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동각의 접견실은 사람을 편안하게 만들려고 꾸며진 장소였다. 연한 녹색 벽지에 맞춰 찻잔까지 같은 색으로 고르고, 창틀에는 겨울에도 시들지 않는 작은 상록수를 놓았다. 바닥에 깐 두꺼운 양탄자 때문에 구두 소리가 거의 나지 않았다.
하지만 서진혁은 편안하지 않았다. 자신 앞에 놓인 봉투가 주변의 모든 장식보다 무거워 보였다.
“마지막 생존자라고요?”
민도겸은 차를 천천히 따랐다. 찻물에서는 잘 익은 사과와 계피 냄새가 났다.
“제가 말한 것은 등록 문구입니다. 사실 관계를 확인할 책임은 당신에게 있지요.”
“그럼 확인되지 않은 말을 왜 확정된 것처럼 말했습니까?”
“당사자가 나서야 원본을 열람할 수 있는 규정 때문입니다.”
카렌은 창문을 등지고 섰다. 그녀는 남자의 목소리보다 손을 보고 있었다. 민도겸이 봉투를 테이블 위에 놓을 때 검지 끝으로 봉인 가장자리를 한 번 눌렀다. 무심한 행동처럼 보였지만 카렌은 그 순간 테이블 아래 은색 가루가 한 톨 떨어지는 것을 보았다.
“제가 확인하겠습니다.” 카렌이 말했다.
그녀는 봉투에 손대지 않고 손수건을 펼쳤다. 가루는 자석에 붙는 물질이었다. 천천히 가까이 가져간 작은 철제 단추에 미세한 입자가 달라붙었다.
“봉인에 금속 분말이 들어 있군요.”
민도겸이 시선을 옮겼다. “청동각의 위조 방지 기술입니다.”
“그렇다면 봉투를 열지 않은 상태에서도 누가 만졌는지 알아볼 수 있겠네요.”
“규정상 가능합니다.”
진혁은 봉투를 다시 내려다봤다. 손바닥에 문장이 짧게 스쳤다.
[대상: 사전 열람 자격 확인서.]
[기능: 수령인 인식.]
[부가 기능: 단독 개봉자의 생체 응답을 기록함.]
그는 손가락을 거두었다. 단순한 신청서가 아니었다. 봉투를 열었다는 사실을 상대가 새로운 동의처럼 이용할 여지가 있었다. 자신에게만 보이는 문장으로 누군가를 비난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위험을 피하는 것은 가능했다.
“공증 참관인이 있는 자리에서 열겠습니다.”
민도겸은 찻잔을 내려놓았다. “까다로운 분이군요.”
“말단 직원이라서 그렇습니다. 일을 잘못하면 월급이 깎이거든요.”
세리아가 차분하게 말을 받았다. “참관을 거절하시면 신청 사실과 거절 사유를 기록하겠습니다. 어느 쪽이든 청동각에는 손해가 없겠지요.”
사실 손해가 없지는 않았다. 민도겸은 잠시 계산하는 얼굴이 되었지만 곧 담당 직원을 불렀다.
공증인은 머리가 희끗한 여성이었다. 이름은 윤상화. 그녀는 왕립 경매협회의 출장 공증인으로, 자신의 철제 인장을 지닌 작은 가방을 가지고 들어왔다. 윤상화는 처음부터 누구의 편도 들지 않았다. 봉투의 앞뒷면, 봉인 가루의 무게, 참석자의 위치를 기록하고 나서야 개봉용 칼을 꺼냈다.
안에는 예상 밖으로 평범한 서식이 있었다. 서진혁 본인 이름, 출생 기록의 확인 기관, 살아 있는 법정 가족의 존재 여부를 적는 칸이 전부였다. 그러나 맨 아래에 작고 흐린 문구가 적혀 있었다.
‘확인서 제출자는 계약과 관련된 모든 선행 의무의 승계 여부를 검토하는 자격자로 등록된다.’
“이 문구는 뭐죠?” 카렌이 물었다.
민도겸은 아무렇지 않게 답했다. “원본을 보여 주기 위한 절차입니다.”
“원본을 읽어 보기도 전에 채무 승계의 자격자로 등록한다는 겁니까?”
“채무라고 확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더 문제죠.” 세리아가 끼어들었다. “무슨 의무인지도 모르는데 그 검토 자격을 왜 받아야 합니까?”
윤상화 공증인은 그 문장을 세 번 읽었다. 그녀는 서식 뒷면에 추가 기록을 적었다.
