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레온 항구의 제3창고는 멀리서 보면 특별할 것 없는 건물이었다.
바닷가의 창고들은 대개 붉은 벽돌과 검게 그을린 소나무 기둥으로 지어졌다. 가을이면 소금기 섞인 바람에 못이 쉽게 녹슬기 때문에 항만 조합에서는 해마다 같은 시기에 지붕을 손보고 문짝에 기름을 발랐다. 제3창고 역시 높다란 미닫이문과 작은 화물창 두 개, 부두 쪽으로 늘어진 밧줄이 전부였다. 지붕에 앉은 갈매기 한 마리가 날아오른 자리를 제외하면 그곳은 마레온에서 가장 눈에 띄지 않는 장소 가운데 하나였다.
그 점이 오히려 이상했다.
“제3창고는 곡물과 어망을 보관하는 곳이라고 들었습니다.”
진혁은 부두 초입의 게시판에 붙은 창고 배치도를 살폈다. 나무판에 새겨진 숫자는 1, 2, 4, 5, 6으로 이어졌다. 세 번째 자리에는 분명 건물이 그려져 있었으나 이름표만 깨끗하게 비어 있었다.
카렌이 손가락으로 그 부분을 눌렀다.
“칠한 흔적이 있네요.”
“네. 오래된 건 지운 자리가 더 거칠어야 하는데 여기는 새것처럼 매끄럽습니다.”
“그걸 손으로 만지지 않고 어떻게 압니까?”
“보조 직원으로 일하면서 남의 실수만 찾은 시간이 길어서요.”
라일은 그들 뒤에서 장화 밑창을 털며 웃었다.
“서 감정사의 능력은 결국 사무직의 원한이군요.”
그들은 부두 노동자들이 퇴근하기 전, 아직 사람들이 많이 드나드는 시간을 골라 움직였다. 검은 경매의 정체가 무엇이든 세 사람이 텅 빈 항구로 몰래 들어가는 것보다 정상적인 물품을 확인하는 손님처럼 보이는 편이 안전했다. 진혁은 새로 지급받은 수석 감정사 대행의 동판 배지를 겉옷에 달았다. 번쩍이는 이름표 아래로 낡은 소매 끝이 드러나 조금 우스웠지만, 적어도 창고 사무원이 말을 들어 줄 가능성은 높아졌다.
제3창고 앞에는 어깨가 넓은 중년 여자가 장부를 펴 놓고 앉아 있었다. 노동자들은 그녀를 ‘포구의 난다’라고 불렀다. 얼굴 한쪽에는 그물에 긁힌 듯한 오래된 흉터가 있었고, 손톱 끝은 늘 검붉은 마정석 먼지로 물들어 있었다.
“루멘에서 나왔습니다. 보관 위탁품의 실물 확인이 필요합니다.”
진혁이 말하자 난다는 고개도 들지 않았다.
“확인할 위탁품이 없는데.”
“창고 전체가 비어 있습니까?”
“창고라는 게 비어 있다가 차기도 하죠. 자꾸 뭘 묻는 사람은 세관으로 보내요.”
카렌이 시의회 명령서 사본을 꺼냈다.
“공적 서류입니다. 검은 인장 상회와 연결된 화물 명부를 확인하겠습니다.”
난다는 그제야 고개를 들었다. 그녀는 명령서의 끝을 두 번 읽고 입술을 다물었다. 시의회 인장을 보고도 놀라지 않았지만, 종이 아래에 적힌 이사벨 론의 서명을 보고 얼굴빛이 변했다.
“그 여자가 직접 검사하겠다고 했어요?”
“알고 계십니까?”
“옛날에 같은 부두에서 일했어요. 원칙 때문에 늘 미움받았죠.”
난다는 의자를 뒤로 밀었다. 창고 문을 여는 데는 두 개의 쇠열쇠가 필요했다. 하나는 조합 소유, 다른 하나는 위탁인이 보유하는 방식이었다. 난다는 조합 열쇠를 넣었지만 두 번째 구멍에는 열쇠가 보이지 않았다.
