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번 진열함은 부서지지 않았다. 유리 표면에는 금 하나 없었고 봉인 끈도 멀쩡했다. 그런데 안에 놓여 있어야 할 황동판만 사라져 있었다.
밤 열 시가 넘은 왕도 비축고 전시장은 낮의 화려함을 잃고 있었다. 경매 안내판에는 반쯤 걷힌 천이 걸려 있었고, 복도를 지키는 방위병의 장화에서 젖은 가죽 냄새가 났다. 커다란 천창 너머로 왕도의 등불이 보였지만, 실내에서는 짧은 기름등 세 개만 켜져 있었다. 공기마저 조심스럽게 숨을 죽인 듯했다.
“전시가 끝난 뒤 반출된 물건은 하나도 없습니까?” 카렌이 물었다.
방위병 대장이 장부를 펼쳤다. “일반 출입문 봉인은 온전합니다. 열쇠는 두 사람이 나눠 가지고 있고, 두 사람의 출입 기록도 일치합니다. 다만 오늘 저녁에 받침대를 옮겨 전시물 높이를 조정했습니다.”
“그러니까 누군가 유리함 안에서 물건을 꺼낸 게 아니라는 뜻이군요.”
하서린이 곧바로 말을 받았다. “아직 그렇게 결론 내릴 수 없습니다. 내벽의 점검문이나 운송 통로가 있을 수도 있어요. 손상이 없다는 건 손상 흔적이 없다는 뜻일 뿐입니다.”
진혁은 빈 받침대 앞에 섰다. 그의 능력은 대상이 없으면 기껏해야 물건이 닿았던 흔적 정도만 보여 주었다. 손바닥에 글씨가 떠오르기를 기다렸지만 아무것도 나타나지 않았다. 이럴 때마다 자신이 어쩌면 평범한 감정사보다 편견에 빠지기 쉽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법의 문장이 잠잠하면 확인할 방법이 없다고 착각하기 때문이었다.
라일은 바닥에 한쪽 무릎을 댔다. 목재 받침대 옆에는 가루가 얇게 쌓여 있었다. 손가락으로 문지르자 옅은 푸른빛이 묻어났다. 경매장 먼지라기보다 낡은 물길 표식에 쓰는 발광 안료와 닮았다.
“보통 도둑이면 전시대까지 다 가져갑니다.” 라일이 말했다. “저렇게 작은 부품만 뺀 이유는 이미 값어치를 알았거나, 그것을 써야 할 급한 일이 있었기 때문이죠.”
카렌이 그를 내려다봤다. “말투가 경험담 같은데?”
“저는 지금 합법적인 운송 보조입니다.”
“오늘 밤까지는.”
진혁은 받침대 모서리를 손으로 더듬었다. 오른쪽 아래 나사가 미세하게 풀려 있었다. 기술관이 긴 자를 가져와 치수를 쟀다. 나사에는 새 공구가 닿은 흔적이 없었고, 오히려 아래쪽 나무판이 습기로 팽창해 있었다. 진열함은 바닥의 좁은 홈을 통해 공기를 순환시켰고, 그 홈을 따라 안쪽 받침대도 미세하게 움직였다. 누군가 정교하게 설계된 장치를 활용했다면 문을 열지 않고도 물건을 옮길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서린은 전시 책임자의 입회 아래 받침대 뒷면을 열었다. 그 안에서 길이 손가락 한 마디만 한 청동 굴림쇠가 나왔다. 굴림쇠는 벽 뒤의 오래된 안내관과 연결되어 있었다. 전시장은 옛 마구간을 개조한 건물이었고, 말에게 약품을 전달하던 관을 완전히 철거하지 않았던 것이다. 누군가 관에 압력을 가하면 얇은 판을 바닥 틈으로 미끄러뜨릴 수 있었다.
“출입문을 지키는 사람들만 보고 있으면 물건은 밖으로 사라질 수 있습니다.” 서린이 말했다. “관의 반대쪽을 찾아야겠군요.”
지백 총괄관도 현장에 도착했다. 그는 군더더기 없는 외투를 걸친 채 침착하게 손실 신고서를 작성했다. 책임 있는 직원에게 불이익을 주기 전에 기술 검사를 하겠다고 말했지만, 동시에 다음 날 경매 일정을 연기할 수 없다고 못 박았다.
