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렌이 아버지의 검집을 다시 연 것은 오래된 화상 자국을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레온의 검에는 날카로운 전투의 흔적이 거의 없었다. 손잡이의 가죽은 여러 번 갈아 끼웠지만, 칼날의 옆면에는 일정한 간격으로 닳은 자국이 남아 있었다. 카렌은 그것을 칼집을 자주 넣고 뺀 흔적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해린이 검을 손에 들었을 때, 그녀는 전혀 다른 말을 했다.
“이건 검으로만 쓰인 게 아니에요.”
해린의 손가락이 칼등의 가는 홈을 따라 움직였다. 홈은 세 개씩 두 묶음으로 나뉘었고 끝에는 아주 작은 깊은 자국이 하나 있었다. 시각이 아닌 촉각으로 세상의 표면을 기억하는 사람만이 알아차릴 수 있는 흔적이었다.
“문을 두드리는 도구였군요.” 진혁이 말했다.
“정확히는 문 밖에서 응답이 없을 때, 안쪽 사람에게 신호가 도착했는지 확인하는 장치였어요.” 해린이 답했다.
카렌은 숨을 고르며 칼날을 바라봤다. 어린 시절 아버지는 검을 휘두르기 전에 늘 칼집을 두 번 두드렸다. 카렌은 그것을 긴장할 때 나오는 버릇이라고 생각했다. 그가 집을 떠나던 마지막 날에도 똑같은 소리를 들었다. 이제 그 버릇이 어떤 작업의 일부였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어머니는 아버지가 이 검으로 사람을 구했다고 하셨어요.”
“틀린 말은 아니겠죠.” 해린이 말했다. “하지만 사람을 해치지 않고 구하는 방법도 많습니다.”
루멘의 제2심실로 이어지는 통로는 계속 봉쇄된 상태였다. 왕립감정청은 별도 기술위원회를 보내기로 했지만 도착까지 이틀이 더 걸렸다. 그동안 제0호 회신 기한은 하루씩 줄어들었다. 진혁은 기다리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과 기다리기만 할 수는 없다는 것을 동시에 알았다.
그들은 검집과 황동판의 홈을 도면 위에 겹쳤다. 레온의 검집 끝에 새겨진 둥근 흔적과 43번 황동판의 네 번째 점은 모양이 비슷했다. 그러나 크기가 조금 달랐다. 아무리 비슷해도 강제로 끼워 넣으면 부품이 부러질 가능성이 있었다. 도르는 검집의 금속 끝을 다치지 않도록 나무 원통을 먼저 깎아 모형을 만들었다. 오렐은 황동판 복사품에 홈을 판 뒤 기계적인 접촉 가능성을 시험했다.
“맞습니다.” 도르가 말했다. “다만 둘을 연결하면 문이 열리는 게 아니라 기록 신호를 되돌려 보내는 통로가 열려요.”
카렌은 검을 거꾸로 쥐고 손잡이를 바라봤다. “그러면 아버지는 그걸 왜 검으로 만들었을까요?”
라일이 대답했다. “검은 사람이 항상 들고 다녀도 이상하지 않으니까요. 특히 카렌 씨 아버지처럼 검을 직업으로 썼던 사람이라면.”
“그래서 표적이 되기도 쉽죠.” 카렌이 말했다.
검을 조사하던 날 낮, 카렌은 한참 동안 루멘의 빈 연습장에 혼자 남아 있었다. 그녀는 검을 뽑아 허공에 몇 번 휘둘렀다가 천천히 칼집에 넣었다. 레온이 가르쳐 준 동작이었다. 손목에 힘을 실을 때는 숨을 내쉬고, 상대의 칼을 막을 때는 발을 먼저 옮기라는 가르침. 그 기억만은 어떤 서류로도 바꿀 수 없었다.
“오늘은 훈련이 더 길군요.” 진혁이 연습장 문가에 서서 말했다.
“머릿속이 복잡할 때는 몸을 움직이는 게 낫거든요.”
“그럼 저도 배울 수 있습니까?”
카렌은 진혁의 자세를 위아래로 훑었다. 그는 무기를 잡기보다 감정표를 쥘 때 더 편안한 사람이었다. 그녀는 길이가 짧은 연습용 목검을 하나 건넸다.
“기본부터 해요. 다리를 조금 벌리고, 손잡이는 너무 꽉 쥐지 마세요.”