‘신청인은 선행 의무 승계에 동의하지 않았으며, 단순 열람 요청만 의사 표시함.’
“이렇게라도 구분해 둬야겠습니다.” 공증인이 말했다.
민도겸이 더 이상 차를 권하지 않았다.
접견실을 나오기 전, 윤상화는 진혁을 복도로 따로 불렀다. 공증인 가방에서 꺼낸 것은 얇은 푸른색 보관증이었다. 서류의 앞면에는 아까 본 신청서의 문구가 정리되어 있었다.
“당신이 열람을 요청했다는 사실과 어떤 의무에도 동의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따로 보관하겠습니다. 오늘처럼 상대가 문장을 두 가지 뜻으로 읽을 수 있게 쓰면, 뒤늦게 분쟁이 생기기 쉽거든요.”
“그걸 오늘 안 적어 뒀으면 어떻게 됐을까요?” 진혁이 물었다.
“상대가 자기 입맛대로 해석하겠죠. 물론 법정에서 그 해석이 그대로 인정되리라는 뜻은 아닙니다. 다만 당신은 그동안 불필요한 시간과 돈을 쓰게 될 거예요.”
진혁은 씁쓸하게 웃었다. 유물의 잔류 기억을 읽는 능력으로도 공증인의 한 문장을 대신할 수는 없었다.
윤상화는 도로 가방을 닫았다. “참, 시작가가 왜 금화 일만 닢인지 궁금하시죠?”
“혹시 알고 계십니까?”
“알고 있는 게 아니라 이상한 점을 발견했어요. 청동각은 지난 삼십 년간 비슷한 고문서를 팔면서 시작가를 대체로 천 닢 이하로 책정했습니다. 이번에는 물건의 보존 상태도 제대로 공개하지 않았는데 열 배 이상이에요.”
“그럼 누군가 가격을 정해 줬군요.”
“그럴 가능성은 있지만 확인해야겠죠. 특히 그 액수가 계약서에 적힌 금액과 같다면 더더욱요.”
계약서에 돈이 적혀 있는 것은 이상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 숫자를 물건의 가격으로 옮겨 쓰는 순간 사람들은 두 금액을 같은 것으로 착각하기 쉬웠다. 진혁은 낡은 동화 두 닢짜리 반지에서 시작된 자신의 일이 어느새 숫자의 마술과 싸우는 일이 되었다고 생각했다.
“좋은 정보 감사합니다.”
“대가는 이미 청구했습니다.” 윤상화가 말했다. “공증 수수료 말입니다.”
진혁은 영수증을 보고 눈을 크게 떴다. “은화 여덟 닢이나요?”
“계약을 섣불리 승계한 뒤 지불하는 금화보다는 싸지 않습니까.”
“그 말씀을 들으니 갑자기 굉장히 저렴해 보이네요.”
윤상화는 처음으로 작게 웃었다. 진혁은 영수증을 접어 자신의 기록철에 넣었다. 평범한 비용이지만, 이번에는 정말로 무언가를 산 기분이었다. 적어도 누군가 자신의 입을 빌려 마음대로 동의했다고 말하지 못하게 하는 작은 증거를 샀다.
청동각에서 나왔을 때 오후의 햇살이 사라지고 있었다. 거리에는 옷깃을 여민 사람들이 늘었고, 마차 바퀴가 젖은 돌 위에서 긴 줄을 그었다. 진혁은 접견실에서 한 번도 물에 손대지 않은 채 식어 버린 찻잔을 생각했다.
“저 사람은 제가 어떤 종이든 사인할 거라고 믿었나 봅니다.”
“그렇게 믿고 있었겠지.” 세리아가 말했다. “서명 하나로 사람의 미래를 바꾸는 장사를 하고 있으니까.”
라일이 두 사람 사이로 팔을 뻗었다. “하지만 대단한 소식이 있어요. 출품품의 정식 등재 번호를 알아냈습니다.”
“어떻게?” 카렌이 물었다.
“청동각 서고 입구에 오늘 배송된 화물 목록이 붙어 있더라고요.”
“출입 금지 구역에 들어갔어?”
“입구에 붙어 있었다니까요.”
카렌은 그 말을 믿지 않았지만 라일이 내민 작은 종이를 확인했다. 계약서는 ‘고문서’가 아닌 ‘복합 유물’로 분류되어 있었다. 보관 장소는 왕립 감정청 부속 격리실. 경매 전날 저녁에만 청동각으로 운송될 예정이었다.
