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도 에르반에 다시 도착한 날, 서진혁은 역 광장에 걸린 커다란 현수막부터 읽었다.
‘왕실 중앙 비축고 정리품 특별 경매. 국가가 보증하는 가장 안전한 거래.’
그 아래에서는 비축고 철문을 형상화한 황금색 장식이 겨울바람에 흔들렸다. 사람들은 현수막 앞에서 기념 초상화를 그리고 있었고, 빵 장수는 ‘왕실 보관표 모양’이라고 주장하는 네모난 과자를 팔고 있었다. 아무리 봐도 평범한 버터 과자였지만 가격은 두 배였다.
“역시 왕도군요. 종이 한 장을 붙이니 과자 값까지 오릅니다.”
진혁이 감탄하자 카렌이 코웃음을 쳤다.
“그러면서 방금 두 개 샀잖아요.”
“조사에 필요할 수도 있어서요.”
“과자가요?”
“시장 분위기 파악입니다.”
라일은 그의 손에서 과자 하나를 빼앗아 베어 물었다. “분석 결과, 그냥 달아요.”
겨울이 한발 물러난 에르반에는 눈 대신 검은 진창이 남아 있었다. 귀족의 마차가 지나간 자리로 소금물과 석탄 가루가 섞인 물이 흘렀다. 중앙역에서 비축고까지는 걸어서 반 시간이었지만, 세리아는 짐꾼을 고용해 봉인 서류 상자들을 먼저 하서린의 임시 사무실로 보냈다. 서류는 개인 짐과 섞을 수 없었다. 남관역의 확인 기록은 봉인 번호와 운송 책임자를 적은 별도 장부를 동반해야 했다.
왕립감정청 북쪽 별관 앞에는 작은 시위가 벌어지고 있었다. 구형 감정 장치의 가동 중지 때문에 일감이 끊겼다는 기술자들이었다. 그 맞은편에서는 강제 동의 기록을 조사해 달라는 상인들이 순서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느 쪽도 장난으로 나온 얼굴이 아니었다. 진혁은 이런 일이 왕도의 소문처럼 한 줄짜리 선악으로 정리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또 한 번 느꼈다.
하서린은 사무실의 문을 잠근 뒤 남관역 서류를 확인했다. 그녀는 왕립감정청의 조사관 자격으로 이번 경매의 기술 검증 입회 신청을 해 둔 상태였다. 청문회 결정에 따라 영번 감정대 자체는 여전히 멈춰 있었지만, 비축고의 정리품 매각은 별도의 회계 절차로 추진되고 있었다. 비축고가 물건을 내놓는다는 말이 곧 봉인된 원부를 마음대로 팔 수 있다는 뜻은 아니었다.
“반출 후보가 모두 일흔두 점입니다.” 서린이 목록을 펼쳤다. “그중 열한 점은 소유 근거가 부족해 출품 보류를 권고했고, 네 점은 개인 기록이 섞였다는 이유로 열람을 제한했습니다.”
“그럼 남은 쉰일곱 점을 보면 됩니까?” 진혁이 물었다.
“그렇습니다. 하지만 경매 진행과 기록 조사 권한은 별개예요. 전시장의 물건을 감정할 수 있어도 제0보관실 문을 열 수는 없습니다.”
“네. 이번에는 문부터 뜯지 않겠습니다.”
라일이 어깨를 움찔했다. “이번에는?”
서린은 진혁에게 회색 명패 하나를 내밀었다. ‘민간 감정 참고인’. 뒷면에는 관람 가능한 구역과 반입 금지 도구가 적혀 있었다. 세리아는 루멘 경매장의 운영자 자격으로 정식 참가 등록을 했고, 카렌은 경호원이자 사건 참고인, 라일은 물품 운송 보조로 출입증을 받았다. 라일은 자신의 사진이 박힌 명패를 들여다보다가 심각하게 물었다.
“왜 제 직업란에 ‘운송 보조’라고 써 놨죠?”
“공식 서류에 도둑이라고 쓰고 싶었어?” 세리아가 되물었다.
“전문성이 사라지잖아요.”
왕도 중앙 비축고는 궁성 바깥의 운하와 맞닿은 곳에 있었다. 멀리서 보면 밝은 석회석 벽으로 지은 거대한 창고 같았지만, 가까이서는 군사 시설의 흔적이 짙었다. 높은 창문마다 쇠살이 박혔고 물길 아래로 내리는 검은 철문에는 왕실의 쌍관 문장이 새겨져 있었다. 전쟁 때에는 식량과 약품을 저장하고, 평화로운 시기에는 국가 소유 유물을 보관하며, 오랜 세월 주인 없는 물건이 밀려드는 바람에 안쪽 구역은 복잡한 미로가 되었다고 했다.
