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레온의 아침은 바다보다 먼저 깨어났다.
북쪽 조선소에서는 아직 해가 수평선 위로 올라오기도 전에 쇠망치 소리가 시작됐다. 어부들이 물기를 머금은 밧줄을 끌어당기면 부두의 나무 말뚝이 낮게 울었다. 생선 경매를 기다리는 갈매기들이 잿빛 하늘 아래 원을 그렸고, 골목마다 굴뚝에서 피어오른 연기가 바닷안개에 섞였다. 수백 년 동안 그랬듯 오늘도 사람들은 배를 띄우고 장부에 값을 적었다.
그러나 서진혁에게만은 그 평범한 풍경이 위태로워 보였다.
‘등록번호 999. 마레온의 내일.’
전날 밤 문틈으로 들어온 검은 초대장의 마지막 문장이 눈을 감아도 떠올랐다. 그는 항구 근처 여인숙 삼층 다락방에서 거의 잠을 이루지 못했다. 창틀 사이로 들이치는 바람에 초대장이 몇 번이나 바닥으로 떨어졌고, 그때마다 주워 책 사이에 끼웠다. 어제까지도 월세를 걱정하며 사는 사람이었는데 누군가 도시의 내일을 경매에 부치겠다는 말을 이해해야 한다니, 세상에 이렇게 직급과 업무가 맞지 않는 회사가 또 있을까.
진혁은 물이 덜 데워진 세숫대야에 얼굴을 씻었다. 거울 대신 걸린 작은 광택판에는 피로에 찌든 눈과 헝클어진 머리가 비쳤다. 손바닥 안쪽에 남은 ‘본질을 본다’라는 문양은 평소보다 흐릿했다. 어제 공개 감정 심사에서 지나치게 능력을 쓴 탓인지 문자들을 집중해서 읽으려 하면 눈꺼풀 뒤쪽이 쑤셨다.
‘이번에는 먼저 종이를 읽자. 손을 대고 기절하는 것보다 낫다.’
그는 초대장을 등잔 가까이 가져갔다. 종이는 매끄러운 검정색이었고, 모서리에 짠 바다 냄새가 스며 있었다. 초청장의 글씨는 건조한 금분으로 쓰인 것처럼 빛났지만 손톱으로 문질러도 떨어지지 않았다. 봉투에는 받는 사람 이름도, 배달한 사람의 흔적도 없었다. 다만 거꾸로 뒤집힌 일곱 번째 고리의 인장만 유독 선명했다.
진혁이 손바닥을 가까이 대자 문장이 하나씩 떠올랐다.
[대상: 검은 경매 초청장.]
[표면 용도: 비공개 거래장 입장 증명.]
[작성 시각: 어제 소유권 심사 종료 17분 전.]
[발송자의 이름: 비공개.]
[잔류 기억: 물기가 묻은 장갑. 의자 아흔여덟 개. 빈 명패 하나.]
[감정 누락: 초청을 수락할 때 요구되는 대가.]
“의자 수가 또 왜 나오는데.”
그가 중얼거릴 때 아래층 식당에서 여인숙 주인의 고함이 들렸다.
“서 감정사! 당신 찾는 사람이 왔어요! 그 은발 아가씨요!”
진혁은 급히 초대장을 접었다. 복도를 뛰어 내려가다가 계단 모서리에 발을 찧고 얼굴을 구겼다. 식당에는 카렌 하르트가 앉아 있었다. 햇빛이 아직 희미한 시간인데도 검집을 허리에 차고, 머리카락을 단정히 묶은 모습이었다. 그녀 앞에는 식지 않은 보리죽 두 그릇이 놓여 있었다.
“한 그릇은 제 겁니까?”
“다른 사람도 부르셨나요?”
“혹시 저한테 돈 빌려준 사람이면 피해 다녀야 해서요.”
카렌이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밥부터 먹어요. 오늘 시의회에서 정식 보호 계약 심사 전에 현장 검사를 나오기로 했어요.”
