렸다. 좁은 방에서 등불 하나가 바람에 흔들리고, 누군가 그의 손을 감싸 쥔 채 불꽃을 보호해 주던 순간이었다. 방은 어두웠지만 누군가 옆에 있다는 사실만으로 무섭지 않았었다.
지금 앞에 선 노인이 그 사람이라는 확신은 없었다. 다만 오래 잊고 살았던 감각이 갑자기 되살아나 숨이 막혔다. 그는 목 안쪽에서 올라오는 말을 삼켰다. 너무 이른 질문을 하면 자신이 바라는 대답만 듣게 될까 두려웠다.
카렌은 그가 움직이지 않자 한 걸음 옆으로 다가왔다. 그녀는 무엇을 물어보라고 재촉하지 않았다. 대신 주변의 창문과 골목 길을 확인하면서도 진혁이 원하는 만큼 기다려 주었다.
“괜찮아요?” 카렌이 낮게 물었다.
“조금 이상합니다.”
“무엇이요?”
“돈이 일만 금화나 걸린 일인데, 지금은 그냥 이 사람이 밥을 먹고 사는지부터 묻고 싶어요.”
카렌은 잠깐 그를 바라봤다. “그렇게 물어봐도 되죠.”
진혁은 노인에게 다가가기 전에 한 번 더 숨을 고르고 있었다. 사람을 감정하는 능력이 있다면 얼마나 쉬울까 생각했지만 곧 고개를 저었다. 사람을 물건처럼 읽고 싶지 않다는 마음은 오늘만의 감상이 아니었다. 그동안 여러 경매장에서 어렵게 배운 원칙이었다.
라일은 길 건너에서 작은 수첩을 꺼내 손바닥만 한 지도를 그렸다. 주변 길은 넷이었고, 가로등 뒤에도 낮은 골목이 하나 있었다. 그는 도주로와 순찰 경로를 확인한 뒤 고개를 끄덕였다. 누군가 함정을 준비했다면 적어도 빠져나갈 길은 있었다.
세리아도 진혁의 모습을 보고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진혁이 어떤 말에 무너질 수 있는지 알고 있었다. 세리아에게도 유나라는 이름은 항상 아픈 자리였다. 그럼에도 그녀는 그 이름 하나만으로 누군가를 진실이라고 받아들이지 않기로 했다.
그들 모두 각자의 이유로 이 만남을 원했고, 각자의 이유로 두려워했다. 그래서 누구도 먼저 결론을 말하지 않았다.
진혁은 발을 떼지 못했다. 목소리는 꿈에서 들은 것과 완전히 같지는 않았다. 세월이 지나면 누구나 목소리가 달라진다. 그러나 그 한마디에는 오래전부터 누군가를 기다린 듯한 떨림이 있었다.
“누구십니까?”
“나를 서도원이라고 불렀지.”
순간 골목 끝에서 바퀴 소리가 멈췄다. 카렌은 진혁의 곁을 지키며 주변을 살폈다. 세리아와 라일은 길 건너 가게의 그림자에 서 있었다. 혹시 모르니 서로의 위치를 미리 정해 둔 것이었다.
진혁은 노인을 똑바로 바라봤다. 남구현이 보여 준 사진 속 인물과 비슷한 얼굴이었다. 눈썹 위의 흉터와 어깨를 굽힌 자세까지 닮았다. 하지만 닮았다는 사실만으로 확정할 수는 없었다.
“서도원 씨는 열두 해 전에 사라졌다고 들었습니다.”
“살아 있을 수 없는 사람처럼 기록됐겠지.”
“그럼 왜 지금 나타났죠?”
“내일 계약서가 팔리면 네가 위험해져.”
진혁은 목 안에서 뜨거운 것이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 듣고 싶은 말이었지만 너무 늦게 도착한 경고였다.
“저한테 가족을 증명하라던 사람들이 있었어요. 저를 아는 사람도 있고, 제 이름을 이용하려는 사람도 있었죠. 당신은 어떤 사람입니까?”
노인은 대답 대신 외투 안에서 작은 금속 원반을 꺼냈다. 네 방향 홈이 새겨진 낡은 등불 부품이었다.
“이건 내가 만들었어. 네가 어렸을 때도 만지작거리던 물건이지.”
진혁의 손바닥이 따끔거렸다.
[대상: 제4안전로 도해 원반.]
