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레온으로 돌아가는 야간열차의 창문은 바깥쪽보다 안쪽이 더 차가웠다.
왕도 에르반의 플랫폼에서 묻어 온 눈발이 객실 문턱에 녹아 작은 웅덩이를 만들었다. 화물열차와 여객열차가 엇갈리는 환승역마다 검은 석탄 냄새가 밀려왔고, 새벽이 가까워질수록 차창 너머 지형은 완만한 언덕에서 갈대밭으로 바뀌었다. 바다까지 이어지는 낮은 강이 모습을 드러낼 무렵에는 승객들의 잠든 얼굴에도 옅은 푸른빛이 비쳤다.
서진혁은 무릎 위에 올려 둔 낡은 종시계 때문에 잠을 이루지 못했다. 왕도 중앙 비축고 경매에서 은화 아홉 닢에 낙찰받은 물건이었다. 진품 감정서에는 ‘구형 기록용 종시계, 부분 작동’이라 적혔다. 멀쩡한 시계보다 가치가 낮아 보였던 이유는 분명했다. 분침이 열세 분을 넘길 때마다 멈췄고, 종은 울리지 않았다.
하지만 진혁에게는 다른 문장이 보였다.
[기록 코어: 미송신 회신 1건.]
[원래 수취 주소: 루멘 경매장 심실.]
[수취 상태: 미확인.]
[회신 기한: 30일 후.]
문제는 그 ‘30일’이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거 좀 내려놔요.” 맞은편 카렌이 말했다. 그녀는 무릎에 펼친 지도를 접고 있었다. “세 번째로 똑같은 자리를 만지고 있어요. 더 들여다본다고 당장 답이 나오지 않잖아요.”
“시간표와 시계가 안 맞으니 신경이 쓰여서요.”
“당신 눈에 보이는 문구를 전부 믿으면 안 된다는 얘기도 했죠.”
“믿는 게 아니라 따져 보는 겁니다. 지금 제 손에 있는 은화 아홉 닢이 얼마나 불길한지.”
카렌은 대꾸 대신 시계 옆에 두었던 천을 다시 덮어 주었다. 그녀가 검집을 점검할 때마다 사용하는 부드러운 면포였다. 진혁은 잠시 그녀의 손을 바라봤다. 검을 쥐는 사람의 손이라고 해서 거칠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손등에는 얇은 흉터가 몇 개 남아 있었고, 천 끝을 접을 때는 누군가의 상처를 감싸듯 조심스러웠다.
“고마워요.”
“그 말도 세 번째예요. 잠이나 자요.”
옆 좌석에서 라일이 눈을 감은 채 끼어들었다. “두 분이 서로 챙기는 횟수를 따질 거면 저는 수면 수당을 받아야겠어요.”
“자네는 열차에 타자마자 잠들었잖아.” 진혁이 말했다.
“그러니까 더 억울하죠. 이렇게 재미있는 걸 놓칠 뻔했으니까.”
세리아는 객실 맨 뒤의 작은 식탁에서 회계 담당 벨라가 보내온 전보를 읽고 있었다. 루멘 경매장에서는 그들이 왕도에 머무는 동안 별다른 대형 사고가 없었다. 다만 심실 아래 냉각 수로의 온도가 지난주보다 두 도 높아졌다는 점이 마음에 걸렸다. 그녀는 숫자가 적힌 종이를 몇 번이나 접었다 펼쳤다.
“도착하면 먼저 영업을 중단해야 할까요?” 진혁이 물었다.
“전체를 닫지는 않을 거야.” 세리아가 말했다. “입찰장을 폐쇄하면 맡긴 물건을 돌려받아야 하는 사람들도 발이 묶여. 심실과 이어진 옛 회랑을 막고 기술 점검을 할 거다. 책임자는 내가 직접 맡을 거고.”
“사장님이 정말 사장님답게 말씀하시네요.”
“월급을 깎아 달라는 뜻으로 들리는데?”
“제가 방금 졸았나 봅니다.”
짧은 웃음 뒤에 잠시 정적이 찾아왔다. 열차 바퀴가 이음매를 지나며 규칙적인 소리를 냈다. 진혁은 그 소리에 시계의 무음 박자가 겹치는 듯한 착각을 느꼈다. 손바닥의 문구가 잠깐 번졌다가 사라졌다.
열차가 마지막 정거장을 앞두고 속도를 줄이자 객실 복도에서 차를 파는 소년이 지나갔다. 소년은 식어 버린 주전자 때문에 평소 가격의 절반만 받겠다고 했다. 진혁이 은화 한 닢을 건네자 소년은 잔돈이 없다며 난처해했다.
“그냥 둘 다 사죠.” 라일이 말했다. “따뜻한 물이라도 먹어야 잠이 깨겠습니다.”