그녀는 작은 봉투 하나를 내밀었다. 시의회 회색 봉랍이 찍힌 소환장이었다. 검사 시각은 오전 열 시, 대상은 루멘의 지하 관리 시설과 현행 위탁 계약 원부. 오르텐 백작의 소유권 청구는 기각됐지만 그것이 사라진 직원과 모라의 보호 문제까지 해결한 것은 아니었다.
“삼십 일 안에 원권리자를 확인하라고 했죠. 벌써 첫날부터 일이군요.”
“그렇다고 삼십 일 동안 밥도 안 먹을 생각은 아니죠?”
진혁은 죽을 한 숟가락 떠먹었다. 따뜻한 곡물이 목을 넘어가자 밤새 움츠러든 배가 비로소 움직였다. 한참 굶었던 사람처럼 빠르게 먹자 카렌이 작은 물병을 밀어 주었다.
“그런데 어제 퇴근할 때 어떤 편지 받았어요?”
진혁은 숟가락을 멈췄다.
“어떻게 아셨습니까?”
“당신 숙소 앞에 검은 모자를 쓴 사람이 다녀갔다는 말을 들었거든요. 야간 순찰하던 경비가 이상하게 여겼어요.”
“경비들은 왜 그 사람을 잡지 않았답니까?”
“우편 배달부를 매번 체포할 순 없잖아요.”
진혁은 부정할 수 없어 입을 다물었다. 초대장을 꺼내 보여 주자 카렌의 눈길이 금빛 글자 위에 오래 머물렀다. 그녀는 ‘마레온의 내일’이라는 문장을 손가락으로 짚고 나서 천천히 말했다.
“아버지가 살아 있을 때 비슷한 말을 한 적이 있어요. 미래를 사고파는 놈들을 만나면 가장 먼저 누가 대금을 내는지 보라고.”
“누가 냅니까?”
“팔겠다는 사람이 아니라, 팔리는지도 모르는 사람들이요.”
식당 문이 열리며 차가운 바람이 들어왔다. 하역 노동자 두 명이 젖은 장화를 벗지도 못한 채 들어와 선 채로 빵을 샀다. 카렌은 그들을 잠시 바라봤다. 누군가의 거래 때문에 저 사람들의 내일이 사라질 수 있다면, 경매란 말은 너무 그럴듯한 이름이었다.
루멘 경매장은 오전 아홉 시부터 평소처럼 손님을 받았다. 높다란 황동 정문 양쪽에는 지난밤 심사 도중 파손된 난간이 아직 천으로 감겨 있었다. 대홀의 대리석 바닥은 종업원들이 닦아 윤이 났지만, 천장 샹들리에 하나에서는 떨어진 유리 조각을 모두 회수하지 못했는지 작은 빈자리가 보였다. 경매장은 거대한 비밀을 품고도 너무나 평범하게 업무를 시작하고 있었다.
헥터 경비대장은 직원 휴게실에서 조사 명단을 작성하고 있었다. 벽에는 실종된 직원 세 명의 얼굴을 그린 종이가 붙어 있었다. 보조 장부원 벨트, 야간 운반원 로아, 전임 감정 보조 데브. 실종 날짜는 달랐지만 세 사람 모두 검은 인장 상회의 위탁품을 취급한 직후부터 행방이 묘연했다.
“시청에서 오늘부터 근무 기록을 전부 달라고 했네.”
헥터가 말했다.
“줄 수 있는 건 줘야죠.”
“문제는 없는 기록이야. 명부에 공백이 있어. 분명 내가 서명한 야간 교대표인데 특정 날의 이름만 하얗게 비어 있네.”
진혁은 종이에 손을 댔다. 아주 희미한 먹 냄새와 함께 누군가 지운 흔적이 눈앞에서 떠올랐다. 벨트라는 이름이 있어야 할 칸에는 다른 글자가 수차례 덮였다가 사라진 흔적뿐이었다.
[기록 편집 방식: 단순 삭제 아님.]
