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실 비축고의 서류실은 창문이 좁았다. 두꺼운 벽을 통과한 빛이 바닥에 네모난 칸을 만들고, 그 안에서 종이 먼지가 천천히 떠돌았다. 창고에 서류가 쌓인다는 말은 쉬웠지만, 실제로는 수십 년의 날짜와 서로 다른 서명이 작은 봉투 수만 개로 바뀐 채 사람을 기다리고 있었다.
하서린은 서류실 중앙 탁자에 43번 출품품에 관한 문서 세 장을 놓았다. 첫 번째는 경매 전시 목록, 두 번째는 전시 담당자가 서명한 진열 확인서, 세 번째는 새로 제출된 수정 목록이었다. 마지막 문서에는 ‘43번 출품품: 작성 오류로 삭제’라는 붉은 문구가 찍혀 있었다.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다는 말은 사실이 아닙니다.” 카렌이 말했다.
“기록이 수정됐다는 말과 물건을 본 사람들이 잘못 봤다는 말은 다르죠.” 진혁은 종이를 가리켰다. “왜 수정했는지 근거가 없네요.”
서린은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정정 명령을 낼 수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부터 확인해야 합니다. 사라졌다고 해서 당장 도둑이라고 부를 수도 없고, 수정했다고 해서 곧바로 위조라고 할 수도 없어요.”
기록 담당자는 야간에 매각 총괄관의 직인을 가진 정정 신청이 들어왔다고 설명했다. 정정 사유란에는 왕실 정리 목록과 경매 준비 목록이 달랐다고 적혀 있었다. 그런데 원본을 비교하니 정리 목록에는 확실히 43번 물건이 있었다. 대조 표가 잘못 붙었다면 실수일 수도 있었다. 다만 정정 신청서가 제출된 시각은 황동판이 사라진 사실을 경비대가 발견하기도 전이었다.
“물건이 없어지기 전에 삭제할 이유를 알고 있었네요.” 카렌이 중얼거렸다.
세리아는 서류실 문밖의 복도를 바라봤다. “아니면 누군가 없어질 예정이었기 때문에 미리 문서를 바꿨겠지.”
그 말은 위험한 추측이었다. 하서린은 사실로 적지 말라고 당부했다. 대신 정확한 시각과 전달 경로, 승인한 사람들의 실명을 확인해 두었다.
지백은 그날 오전 비축고의 연간 예산 설명회에 참석하고 있었다. 고위 관리들과 상인들이 긴 탁자에 마주 앉아 배수 시설 보수와 오래된 자산 처분 수익을 논의하는 자리였다. 진혁 일행은 회의실로 쳐들어가지 않았다. 정당한 소명 요청을 문서로 내고 답변 기한을 받았다. 기다림이 답답했지만, 억지로 문을 여는 것보다 나중에 더 강한 증거가 될 수 있었다.
라일은 그 사이 복도 끝 운송대장을 조사했다. 사라진 물건을 찾을 때는 금고 안보다 배달을 책임진 사람의 손가락과 신발을 보는 것이 유용했다. 화물 담당자들이 들고 다니는 장부에는 짐의 무게와 크기, 운반 수단이 적혀 있었다. 그는 이동 중에 분실되었다는 작은 황동판과 비슷한 크기의 발송 물품이 있는지 찾아봤다.
“여기 있네.”
라일이 가리킨 장부에는 ‘서류 교정용 추, 은화 두 닢’이라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발송지는 전시장 뒤편, 수취인은 제0보관실 접수 담당자. 배송 시각은 전시실이 닫힌 직후였다. 무게는 황동판과 거의 같았지만 당연히 증명은 되지 않았다. 세리아는 우선 보존 요청을 냈다.
“제0보관실이 사람을 받는다는 뜻입니까?” 진혁이 물었다.
“장부에는 담당자라고만 적혀 있습니다.” 서린이 대답했다. “조직의 이름이거나, 오래된 부서명일 수 있어요.”
진혁은 운송대장을 바라보다가 묘한 감각을 느꼈다. 수취인란의 글자는 뒤에서 눌러 쓴 흔적이 있었고, 먹이 마르기 전에 덧칠한 부분은 다른 줄보다 더 검었다. 그가 손끝으로 종이 가장자리를 만지자 문구가 떠올랐다.
[대상: 수취 기재 장부.] [기록 목적: 물품 이동.] [변경 이력: 수취인 표기 1회 수정.] [수정 전 항목: 제0보관실. 수정 후 항목: 접수 담당자.] [주의: 변경 주체 식별 불가.]
“수취인이 원래는 사람이 아니었군요.”
“그건 문서 조사로 확인해야 합니다.” 하서린이 바로 말했다.
“맞습니다. 덧칠된 부분의 색과 압력을 비교해 보죠.”