소년은 미안한 표정으로 두 잔을 건넸다. 진혁은 차의 온기를 손끝으로 느끼며 왕도에서 겪은 일들을 잠시 내려놓았다. 수많은 계약서와 마법 장치가 머릿속에 뒤엉켜 있었지만, 소년에게는 지금 잔돈을 정확히 돌려주는 일이 더 중요한 문제일 것이다.
“소소한 물건은 본질이 안 보여요?” 라일이 물었다.
“보여도 그게 늘 특별한 건 아닙니다. 이 차의 본질은 그냥 차겠죠.”
그는 웃었다. 세상에 있는 모든 물건이 고대 유물일 필요는 없었다. 따뜻한 차가 필요한 때에는 차 한 잔만으로도 충분히 값이 나갔다.
세리아가 그 모습을 보고 조용히 말했다. “루멘으로 돌아가면 직원들에게도 그 얘기를 해 주게. 이번 일은 당장 해결되지 않을 거라고. 대신 우리가 무엇을 모르는지, 어디가 위험한지 먼저 말해 주게.”
진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괴수의 껍질 위에서 일한다는 소문보다 무서운 것은 누구도 사실을 알려 주지 않는 일이었다.
마레온에 도착했을 때 바람은 짠내를 싣고 있었다. 왕도에서 얼어붙었던 코트 자락이 항구의 습기에 축축하게 늘어졌다. 생선 경매를 마친 상인들이 물통을 비우고 있었고, 부두 노동자들은 높은 창고 문 앞에 줄을 서서 오늘의 작업표를 받았다. 거리에는 왕도와 다른 종류의 분주함이 있었다. 종과 가격표가 사람을 움직이는 게 아니라 물때와 바람이 하루의 순서를 정했다.
루멘 경매장의 회색 외벽은 멀리서 보면 수십 년 된 석조 건축물에 불과했다. 아치형 창과 검은 지붕, 입구 양옆의 둥근 돌기둥. 진혁은 처음 이곳에 취직했을 때 고풍스러운 건물이라고 생각했다. 이제는 돌기둥에 섞인 잿빛 결이 단순한 화석이 아니라 오래전 거대한 생물이 남긴 껍질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현관에서 벨라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는 따뜻한 차를 건네기도 전에 두툼한 장부부터 내밀었다.
“사장님, 심실은 어제부터 출입을 제한했습니다. 일반 경매는 정상 진행 중이고, 열두 건의 위탁품 반환 요청이 들어왔습니다. 조사는 조용히 하셔야 해요. 예전에 건물이 살아 있다는 소문이 돌았을 때 계약 해지가 얼마나 많았는지 기억하시죠?”
“기억하지.” 세리아가 말했다.
“그리고 진혁 씨.” 벨라가 눈썹을 치켜올렸다. “출장 정산서에 ‘왕실 경매장 보존 연구비’로 은화 아홉 닢을 쓰셨던데 그 물건이 저 시계입니까?”
“연구비라는 말이 마음에 안 듭니까?”
“물건을 사는 건 구매비예요. 연구는 그다음이고요.”
라일이 작게 휘파람을 불었다. “아무리 깊은 던전도 회계실보다 무섭지는 않군요.”
벨라가 가져온 장부에는 또 하나 이해되지 않는 항목이 있었다. 작은 글씨로 적힌 ‘심실 주변 세대별 변형 추적’이라는 비용이었다. 비용을 신청한 직원은 모두 퇴직하거나 연락이 끊긴 사람이었고, 최근 담당자란에는 도르가 서명해 놓았다. 진혁은 도르를 곧바로 의심하지 않았다. 하지만 도르가 나이를 먹고도 매일 이 낡은 건물을 돌아다니는 이유가 궁금해졌다.
“도르 씨가 처음 이 일을 시작한 건 언제입니까?”
“이곳이 아직 경매장이 아니라 창고일 때였지.” 노인이 말했다. “부두가 지금보다 낮았어. 파도가 높은 날이면 안쪽 통로까지 바닷물이 밀려왔고, 사람들은 물이 빠진 뒤에야 짐을 꺼낼 수 있었소.”
“그런데 굳이 이 건물을 고집하셨군요.”
“여기서 밥을 벌었으니까. 처음엔 창고지기가 시키는 대로 빗물을 퍼냈고, 나중엔 장치를 배우면서 수리공이 됐지. 그리고…….”
도르는 말을 멈췄다. 좁은 창문 너머로 바다가 보였다. 그는 한참 있다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열두 해 전에 내 손으로 연결한 관 하나가 이상한 기록을 만들었어. 그걸 빼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겁이 나서 못 했지. 그래서 아직 여기를 떠나지 못했소.”