[제작: 왕도 등화관리국 협력공방.]
[잔류 기억: 어린아이의 손.]
[기록: 일부 훼손.]
짧은 환영이 스쳤다. 작은 아이가 나사를 굴리고, 누군가 다정하게 웃었다. 하지만 얼굴은 안개에 가려 있었다. 진혁은 원반을 돌려주었다.
“물건은 진짜인 것 같습니다. 하지만 당신이 누군지까지 증명하지는 못해요.”
노인의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렇겠지. 잘 컸구나.”
카렌은 눈길을 떼지 않았다. “사진과 기록, 기술 경력이 실제로 일치하는지 확인하겠습니다. 괜찮으시겠습니까?”
“그러게. 그렇게 해야지.”
노인은 자신의 오른쪽 소매를 조금 걷었다. 손목에는 오래된 화상 자국이 있었다. 둥근 흔적 사이로 네 줄의 흰 살이 남아 있었다.
“그때 이 손으로 작은 문을 열었지. 기계가 멈추지 않아 문이 뜨거웠거든. 멀리서 누군가 아이를 안고 뛰어오는 걸 봤어. 불이 꺼지면 못 나올 것 같아서 나도 뛰었지.”
진혁은 화상 자국을 보았다. 자신의 첫 번째 유물 감정에서 반지를 건네던 노인의 손등에도 열쇠 모양의 상처가 있었다. 그 사람이 이 노인과 같은 사람인지, 비슷한 기술을 다루다 입은 상처인지 아직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손등의 흔적 하나가 다시 새로운 물음을 만들었다.
“그 아이는 무서워했습니까?” 진혁이 물었다.
“울지도 않았어. 내가 등불을 들려주니 손잡이를 두 손으로 꽉 잡더라. 나는 어른이니까 더 힘이 셀 거라 생각했는데, 그 애가 버티는 힘이 더 셌지.”
노인이 잠시 웃었다. 그러나 웃음은 금세 사라졌다.
“그리고 어느 역에서 그 애를 놓쳤어. 기록도, 연락도, 아무것도 남기지 못했지. 그 뒤로 사람을 찾는 일을 멈춘 적이 없어.”
진혁은 바로 위로의 말을 하지 못했다. 노인의 고통이 진짜라 해도 그것이 자신을 향한 고통인지는 확인되지 않았다. 다만 애써 단단하게 만들었던 마음 안에 작은 균열이 생기는 것을 느꼈다.
“어떻게 찾으셨습니까?”
“사라진 이름을 따라다녔지. 근데 이름이 없더구나. 네가 말한 그 기록들이 왜 중요한지 이제 알겠지?”
진혁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경매장에서는 이름 하나가 물건의 가치를 높이기도 낮추기도 했다. 사람에게는 이름이 자신의 삶으로 돌아가는 길일 수도 있었다.
그가 뜻밖에도 쉽게 동의하자 진혁은 더 혼란스러웠다. 노인은 자신을 붙잡거나 혼자 따라오라고 하지 않았다. 대신 가로등 아래 무릎을 굽혀 낡은 나사 하나를 조였다. 작은 유리등이 다시 켜졌다.
“네 번째 불은 일부러 꺼 둔 거야.”
“왜요?”
“아무도 보지 않는 길이 있어야 누군가는 도망칠 수 있으니까. 하지만 그 길을 찾으러 온 사람에게는 등불이 필요하거든.”
노인은 옛 등화관리국의 시험에 대해 이야기했다. 최초 계약서가 만들어졌을 때, 루멘은 단순한 건축물이 아니었다. 깊은 곳에서 살아 있는 반응을 보이는 장치를 사람들은 통제하려 했다. 기술자들은 작동을 멈출 방법을 만들었고, 계약 당사자는 그 방법을 기록으로 남기려 했다.
“네 번째 길은 탈출로였지. 그런데 누군가 그걸 의무의 승계로 바꿨다.”
“누가요?”
노인은 손을 내렸다. “그 사람을 직접 본 건 아니야. 하지만 검수 도장을 빼앗고 기록에서 거절을 지운 사람들은 에르딘의 선임자들이었어.”
“당신은 그때 뭘 했습니까?”
“아이 하나를 데리고 도망쳤지.”
진혁이 한 걸음 가까이 갔다. “그 아이가 저입니까?”