인쇄소 견습 출신 기술자가 돋보기와 빛 판을 가져왔다. 덧칠 아래의 글자는 여러 필획이 겹쳐 완전하게 읽히지는 않았지만, 뒤에 ‘담당자’라는 글자가 추가되었다는 사실은 분명해졌다. 누군가 물품을 특정 장소로 보냈다는 기록을, 누군가 받아 처리한 것처럼 바꾸어 놓은 것이었다.
오전 내내 서류를 대조하는 동안 카렌은 세리아가 유나에 대해 말할 때마다 손을 만지는 모습을 보았다. 세리아는 평소 경매장에서 가격과 기한을 정확히 짚어 내는 사람이었지만, 오래된 친구의 필체 앞에서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카렌이 조용히 물었다. “유나가 남긴 마지막 편지에도 빈칸이 있었어요?”
세리아는 잠시 생각했다. “있었어. 언젠가 내가 답장을 쓰라고 남겨 둔 여백인 줄 알았지. 처음에는 화가 났어. 어디 갔는지 말도 없이 사라진 사람이 답장을 기다리는 것 같아서.”
“지금은요?”
“그 여백이 누군가에게 결정하라고 남겨 둔 자리였을 수도 있겠구나 싶어. 내가 답해도 되고, 답하지 않아도 되는 자리.”
두 사람은 복도 끝의 창가에 섰다. 작은 새 한 마리가 눈 녹은 물을 마시고 있었다. 평화로운 장면이었지만 복도 바깥에는 서류가 든 상자를 옮기는 인부들이 여전히 분주했다. 세리아는 카렌의 검집을 바라봤다. 카렌의 아버지 레온 역시 지켜야 할 사람의 이름을 남기려 했을 것이다. 그가 어떤 실수를 했는지는 아직 몰랐지만, 남겨 둔 의무와 딸이 지금 하는 선택을 같은 것으로 묶을 수는 없었다.
“아버지의 이름으로 살기 힘들지?” 세리아가 물었다.
카렌은 미묘하게 웃었다. “네. 하지만 그 덕분에 처음 시작한 것도 사실이에요. 아버지와 다른 길을 가더라도, 그걸 숨기고 싶지는 않아요.”
세리아는 카렌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두 사람은 오랫동안 서진혁을 두고 장난스러운 경쟁을 벌였지만, 이런 순간에는 서로의 무게를 더 잘 알아봤다.
그때 진혁이 서류 한 장을 들고 나타났다. “두 분, 이 문서 좀 봐 주세요. 제가 보기에는 중요한데, 글씨가 너무 작아요.”
카렌이 한숨을 쉬었다. “정말 분위기를 못 읽네요.”
진혁이 어리둥절해하자 세리아는 웃음을 터뜨렸다. 때때로 가장 심각한 서류를 앞에 둔 사람이 가장 일상적인 모습으로 돌아오는 일이 모두에게 필요했다.
그 무렵 서류실에서 소동이 났다. 아직 누구에게도 넘기지 않은 봉투 하나가 대외 발송함에 들어 있었다. 남관역의 역장 문형규 앞으로 된 편지였다. 진혁은 이름을 보고 손이 얼어붙었다. 봉투 겉면에는 ‘제9반송 기록 원본을 열람한 민간 감정사의 동의서’라는 제목이 찍혀 있었다.
“제가 동의한 적 없습니다.”
하서린이 봉투를 열지 않은 채 물었다. “서명한 적 없다는 말이죠?”
“그렇습니다.”
“그럼 밀봉 상태를 기록하고 발송 보류부터 하겠습니다.”
실제 봉투 안에는 진혁의 서명을 흉내 낸 서류 한 장이 들어 있었다. 문장 하나가 특히 악의적이었다. ‘제998호 원부의 접수 여부를 내 신원으로 대리 확인하는 데 동의한다.’ 종이의 끝에는 남관역에서 진혁이 사용한 등록부 서식과 비슷한 직사각형 구멍이 뚫려 있었다.
진혁의 손바닥이 따끔했다. 자신의 능력은 모르는 글자를 읽는 데 쓰였지만 이번에는 다른 사람에게 자기 이름을 빌려줄 생각이 없다는 사실을 굳게 붙잡아야 했다. 카렌은 그가 서류를 만지지 않도록 손등을 감쌌다.
“숨 쉬어요. 이건 아직 발송되지 않았어요.”
“제가 거절한 일을 또 설명해야 한다는 게 짜증 나서요.”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이 옆에 있어요. 혼자 하지 마요.”
라일은 평소와 달리 농담하지 않았다. 그는 위조 서류의 구멍 위치를 남관역 반송함에서 봤던 것과 비교했다. 동일한 규격이었지만 구멍 가장자리에 미세한 턱이 있었다. 출입증 제작용 천공기에서 새로 뚫었을 때 생기는 흔적이었다. 누군가 오래된 서식을 흉내 낼 수는 있어도 그 서식이 지나온 세월까지 훔칠 수는 없었다.