[수정 효과: 해당 근무자의 이름을 떠올릴 수 없도록 기억 저하 유도.]
[재료: 은빛 해초 추출액, 인장 먹물.]
“이 명부를 누가 만들었습니까?”
“서기가 만들고 내가 승인했지. 종이는 항상 같은 인쇄소에서 들여왔어.”
“인쇄소부터 조사해야겠습니다.”
“아직 추궁할 사람이 남았네. 오르텐이 시청 임시 구금소에 있긴 하지만 입을 다물고 있어. 로델도 자기 감정서가 바뀌었다고 주장하지.”
진혁은 자리에 놓인 초대장을 헥터에게 보여 주었다. 세리아가 집무실로 들어서자 세 사람은 자연스럽게 대화를 멈췄다. 그녀는 초대장을 읽고도 놀라지 않았다. 오히려 얼굴이 더 차분해졌다.
“결국 보내왔군.”
“알고 계셨습니까?”
“검은 경매가 실제로 열리는지조차 확인할 수 없었어. 돈을 가진 사람은 초대받지만 그곳에서 뭘 사는지는 절대로 기록에 남지 않는다는 소문뿐이었지.”
세리아는 초대장 끝부분의 인장을 조심스럽게 살폈다. 검지에 낀 낡은 구리 반지가 금속 소리를 냈다.
“거꾸로 된 고리. 루멘이 동의와 대가로 봉인을 지킨다면 저들은 누가 동의했는지 묻지 않고 가격만 치르는 방식을 만들려고 해.”
“초청장의 조건은 ‘가격이 없는 것’을 가져오라는 거잖습니까. 저는 월급날도 아직 멀었습니다.”
“돈이 아니라는 뜻이지.”
그때 바닥 아래에서 낮은 박동이 울렸다. 남들은 느끼지 못할 정도였지만 세리아의 손끝과 진혁의 구리 반지가 동시에 떨렸다. 진혁은 심실의 모라가 깨어 있다는 것을 알았다.
“오늘 아침에 빵 가져왔어요.”
그가 가방을 살짝 들자 세리아가 눈을 크게 떴다.
“자네, 정말로?”
“약속했으니까요. 물론 한참 아래로 가야 하긴 하지만.”
세리아는 아주 작게 웃었다. 지금까지 그녀가 매일 모라에게 무엇을 먹이는지, 아이가 음식을 먹을 수는 있는지 제대로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는 표정이었다.
지하 심실에는 의회의 허가를 받은 사람만 들어갈 수 있었다. 세리아는 오전 검사 전에 잠깐 둘을 데려갔다. 계단을 내려갈수록 신발 밑창에 바닷소금이 달라붙었고, 푸른 광맥이 희미하게 맥박쳤다. 검은 물 위에 떠 있던 모라는 진혁의 발소리를 알아차리고 고개를 들었다.
“서진혁.”
“약속대로 왔습니다.”
그가 따뜻한 작은 빵을 천에 싸서 보여 주자 아이의 눈이 둥글어졌다. 심실의 공기가 잠시 일렁였고, 빵 하나가 천천히 수면을 건너갔다. 모라는 아주 작은 조각을 떼어 입에 넣었다. 먹는 법을 모르는 듯 한참 굴리더니 두 눈을 깜빡였다.
“따뜻해.”
“그렇죠?”
“바깥은… 다 따뜻해?”
진혁은 쉽사리 대답하지 못했다.
“그런 날도 있고, 추운 날도 있어요. 비가 오기도 하고요.”
모라는 물 위에 손을 펼쳤다. 아이가 만든 작은 비구름 아래로 조그만 항구와 배들이 나타났다. 진혁이 알고 있는 마레온과 똑같았지만 항만 북쪽의 창고 세 채에는 검은 얼룩이 번지고 있었다.
“어제부터 저기가 아파.”
“어디요?”
“바다가 아니야. 약속이 아파.”
