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장 난 전신기가 ‘접수 대기: 서진혁’이라고 찍어 낸 직후, 조작실은 한동안 아무 말도 들리지 않는 곳이 되었다.
시설팀장은 전신기의 연결 상태를 다시 확인했다. 주전원은 꺼져 있었고 송수신선은 낡아 끊어져 있었다. 그런데 종이테이프는 분명 새 글자를 내뱉었다. 누군가 보이지 않는 마법으로 이름을 보내 온 것인지, 기계 안에 남겨 둔 지연 장치가 작동한 것인지 아직 알 수 없었다.
진혁은 종이를 쥐지 않았다. 문구가 낯익을수록 서둘러 믿고 싶어지는 마음을 경계했다. 그는 이미 왕도의 영번 감정대와 남관역에서 자신의 이름이 다른 사람의 의사처럼 쓰이는 경험을 했다.
“저는 오늘 접수를 신청한 적이 없습니다.”
그가 말하자 하서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은 그 사실을 기록하겠습니다. 이 종이는 누군가의 의사를 증명하지 않아요.”
세리아는 조용히 창밖의 수면을 바라봤다. 물이 빠진 곳에는 오래된 벽돌이 층층이 드러나 있었다. 열두 해 전 유나가 이곳을 지나갔을 가능성이 처음으로 현실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세리아는 오래전 친구의 이름을 빌려 서류를 마음대로 열 수 없었다. 그 점이 슬프면서도 다행이었다. 누군가 자신을 대신해 결정하지 못하도록 만든 장치라면 유나가 원했던 것이기도 할 테니까.
지백은 현장 책임을 인정하고 당일 조사에 협조하겠다고 말했다. 그가 숨겨 온 사실은 제0접수 시설이 완전히 사라진 게 아니었다는 점이었다. 전임자는 이곳을 폐쇄했다고 보고했고, 후임자들은 서류대로 운영했다. 하지만 수문 설비는 다른 명칭으로 계속 회계 처리됐다. 오래된 펌프의 점검 비용과 인력 배치가 ‘북측 수로 보수비’라는 항목에 섞여 있었다.
“누구에게 책임을 돌리고 싶지는 않습니다.” 지백이 말했다. “다만 이 부서가 살아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비축고 전체의 예산 집행이 중단될 수 있어요.”
진혁은 잠시 그를 바라봤다. “그럼 지금까지 가장 위험했던 건 무슨 일을 하는 장치인지 모르는 상태로 돈을 써 왔다는 사실이겠군요.”
지백은 고개를 숙였다. “그건 맞습니다.”
문제는 진혁의 이름이 찍힌 종이테이프였다. 하서린은 기계 내부의 남은 톱니와 잉크 분사 흔적을 검사하도록 했다. 재휘는 오래된 자동응답 장치가 특정한 압력 신호에 따라 미리 짜인 문구를 찍을 수 있다고 설명했다. 이 장치에는 그럴듯한 기능이 있었다. 하지만 이름이 언제 등록됐는지는 별도로 확인해야 했다.
라일은 테이프의 가장자리에서 미세한 별 모양 구멍을 발견했다. 남관역 반송함에 있던 표식과 닮았으나 크기는 작았다. 그는 손끝으로 그 구멍을 따라가다가 문득 어릴 때의 장면을 떠올렸다.
낡은 화물선의 갑판. 자기 손에 쥐어진 두꺼운 봉투. 멀리 운하의 수문이 천천히 내려오고 있었다. 누군가 어린아이의 어깨에 담요를 덮어 주며 말했다.
‘이름을 적어 주지 않아도 돼. 너는 봉투를 돌려보내는 사람이지, 그 안에 든 이름의 주인이 아니야.’
라일은 순간 숨을 들이켰다. 카렌이 부축하려 했지만 그는 고개를 저었다. 통증은 짧았다. 대신 잊고 있던 말의 뜻이 또렷하게 남았다.
“그 사람은 내 이름을 물어보지 않았어요.” 라일이 말했다. “내가 누구인지 아는 척하지도 않았고요. 그냥 봉투를 건네라고 했어요.”
“누가?” 세리아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모르겠어요. 얼굴이 기억나지 않아요. 그런데 손목에 종이끈이 있었어요. 짙은 녹색.”
세리아는 자신이 보관해 온 유나의 오래된 녹색 봉인끈을 떠올렸다. 재질이 같을 수는 있었다. 하지만 그 말을 듣는 순간 마음이 흔들렸다. 그녀는 라일에게 확신할 수 없는 추측을 주지 않기로 했다.
“그 사람이 누구인지는 같이 알아보자.”