진혁이 그녀의 지시를 따라 서자 라일이 문밖에서 구경하다 웃음을 터뜨렸다. “그렇게 서 있으면 상대가 때리기도 전에 사과하시겠어요.”
“그럼 안 때리지 않을까요?”
“던전 괴물한테도 그렇게 말해 보세요.”
카렌은 웃음을 참다가 진혁의 발 위치를 고쳐 줬다. 두 사람의 거리가 가까워지자 진혁은 괜히 목검 끝을 내려다봤다. 카렌이 아무 말 없이 손목 각도를 바로잡아 주는 동안 방 안에서는 바람에 문이 가볍게 울리는 소리만 들렸다.
“아버지가 저에게 검을 처음 주셨을 때 말했어요.” 카렌이 말했다. “‘절대로 모든 문제를 검으로 풀려고 하지 마라.’ 그땐 강한 사람이 일부러 멋있는 말을 하는 줄 알았죠.”
“지금은요?”
“아버지도 답을 모르는 일이 많았던 거겠죠. 그래도 제가 그걸 알아낼 수 있도록 가르쳐 준 것 같아요.”
진혁은 목검을 내려놓고 그녀를 바라봤다. 레온의 이름이 둘 사이에서 처음으로 무거운 의무가 아닌, 한 가족의 기억이 된 듯했다. 카렌은 그 느낌이 싫지 않았다.
“훈련은 끝인가요?” 라일이 물었다.
“아닙니다.” 카렌이 돌아섰다. “이번에는 라일 씨 차례예요.”
라일의 얼굴이 굳었다. 그는 재빨리 연습장 밖으로 도망쳤다. 진혁과 카렌은 한참 웃었다.
그러나 카렌은 목검을 거치대에 올려놓으면서 곧 다시 진지해졌다. 심실과 아버지의 과거를 알아내는 데는 아직 시간이 필요했다. 그래서 그녀는 그날만큼은 당장 할 수 있는 일을 먼저 하기로 했다. 검의 오래된 홈을 훼손하지 않고 기록하고, 누구에게 보여 줄 수 있는지 확인하는 일. 아버지가 남긴 물건을 성급하게 해체하지 않는 것도 딸로서 할 수 있는 선택이었다.
오후에는 안전 점검단이 항만을 돌았다. 루멘 주변의 좁은 골목, 오래된 방조제, 바닷물이 드나드는 암거가 모두 검사 대상이었다. 진혁은 조사팀과 함께 부두 아래의 오래된 통로를 걸었다. 물이 빠진 바닥에는 게와 조개가 붙어 있었고, 둥근 천장에서 소금 섞인 물방울이 떨어졌다. 등불을 비추면 암거 벽의 흰 줄이 층층이 드러났다. 항구의 역사를 나이테처럼 품은 흔적이었다.
이 통로는 제2심실의 외부 배수구와 연결될 가능성이 있었다. 문제는 조수였다. 만조가 시작되면 수위가 빠르게 높아져 사람이 들어갈 수 없었다. 조사팀은 통로 입구에서 밧줄을 고정하고, 시간을 기록한 뒤 전문 잠수 인력에게 안쪽 확인을 맡겼다. 진혁은 따라 들어가고 싶었지만 시설 기사의 설명을 듣고 포기했다. 바닷물 아래에서는 그의 감정 능력보다 압력과 호흡 시간이 더 중요했다.
기사가 돌아온 것은 해가 중천을 조금 넘었을 때였다. 그는 손에 진흙 묻은 작은 유리판을 들고 있었다. 원래 벽에 고정된 표식의 일부였지만 수로 진동으로 떨어져 나왔다는 설명이었다. 유리판에는 같은 모양의 문자가 서로 마주 보고 새겨져 있었다.
“두 개의 열쇠네요.” 진혁이 중얼거렸다.
[쌍방 확인판.]
[기능: 외부 요청과 내부 반응의 시간을 각각 보존.]
[중요: 두 기록이 일치하더라도 요청자의 권한을 증명하지는 않음.]
카렌이 문장을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한쪽에서 문을 열고 다른 쪽에서 문을 열어야 했다는 뜻인가요?”
“열기보다 통과시키는 겁니다.” 오렐이 말했다. “바깥에서 요청이 들어왔고, 안쪽에서 응답이 왔다는 걸 두 곳에 따로 남기는 거죠.”
