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실 중앙 비축고 특별 경매 마지막 날, 에르반의 하늘은 맑았다.
전날까지 수로 위에 걸려 있던 비구름이 사라지자 궁성의 청동 지붕이 햇빛을 받아 푸르게 빛났다. 전시장 밖에는 새벽부터 마차가 줄을 섰고, 관리인들은 불편한 표정으로 출입증을 확인했다. 오래된 창고 정리품을 사러 온 사람들과 분실 사건의 소문을 확인하러 온 사람들이 뒤섞였다. 어떤 상인은 값싼 부품을 사려 했고, 어떤 귀족은 왕실 문장이 들어간 물건을 품에 안을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 들떠 있었다.
서진혁은 입찰석 뒤편에서 작은 장부를 세 번 확인했다. 오늘 필요한 돈은 생각보다 많지 않았다. 문제가 되는 장치의 출품을 멈출 증거, 제0접수의 신호가 경매원의 인도 기록과 연결되는 순간을 보여 줄 공인 기술자, 그리고 누군가 사들여도 되는 정상 유물 한 점. 그 세 가지만 있다면 무력으로 전시장을 뒤집을 필요는 없었다.
“얼굴이 굳었어요.” 카렌이 말했다.
“경매장에 올 때마다 제 돈이 줄어드니까요.”
“오늘도 빚이 걱정되는군요.”
“오늘은 제 빚이 아니라 남의 빚이요.”
카렌은 미소를 지었다. 그녀는 진혁의 장갑을 고쳐 끼워 주었다. 예전 같으면 괜히 쑥스러워 퉁명스럽게 대꾸했겠지만 진혁은 이번에는 작게 고맙다고 말했다. 옆에서 라일이 목을 길게 뺐다.
“저도 장갑 끼워 주는 사람 없습니까?”
세리아가 서류뭉치를 내밀었다. “자네는 영수증이나 들고 있어.”
전시장에는 하서린과 시설 본부의 기술관, 왕실 감사관 두 명이 입회했다. 그들은 특별 경매를 전면 중단시키러 온 것이 아니었다. 문제 있는 이송 신호가 거래 완료 기록에 개입하는지 공개 상태에서 시험할 수 있도록 경매원과 협의한 것이었다. 개인 수취인 명부는 비공개로 유지했고, 시험에는 기관이 발급한 가상 번호만 사용하기로 했다.
첫 번째 문제는 경매원 운영진이 수동으로 작성한 인도 기록이었다. 수리공이 산 황동 부품은 정상적으로 낙찰됐고, 직원이 입찰자에게 대금을 받은 뒤 물품 인도서를 내주었다. 그 순간 시험 장치의 작은 붉은 등이 깜박였다. 제0접수 쪽에서 ‘최종 수취 완료’ 신호를 받은 것이다.
“낙찰자에게 전달한 물건인데 당연한 것 아닙니까?” 한 상인이 외쳤다.
윤담이 앞으로 나섰다. “물건을 받은 사람과 오래된 계약 기록의 원권리자가 다르면 당연하지 않습니다. 이 장치는 그 차이를 확인하지 않고 같은 도장을 찍습니다.”
그는 왕실 기술관의 입회 아래 정상 부품을 두 차례 시험했다. 한 번은 원래 설계대로 두 신호를 분리하고, 한 번은 실제 경매원에서 쓰고 있는 현재 연결 상태를 모사했다. 첫 번째 시험에는 ‘물품 인도 완료, 수취 의사 미확인’이라는 두 칸이 분리되어 나타났다. 두 번째 시험에서는 두 칸이 하나의 완료 표시로 합쳐졌다.
전시장에 앉은 사람들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그것이 곧 누군가의 재산이 무효가 된다는 뜻은 아니었다. 그러나 기계가 보여 준 ‘수취 완료’라는 글자만을 근거로 개인의 의사를 확인했다고 주장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은 누구나 이해할 수 있었다.
지백 총괄관이 단상에 올라왔다. 그는 평소보다 얼굴이 창백했다. 왕실 비축고의 최고 매각 책임자로서 그는 자신이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고 인정하지 않았다. 다만 여러 해 동안 반복된 장치 보수 항목과 오류 보고를 확인하지 못한 관리 책임을 인정했다.
“정리품 매각은 국가 재정에 필요합니다.” 그가 말했다. “하지만 물품 인도 기록이 사람의 수취 의사를 대신할 수는 없습니다. 그 두 절차가 분리되는 때까지 제0접수 관련 거래 기록은 별도 보전하도록 요청하겠습니다.”
누군가 지백의 말을 계산된 책임 회피라고 생각할 수도 있었다. 진혁은 그 판단을 서두르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입회한 감사관들이 실제로 어떤 조치를 내리는가였다. 왕실 감사관은 관련 기록의 보전과 문제 있는 연결 신호의 즉시 차단을 지시했다. 정상 소유권이 확인된 부품 경매는 계속하고, 사적 기록이 포함되거나 소유 근거가 모호한 품목은 출품 보류했다.
