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아직 준비되지 않았다.’
그 한 문장이 마레온 전체를 뒤흔든 것은 아니었다. 부두의 시장은 여전히 열렸고, 야간 어선은 시간에 맞춰 돌아왔으며, 어린아이들은 아침에 빵을 사러 뛰어다녔다. 루멘 심실의 종소리를 들었다는 경비병 몇 명의 증언은 항만 기록청의 작은 조사실에서 먼저 다뤄졌다. 그러나 그 말을 들은 서진혁 일행에게는 단순한 소문 이상이었다.
“누가 말했는지 확인했나요?” 진혁이 물었다.
경비대장은 어깨를 으쓱했다. “들었다는 사람은 여섯입니다. 하지만 각자가 적은 문장이 조금씩 달라요. ‘돌아가라’라고 들었다는 사람도 있고 ‘기다려라’라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같은 소리를 들은 사람들이 서로 다르게 기억하는군요.”
“그렇습니다. 그래서 있는 그대로 기록했어요.”
해린은 그 정직한 보고에 고개를 끄덕였다. 사람이 들은 말에는 해석이 섞인다. 더구나 긴장한 상황에서 들은 낯선 음성은 기억 속에서 익숙한 문장으로 바뀌기 쉽다. 그녀는 측정 장치의 기록과 사람들의 증언을 따로 보관하자고 제안했다.
하지만 에르딘에게는 그런 차이가 중요하지 않았다. 그는 이미 항만위원회 심사장에 ‘심실의 자발적 응답’을 증거로 제출했다. 그것은 심실이 왕립정리위원회의 관리를 원한다는 주장으로 바뀌어 있었다. 누군가의 말이 사실로 검증되기도 전에 소유권에 관한 근거가 된 것이다.
“이런 재주는 진짜 감정사보다 사기꾼에게 더 많죠.” 라일이 말했다.
심사가 시작되기 전 진혁은 에르딘의 서류철을 한 번 더 살폈다. 거기에는 이상한 회계 항목이 있었다. 루멘의 안전 점검 비용을 이유로 신청한 왕립정리위원회가, 다른 한편으로는 ‘회신 독점 사용권 예상 수익’을 계산하고 있었다. 안전을 위해 시설을 맡겠다고 한 조직이 아직 정체도 알 수 없는 응답에서 수익을 예상하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가 놓친 금액이 있군요.” 벨라가 말했다.
“얼마나 큰데요?”
“금화 일만 닢 이상이에요. 그런데 왜 그런 값을 매겼는지 근거가 없습니다. 수익을 낼 수 있다는 기대만 적혀 있어요.”
진혁은 숫자를 바라봤다. 동화 두 닢짜리 반지와 동화 마흔 닢짜리 보조축으로 시작된 일이 이제 금화 일만 닢을 넘어섰다. 숫자가 커졌다고 그것이 정당한 값이 되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투자자들에게는 그 반짝이는 숫자만으로 충분할 수도 있었다.
그는 자신이 처음 루멘에 들어왔을 때를 떠올렸다. 보석과 마법 무기를 감정할 줄 알면 부자가 될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실제 경매장을 움직이는 건 물건의 기능만이 아니었다. 누가 위험을 감수하고, 누가 책임을 떠안고, 누가 돈을 돌려받는지를 결정하는 계약이었다.
라일은 서류철 옆에서 작은 신문을 펼쳤다. 신문 1면에는 ‘괴수 경매장 폐쇄 위기’라는 자극적인 제목이 실려 있었다. 기자는 심실이 위험하다는 소문을 근거로 주민들의 불안을 강조했지만, 실제 안전 점검 결과는 한 줄도 설명하지 않았다.
“어떤 사람은 아직 문서를 읽기도 전에 결과를 정해 놨군요.” 카렌이 말했다.
세리아는 신문을 접어 옆에 놓았다. “그럼 우리는 결과가 아니라 우리가 확인한 과정을 말하면 돼.”
그 말에 진혁은 어깨를 폈다. 누구보다 화려한 말이 아니라 누구나 다시 확인할 수 있는 기록을 남기겠다고 마음먹었다. 심사가 어떤 결론을 내리든 자신의 역할은 분명했다. 아직 보지 못한 것을 안다고 말하지 않고, 본 것은 누구나 확인할 수 있는 방식으로 남기는 것.