대외 발송함을 맡는 직원은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자신은 오후마다 물품을 모아 중앙 우편소에 전달했으며, 봉투를 넣은 사람이 누군지 못 봤다고 했다. 하서린은 직원의 손을 잡아 자리에 앉혔다. 책임을 묻는 일보다 어떤 시간대에 누가 발송함에 접근했는지 확인하는 것이 먼저였다.
조사 결과 그 시간대에 드나든 사람은 많았다. 관람객의 길 안내를 돕는 임시 인력, 전시장 소모품을 운반하는 직원, 보존 서류를 맡기는 공무원까지 여럿이었다. 진혁은 익명의 위조자 한 사람을 머릿속에 세우고 싶은 충동을 참았다.
다음 조사에서 그들은 우편함에 봉투를 넣는 장면을 직접 목격한 사람이 있는지 살폈다. 전시장 문지기는 고개를 저었지만, 청소를 맡은 노인은 귀퉁이가 젖은 붉은 봉투를 든 남자를 보았다고 했다. 신발에는 짙은 푸른 흙이 묻어 있었다. 그 흙은 왕도 남쪽의 수문 보수 현장에서 흔히 묻는 것이었다. 청소부는 남자의 얼굴을 기억하지 못했고, 그가 정말 봉투를 넣었는지도 보지 못했다.
하서린은 청소부에게 서두르지 말고 시간과 장소를 따로 적어 달라고 부탁했다. 진혁은 그 노인이 자신이 본 것과 남들에게 들은 소문을 명확히 구분하는 모습을 지켜봤다. 작은 사실 하나가 나중에 틀린 혐의를 막을 수도 있다는 점에서 그런 태도는 귀했다.
카렌은 서류실의 복사 장부에서 위조 서류와 같은 종이 규격을 찾았다. 왕실 우편국이 최근 공급한 양식이었으며, 출입증을 발급하는 임시 등록대에서도 사용하고 있었다. 조사 대상이 좁혀지는가 싶었지만 실은 수백 명이 그 종이를 만졌다는 뜻이었다. 라일은 실망한 듯 휘파람을 불었다.
“이런 종이는 도둑들이 좋아해요. 누구나 구할 수 있으니까.”
“범인을 찾기 어려워서?” 카렌이 물었다.
“그리고 남을 범인으로 만들기도 쉬워서.”
진혁은 그 말이 마음에 걸렸다. 위조된 동의서 한 장이 남관역으로 발송됐다면 그곳의 사람들은 자신이 다시 입장을 바꿨다고 오해했을 것이다. 다행히 발송되기 전에 발견했지만, 비슷한 서류가 이미 다른 곳으로 갔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었다. 그는 문형규 역장에게 사실 관계를 확인하기 위한 전보만 보냈다. 자기 편을 들어 달라는 문구도, 범인을 찾아 달라는 지시도 넣지 않았다.
그날 저녁 지백이 정식 답변서를 보냈다. 그는 황동판의 출품 적격성을 검토하라는 요청은 승인했지만, 실제 삭제 신청은 부하 직원의 서식 오류로 들어갔다고 주장했다. 문제의 장부를 보존하겠다는 약속도 적혀 있었다. 답변서는 공손했고 흠잡기 어려웠다. 그러나 마지막 문장은 뜻밖이었다.
‘제0보관실은 오래전에 폐쇄되었습니다. 따라서 해당 명칭을 이용한 수취 기록은 모두 참고용으로만 취급하여야 합니다.’
“폐쇄됐는데 물건을 보내요?” 카렌이 말했다.
진혁은 그 질문 대신 봉투의 날짜를 확인했다. 지백의 답변에는 최근 날짜가 적혀 있었지만, 문서 상단의 기록 양식은 열두 해 전의 구형 형식이었다. 세리아가 먼저 알아보고 미간을 찌푸렸다.
“이건 유나가 쓰던 양식이야. 그런데 유나는 수취인을 적기 전에 항상 한 칸을 비웠어. 상대가 직접 쓰도록.”
그 편지에는 빈칸이 없었다.
그 순간 멀리 비축고 쪽에서 두꺼운 종소리가 울렸다. 하서린은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비축고의 수로 수문이 일상 점검 시간도 아닌데 내려가고 있었다.
라일이 창문을 열었다. 어두운 운하 위에 작은 화물선 하나가 보였다. 선박의 돛대에는 평범한 왕실 기가 아니라, 반송 기록에서 수없이 봤던 두 가닥 선이 걸려 있었다.
“저 배.” 라일이 숨을 삼켰다. “어릴 때 봤던 배일지도 몰라요.”
그가 기억하는 것인지, 누군가 기억나게 만들려고 보여 주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그 배는 수문이 완전히 닫히기 전, 비축고 아래의 좁은 물길로 사라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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