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멘의 지하에서는 물이 흘렀지만, 왕도의 지하에서는 사람들이 버린 시간이 흘렀다.
서진혁이 통과한 비상로 벽에는 오래된 초대장과 손수레 바퀴 자국, 운송조합의 퇴색한 광고가 남아 있었다. 어떤 광고는 이미 문을 닫은 상회의 이름을 선명하게 보여 주었고, 어떤 것은 반쯤 뜯겨 사람 얼굴처럼 보였다. 천장의 환기구로 들어오는 빛은 정오가 가까워질수록 좁아졌다.
그는 혼자 내려온 것을 후회하기 시작했다. 어느 갈림길에서 왔는지 정확히 기억하지 못했다. 몇 차례 같은 물소리가 들리자 복도가 원을 그리는 듯했다. 그러나 무작정 걸음을 재촉하지 않았다. 벽의 네 방향 홈에 종이 조각을 끼워 지나온 길을 표시했다. 라일이 알려 준 방법이었다.
마침내 낮은 철제 사다리 끝에서 지상의 빛이 보였다. 사다리를 오른 곳은 오래된 등불 수리소의 뒷마당이었다. 깨진 유리갓과 색이 바랜 황동 반사판이 산처럼 쌓여 있었다. 연장함 옆에서는 수리공들이 점심으로 감자와 검은 빵을 먹고 있었다.
“거기서 뭘 하고 나오는 거요?”
작업복을 입은 노인이 외쳤다. 진혁은 양손을 들어 보였다.
“위험한 물건은 없습니다. 다만 길을 잃었습니다.”
노인은 그의 신분증을 살피더니 고개를 저었다. “공무원 놈들이 또 지하 길을 허락도 없이 쓰는군. 내일부터 문 잠가야겠어.”
진혁은 고맙다는 말부터 했다. 노인은 수리소 주인 남구현이었다. 허름한 작업장에는 오래된 회중시계 수십 개와 석유등 심지를 자르는 작은 가위가 정리되어 있었다. 진혁이 마실 물을 얻으려 하자 남구현은 미지근한 차 한 잔까지 건넸다.
“서씨 기술자들을 아십니까?” 진혁이 물었다.
남구현이 빵을 내려놓았다. “갑자기 그 이름은 왜?”
“관련된 물건을 감정하고 있어서요.”
“그렇다면 앉아 보시오. 예전에는 그 성을 가진 수리공들이 이 근처에서 많이 일했지.”
남구현은 창고의 높은 선반에서 먼지투성이 장부를 꺼냈다. 표지에는 등화관리국 협력공방의 이름들이 적혀 있었다. 서도원이라는 이름도 있었다. 하지만 그 아래 기록은 십수 년 전에 끊겼다.
“그가 사라진 날을 기억하십니까?”
“기억하지. 겨울이었소. 북관의 경고등을 고치러 갔다가 돌아오지 않았어.”
“죽었다는 소문이 있던데요.”
노인은 얼굴을 찌푸렸다. “소문은 많았지. 시체를 본 사람은 없었소. 그런데 며칠 뒤 관리국에서 장례비 명목의 돈을 보냈어. 살아 있는지 죽었는지 모르는 사람에게 장례비를 보냈다는 게 이상했지.”
그는 장부 한 페이지를 짚었다. 서도원이 마지막으로 맡은 작업의 재료 목록이었다. 보조축 네 개, 청각 기록판 두 장, 회신 종 세 개. 루멘 심실에 쓰인 부품과 이름이 같았다.
“이 사람은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손이 아주 좋았지. 물건을 고치면 끝날 일을 자꾸 왜 고장 났느냐고 물어서 윗사람들이 싫어했어. 그래도 동네 아이들에게 등불 손질하는 법을 가르치곤 했지.”
진혁은 눈을 내렸다. 자기가 어렸을 때 들었던 목소리와 어딘가 겹쳤다. 그러나 사람은 닮은 특징을 발견하면 금세 친숙하다고 느끼기도 했다. 그 감정을 증거로 삼을 수는 없었다.
“그분에게 아이가 있었습니까?”
“함께 사는 어린애 하나가 있었어. 아들인지 조카인지는 몰라. 도원은 그 애를 이름으로 부르지 않았지. 남들이 들을까 봐 그랬는지.”
“어떤 이름으로 불렀는데요?”
“‘우리 작은 등불’이라고.”