그날 오전 공개 심사는 시청의 긴 회랑에서 열렸다. 하얀 대리석 바닥에 겨울 물기가 묻어 미끄러웠고, 판서들은 바깥에서 기다리는 사람들에게 번호표를 나눠 주었다. 방청석에는 루멘 경매장 직원뿐 아니라 주변 상인, 항만 노동자 대표, 인근 주민들이 모였다. 모두가 심실의 비밀을 알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경매장이 갑자기 닫히면 일자리가 줄고, 수로가 멈추면 항구의 침수 위험이 늘어난다는 사실은 알았다.
에르딘은 정장을 정리하고 단상에 섰다. “왕립정리위원회는 공공의 안전을 위해 99년 운용권을 요청합니다. 위험 설비를 능력 없는 개인에게 맡겨 둘 수는 없습니다.”
그는 영업 중단 안내문과 심실 온도 상승 수치를 제시했다. 기록 자체는 진짜였다. 그래서 더 교묘했다. 선택한 사실들만으로 전혀 다른 결론을 만들 수 있었기 때문이다.
세리아가 일어섰다. “제 경매장이 완벽하다고 말할 생각은 없습니다. 안전 검사를 진행 중이고 그 결과를 제출하겠습니다. 하지만 그 결론이 왕실의 독점 운용권 매각이어야 한다는 이유는 아직 제시되지 않았습니다.”
오렐은 냉각 수로의 유량 보고서를 설명했다. 도르는 수십 년간의 설비 교체 기록을 제출했다. 진혁은 감정 능력으로 본 환영을 증거처럼 내세우지 않았다. 대신 공개 경매에서 동화 마흔 닢에 낙찰받은 보조축의 실험 결과와, 발신 신호와 독립 반응을 구분한 기술 도면을 보여 줬다.
“이 시설에는 아직 기능이 확인되지 않은 장치가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관리권을 무작정 넘기면 안 됩니다.”
에르딘이 차갑게 웃었다. “소액 낙찰품 하나로 국가 시설의 안전을 논한다는 겁니까?”
“값싼 부품이 쓸모없다는 뜻은 아니잖아요. 비싼 계약도 안전하다는 뜻은 아니고요.”
방청석에서 작게 웃음이 터졌다. 그러나 진혁은 웃는 데 시간을 쓰지 않았다. 그는 에르딘이 제출한 문서의 마지막 문장을 가리켰다.
‘수취 권리 포함.’
“이것은 냉각 수로 운영과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누군가 제0호의 답을 받을 권한까지 왜 같이 사야 하죠?”
에르딘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 “관리자가 원본 응답을 확인할 필요가 있기 때문입니다.”
“확인할 필요와 독점할 권리는 다르죠.” 카렌이 말했다.
심사장은 잠시 술렁였다. 위원장조차 문서에 적힌 그 조항을 자세히 읽지 못한 듯했다. 그는 에르딘에게 보충 자료를 요구하고, 회신 수신권을 포함한 운용권 심사를 별도로 유보했다. 시설 안전에 필요한 임시 감독은 계속하되 소유권 변경이나 독점 수신권 설정은 허용하지 않았다.
심사 중간에는 방청석에서도 발언 요청이 있었다. 에다 아주머니는 시장 상인 대표로 나와 직접 그린 골목 지도를 내밀었다. 그녀의 목소리는 격식을 갖춘 대리인들보다 훨씬 크고 분명했다.
“우리에게 중요한 건 저 건물이 무너지느냐 아니냐예요. 지금도 사람들이 그 골목으로 출근하고, 아이들이 지나갑니다. 안전하게 해 준다면 누가 관리하든 상관없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장부를 보니까 그 양반들은 우리가 어떻게 사는지도 모른 채 돈 얘기부터 하더군요.”
위원장은 정해진 발언 시간이 지났다고 알렸다. 에다는 마지막으로 진혁을 가리켰다. “저 젊은이는 이상한 물건을 보면 무작정 팔려고 하지 않고 먼저 살펴봅니다. 그 정도는 누구나 해야 하는 거 아닙니까?”
진혁은 민망해서 시선을 내렸다. 에르딘은 웃지 않았다. 세리아는 뒤에서 에다에게 작은 고개 인사를 했다.