진혁은 무슨 관인지 캐묻지 않았다. 대신 새 점검표에 도르의 책임 구역을 적고, 혼자서 심실에 들어가지 말자고 부탁했다. 이미 젊지 않은 기술자에게 모든 책임을 뒤집어씌우는 것은 옳지 않았다. 노인은 표를 보더니 처음으로 진혁에게 존댓말을 썼다.
“이번에는 실수를 되풀이하지 맙시다.”
경매장 안쪽 통로는 공사가 진행 중이었다. 벽에 붙인 보호 천이 바람에 흔들렸고, 작업자 한 명은 바닥 홈에 낀 염분을 작은 솔로 털어 냈다. 진혁은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질문을 했다. 하루 중 언제 벽이 울리는지, 무슨 색의 물방울이 맺히는지, 종이 혼자 울린 적은 없는지. 누구의 대답도 결정적이지 않았다. 오히려 어떤 직원은 진혁이 매번 이상한 일을 맡는 것을 재미있어했다.
“감정사님, 다음엔 건물 자체를 경매에 올리시는 것 아닙니까?”
“그렇게 되면 제 월급부터 감정해야겠네요. 요즘 가치가 계속 떨어지는 것 같거든요.”
사람들이 웃었다. 두려움 속에서도 일상을 유지하려는 직원들의 얼굴을 보면서 진혁은 이곳이 단순한 비밀 유적이 아니라 누군가 매일 출근하는 직장이라는 사실을 되새겼다.
그들은 심실로 이어지는 북쪽 회랑에 들어가기 전에 시설 책임자 도르와 항만 기술관 오렐을 만났다. 심실은 오래된 냉각 설비와 봉인 장치가 얽힌 공간이었다. 천장은 보통 창고보다 낮았고, 벽에는 관절처럼 곡선을 그리며 뻗은 석회질 돌기가 남아 있었다. 바닥에 난 배수구는 사람의 손으로 판 것처럼 직선이 아니었다. 물길은 마치 거대한 갈비뼈 사이를 따라 흐르듯 완만하게 굽어 있었다.
오렐이 측정기를 들이댔다. “냉각 수로 압력은 허용 범위입니다. 하지만 울림이 달라졌어요. 건물이 크게 흔들리는 건 아니고, 누군가 두드렸을 때 되돌아오는 파형이 늘어났습니다.”
“누가 두드렸는데요?” 라일이 물었다.
“그걸 확인하려고 모인 겁니다.”
진혁은 시계를 꺼내 보호대 위에 올려놓았다. 오렐이 전원 공급 없이 측정 가능한지 먼저 확인하고, 도르가 마른 장갑으로 고정나사를 조였다. 작업이 끝나자 시계의 초침이 저절로 한 칸 움직였다.
“어?” 진혁이 숨을 멈췄다.
초침은 두 칸 더 움직이고 멈췄다. 심실 바닥에서 가느다란 진동이 올라왔다. 벽에 기대어 놓은 물통의 표면이 둥글게 파문을 그렸다.
[미송신 회신의 수신기 확인.]
[발신 대상: 제0감정인.]
[확인 절차: 원래 수취인의 응답 필요.]
[대리 응답: 허용되지 않음.]
진혁은 문구를 소리 내어 읽지 않았다. 대신 수첩에 그대로 옮겨 적었다. 능력이 보여 주는 문장이 옳더라도, 그것을 곧바로 법적 사실로 취급하면 안 된다는 점을 지난 사건들에서 배웠다.
“열두 해 전에 쓰인 장치가 지금도 사람의 대답을 기다린다고?” 세리아가 중얼거렸다.
오렐이 고개를 저었다. “장치가 응답을 기다리는 것과, 특정 인물이 살아서 기다리는 건 달라요. 송신기에서 남은 물리적 신호를 받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카렌은 벽 아래 돌기 하나를 가리켰다. “저 부분은 왜 색이 다르죠?”
기술관의 등불이 비추자 다른 돌기와 달리 새로 붙인 금속판이 드러났다. 왕도에서 사라진 43번 황동판의 사진과 크기가 비슷했다. 다만 명판에는 번호가 없었다.
도르는 마른침을 삼켰다. “저런 건 어제까지만 해도 없었습니다.”
그때 심실 안쪽에서 철제 전령통이 덜컹거렸다. 누구도 손대지 않았는데 낡은 수신함 안에서 작은 종이 조각이 밀려 나왔다. 오렐이 위험 여부를 살피고 집게로 종이를 꺼냈다.
종이에는 단 한 줄이 적혀 있었다.
‘회신 가능 기간: 지금부터 스물아홉 번의 일몰.’
진혁은 시계를 내려다봤다. 분침이 마침내 열세 분을 넘어 움직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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