“위탁인 열쇠가 없어서 못 엽니다.”
라일이 손을 뻗자 카렌이 그의 손목을 잡았다.
“지금 훔치면 증거 능력이 없어져요.”
“저는 열쇠가 어떻게 생겼는지만 보려던 건데요.”
“거짓말은 좀 덜 자연스럽게 해요.”
진혁은 문의 금속판을 유심히 보았다. 오래된 자물쇠에는 두 명이 동의해야 문이 열리는 정상적인 구조가 있었다. 문제는 위탁인 자물쇠의 열쇠 구멍이 살짝 뒤집혀 있다는 점이었다. 루멘의 초대장에 찍힌 고리와 똑같은 방향이었다.
그가 손바닥을 가까이 대자 글자가 나타났다.
[대상: 제3창고 계약문.]
[분류: 조합 보관소에 부착된 외부 거래 장치.]
[정상 개폐 조건: 조합 관리자 동의와 위탁인의 정당한 소유 증명.]
[비정상 우회 기능: 이름 대신 담보된 기억을 제시하면 임시 열림.]
[부작용: 문을 연 사람의 방문 기억 일부가 탈락.]
진혁은 문에서 손을 뗐다. 가느다란 통증이 손목을 지나 팔꿈치까지 올라왔다. 그는 고개를 돌려 라일을 바라봤다. 라일은 설명할 필요도 없다는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했다.
“그래서 내가 들어간 적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생기는 거예요. 본인이 문을 열면서 기억을 내버렸으니까.”
“당신은 무엇을 담보로 냈죠?”
“나중에요. 지금은 살아서 안에 들어가는 게 먼저니까.”
진혁은 두 번째 구멍을 무시하고 문짝의 작은 확인창을 두드렸다. 내부에서 아주 느린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잠시 후 눈높이보다 낮은 곳의 덮개가 열리며 붉은 안경을 낀 소년이 얼굴을 내밀었다. 열다섯 살이나 되었을까. 아직 어른이 되지 못한 얼굴이었지만 눈 밑에는 깊은 그늘이 있었다.
“무슨 일이죠?”
“위탁인이 직접 오기를 기다립니다.” 진혁이 말했다. “그전에는 문을 열 필요가 없어요. 대신 이 물건을 확인해 주시겠습니까?”
그는 검은 초대장을 창에 보여 주었다.
소년은 글자를 읽자마자 덮개를 닫으려 했다. 라일이 재빨리 손가락 하나를 끼워 넣었다.
“손가락은 내 거니까 닫으면 안 돼요.”
소년이 잠깐 망설였다.
“그 편지를 받았으면 해 질 때 와야 해요.”
“왜요?”
“그때 창고가 다른 데로 이어지니까.”
“어디로?”
소년은 고개를 숙였다.
“말하면 제 내일 하루를 가져간대요.”
누군가가 뒤에서 헛기침을 하자 소년은 황급히 창을 닫았다. 창 안쪽으로 쇠빗장이 내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진혁은 문을 두드리지 않았다. 저 아이가 지금 할 수 있는 선택이 무엇인지 먼저 생각했다. 강제로 말하게 만드는 순간 그들 역시 검은 경매와 다를 바 없어질지도 몰랐다.
난다는 창고 앞에서 담배를 끄듯 신발로 돌을 문질렀다.
“저 애는 원래 저기서 일하지 않았어요.”
“누군지 아세요?” 카렌이 물었다.
“항구 의료소에서 심부름하던 아이예요. 이름은 이안. 누나가 검사라던데.”
카렌의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졌다.
그녀가 창고 문 쪽으로 뛰려는 것을 진혁이 붙잡았다. 카렌은 반사적으로 손을 뿌리쳤다가, 눈앞의 사람이 적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하고 멈췄다.
“이안이라고 했어요?”
난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 전까진 분명 여기 있었어요. 그런데 문을 열면 또 모르는 사람이라고 하겠지.”