진혁의 손에서 찻잔이 미끄러질 뻔했다. 기억 속 어른도 그런 말을 했었다. 비가 오고 방이 어두워졌을 때, 무서워하지 말라고 자신의 손에 작은 등불을 쥐여 주며 했다. ‘불이 작다고 길까지 작은 건 아니야.’
그는 숨을 조절했다. 카렌이 곁에 있었다면 섣불리 확신하지 말라고 했을 것이다. 세리아는 장부의 날짜를 먼저 보자고 했을 것이다.
“그 아이가 어떻게 됐는지는 아십니까?”
“어느 날부터 보이지 않았어. 도원이 데려갔다는 사람도 있었고, 관리국 사람들이 보냈다는 사람도 있었지.”
진혁은 노인에게 기록 사본을 정식으로 받을 수 있는지 물었다. 남구현은 괜찮다고 했다. 다만 원본은 수리소에 두어야 한다고 했다. 그는 누구에게도 장부를 통째로 팔 생각이 없었다.
“값은 얼마나 드리면 될까요?” 진혁이 물었다.
“값?”
“기록을 찾아 주셨잖아요.”
남구현은 창가에 걸린 고장 난 풍향등을 가리켰다. “그거 고칠 수 있겠나?”
진혁은 뜻밖의 제안에 웃었다. 능력을 쓰지 않고도 고칠 만한 간단한 고장이었다. 손잡이를 열어 보니 배선 접점이 녹슬어 있었다. 그는 남구현이 내준 작은 솔로 녹을 걷어 내고 나사를 조였다. 얼마 뒤 풍향등이 바람에 따라 깜빡였다.
“고쳤네요.”
“그걸로 충분해. 사람이 품은 기억을 돈으로만 사려고 들면 언젠가 후회해.”
진혁은 깊게 머리를 숙였다.
남구현은 작업대 아래에서 낡은 망치를 꺼내 진혁의 앞에 놓았다. 손잡이에는 그가 수십 년 전 새겼다는 작은 숫자가 남아 있었다.
“새것이라면 은화 두 닢 정도 받을 수 있겠지만, 이 망치는 그 절반도 안 될 거요.”
진혁이 망치를 들어 보았다. 손잡이는 가벼웠고 철제 머리는 한쪽이 기울어져 있었다. 곧바로 손바닥에 문장이 떴다.
[일반 수리공의 망치.]
[잔류 기억: 수백 회의 부품 교체.]
[특별한 마력: 없음.]
“그런데 왜 버리지 않으셨습니까?”
“내게는 가장 손에 맞거든. 이것보다 비싼 망치를 쓰면 오히려 실수해.”
노인은 웃으며 망치를 돌려받았다. “네가 보는 가격이 늘 남의 가격과 같지는 않을 거요. 옛날 도원이도 그런 말을 했지. 기계가 부러지면 어떤 부품이 비싼지부터 보지 말고, 누구의 손이 닿는지부터 살피라고.”
그 말이 진혁의 마음에 오래 남았다. 그는 작업대 위에 있는 수리 장부와 망치를 번갈아 보았다. 자신의 능력이 귀한 것은 물건의 숨겨진 기능을 알려 주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남들이 지나치는 사소한 문제를 알아볼 수 있다는 점 때문이었다. 그 사실을 잊을 때마다 값비싼 것만 좇는 사람들과 비슷해질 것이다.
남구현은 낡은 회전등 모형을 꺼내 직접 작동시켰다. 톱니 네 개 중 셋이 맞물리자 둥근 유리가 돌기 시작했지만, 마지막 하나를 빼자 불빛이 거꾸로 벽을 비췄다.
“기계에는 이런 일이 흔해. 어느 부품이 빠졌는지 모르면 사람은 방향이 바뀐 걸 오래 알아차리지 못하지.”
진혁은 그 작은 모형을 한참 바라봤다. 루멘의 기록 장치에서 거절이 수락으로 뒤집히던 사건들과 겹쳤다. 도원이라는 기술자는 단지 고장 난 등을 고친 사람이 아니라, 누군가 고의로 방향을 바꾸어 놓았을 때 알아볼 방법을 찾던 사람이었을지도 몰랐다.
“이 모형, 감정하러 다시 와도 되겠습니까?”
“문은 언제든 열어 두겠소. 다만 바쁠 땐 저기 놓인 못부터 좀 분류해 주시오.”
진혁은 못이 쌓인 상자를 보고 헛웃음을 흘렸다. 종이가 아무리 귀해도 수리소에서는 늘 손에 잡히는 일이 남아 있었다.