세리아의 표정이 굳었다. 모라는 마력선과 계약의 맥을 느낄 수 있었지만 인간의 문서를 읽지는 못했다. 아이는 창고 위에 떠 있던 검은 얼룩을 손끝으로 문질렀다.
“내일을 잡아당겨. 아직 오지도 않았는데.”
진혁은 초대장을 꺼내 작은 환영과 나란히 놓았다. 두 물건은 닿지도 않았는데 같은 음색으로 짧게 울렸다.
[연결 감지.]
[초대장과 항구 제3창고의 등록 장치가 동일한 인장 체계를 사용.]
[등록번호 999의 실물 위치: 확인 불가.]
[참고: 미래는 물건이 아니나 미래에 대한 권리는 계약으로 위장될 수 있음.]
“항구 제3창고.”
진혁이 말했다. 부두의 평범한 창고가 검은 경매로 이어진다니 믿기 어려웠지만, 그곳이라면 입항 기록과 물품 명부를 통해 확인할 수 있었다.
모라가 빵을 꼭 쥐었다.
“또 올 거야?”
“갑니다. 그리고 돌아올 겁니다.”
“그럼 나도 볼래. 바깥의 내일.”
오전 열 시가 되자 시의회 감찰관들이 루멘 정문으로 도착했다. 검사장은 모라와의 대화에 익숙하지 않은 회색 머리의 여성, 이사벨 론이었다. 그녀는 사적인 감상을 거의 드러내지 않은 채 공적 검사 명령을 읽었다. 보호 기금의 재원, 봉인 시설의 안정성, 독립 의사 확인. 그리고 서진혁의 감정 결과를 제삼자가 검증할 방법까지 요구했다.
“마법으로 보이는 글자만으로 사람의 권리를 인정하긴 어렵습니다.”
그녀는 정확하게 말했다.
“알고 있습니다.” 진혁이 답했다. “그래서 증인을 부르고, 기록을 남기는 겁니다.”
이사벨은 잠시 그를 바라보다 서류를 덮었다.
“좋습니다. 그렇다면 내일까지 창고와 위탁품의 등록 원본을 제출하십시오. 시청 인장이 찍혔다고 모두 진짜는 아니라는 사실이 확인됐으니까요.”
진혁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믿을 수 없는 것을 증거로 만들려면 검증할 수 있는 길이 필요했다. 이번 싸움에서는 그 원칙이 목숨보다 중요할 수도 있었다.
회의가 끝나고 직원들이 흩어질 때, 진혁은 초대장을 다시 펼쳤다. 아침에는 없었던 글자가 종이 아래에 나타나 있었다.
‘제삼자의 눈으로 보지 못하는 것을 하나 가져오시오.’
‘오늘 해질 무렵, 제3창고의 문을 두드릴 것.’
그는 잠깐 생각하다가 카렌을 바라봤다.
“제가 보기에 이 사람들, 회의를 엿듣고 있습니다.”
“아니면 경매장이 먼저 읽고 있는 거겠죠.”
라일이 문틀에 기대어 서 있었다. 언제 들어왔는지 아무도 몰랐다. 그는 종이에 찍힌 인장을 보는 순간 평소의 장난스러운 표정을 지웠다.
“제3창고로 가면 발을 들인 사람이 누구였는지 기억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어요.”
“가 본 적 있습니까?” 진혁이 물었다.
라일은 한참 답하지 않았다.
“저는 그곳에 이름을 두고 나왔거든요.”
그는 자신의 목덜미에서 은빛 실 한 가닥을 꺼냈다. 빛에 비추자 실 끝에는 누군가의 필체로 쓰인 글자 하나가 매달려 있었다. 그러나 진혁이 읽으려는 순간 글자는 검게 번졌다.
“이번에는 누가 나올지 직접 보러 가죠.”
라일이 말했다.
그 말은 모험을 제안하는 목소리가 아니었다. 이미 한 번 죽을 뻔했던 장소에 돌아가겠다고 결심한 사람의 목소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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