이제 진혁 차례였다. 그는 비싼 거울이나 사라진 황동판 대신 목록의 끝에 있는 작은 장치 하나를 바라봤다. 출품번호 57번, 오래된 창고용 종시계. 망치가 녹슬어 제대로 울리지 않는다는 설명이 붙어 있었고, 시작가는 은화 다섯 닢이었다. 대부분의 손님은 낡고 투박한 물건이라 무시했다.
진혁의 눈앞에 감정문이 떴다.
[대상: 왕실 창고용 종시계.] [숨은 기능: 두 개의 서로 다른 완료 신호를 독립적으로 저장.] [현재 상태: 종 타격 장치만 파손, 기록 코어는 정상.] [시장 가치: 복원 조건부.] [주의: 기존 개인 기록의 소유권을 생성하지 않음.]
그는 숨을 고르게 들이켰다. 제0접수의 오래된 절차를 복원하는 데 필요한 것은 대단한 왕실 유물이 아니라, 값싸고 고장 난 시계였다.
“은화 다섯 닢.” 경매사가 말했다.
진혁은 입찰패를 들었다. 맞은편에서 상인 하나가 여섯 닢을 불렀다. 며칠 전부터 이들의 조사에 관심을 보인 붉은 장갑의 수문 수리공이었다. 그는 시계의 톱니 규격이 자기 공방의 부품과 맞을지 확인하려던 참이었다.
“은화 일곱 닢.” 진혁이 말했다.
상인은 그를 알아보고 고개를 들었다. “또 당신입니까?”
“오늘도 마찰이 생겼군요.”
“팔 닢.”
세리아가 진혁의 팔꿈치를 건드렸다. “쓸모가 있어도 예산은 넘기지 마.”
진혁은 수첩을 열었다. 작업 비용을 제외하면 은화 열두 닢이 한도였다. 그는 은화 아홉 닢을 불렀고 상대는 잠시 고민하다 패를 내렸다. 낙찰망치가 내려왔다.
탁, 탁, 탁.
낡은 종시계는 진혁에게 돌아왔다. 그는 서류에 사인하고 정상적인 물품 인도 절차를 밟았다. 누군가 ‘소유권을 얻었다’는 사실은 분명했지만, 그 시계 안의 오래된 기록까지 자기 것이 됐다는 뜻은 아니었다. 그는 필요한 기능만을 복원해 공동 검증 장치로 사용하겠다는 별도 계약을 맺었다.
윤담과 재휘는 시계를 곧바로 작업대에 올렸다. 당장 공개 시연을 하지는 않았다. 출고 품목에 손을 대려면 정해진 절차를 따라야 했고, 공공 조사에 활용하는 부분은 왕실 시설팀과 따로 계약해야 했다. 그들은 일단 기록 코어가 정상적으로 작동하는지만 측정했다. 코어 안쪽에는 작고 맑은 소리가 남아 있었다. 종을 세 번 울렸을 때와 한 번도 울리지 않았을 때의 차이를 구별하는 소리였다.
공개 검증 결과는 오후 늦게 확정됐다. 제0접수 신호 혼선이 확인되어 관련 장치의 사용이 잠정 중지되었고, 잘못된 수취 표시와 연결된 기록은 원본을 보존한 채 독립적으로 재검토하기로 했다. 미엘라와 비슷한 통지를 받은 사람들에게는 임의 채무 정산 사실을 근거로 새로운 납부를 강제하지 말라는 임시 안내가 나갔다. 미엘라의 임금이 그날 돌아온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자신이 받지도 않은 돈 때문에 더 큰 빚을 떠안는 일은 일단 막을 수 있었다.
일반 관객들이 빠져나간 뒤 남은 입찰자들은 오늘 거래에 관한 명세서를 받았다. 정상적으로 매각된 물품의 수는 예정된 수량보다 줄었다. 대신 반출 보류된 품목은 각각 다른 사유가 붙었고, 기술 검증을 요구하는 서류도 함께 안내됐다. 그것은 비밀을 덮어 둔 채 무조건 팔거나, 모든 거래가 나쁘다고 주장하는 것보다 느리고 어려운 길이었다.
윤담은 낙찰받은 잔향석의 공동 분석 결과를 수문 관리국에 제출했다. 그는 나중에 추가 수리 계약을 따낼 수 있다는 사실에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진혁은 그런 그를 부러워하다가 문득 생각을 바꿨다. 자신도 정상 작동하는 종시계를 싸게 사서 수익을 낼 가능성을 얻지 않았는가. 다른 사람의 성공에 괜히 화낼 필요는 없었다.
“그럼 우리 두 사람 모두 이번 경매에서 손해는 피한 거군요.” 진혁이 말했다.