오렐은 이어서 기술적인 한계를 설명했다. 루멘의 냉각 수로는 일부 구간에 응급 우회관을 설치할 수 있었지만, 제2심실의 내부를 아직 조사하지 못했다. 따라서 정상 영업과 안전 점검을 병행하는 것조차 조건부로만 가능했다. 위원장은 그 말을 듣고 기존 운영진에게도 추가 보고 의무를 부과했다. 세리아는 거부하지 않았다. 공정한 심사는 자신들에게도 불편한 결론을 줄 수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이렇게 되면 사장님도 더 많은 돈을 써야겠네요.” 진혁이 속삭였다.
“이미 알고 있었어.” 세리아가 말했다. “그래도 내지 않는 것보다는 낫지.”
그녀의 눈길은 방청석 뒤쪽의 직원들에게 향했다. 그들은 오늘도 저녁에 집으로 돌아가야 하는 사람들이었다. 돈을 아끼려고 안전을 포기할 수 없다는 결론은 그 얼굴들 앞에서 더 명확해졌다.
위원장이 중간 결정을 읽을 때, 누군가 복도 쪽으로 급히 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라일은 자연스럽게 시선을 돌렸다. 회색 장갑을 낀 젊은 남자가 에르딘의 서류 가방을 들고 있었다. 라일은 그의 뒷모습에서 운송조합의 오래된 매듭법을 알아봤다. 이름 없는 배달인들이 자신을 나타내기 위해 쓰던 것과 비슷했다.
“저 사람, 어디서 본 것 같은데.” 그가 중얼거렸다.
진혁이 물으려는 순간 재판정 안에서 또 다른 질문이 시작됐다. 라일은 지금 뒤쫓으면 공개 심사에서 중요한 증언을 놓칠 수 있다는 걸 알았다. 그는 대신 출입문 옆 경비에게 남자의 옷차림과 이동 방향을 기록해 달라고 부탁했다. 이제 혼자서 사람을 쫓는 것만이 유일한 방법은 아니었다.
심사가 끝났다고 모두 안도하지는 못했다. 에르딘은 자신의 패배를 인정하지 않았다. 그는 긴 회랑에서 진혁에게 다가와 조용히 말했다.
“당신은 근본적인 문제를 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제0호에 응답할 사람이 없으면 기한이 끝나는 순간 자동 처리가 시작됩니다.”
“어떤 자동 처리죠?”
“당신이 누구보다 잘 보지 않습니까? 물건의 본질을.”
진혁의 등줄기가 차가워졌다. 에르딘은 그 능력을 알고 있었다. 적어도 누군가 그에 관해 설명해 줬다는 뜻이었다.
“제 손바닥에서 무엇을 보시죠?” 진혁이 물었다.
남자는 웃었다. “아무것도요. 그래서 더 값비싼 능력인 겁니다.”
그날 저녁 해린이 오래된 음성 필름을 복원해 앞부분을 찾아냈다. 유나로 추정되는 목소리는 문이 닫히기 직전 이렇게 말했다.
‘내가 여기 있으면 안 돼. 응답을 받는 자리에는 감정사가 앉을 수 없어. 내가 대신 들어가면 모두가 내 침묵을 동의라고 기록할 거야.’
세리아는 마지막까지 듣고도 눈물을 보이지 않았다. 다만 손에 쥔 찻잔을 내려놓는 동작이 아주 조심스러웠다.
그 뒤에 낮은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러면 네가 나가. 나는 네 번째 신호를 지키겠다.’
해린은 소리를 몇 번 되감았다. 남자의 억양은 과거 레온과 함께 일했던 한서겸의 것과 비슷했다. 그러나 음질이 좋지 않아 확신할 수 없었다.
그 순간 수신 장치의 기록 바늘이 갑자기 종이를 찢었다. 전령통 쪽에서 누군가 강한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미송신 회신의 최종 요청 시작.]
[수취인 확인 실패 시, 제0호 직무 자동 배정.]
[우선 후보: 서진혁.]
진혁은 종시계를 바라봤다. 아직 기한이 남았는데도 절차가 당겨지고 있었다.
“시간을 훔쳤군요.” 그가 낮게 말했다.
카렌이 검집을 붙잡았다. “누가요?”
“우리에게 삼십 일 준다고 했던 사람이요. 애초에 그걸 지킬 생각이 없었던 겁니다.”
제149화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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