점검단은 암거 밖으로 나온 뒤 씻을 물부터 찾았다. 옷자락에는 진흙과 소금이 묻었고, 수문 주변의 이끼 때문에 누구나 발걸음을 조심해야 했다. 도르는 자잘한 돌을 세어 넣은 유리병을 들고 왔다. 어릴 때부터 조수의 높이를 기록할 때 쓰던 방법이었다. 물이 어느 선까지 올라오는지 숫자로 남길 도구가 없었던 시절, 사람들은 돌의 개수로 물때를 기억했다.
“그때는 이런 게 과학인 줄도 몰랐소.” 도르가 웃었다.
“지금도 과학이죠.” 오렐이 대답했다. “비교할 기준을 만들고 같은 조건을 반복해서 확인한 거니까요.”
그 말에 카렌은 아버지의 검집을 내려다봤다. 누군가 오래전 비밀을 지키기 위해 새겨 놓은 홈도 결국 그런 기록일 수 있었다. 사람들의 기억이 흐려져도 같은 모양을 다시 찾아낼 수 있게 남긴 흔적.
진혁은 잠수 인력의 작업 일지를 확인했다. 현장에는 왕립감정청과 기술청의 공동 보관 담당자가 동행했다. 유리판은 어느 위치에서 떨어져 있었는지, 수면 아래 얼마만큼 잠겨 있었는지 기록됐다. 만약 나중에 누군가 발견 장소를 바꿔 말하더라도 최소한 오늘의 기록은 남을 것이다.
“이젠 어떤 물건도 혼자 몰래 주워 오기가 어렵겠군요.” 라일이 말했다.
“불만입니까?” 카렌이 물었다.
“아뇨. 전문 도둑의 입장에서 실무가 꽤 번거로워져서요.”
“그러면 직업을 바꾸세요.”
라일은 손가락으로 턱을 두드렸다. “감정사 조수가 나쁘지 않겠네요. 월급만 괜찮다면.”
진혁은 곧바로 고개를 저었다. “제 월급도 간신히 지키는 처지라서요.”
셋은 웃었지만 도르의 표정은 무거웠다. 그가 만든 장치가 누군가의 동의를 왜곡하는 데 쓰였다는 생각이 아직 그를 괴롭히고 있었다. 카렌은 도르에게 말했다. “아버지가 어떤 일을 했든, 지금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일은 해야 해요. 도르 씨도 마찬가지입니다.”
노인은 잠시 고개를 들었다. “그래야겠지요.”
바다 위에는 갈매기 떼가 낮게 돌고 있었다. 만조가 다가오자 암거 입구를 막은 쇠문이 다시 물에 잠겼다. 그 안쪽에 무엇이 있든, 다음 조사는 다음 물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그날 밤 해린은 카렌에게 검을 다시 돌려주었다. “아버지가 유나를 끝까지 지킨 사람인지, 중간에 돌아선 사람인지 저는 몰라요. 다만 열두 해 전 그가 네 번째 소리를 없애라는 명령을 거부한 건 기억합니다.”
카렌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한때는 아버지의 모든 선택이 옳았다는 답을 듣고 싶었다. 이제는 그가 옳지 않았던 순간까지 알고 싶었다. 그래야 그의 이름을 누군가의 도구가 아닌 실제 사람의 것으로 남길 수 있을 것 같았다.
카렌이 검집을 허리에 찼을 때, 진혁이 조용히 다가왔다.
“오늘은 같이 가도 될까요?”
“어디를요?”
“바깥 계단까지요. 오늘 하루 혼자 있기 싫을 것 같아서.”
카렌은 그를 잠시 바라보다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은 항구의 작은 등불이 보이는 계단에 나란히 앉았다. 바람이 차가웠고, 멀리서 부두 작업이 끝나는 종이 울렸다.
“당신은 늘 뭔가를 알아내죠.” 카렌이 말했다.
“아닌데요. 모르는 게 훨씬 많습니다.”
“그래서 계속 묻는 거겠죠.”
진혁은 웃었다. 그녀가 자신의 질문을 귀찮아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고마웠다. 그는 평소와 달리 농담을 억지로 꺼내지 않았다.
계단 아래에서 라일이 급히 올라왔다. “두 분, 분위기 깨서 미안한데요. 새벽 물때가 바뀌면 제2심실에서 종소리가 들린답니다.”
“누가 들었죠?”
“항만 경비대 전원이요. 그리고 그들이 공통으로 들었다는 말이 있어요.”
라일의 얼굴에서 장난기가 사라졌다.
“문밖에 있는 사람은 돌아가라. 나는 아직 준비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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