오후에는 연락을 받은 카렌과 세리아, 라일이 수리소로 왔다. 미조도 왕도 경비의 현장 확인을 마치고 합류했다. 기록은 공증인의 참관 아래 사본으로 정리됐다. 미조는 서도원의 마지막 작업 날짜와 왕도 비축고에서 발견된 가짜 의무 승계 날짜를 대조했다.
“보세요. 둘이 같은 날입니다.”
“하나의 사고를 두 개의 거래처럼 만들었군요.” 세리아가 말했다.
진혁은 오래된 장부에서 재료 목록을 다시 읽었다. 네 개의 보조축이 주문되었지만 실제 지급 기록에는 세 개만 나갔다. 마지막 하나는 서도원이 직접 반출했다고 적혀 있었다.
“네 번째 보조축이 어디 있지?”
미조가 낮은 목소리로 답했다. “그건 아주 중요한 질문이에요. 네 번째가 빠지면 모든 거절 신호가 수락으로 뒤집힐 수 있어요.”
수리소에서 나가기 전 남구현은 진혁에게 얇은 목제 상자를 하나 건넸다. 안에는 등불 유리갓을 고정하는 작은 철사 조각들이 가지런히 들어 있었다.
“서도원이 자주 하던 실수 하나 알려 주겠소. 기술이 뛰어나면 손이 빠르거든. 그래서 마지막 철사를 감을 때 가끔 한 번 덜 감았어. 그럴 때면 제 조수가 뒤에서 말했지. ‘서두르지 마세요. 아무도 지금 당장 등불을 켜라고 한 적 없어요.’”
“그 조수라는 분은요?” 진혁이 물었다.
“가끔 웃음이 많은 여자였어. 이름을 기억해 두었어야 했는데.”
남구현은 멋쩍게 이마를 문질렀다. “열두 해면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오가겠나. 기억은 종이보다 더 쉽게 젖고 찢어지는 법이야.”
진혁은 철사 한 가닥을 들어 빛에 비춰 봤다. 특별한 마력도 없고 금속 값도 거의 없었다. 하지만 등불을 고정하는 마지막 철사가 빠지면 누군가의 밤길은 어두워질 수 있었다.
“이걸 제가 가져도 됩니까?”
“공짜로 주는 게 아니오. 다음에 올 땐 고장 난 유리갓 세 개를 고쳐 주시오.”
진혁은 웃었다. “그럼 상당히 비싼 선물이네요.”
남구현도 웃었다. 진혁은 작은 상자를 소중하게 감싸 가방에 넣었다. 앞으로 누군가 일만 금화를 운운하더라도, 몇 푼 안 되는 철사 하나가 사람을 살리는 곳이 있다는 걸 기억하고 싶었다.
그날 저녁 다섯 사람은 수리소를 나왔다. 길에는 눈 대신 가벼운 비가 내렸다. 종이를 젖지 않게 감싼 라일이 앞서 걸었고, 카렌은 진혁의 옆에서 속도를 맞췄다.
“오늘 꽤 놀랐죠?” 그녀가 물었다.
“네. 어렸을 적 기억이 진짜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확인하고 싶은 마음이 큰 건 알겠어요. 그래도 그 기억 때문에 누가 내미는 계약서든 믿지는 말아요.”
“알아요. 그런데 오늘은 조금… 기쁘네요.”
카렌은 잠시 진혁을 보더니 작은 미소를 지었다. “그럼 그 정도는 기뻐해도 되겠죠.”
수리소 골목을 돌아서자 청동각에서 보내온 새 경매 안내문이 벽에 붙어 있었다. 특별 출품의 시작가는 그대로 금화 일만 닢이었다. 대신 조건 하나가 추가되어 있었다.
‘가족 관계 입증자에게 낙찰 즉시 원본 독점 열람권 부여. 단, 입증자는 개찰 전 일시 보호 시설에 대기.’
진혁은 공고를 읽고 한참 웃지 못했다. 가족을 증명하라는 말 뒤에는 자기를 외부와 분리해 두겠다는 조건이 붙어 있었다.
“이건 경매가 아니라 덫이네요.”
세리아가 공고문을 접었다. “덫이란 걸 알았으니 방법도 찾을 수 있겠지.”
그러나 진혁은 그날 밤 처음으로 꿈에서 낡은 등불을 보았다. 꿈속에서 누군가 그에게 등불을 들려주며 말했다.
‘네가 도망친 것이 아니라, 우리가 길을 남긴 거야.’
잠에서 깬 진혁의 손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다만 손바닥의 오래된 글씨 ‘본질을 본다’가 그 어느 때보다 선명하게 떠 있었다.
제156화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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