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적지가 비어 있는데 열차를 출발시킨다고요?”
서진혁의 목소리가 구서고 벽에 부딪쳤다. 먼지가 오래 쌓인 선반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문형규 역장의 무전관에서 기관사의 목소리가 다시 흘러나왔다.
“회사에서 임시 운송 허가를 받았다고 합니다. 화물을 화령 방면으로 넘겨 달랍니다.”
“받는 창고는?”
“서류에는 없습니다.”
역장의 굵은 손가락이 무전관의 송신 단추를 눌렀다.
“남쪽 분기 대기. 지정 수취지 없는 화물은 우리 역에서 넘기지 않는다. 차륜 제동 확인하고 재차 연락해.”
말이 떨어지자 진혁은 얼른 물었다. “멈추게 할 수 있습니까?”
“할 수 있는 권한이 있는 게 아니라, 안 멈추면 안 되는 절차야.” 역장은 그를 보았다. “그 차이를 알아야 다음에도 사람을 구하지.”
일행은 구서고에서 나와 남쪽 화물선로로 향했다. 비는 내리지 않았지만 눈이 녹으면서 기름 섞인 검은 물이 선로 사이에 고였다. 전날부터 추위가 누그러져 얼음 아래 고여 있던 물이 한꺼번에 흐르는 중이었다. 선로 옆 수로에서는 버려진 철편이 물살에 서로 부딪치며 소리를 냈다. 하얀 김을 뿜는 화물 기관차는 다섯 칸짜리 짧은 편성을 달고 정지해 있었다.
도건익은 화차 앞에서 남관역 직원에게 화를 내고 있었다.
“정식 운송 계약이 있습니다. 멈추면 지연 보상금이 붙어요.”
소담이 서류를 확인하며 말했다. “계약은 계약이고, 수취지 빈칸은 빈칸이에요.”
“본사에서 나중에 적을 겁니다.”
“나중에 적을 주소로 지금 출발시키는 건 철도 규정에도 없습니다.”
카렌은 조금 떨어진 곳에서 상황을 지켜봤다. 그녀는 칼에 손을 대지 않았다. 이곳에는 적어도 아직 싸워야 할 사람이 없었다. 회사의 권한과 역장의 권한이 맞부딪치는 순간에는 검보다 날짜가 적힌 문서 한 장이 더 무서운 무기가 되었다.
역장이 도건익의 허가증을 받아 들었다. 봉인은 정상이었다. 화물 이동 허가도 분명히 존재했다. 다만 가장 중요한 마지막 칸이 빠졌다. 역장은 허가증 뒷면에 연필로 미비 사항을 적고 서명했다.
“출발 보류. 보관 구역에서 개봉하려면 화주와 역의 공동 입회가 필요합니다.”
“그 상자는 우리 회사 소유입니다.”
“그럼 소유를 증명하는 원본도 갖고 오십시오.”
도건익은 입을 다물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회사가 지불할 비용이 늘어나는 것은 사실이었다. 진혁은 그 점이 마음에 걸렸다. 사기와 조작을 막는 일도 결국 누군가의 월급과 연결되어 있었다. 그래서 그는 도건익이 떠난 뒤 역장에게 물었다.
“불필요한 지연이 아니었다는 증거를 남길 수 있습니까?”
“서명과 운행 기록, 멈춰 선 시각을 남기지. 하지만 여섯 상자가 진짜 무엇인지는 확인해야 해.”
그 사이 기관차의 화부들은 뜨거운 물을 한 통 가져와 얼어붙은 연결쇠를 녹였다. 화물 열차는 계속 멈춰 있었지만 엔진의 열을 유지해야 했기에 석탄이 조금씩 사라졌다. 도건익은 시간당 석탄비와 선로 점유 비용을 모두 계산해서 역에 청구하겠다고 했다. 역장 문형규는 비용 산정 방식에는 이의가 없다고 답했다. 다만 운행을 보류한 원인이 운송 서류의 미비라면 책임을 가려야 한다고 했다.
현장의 긴장은 쉽게 풀리지 않았다. 화부 한 명은 오늘 예정된 세 번째 운송을 못 가면 야간 수당도 날아간다고 투덜댔다. 소담은 그에게 회사와 역의 책임을 나눠 임금 청구에 필요한 운행 시간을 별도로 적어 주겠다고 약속했다. 진혁은 그 대화를 들으며 눈앞의 계약 조작을 밝히더라도 한 번 멈춘 열차가 남기는 피해까지 지워지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라일은 창고 주변을 돌며 화차 번호를 확인했다. 번호가 모두 이어지는데 마지막 상자 봉인의 밀랍 색만 조금 달랐다. 그는 왜 차이가 나는지 궁금했지만 먼저 사진을 찍어 두었다. 예전의 자신이었다면 그 틈을 손가락으로 벌려 봤을 것이다. 지금은 어떤 증거도 자신의 호기심 때문에 망가지지 않게 해야 했다.