“43번 품목이 없으면 그 물건만 출품 취소하면 됩니다. 쉰여섯 점의 매각을 전부 멈출 이유는 없지요.”
“누군가 전시실 안전을 뚫었다는 사실은 중요합니다.” 하서린이 말했다.
“그 부분은 개선하겠습니다. 경매는 국가 예산 집행 일정에 연결되어 있어요.”
그의 말은 현실적이었다. 비축고는 오래된 식량 저장 장치를 수리할 예산을 확보해야 했고, 올해 운하 범람 방지 공사도 앞두고 있었다. 진혁은 지백을 무조건 악당 취급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누가 무엇을 알고 있는지와 그의 말이 옳은지는 다른 문제였다.
수로에 내려가기 전, 하서린은 전시 담당자들을 하나씩 불러 짧은 확인을 했다. 유리함 청소를 맡은 젊은 직원은 어제 오후 황동판의 모서리에 검은 점이 있는 것을 보았다고 했다. 또 다른 직원은 그 점을 본 기억이 없었다. 그들은 서로의 진술을 듣지 않은 채 기록을 남겼다. 사소한 차이를 잘못된 기억으로 몰기보다 처음 본 순간의 상태를 남겨 두려는 절차였다.
진혁은 자신이 마법의 문장으로 황동판의 기능을 확인했다고 해서 그 물건을 보고 있던 수십 명의 눈보다 정확하다고 단정할 수 없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능력은 숨은 기능을 알려 줬지만 누가 언제 물건을 옮겼는지는 보여 주지 않았다. 그는 서류 가장자리에 자신이 직접 목격한 것과 추정한 것을 다른 색으로 적었다. 세리아가 그 수첩을 보고 말했다.
“자네도 이제 제대로 된 감정사처럼 보이는군.”
“전에는 아니었습니까?”
“전에는 숨이 차도록 뛰어다니는 직원 같았지.”
“말단 직원의 경력도 존중해 주십시오.”
그들은 기술관에게 전시장 구조를 더 물었다. 옛 마구간 시절에는 말이 먹는 사료와 약품을 바깥 통로로 밀어 넣었기 때문에 벽에는 작은 원형 관이 여러 개 남아 있었다. 대부분은 시멘트로 막혀 있었다. 그러나 난로를 교체한 뒤 습기를 빼려고 한 관을 다시 열었다는 수리 기록이 있었다. 기록은 열흘 전의 것이었다. 마침 특별 경매 전시 준비가 시작된 날이었다.
라일은 열린 관의 높이를 보고 고개를 기울였다. “아이 손이 닿을 만한 높이인데, 어른이라면 허리를 굽혀야 해요. 도둑이 쓰기에는 별로인데요.”
카렌이 물었다. “왜?”
“들어가는 사람이 허리를 굽히면 시야가 좁아져요. 누가 지켜보면 들키기 쉽죠. 이건 사람이 들어가려고 만든 길이 아니라 얇은 물건을 보내려는 길이에요.”
기사는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범위만 작은 거울로 비추었다. 관 안쪽에는 젖은 가루가 남았지만 어떤 물건이 통과했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들은 안으로 도구를 찔러 넣지 않았다. 경매 전시장의 구조를 망가뜨리거나 다른 증거를 밀어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진혁은 영리한 탐정처럼 즉시 모든 것을 해결하고 싶은 마음을 억눌렀다. 이 통로는 자신에게 숨겨진 문을 열어 주는 통행권이 아니라 물건의 이동 가능성을 확인하게 해 주는 단서였다.
한밤중 일행은 경비대의 동행을 받아 마구간 뒤편 배수 통로로 내려갔다. 카렌은 칼집을 걸리적거리지 않도록 허리 위로 올렸고 세리아는 물을 막는 가죽 외투를 입었다. 라일이 먼저 나서려 하자 카렌이 팔을 붙잡았다.
“여기서는 혼자 움직이지 마.”
“제가 제일 잘 알겠는데요.”
“그런 사람부터 사라져.”
통로에는 발목 깊이의 물이 고여 있었다. 오래된 돌기둥 사이로 겨울비가 스며들어 작은 물방울이 떨어졌다. 바닥은 간혹 계단처럼 낮아졌고, 멀리서 수차가 돌아가는 소리가 들렸다. 왕도 사람들은 비축고가 단단한 돌로 지어졌다고 생각했지만, 실제로 그 바닥을 받치는 것은 물을 빼내는 설비와 수십 년간 수리해 온 노동자들이었다.