진혁은 테이프를 바라보다가 라일과 함께 비축고 뒤편의 작은 휴게실로 나갔다. 밤 근무자들은 화로에 감자를 굽고 있었다. 진혁이 은화 한 닢을 내밀며 감자를 사려 하자 노인이 동화 몇 닢이면 된다고 손을 내저었다. 왕실 가까이에도 과도한 값을 받지 않는 사람들이 있었다.
라일은 뜨거운 감자를 손바닥에서 굴리며 말했다. “내가 혹시 그 기록을 옮긴 아이였다면, 누군가 나를 찾는 걸 두려워해야 할까요?”
“그건 아직 모르죠.”
“가끔은 제가 원래 이름을 알고 싶어 하는 게 잘못된 일처럼 느껴져요. 옛날에 어떤 사람이 저를 불렀는지 기억나기만 하면 모든 일이 끝날 줄 알았는데.”
진혁은 감자를 반으로 나눴다. “이름을 알게 된다고 자동으로 누군가의 빚까지 가져오는 건 아닐 겁니다. 적어도 우린 그런 기계를 멈추려고 여기 와 있잖아요.”
“그건 좋은 말이네요. 그런데 너무 감정사 같아요.”
“제가 감정사라서요.”
라일은 웃었다. 잠시 뒤 그는 아주 진지하게 물었다. “제가 라일이라는 이름을 계속 쓰고 싶으면요?”
진혁은 잠시 생각했다. “그럼 계속 쓰면 되죠. 옛 이름을 찾는 것과 지금 이름을 버리는 건 다른 일이니까.”
라일은 감자를 한 입 베어 물었다. 오랫동안 자기 과거를 추적해 왔지만 누군가 그 말을 해 준 적은 없었다. 그는 자기가 미래에도 선택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사실이 마음에 들었다.
휴게실 벽에는 오래된 작업 규칙이 걸려 있었다. '어떤 물건도 도착했다고 해서 수령된 것은 아니다.' 수문 노동자들은 그 문구를 단순한 안전 수칙으로 여겼다. 무거운 상자를 갑판에 올리기 전 반드시 반대편에서 준비됐다는 종소리를 확인하라는 뜻이었다. 진혁은 그 일상적인 규칙이 오래된 원부를 지키려 했던 사람들이 만든 원칙과 닮아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밖으로 나올 때 라일은 낡은 게시판에 자기 이름을 한 번 적었다. '라일, 운송 보조.' 누군가 지워 버릴 수도 있는 글씨였지만, 적어도 그 순간에는 자신이 직접 쓴 이름이었다.
그날 밤 미엘라의 사연과 비슷한 사례들이 하나둘 접수됐다. 회계 서류에서 부채가 사라졌는데 그 대신 자기 이름이 ‘왕실 특별 정산 계정’에 걸려 있다는 사람들이었다. 어떤 이는 체불 임금을 받지 못했고, 어떤 이는 오래전에 포기한 유물 보상금을 갑자기 수령했다고 통보받았다. 모두 같은 범죄의 피해자라고 단정할 수 없었지만, 갑작스러운 대리 수취라는 공통점은 있었다.
하서린은 기록을 보존하되 공개 범위를 엄격히 제한했다. 사람의 이름을 외치면 안 되는 경매장이 있다는 사실을 진혁은 이제 안다. 사람을 보호하기 위해 조용히 지켜야 할 정보가 있고, 반대로 공개해야만 막을 수 있는 기계의 오류가 있었다.
진혁은 그날 늦게 하서린의 허락을 받아 전신기의 원래 납품 도면을 살폈다. 설계도는 두 장으로 나뉘어 있었다. 하나는 ‘물품 이송 신호용’, 다른 하나는 ‘수취 거절 확인용’이었다. 그런데 지금 작동하는 장치는 첫 번째 도면대로 제작된 신호를 두 번째 도면의 장부에 기록하고 있었다. 물건이 통과하면 사람이 동의한 것으로 처리될 수 있다는 뜻이었다.
“그러면 제가 여기 물건 하나를 올려 놓기만 해도 제 이름으로 수취 완료가 될 수 있겠군요.”
재휘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원래라면 안 되는 일이에요. 두 절차를 잇는 안전장치가 빠졌습니다.”
“그걸 누가 뺐죠?”
“아직 모릅니다. 그리고 고장 난 부품을 교체한다고 저절로 정상화되지는 않아요. 기록을 다시 나눌 필요가 있어요.”
라일이 낡은 바퀴 설계도를 보다가 손을 뻗었다. 그는 서로 닮은 두 개의 작은 표시를 발견했다. 하나는 운하 이송 갑판, 다른 하나는 왕실 경매원의 출품 인도 장치였다. 두 장치는 다른 곳에 있어도 같은 승인 신호로 연결될 수 있었다.