공동 입회가 성사된 것은 정오를 조금 넘긴 뒤였다. 회사에서 파견한 감정인과 남관역 물품관리인, 하서린이 지정한 현장 보전 대리인이 함께 서류를 확인했다. 세리아는 루멘 경매장의 영업용 감정인 면허를 제시했지만 독립적인 국가 감정인 역할을 자처하지 않았다. 그녀는 물품 감정에 관한 의견만 내기로 했다.
화차 문이 열리자 커다란 상자 여섯 개가 드러났다. 각 상자에는 붉은 밀랍으로 세 번 봉인이 찍혀 있었고, 안쪽에는 얇은 금속판이 끼워져 있었다. 도건익은 포장을 자르지 말라고 여러 차례 경고했다. 결국 모든 봉인을 사진으로 남긴 뒤 첫 상자를 개봉했다.
안에는 녹슨 신호 레버와 교체용 베어링이 들어 있었다.
진혁이 눈을 깜빡였다. “기록 상자가 아니라 부품 상자잖아요.”
다른 다섯 상자도 마찬가지였다. 마모된 고리, 금이 간 표시등, 낡은 도구들이 나왔다. 도건익이 비웃듯 말했다.
“습기 때문에 옮긴 거 맞지 않습니까?”
소담은 멍하니 빈 목차 봉투를 들여다봤다. 구서고에서 반출되었다는 기록의 상자번호와 실물 번호는 같았지만, 내용물은 전혀 달랐다. 누군가 서류 상자 여섯 개와 같은 번호를 가진 부품 상자 여섯 개를 따로 만들어 둔 셈이었다.
진혁은 가장 작은 표시등을 들어 올렸다. 겉에는 값싼 황동이지만 바닥에는 가는 홈이 있었다. 그가 장갑을 낀 손으로 옆면을 쓸자 글씨가 떴다.
[대상: 구형 신호 복귀등.] [상용 가치: 은화 두 닢.] [원래 용도: 반송 확인선의 통전 검사.] [비고: 회로가 끊긴 뒤에도 마지막 신호 시각 보존.]
“이것부터 조심해서 보관해 주세요.”
“왜요?” 도건익이 물었다.
“고장 난 표시등이 아니라 마지막 작동 시각을 기록하는 부품일 수 있습니다. 외관만 보고 판단하면 손해를 보실 겁니다.”
회사 감정인은 표시등의 구조를 확인한 뒤 고개를 끄덕였다. 분해하려면 인수인계서를 추가로 써야 했다. 도건익은 얼굴을 찌푸렸지만 그 자리에서 반대할 근거는 없었다.
그때 라일이 화차 밖으로 나가 선로 건너편 신호탑을 보았다. 붉은 시계바늘이 보이는 둥근 유리창이었다.
“저 시계, 네 시 십칠 분에 멈춰 있군요.”
소담이 말했다. “폐선할 때부터 움직이지 않아요. 열두 해째요.”
“왜 하필 네 시 십칠 분이죠?”
“정확한 사고 시각은 네 시 이십 분이라는 기록이 있는데요.”
라일은 작은 황동 고리를 꺼냈다. 고리의 아홉 홈 중 하나에 빛이 스쳤다. 그는 순간 벽과 선로가 뒤집히는 듯한 어지럼증을 느꼈다. 쇠로 된 발판을 오르는 작은 발, 아이의 손보다 큰 봉투, 검은 코트를 입은 누군가의 목소리가 머릿속을 지나갔다.
‘시계가 울리면 보내지 마.’
라일이 무릎을 꿇자 카렌이 달려왔다. “괜찮아요?”
그는 입술을 깨물고 고개를 끄덕였다. “기억인지 상상인지 모르겠어요. 그때 누군가가 분명 네 시 십칠 분이라고 말했습니다.”
진혁은 다시 표시등을 내려다봤다. 안쪽 금속판에는 육안으로 읽기 어려운 작은 눈금이 새겨져 있었다. 역의 시계와 맞춰 보니 표시등도 네 시 십칠 분에 정지해 있었다.