“당신 건 언제 팔 수 있는데요?” 윤담이 물었다.
“정확한 검사와 계약이 끝나면요.”
“그때는 부디 판매 대금보다 수리비가 더 나가지 않기를.”
그들은 서로 명함을 주고받았다. 처음에는 상대보다 싸게 사고 비싸게 팔기 위해 경쟁했지만, 이제는 상대가 좋은 물건을 발견하면 함께 안전하게 활용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았다.
미엘라는 회계 상담 담당자에게서 온 정식 접수증을 손에 쥐고 있었다. 이번에도 보상금은 없었지만 그녀는 종이를 구겨 버리지 않았다. 자신의 이름과 남편이 일했던 날짜가 정확히 적혀 있었기 때문이다. 진혁은 그것이 당연한 일인데도 지금까지 얼마나 멀리 돌아와야 했는지 생각했다.
카렌은 돌아오는 길에 미엘라를 잠시 따라 걸었다. “당장 모두 해결되지는 않았어요.”
“알아요.” 미엘라가 말했다. “그래도 이제 누가 제 말을 들었는지 알 수 있어요.”
그 대답은 카렌에게 오래 남았다. 아버지의 흔적을 찾으며 자신이 원했던 것도 어쩌면 그런 확인이었을 것이다. 누군가 레온의 이름을 좋게 말해 주는 것이 아니라, 그가 어떤 선택을 했는지 사실대로 듣는 것.
경매가 끝날 무렵 세리아는 야외 계단에 앉아 긴 숨을 내쉬었다. 겨울바람에 그녀의 붉은 머리카락이 흔들렸다. 진혁이 종시계 상자를 안고 다가왔다.
“사장님, 저 이번에는 진짜 이익을 냈습니다.”
“뭐가?”
“정상 작동하는 기록 코어를 은화 아홉 닢에 샀습니다. 수리비를 빼도 가치가 훨씬 높아요.”
“팔 수 있어?”
“아직 공동 검증 계약이 남아 있습니다.”
세리아가 웃었다. “역시 자네가 가져오는 물건은 바로 돈이 되질 않네.”
“그래도 언젠가는 됩니다.”
“그래. 그게 자네의 좋은 점인지 나쁜 점인지는 모르겠지만.”
멀리서는 왕도 사람들이 장바구니를 들고 집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거창한 기록 하나 때문에 그들의 하루가 모두 바뀌지는 않았다. 그러나 누군가의 의사도 확인하지 않고 물건처럼 옮기던 장치는 잠시 멈췄다. 그 사실이 진혁에게는 오늘의 가장 큰 낙찰이었다.
라일이 계단 위로 달려왔다. 그는 두 손에 작은 황동판 사진을 들고 있었다. 청안 운송이 옮긴 화물차가 도착한 곳은 왕립 경매원도 비축고도 아니었다. 왕도 외곽의 빈 화물선 계류장이었다. 현장 검사를 통해 43번 황동판으로 보이는 물건의 형상은 확인했으나, 물건은 다시 다른 보관 장소로 옮겨졌다고 했다.
“목적지를 확인했어?” 카렌이 물었다.
“일부만요. 그곳의 화물장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어요.”
라일은 사진 아래의 글씨를 짚었다.
‘최종 발송지: 루멘 경매장.’
세리아의 표정이 굳었다. 마레온의 루멘은 한때 고대 괴수의 껍질이라는 정체를 드러낸 곳이었다. 이미 안전 문제와 제7봉인의 열쇠 때문에 몇 번이고 조사를 거친 그곳으로, 누군가 사라진 기준표를 보내고 있었다.
진혁은 수첩을 펼쳤다. 동화 여섯 닢의 연결고리, 은화 아홉 닢의 종시계, 황동판 43번. 모두 값싼 물건이었지만 이상하게도 한 곳을 가리켰다.
그가 종시계의 덮개를 조심스럽게 만지자 마지막 감정문이 떠올랐다.
[기록 코어에 보관된 미송신 회신 발견.] [발신 대상: 제0감정인.] [원래 수취 주소: 루멘 경매장 심실.] [수취 상태: 미확인.] [회신 기한: 30일 후.]
진혁은 깜짝 놀라 시계를 놓칠 뻔했다. 카렌이 재빨리 상자를 받쳤다.
“왜 그래요?”
“누군가 열두 해 전부터 답장을 기다리고 있는 모양입니다.”
“누구에게서?”
진혁은 왕도의 맑은 하늘을 올려다봤다. 오래전의 편지가 오늘 도착할 수 있다면, 그 편지의 수취인이 아직 살아 있는지도 확인해야 했다.
“제0감정인에게서요. 그런데 답장이 어디로 가야 하는지가 더 이상합니다.”
그는 세리아를 바라봤다.
“루멘 심실입니다.”
제140화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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