비축고로 가는 길의 양쪽에는 오래된 왕도와 새 왕도가 겹쳐 있었다. 한편에는 흙벽으로 지은 공동 숙소가 늘어서 있었고, 맞은편에는 납유리 창을 가진 은행이 세워져 있었다. 손이 갈라진 인부들이 새벽 일당을 받으러 줄을 섰는데, 은행 앞의 검은 마차에서는 누군가 오늘 매각될 왕실 보석의 예상가를 큰 소리로 읽고 있었다. 진혁은 그 거리가 겨우 열 걸음이라는 사실에 잠깐 멈췄다.
그들은 길가의 작은 국수 가게에서 아침을 먹었다. 가게 여주인은 세리아가 루멘 경매장의 사장이라는 말을 듣고 국수를 더 담아 주었다. 얼마 전 마레온에서 올라온 상인이 식량을 값싸게 보급해 준 덕을 봤다고 했다. 세리아는 자신이 한 일이 아니라 그 상인이 자발적으로 내린 결정이라고 설명했지만 여주인은 손사래를 쳤다. 진혁은 국물을 떠먹으며 돈의 흐름이 항상 거래 영수증에 적히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을 했다.
“우리가 오늘 입찰해서 번 돈이 어디에 쓰이는지도 알 수 있으면 좋겠네요.” 그가 말했다.
카렌은 뜨거운 수프를 식히며 대답했다. “알 수 있어야죠. 경매에 물건을 내는 사람만 있는 게 아니잖아요. 그걸 팔아 무엇을 하겠다고 약속받은 사람도 있으니까.”
세리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비축고 정리 예산의 공개 장부에는 낡은 식량 저장고의 지붕 수리비와 운하 제방 보수비가 기재돼 있었다. 그러나 일부 항목에는 구체적인 설비명이 생략되어 있었다. 사장으로서 회계 장부를 자주 봐 온 그녀는 그 빈칸이 단순한 게으름의 흔적일 수도, 누군가 의도적으로 남긴 여백일 수도 있다는 것을 알았다.
라일은 창밖의 역마차를 보다가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제가 어릴 때 저런 마차를 따라 달린 것 같습니다. 그때는 안에 누가 앉았는지보다 뒤축에 어떤 상자가 걸렸는지가 중요했어요.”
“지금도 물건부터 보는구나.” 카렌이 말했다.
“사람은 보통 도망갈 때 빠르거든요. 상자는 무거워서 늦게 갑니다.”
카렌은 웃었지만, 라일은 자신의 말을 들으며 어딘가 쓸쓸해 보였다. 상자를 찾아도 그 상자를 들고 뛰던 아이의 이름까지 찾을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 모두의 마음을 스쳤다.
다시 길을 나선 진혁은 비축고를 올려다봤다. 거대한 건물에는 누구나 입장할 수 있는 전시장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군수품 창고, 문서 기록실, 세금으로 매입한 공공 설비 보관소, 출처를 확인 중인 압류물 창고가 모두 다른 문으로 나뉘어 있었다. 진혁은 그 구조가 한 사람이 모든 물건을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도록 만든 안전장치라는 설명을 들었다. 오래된 장부를 통해 권리가 뒤섞일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나니 문마다 붙은 서로 다른 명패가 전보다 중요하게 느껴졌다.
경매 전시장은 비축고 바깥쪽의 옛 마구간을 개조한 건물이었다. 따뜻한 난로 옆에서 금속 감정기가 작은 종을 울렸고, 두꺼운 유리함 안에는 파손된 신호등, 장식이 떨어진 의식용 단검, 용도를 알 수 없는 도자기 조각이 놓여 있었다. 왕실 직인이 붙은 출품 목록에는 소유권과 기능 보증이 별개라는 주의 문구가 여러 번 인쇄되어 있었다.
“엄숙하네요.” 카렌이 말했다.
“엄숙한데 손님은 다들 가격표만 봅니다.” 진혁이 대답했다.
세리아는 첫 번째 유리함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사소한 황동판 하나였다. 직사각형 모서리에 세 개의 구멍이 뚫렸고, 가운데에는 세월에 닳은 숫자 0처럼 보이는 홈이 있었다. 출품번호는 43번. 설명에는 ‘창고 바닥 긁개 부품, 사용 불가, 시작가 동화 열세 닢’이라고 쓰여 있었다.
진혁의 손바닥이 뜨거워졌다. 눈앞에 익숙한 문장이 떠올랐다.
[대상: 비축고 바닥 긁개 부품.] [실제 용도: 깊이 기준표.] [접촉된 마지막 장소: 제0보관실 전실.] [현재 소유권: 왕실 정리 자산으로 임시 분류.] [주의: 대상물에 기록 정보가 남아 있어도 그 기록의 소유권까지 이전되지는 않습니다.]