“원본은 아직 이 건물에 없군요.” 진혁이 말했다.
“응.” 라일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경매 시작가의 보증인은 청동각이 아니야. 왕립정리위원회야.”
에르딘의 조직이었다.
진혁은 마차가 지나는 길에서 잠시 멈춰 섰다. 달콤한 견과를 파는 노점이 보였지만 손이 가지 않았다. 그들이 계약서를 팔려는 이유는 돈만이 아닐 것이다. 일만 금화란 액수는 사람을 쫓아내는 장벽이자, 진혁에게 단 한 번의 선택만 남기려는 압박처럼 보였다.
“그럼 돈을 벌 방법부터 찾아야겠네요.”
세리아가 진혁을 돌아봤다. “정말 입찰할 생각이야?”
“무턱대고는 아니고요. 일단 경매에 참여할 권한은 있어야 하잖아요.”
“자네는 월급이 얼마지?”
“지금 제 월급 얘기를 하실 때가 아니지 않습니까?”
“그럼 내 경매장 재정을 위험에 빠뜨리겠다는 이야기도 하지 말아야지.”
진혁은 입을 다물었다. 카렌이 옆에서 웃음을 삼켰다. 두 사람은 곧장 왕도 감정청으로 향했다.
감정청의 공개 서고는 화려한 청동각과 달랐다. 출입문 손잡이의 니켈 도금이 벗겨졌고, 서고 한쪽에서는 서류를 말리는 숯난로가 약하게 타고 있었다. 직원들은 낡은 신발 밑창으로 돌계단을 오르내리느라 분주했다.
거기에서 만난 기록 담당자 한서린은 서류에 적힌 ‘서진혁의 가족’이라는 문구를 오래 바라봤다. 왕도에서 함께 영번 감정대의 기록을 조사했던 그녀는 진혁의 얼굴에 드리운 피로를 한눈에 알아봤다.
“정식 가족 기록은 시청 시민명부에서 찾을 수 있지만, 이번 건은 그보다 오래된 기술 장부를 봐야 할 것 같습니다.”
“기술 장부요?”
“초대 루멘 설계 기록에서 성 대신 직책으로 사람을 적은 흔적이 있었거든요. ‘서씨 등불 수리자’라는 칸이요.”
진혁은 그 말에 어렴풋한 기억을 떠올렸다. 어렸을 적 식탁 아래에서 가지고 놀던 낡은 구리 나사. 어른은 그것을 버리지 못하게 했다. 아무것도 아닌 물건 같아도 제 자리를 찾으면 누군가의 길을 밝혀 준다고 했다.
“등불 수리자면 기술공 아닙니까?”
“그렇습니다. 그런데 설계 장부의 뒷부분에서는 그 자리가 ‘영구 보증인’으로 바뀌어 있어요.”
서린이 두 장의 사본을 펼쳤다. 앞쪽은 오래된 먹으로 쓴 기록이었다. 뒤쪽의 잉크는 색이 더 짙었고 필획도 달랐다.
“처음부터 같은 문서가 아닌 것 같은데요?” 진혁이 말했다.
“바로 그걸 확인하려고 했습니다. 경매에 나온 계약서 원본이 있어야 단정할 수 있지만, 먼저 비교할 수 있는 물건을 찾을 수 있어요.”
서린은 오래된 등록 번호를 가리켰다. 왕실 압류품의 소액 보조 경매에 올라온 낡은 물건 하나였다.
‘등불 수리자의 연습 도장. 예정가 은화 세 닢.’
라일의 얼굴이 밝아졌다. “드디어 저희 형편에 맞는 경매가 나왔네요.”
그러나 서린은 고개를 저었다.
“그 도장은 내일 정오까지만 공개 감정합니다. 이미 청동각 쪽에서 감정 취소 요청을 넣었거든요.”
진혁은 그제야 피곤함을 잊었다. 진짜 단서를 찾았다면 상대가 먼저 지우려 들 것이다.
“그럼 정오 전에 가야겠네요.”
건물 밖에서 늦은 저녁 종이 울렸다. 카렌은 몸을 돌려 문을 열었다. 진혁은 서류철을 가슴에 안았다. 가족의 이야기를 찾으러 왔는데, 먼저 만나게 된 것은 은화 세 닢짜리 낡은 도장이었다. 이상하게도 그 편이 마음에 들었다.
일만 금화를 가진 적은 없어도, 값싼 물건의 가치를 찾아내는 일이라면 자신이 할 수 있었다.
제152화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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