노인은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멀리서 순찰 경비의 호각 소리가 들렸다. 그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내가 데리고 나온 아이의 이름은 끝까지 문서에 쓰지 않았어. 안전하려면 그래야 한다고 생각했지. 그 아이가 네가 맞는지, 이제는 확인해야 해.”
그 말이 너무 아파 진혁은 잠시 고개를 숙였다. 그가 듣고 싶었던 것은 단순한 확인 절차가 아니었다. 자신을 오래 기다렸다는 말, 왜 혼자 두고 갔느냐는 질문에 대한 대답이었다.
카렌이 조용히 그의 팔을 잡았다. 손의 온기가 다시 현실로 데려왔다.
“그럼 확인할 수 있는 기록은 어디 있습니까?” 카렌이 물었다.
노인은 자신의 주머니에서 작은 열쇠를 꺼냈다. 검게 녹슨 열쇠 손잡이에는 등불 모양이 새겨져 있었다.
“옛 북관 제4등불 보관함. 내일 아침 정식 입회 아래 열어야 해. 나는 그 앞에서 기다리겠다.”
세리아가 길 건너에서 나왔다. “서도원 씨, 한 가지 묻겠습니다. 경매의 시작가가 왜 일만 금화인지 알고 계세요?”
노인은 낯빛이 변했다.
“그 숫자는 계약서의 값이 아니오.”
“그럼 무엇이죠?”
“원래 계약에는 사고가 나면 기술공의 가족에게 일만 금화를 지급한다는 조항이 있었지. 위험 작업 보상금이었어.”
진혁은 숨을 멈췄다. 가치를 매기는 숫자가 거꾸로 놓여 있었다. 누군가 가족에게 줘야 할 보상금을 가족이 내야 할 빚처럼 바꾼 것이다.
“그러면 지금 경매에서 일만 금화는…”
“처음부터 사람을 헷갈리게 만들려고 고른 숫자일 수도 있어.”
노인은 정확한 결론을 말하지 않았다. 실제 계약서를 보지 못했으므로 그 역시 추정이었다. 하지만 새로운 비교 기준이 생겼다. 출품한 사람들이 제멋대로 정한 시작가가 왜 하필 그 액수인지 따져 볼 수 있게 되었다.
그 순간 길 건너에서 금속이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라일이 외쳤다.
“엎드려!”
짙은 어둠 속에서 쇠구슬 하나가 날아와 등불 기둥에 부딪쳤다. 유리갓이 깨지며 불꽃이 튀었다. 카렌은 진혁을 뒤로 밀고 외투로 파편을 막았다. 노인은 얼굴을 가리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라일이 골목 안쪽으로 달렸다. 하지만 범인은 이미 마차에 올라 떠나고 있었다. 그의 손에 남은 것은 현장에서 떨어진 작은 도르래 하나뿐이었다.
“일부러 사람을 맞히려 한 건 아닌 것 같아요.” 라일이 말했다. “등불을 부수려 했습니다.”
노인은 떨어진 유리 조각을 멍하니 바라봤다. “네 번째 불을 다시 켜면 안 됐던 모양이군.”
카렌은 노인의 팔을 살폈다. 작은 상처가 있었지만 심각하지 않았다. 세리아는 가까운 경비초소로 가서 사고를 신고했다. 도망간 마차의 문양과 방향을 기록으로 남겼다.
진혁은 바닥에 떨어진 도해 원반을 주웠다. 한쪽 모서리가 깨져 안쪽의 얇은 종이띠가 드러났다. 그 위에는 지금까지 보지 못한 문장이 적혀 있었다.
‘보상금 지급 전, 네 번째 길의 원본 기록을 확인할 것.’
서도원이 낮게 말했다. “도해 원반이 왜 그 말을 품고 있었지?”
진혁은 깨진 원반을 내려다봤다. 누군가 감춰 둔 기억이 아니라, 처음부터 사람들을 보호하기 위해 남겨 놓은 점검 절차였다.
다음 날 아침 보관함을 열기 전까지 그 기록은 더 이상 누구의 손에도 맡길 수 없었다. 하지만 그는 혼자 지키려 하지 않았다.
“같이 보관합시다.” 진혁이 말했다. “이번에는 누구도 혼자 남겨 두지 않겠습니다.”
제158화 댓글 0
댓글·공감·신고는 로그인 후 이용할 수 있습니다. 이전 익명 댓글은 그대로 표시됩니다.
댓글을 불러오는 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