카렌은 눈을 감았다. 동생을 찾아 며칠 동안 약방과 병원을 뒤졌지만 돌아오는 것은 돈을 갚으라는 통지서뿐이었다. 이안이 스스로 다른 데로 갔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서도 그럴 리 없다고 믿고 싶었다. 동생은 열이 잦은 아이였고, 물이 차오르면 무릎이 아파 잘 걷지 못했다. 그녀가 지키지 않으면 누가 지킬 것인가.
“지금 문을 부숴요.”
“그러면 이안의 방문 기억부터 지워질 겁니다.” 진혁이 말했다.
“그걸 어떻게 확신해요?”
“확신은 못 합니다. 하지만 문에는 누가 열었는지 대신 기억을 가져가는 장치가 있어요. 저 아이가 담보로 잡힌 상태라면 더 위험합니다.”
카렌이 이를 악물었다. 손등에 힘줄이 솟았다.
“그러면 무슨 방법이 있는데요?”
“증거를 모아 정상적으로 여는 겁니다. 지금 보시면 저 문에 열쇠가 두 개 필요한 이유가 있잖아요. 소유자 이름을 먼저 확인하면 우회 장치를 사용하지 않아도 열 수 있어요.”
그 말은 느린 해결책이었다. 하지만 카렌은 검의 자루를 놓고 한 번 깊게 숨을 쉬었다.
난다는 자신의 장부에서 두 장을 찢어 건넸다. 한 장에는 제3창고의 본래 위탁인이 ‘세관 지정 공동 보관소’라고 쓰여 있었고, 다른 장에는 한 달 전부터 관리 주체가 ‘무명회사’로 변경됐다는 붉은 도장이 찍혀 있었다. 원인 서류 번호는 998이었다.
“이 번호.” 진혁이 중얼거렸다.
“아는 겁니까?” 난다가 물었다.
“루멘 기록에도 나옵니다.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사람의 이름’이라는 상품 번호죠.”
라일은 고개를 돌렸다. 바람에 눌린 외투 끝이 흔들렸고, 그의 표정에서 잠시 장난기가 사라졌다.
“그 이름은 문을 여는 열쇠가 아니라 마지막 빚을 떠안을 사람을 지정하는 거예요.”
진혁은 그를 보았다.
“당신이 그 경매에 있었습니까?”
“나도 어쩌면 있었겠죠. 하지만 기억은 내 이름과 함께 담보로 잡혔으니까.”
남쪽 수평선에 먹구름이 모이기 시작했다. 부두에서는 폭풍 경보를 알리는 깃발 하나가 올라갔다. 어부들은 바람이 심상치 않다며 배를 묶었지만 항만청의 공식 일기 기록에는 오늘 밤이 맑을 것으로 적혀 있었다. 바다에서 살아온 사람들이 공식 기록보다 파도의 냄새를 더 믿는 것은 흔한 일이었다. 그러나 평생 무역으로 먹고살던 마레온의 상인들이 잘못된 예보에 따라 창고 문을 열어 두었다면 피해는 적지 않을 터였다.
진혁은 항만청 게시판에 적힌 숫자를 눈여겨봤다. 평소에는 강풍 경보를 담당하는 항만 방벽의 마력 사용량이 지난주 대비 절반으로 줄어 있었다. 루멘 심실의 모라가 ‘저기가 아프다’고 말한 이유가 조금 보였다.
“바다의 힘이 약해지고 있습니다.”
“날씨가 나빠진다는 뜻인가요?”
“자연이 꼭 그렇게 움직이는 건 아닐 겁니다. 누군가 방벽 유지에 쓰일 힘을 다른 데로 돌리고 있을 가능성이 있어요.”
그들은 항만청으로 갔다. 낡은 돌계단 위로 해풍이 모래를 밀어 올리고 있었고, 창문마다 교대 시각을 적은 작은 종이가 붙어 있었다. 공무원은 서류를 세 번 확인한 뒤에야 ‘최근 경보 설비 수리 중’이라는 짧은 대답을 내놓았다. 그러나 진혁이 수리 의뢰서를 보여 달라고 하자 담당자가 눈을 피했다.