길 끝에서 두 갈래 관이 나타났다. 왼쪽 관에는 1이라고 새겨져 있었고 오른쪽에는 지워진 작은 화살표가 남아 있었다. 라일은 오른쪽을 가리켰다.
“화살표가 위험 구간 표시라면 이쪽은 원래 사람이 다니는 길이 아니었을 겁니다.”
“그럼 더더욱 들어가면 안 되겠네.” 카렌이 말했다.
진혁은 관 밖으로 튀어나온 낡은 계측기를 발견했다. 바늘이 수면 높이를 가리키는 장치였다. 숫자 1에서 시작하는 일반 보관 구역 눈금과 달리 이 계측기는 가운데에 0이 그어져 있었다. 손을 대자 짧은 감정문이 떴다.
[대상: 영점 수위계.] [제작 목적: 정수면 아래 물품 이송 통로의 안전 높이 측정.] [현재 상태: 영점 편차 18센티미터.] [주의: 수로를 무단 개방할 경우 급류 발생 가능.]
“우리가 찾는 건 문이 아니라 물 위의 높이입니다.” 진혁이 말했다.
하서린은 동행한 시설 기사에게 계측기의 수치를 기록해 달라고 부탁했다. 기사는 낡은 수위계와 휴대용 눈금을 대조하더니 얼굴을 찌푸렸다. 수위계가 실제보다 수면을 낮게 표시하고 있었다. 이 상태에서 작업자가 안전 기준에 맞춰 수로를 열었다면 사람이 떠내려갈 수도 있었다.
“장치가 오래돼서 그런 겁니까?” 세리아가 물었다.
“편차는 오래됐을 수 있지만 고정 나사는 최근 조정됐습니다.” 기사가 말했다. “의도적인지는 모르겠어요. 수리 기록을 찾아야 합니다.”
하서린은 즉시 수로 진입을 중단했다. 경비병 두 명이 위험 구간에 붉은 끈을 쳤다. 진혁은 아쉬웠지만 반박하지 않았다. 중요한 유물보다 물의 속도가 더 빠르다는 사실을 이미 여러 번 배웠다.
돌아오는 길에 그는 통로 벽에서 작은 흰 선 세 개를 보았다. 그것들은 일정한 간격으로 이어지다가 갑자기 위로 꺾였다. 라일은 그 자리에 오래 머물렀다. 눈빛이 어딘가 멀어졌다.
“열두 해 전에도 이런 표식을 봤어요.”
카렌은 조용히 물었다. “남관역에서?”
“아뇨. 기억 속에는 넓은 물소리가 있어요. 어떤 사람이 아이를 안고 계단을 올라가고 있었어요. 나인지 다른 아이인지 모르겠지만.”
라일은 손을 거두었다. 억지로 기억하려는 순간 머릿속에 날카로운 통증이 왔다. 세리아가 그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기억이 돌아오는 것보다 지금 무사히 돌아가는 게 먼저야.”
숙소로 돌아온 뒤 진혁은 밤새 기록을 뒤졌다. 전시장 옛 설계도에는 말 사료를 옮기는 관이 있었지만, 관이 닿는 끝은 빈 여백으로 처리되어 있었다. 왕실 비축고 도면의 계단은 여덟 개였다. 그런데 기록실의 낡은 점검 영수증에는 ‘제0계단 발판 교체, 황동 고정못 아홉 개’라는 문장이 남아 있었다.
“지금은 없어진 계단이군요.” 카렌이 말했다.
“아뇨. 위치가 잘못 적힌 계단일 수도 있어요.”
진혁은 종이에 운하 수면과 수위계의 영점을 그렸다. 첫 번째 보관실에 들어가는 계단은 아래로만 향했다. 제0계단은 반대로, 물 아래의 통로에서 수면 위로 올라오는 계단일 가능성이 있었다.
그때 하서린에게 급한 전보가 도착했다. 비축고 시설팀이 야간 점검 중 영점 수위계를 조정하려고 했는데, 공구를 대기도 전에 바늘이 스스로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소식이었다.
진혁의 손바닥에 경고가 떠올랐다.
[수면 영점 변경 시도 감지.] [제0보관실의 접수 창구가 이동 중입니다.]
그는 창밖의 운하를 바라봤다. 창고가 숨어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기준점 자체를 누군가 바꾸고 있었다.
제132화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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