두 물건의 시간이 같다는 사실만으로 조작을 증명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역의 공식 사고 기록과 다른 시각이 두 개의 물건에 나란히 남았다는 것은 조사할 가치가 있었다.
재휘가 도착하기 전 진혁은 고장 난 복귀등의 뒷면에 새겨진 오래된 제작자 부호를 살폈다. 기판을 뜯으면 마지막 신호가 소실될 수 있었기 때문에 손을 댈 수는 없었다. 그는 대신 유리 밖에서 자철침이 가리키는 방향만 기록했다. 작은 바늘은 정북을 향하지 않았다. 역의 철제 기둥과 기관차의 자기력이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도 있었다. 정확한 판독은 차폐된 공간에서 해야 했다.
“결과는 지금 말할 수 없겠네요?” 카렌이 물었다.
“말할 수 있는 건 확실히 하나예요. 싸구려 고장품에도 아직 읽지 못한 정보가 남아 있다는 것.”
도건익 회사의 감정인은 뜻밖에도 그 말에 동의했다. 그는 젊은 시절 기계 수리공으로 일했고, 고철로 넘길 물건에서 재사용 가능한 부품을 찾아내는 일에 자부심이 있었다고 했다. 두 사람은 잠시 기계 구조에 관해 대화했다. 그 감정인은 회사의 지시로 일하고 있지만 모든 기계를 속이려는 사람은 아니었다.
진혁은 상대와 말을 나누며 한 가지를 배웠다. 경매에서 상대를 이기는 가장 좋은 방법은 상대가 가진 정보를 무시하는 것이 아니었다. 무엇을 알고 무엇을 모르는지 정확히 확인하는 일이었다. 도건익이 그 대화를 못마땅하게 바라봤지만, 회사 감정인은 끝까지 시험 규격을 알려 주었다.
오후에는 화물선로에서 작은 사고가 났다. 작업자가 멈춘 화차를 치우다가 받침목을 제대로 고정하지 않아 차륜이 손바닥 길이만큼 굴러간 것이다. 다친 사람은 없었지만 역장은 전원에게 작업을 중지시켰다. 진혁도 상자 가까이에서 움직이다 호된 꾸중을 들었다.
“감정사가 유물에 미쳐 사람을 못 보면 그게 무슨 감정사야!”
진혁은 머쓱하게 고개를 숙였다. “다음부터는 작업 구역 표시부터 확인하겠습니다.”
진혁은 역의 찬 공기 속에서 장갑을 벗어 손가락을 움직였다. 하루 종일 봉인된 상자만 쳐다보느라 목이 뻣뻣했다. 카렌이 따뜻한 차를 건네자 그는 웃으며 받았다. “눈으로만 감정하는 날이 이렇게 피곤할 줄 몰랐어요.” 카렌은 그를 보며 말했다. “힘으로 문을 열지 않아도, 오늘은 출발할 수 없던 열차 하나가 멈췄잖아요. 그런 하루도 필요해요.” 진혁은 차를 마시며 선로를 바라봤다. 조금씩 풀리는 얼음 사이로 미처 닦지 못한 발자국이 반짝였다.
저녁 무렵 상자 여섯 개는 남관역의 공동 봉인 창고로 옮겨졌다. 도건익은 운송 지연 손실에 관한 이의 서류를 남긴 뒤 떠났다. 그는 패배한 사람처럼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에게 필요한 것은 이미 끝냈다는 듯 담담했다.
소담은 화물 기록 두 장을 비교하다가 책상을 손바닥으로 쳤다.
“잠깐만요. 여섯 상자가 화차에 올라간 건 어제 새벽이 아니에요. 회사 문서에는 그제 밤으로 나와 있어요.”
“그래서요?” 진혁이 물었다.
“그날 구서고에는 아무도 들어가지 않았어요. 그럼 문서 상자를 빼낸 사람은 도건익 회사만이 아닐 수 있어요.”
진혁은 역 구내를 내려다봤다. 그들이 멈춘 것은 서류가 아니라 낡은 부품을 실은 열차였다. 그리고 진짜 서류는 열차가 오기도 전에 이미 다른 길로 사라졌을 수 있었다.
역의 오래된 시계는 네 시 십칠 분에 멈춰 있었다. 누군가 열두 해 전 사건의 시각을 바꾸려 했다면, 그 시계를 멈춘 일과 열차를 멈춘 일 사이에는 아직 밝혀지지 않은 연결이 있었다.
제123화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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