“수리는 담당 기사만 알아요.”
“그럼 담당 기사의 이름을 적어 주십시오.”
“기록이….”
그는 말끝을 흐렸다.
“설마 비어 있습니까?”
공무원은 대답하지 못했다.
카렌은 거울처럼 닦인 창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보고 입술을 깨물었다. 이안이 저 안에 있다는 걸 알면서도 당장 데려올 수 없다니 참기 어려웠다. 진혁은 그녀를 데리고 항만청 밖으로 나왔다. 도시 쪽 언덕으로 오르는 좁은 골목은 작은 생선 가게와 수선방 사이로 이어졌다. 어떤 집에서는 아이가 책을 읽었고, 다른 집에서는 아버지가 젖은 그물을 수선했다. 그들에게 폭풍 예보는 살아남을 수 있느냐를 정하는 숫자였다.
“오늘 해질 무렵 들어갈 겁니다.”
진혁이 말했다.
“저를 못 믿겠다면 혼자 가셔도 돼요. 하지만 저는 이안이 왜 그곳에 있는지 알아내고 데려올 방법을 찾겠습니다.”
카렌은 그를 노려보다 고개를 돌렸다.
“혼자 가면 제가 문부터 부술 것 같아서요.”
“저도 알아요.”
“짜증 나네요. 당신 같은 사람이 옆에 있어서.”
“감사 인사로 듣겠습니다.”
잠시 뒤 카렌이 작게 웃었다. 웃음의 끝은 떨렸지만 발걸음은 조금 안정됐다.
해가 바다 쪽으로 기울자 세 사람은 다시 제3창고 앞으로 돌아왔다. 사람들은 거의 퇴근했고 부두에는 밧줄을 감는 소리만 남았다. 난다는 창고 문 앞에 다시 의자를 놓고 앉아 있었다. 그녀가 조합 열쇠를 들어 올리며 말했다.
“오늘 밤 여기서 무슨 일이 생기는지 내가 보고 증언할게요. 누가 제 이름도 지워 버릴지 모르겠지만.”
진혁은 그녀에게 작은 종이 두 장을 건넸다.
“한 장에는 지금까지 있었던 일을 쓰세요. 다른 한 장은 아무 내용 없이 주머니에 넣으세요. 혹시 기억이 흐려지면 서로 비교해 보시고요.”
난다는 피식 웃었다.
“감정사 양반, 나 같은 사람도 증거가 될 수 있나?”
“누구보다 중요하죠. 실제 문을 관리한 사람이니까.”
마지막 햇빛이 창고의 녹슨 번호판을 스쳤다. 그 순간 비어 있던 판 위에 숫자 3이 나타났다가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벽에 그려진 그림자도 이상하게 길어졌다. 골목 끝은 본래 부두로 이어져야 했지만 어느새 검은 돌바닥의 좁은 길로 연결되고 있었다. 양쪽 가게의 창문이 하나씩 꺼지고, 존재하지 않았던 건물들이 그림자 속에서 솟아났다.
진혁의 손끝에 차가운 문장이 맺혔다.
[비공개 거래장 접근로 개방.]
[제3창고는 입구일 뿐 실물 경매장과 동일 장소가 아님.]
[입장 조건: 되돌릴 수 없는 비물질적 가치 한 건.]
라일이 낮게 말했다.
“여기서부터는 지도가 도움이 안 됩니다.”
골목 저편에서 검은 모자를 쓴 안내인이 천천히 걸어 나왔다. 얼굴 위에는 거울처럼 반짝이는 가면을 쓰고 있었다.
“초대받은 분, 앞으로.”
안내인은 고개를 숙였다.
“오늘 여러분이 가져오신, 값으로 매길 수 없는 물건은 무엇입니까?”
진혁은 한순간 대답하지 않았다. 카렌은 검집을 움켜쥐고 있었고, 라일은 목덜미의 은빛 실을 손가락 사이에 감았다.
그때 안내인의 가면에 낯익은 얼굴이 비쳤다.
낮에 창고 확인창 너머에서 만났던 소년, 이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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