“긁개가 아니라 기준표네.”
그가 중얼거리자 세리아가 즉시 가까이 왔다. 세리아는 감정 능력을 직접 볼 수 없었지만, 진혁이 ‘표면 가격’과 ‘물건의 실제 기능’을 구분하는 표정을 이제 알아봤다.
“얼마나 중요한 물건이지?”
“물건 자체는 싸요. 그런데 제0보관실의 위치를 찾는 데 쓸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지나치게 높은 금액으로 입찰하지 마.”
“사장님, 제 명예를 뭘로 보십니까?”
“경매가 시작되면 가끔 잊어버리는 걸로.”
진혁은 아쉬운 얼굴로 목록을 뒤집었다. 비용 한도를 적어 두어야 했다. 루멘의 운영 자금과 조사비를 혼동하면 안 된다. 그는 일지에 ‘43번, 최대 은화 한 닢’이라고 썼다. 덧붙여 구매하더라도 증거 가능성이 있으므로 보관 봉인을 신청하겠다고 적었다.
그때 뒤에서 낯선 목소리가 들렸다.
“부품에 한도를 정해 놓는 감정사는 요즘 드물지요.”
검은 수염을 가지런히 자른 남자가 경매원 직원 둘과 함께 서 있었다. 남자의 겉옷에는 비축고 출납 책임자를 뜻하는 파란 어깨끈이 달려 있었다. 명패에는 ‘강지백, 왕실 중앙 비축고 매각 총괄관’이라고 새겨져 있었다. 그는 지나치게 공손한 웃음을 지었지만, 진혁의 수첩으로 향한 시선을 숨기지 않았다.
“서진혁 감정사. 당신 이야기는 남관역에서부터 들었습니다.”
“좋은 이야기만 들으셨기를 바랍니다.”
“장부를 되돌리는 사람이라더군요.”
“제 월급 장부는 아직 되돌리지 못했습니다.”
지백은 웃지 않았다. “비축고는 장부를 되돌리는 곳이 아니라 정리하는 곳입니다. 멈춰 선 물건을 계속 붙잡아 두면 국가가 손해를 봅니다.”
“정리할 수 있는 물건과 없는 기록은 구분해야겠죠.” 세리아가 말했다.
지백은 세리아에게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물론입니다. 오늘 전시된 품목에는 법적 정리 절차를 거친 자산만 포함했습니다.”
그 말이 완전한 거짓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었다. 하서린이 확인한 쉰일곱 점은 적어도 출품 대상이었다. 다만 진혁은 남관역 송장의 마지막 줄을 떠올렸다. 제0보관실에서 아직 수취되지 않은 원부가 존재한다면, 누군가 정리라는 이름으로 그 주변 장치를 먼저 처분하려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저녁 무렵 전시장 문이 닫히기 전, 기묘한 일이 생겼다. 수리 기사가 43번 물건의 받침대를 옮겼는데, 진혁의 시야에서 황동판에 새겨진 0자가 순간 뒤집혀 보였다. 그는 반사된 글씨가 아니라 판 아래의 얕은 홈이 빛을 바꾸는 것임을 알아챘다. 그것은 숫자가 아니라 아래쪽을 향한 화살표였다.
옆에 있던 라일이 속삭였다. “저거, 배달인들이 쓰던 길 표시랑 닮았어요. 바닥에서 올라오라는 뜻이 아니라, 바닥이 없어지는 지점을 조심하라는 표시죠.”
“기억났어?” 카렌이 물었다.
라일은 잠시 말을 골랐다. “정확히는 손이 먼저 기억했습니다. 저 표식을 보면 발을 멈추게 돼요.”
그날 숙소에서 진혁은 비용을 계산하다가 비축고 도면을 다시 펼쳤다. 하서린이 공개 범위 안에서 전달한 지상 평면도에는 지하 1층까지만 있었다. 보관실 번호는 1부터 시작했고, 그 아래 공간은 배수 설비로만 표시되어 있었다.
황동판의 화살표가 가리키는 것은 지하층이 아니었다.
[추가 감정 정보: 깊이 기준 영점은 바닥이 아닌 수면에서 측정됩니다.]
진혁은 창문 밖의 운하를 바라봤다. 얼음 조각이 떠내려가는 검은 물 위로 궁성의 불빛이 일그러졌다. 제0보관실은 계단 아래에 있는 창고가 아닐지도 몰랐다.
그때 문밖에서 급히 뛰는 발소리가 났다. 카렌이 검을 든 채 들어왔다.
“전시장 43번 물건이 사라졌어요.”
진혁은 계산하던 깃펜을 놓쳤다. 입찰이 시작되기도 전에, 자신이 사려던 가장 싼 물건부터 누군가 훔쳐 간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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