“오늘 경매가 끝난 물건은 어디로 가죠?” 라일이 물었다.
“낙찰자에게 인도합니다.” 세리아가 말했다.
“그 인도 신호가 제0접수에도 도착한다면요?”
진혁의 얼굴이 굳었다. 내일은 경매 마지막 날이었다. 정리품 수십 점이 새 주인에게 넘어가면, 누군가 그것을 이용해 미완료 기록까지 수취 완료로 바꾸려 할 수 있었다.
하서린은 긴급 기술 검증을 신청했고, 시설 본부는 이송 갑판의 자동 신호를 차단하는 임시 조치를 승인했다. 하지만 왕실 경매원 자체의 회계 신호는 별도 계통이었다. 행사 전체를 멈추려면 더 분명한 인과관계가 필요했다.
라일은 서류를 읽는 내내 한쪽 손목을 문질렀다. 어릴 적 자신에게 봉투를 건넨 사람의 목소리는 떠올랐지만, 그 사람이 어떤 얼굴을 하고 있었는지는 여전히 흐렸다. 자꾸 기억을 붙잡으려 하면 오히려 보이는 장면이 달라졌다. 그 사실이 두려웠다.
세리아는 그에게 오래된 초상화를 보여 주려다가 손을 멈췄다. 미리 얼굴을 보여 주면 실제 기억과 새로 본 그림이 뒤섞일 수 있었다. 그녀는 초상화를 뒤집어 가방에 넣고 나중에 독립된 기록과 먼저 대조하기로 했다.
“꼭 오늘 찾지 않아도 돼.” 세리아가 말했다.
“오늘 찾으면 좋을 것 같아서요.”
“그러면 오늘은 확인 가능한 것만 찾자.”
카렌은 라일이 수로에서 본 바퀴의 자국을 직접 그리게 했다. 작은 동그라미 두 개와 그 사이의 홈, 오른쪽으로 흐르는 기름 자국. 그림은 서툴렀지만 그가 다른 사람의 설명을 듣기 전에 남긴 기록이었다. 언젠가 누군가 보여 준 그림에 흔들려도 오늘의 기억을 다시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진혁은 그 장면을 지켜보다가 라일의 손에 있던 깃펜을 건네받았다. “자, 이건 내가 보관해 줄게. 대신 네가 스스로 판단할 때 다시 돌려주지.”
라일은 잠시 인상을 찌푸렸다가 웃었다. “그 말, 제가 도둑이었다면 싫었을 겁니다. 그래도 지금은 괜찮네요.”
그때 윤담이 낙찰받은 잔향석의 나머지 조각을 다시 검사한 결과를 가져왔다. 파손된 여섯 조각 중 두 개가 특정한 짧은 신호에 반응했다. 그 신호는 일반적인 수위 변화가 아니라 경매사가 망치를 세 번 두드릴 때 만들어지는 진동 패턴과 닮아 있었다.
진혁은 기묘한 연결에 숨을 멈췄다. 43번 황동판이 사라진 것도, 제0접수의 수면이 움직이는 것도, 사람이 서명하지 않은 서류가 나타난 것도 우연히 독립적인 사건은 아닐 수 있었다.
“물건을 팔면, 원래 수령하지 않은 기록까지 팔린 것처럼 만드는 장치.”
세리아는 그 문장을 조용히 되풀이했다. “그것이 내일 경매를 여는 진짜 이유라면…”
“경매는 예정대로 열리되,” 진혁이 말을 받았다. “우리는 무엇이 잘못 팔리는지 모든 사람이 볼 수 있게 해야 합니다.”
그는 거울의 결손된 반사판, 자신이 낙찰받은 연결고리, 윤담의 잔향석 기록을 한 장의 도면 위에 올렸다. 세 물건의 모양은 다르지만 모두 같은 점을 가리키고 있었다. ‘팔았다’와 ‘받았다’ 사이에는 원래 한 번 더 확인하는 칸이 있어야 했다.
밖에서는 왕도의 심야 종이 울렸다. 다음 날 경매 개시까지 남은 시간은 채 열 시간도 되지 않았다. 진혁은 오래전 자신이 경매장 말단 직원으로 첫 출품 목록을 쓰던 날을 떠올렸다. 그때는 가격표의 숫자 하나만 틀려도 해고될까 두려웠다.
이제 그가 바로잡아야 할 것은 숫자가 아니라, 수천 개의 이름 앞에 잘못 찍힌 낙찰 망치였다.
제139화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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