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리 명패에 새겨진 두 이름은 유난히 작았다.
기술자들이 쓰는 글자는 대개 크고 분명했지만, ‘한서겸’과 ‘유나’는 얇은 바늘로 여러 번 긁어 낸 것처럼 희미했다. 오래된 기계가 수십 년 동안 수리와 재조립을 거치는 동안 어느 이름은 녹슬고 어떤 이름은 살아남았다. 진혁은 명패를 닦지 않았다. 표면에 남은 녹과 먼지까지도 누가 언제 손댔는지 알려 줄 수 있었다.
다음 날 오전, 명패는 감정청 보존실의 유리 상자 안에 놓였다. 하서린은 기계 제작 조합에서 보내온 규격 기록을 펼쳤다. 고장 난 분류기는 열두 해 전 제작된 것으로 보였다. 더 정확히는 영번 감정대의 보조 설계가 민간 배송조합에 제공된 시기와 겹쳤다.
“이것만으로 한서겸이 그때 살아 있었다고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하서린이 말했다. “이름이 남은 설계도를 나중에 사용했을 수도 있으니까요.”
세리아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손이 떨렸다. 그녀가 기억하는 유나는 누구보다 기계의 작동 원리를 따지던 사람이었다. 사람들이 아름다운 경매장 무대에 정신이 팔릴 때 유나는 출입문과 안전 밸브, 사람이 거절할 수 있는 절차를 물었다. 세리아는 그런 유나를 때때로 지나치게 조심스러운 사람이라고 여겼다.
“그 사람은 물건에 값을 붙이는 것보다 값을 붙이지 말아야 할 것을 먼저 골랐어.” 세리아가 말했다. “나는 그게 경매장 운영에 방해된다고 생각했고.”
진혁은 그녀를 위로할 말을 바로 찾지 못했다. 뒤늦은 후회는 누군가가 대신 덜어 줄 수 있는 물건이 아니었다. 그는 명패 옆에 놓인 낡은 작업 지시서를 살펴보며 물었다.
“유나가 검수했다면 검수표가 남아 있을까요?”
“원본이 있다면 민간 조합에 남아 있을 겁니다.”
라일은 동쪽 운하에 다시 가겠다고 했다. 카렌이 먼저 따라나섰다. 낙찰받은 분류기는 아직 옛 우체국 창고에 있었고, 소유권 이전 전후의 서류를 조사해야 했다. 진혁과 세리아는 감정청에 남아 기술 담당자의 입회를 요청했다.
정오가 가까워질 무렵 감정청의 원로 기술자 박로진이 들어왔다. 그는 한때 왕도의 분류장치를 수리하던 사람이었다. 한쪽 눈에 커다란 단안경을 끼고, 두툼한 손가락으로 기계의 구리판을 두드렸다.
“이건 배송용 장치가 아닙니다. 정확히는 배송이 실패했을 때 작동하는 장치입니다.”
그는 두 장의 종이와 나무 토막을 가져왔다. 일곱 개의 짧은 막대는 입회 기록을 뜻했고, 여덟 번째 막대는 기록을 보관하는 사람의 권한을 나타냈다. 아홉 번째 자리에는 막대가 없었다. 대신 종이가 원래 들어온 쪽으로 돌아가는 작은 통로가 있었다.
“물건을 전달하라고 한 사람이 거절당하면, 이 통로로 기록이 돌아갑니다. 억지로 수령 처리하는 일을 막으려고 만든 거죠.”
“그런데 지금 왕립 경매원의 규정에는 아홉 번째 입회인이 필요하다고 적혀 있습니다.” 하서린이 말했다.
“그 규정은 배송조합 설계와 다릅니다. 언제 바뀌었는지 조사해야겠군요.”
진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아홉 번째 칸이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기술적으로 입증할 실마리가 생겼다. 그렇다고 곧바로 모든 사건이 풀린 것은 아니었다. 문제는 누군가 그 장치를 사람의 동의를 대신하는 데 이용했다는 의혹이었다.
박로진은 조심스럽게 덧붙였다. “그리고 실제 기계는 도면과 다를 수 있습니다. 복원 전에 분해 검사와 기록 대조를 해야 합니다. 종이 위의 좋은 설계가 현장에서 꼭 좋은 장치였던 건 아닙니다.”
진혁은 그 말을 장부에 적었다. 비밀을 밝히는 과정에서 가장 필요한 것은 멋진 선언이 아니라 불편한 확인이었다.
박로진은 바로 결론을 내리지 않고 간단한 시험 장치를 만들어 보였다. 그는 종이에 ‘승인’과 ‘거절’을 쓰고 두 장을 서로 다른 슬롯에 넣었다. 아무도 아홉 번째 칸을 막지 않았을 때는 거절 종이가 원래 자리로 돌아왔다. 하지만 마지막 통로에 나무막대를 끼우자 종이는 안쪽 톱니에 걸려 더 이상 움직이지 못했다.
“문제는 여기입니다.” 박로진이 말했다. “이때 억지로 기계를 돌리면 반송해야 할 문서가 배송 완료 상자에 떨어질 수도 있습니다.”
하서린이 종이의 움직임을 기록하도록 보조 서기에게 지시했다. 세리아는 바짝 다가가 톱니의 방향을 살폈다. 작은 기계가 보여 준 결과는 무서웠다. 사람의 말이 바뀌는 것이 아니라, 말을 실은 종이가 다른 상자로 떨어지는 것만으로 기록이 바뀔 수 있었다.
“누군가 고의로 막았다면?” 진혁이 물었다.
“그 사실은 별도로 입증해야 합니다. 지금은 이런 변경이 어떤 오류를 낳는지만 보여 준 겁니다.”
박로진은 오래된 장치에 새로 기름을 바르지 않았다. 시험에 사용한 것은 모형이었다. 원본의 흔적을 훼손하지 않는 것이 중요했기 때문이다. 그는 모든 조작을 서기 앞에서 한 번 더 반복했다.
“기계가 틀린 말을 하는 건 아닙니다. 사람이 기계의 출력에 이름을 잘못 붙이는 거죠.”
진혁은 그 말을 기억해 두었다. 경매장에서는 물건에 붙은 가격표 하나가 사람들의 태도를 바꾸었다. 기록청에서는 서류함에 붙은 ‘수령 완료’라는 한 줄이 한 사람의 운명을 바꿀 수 있었다.
그때 동쪽 운하에서 보낸 전령이 들어왔다. 카렌과 라일이 공탁소의 교환 기록을 찾았다는 소식이었다. 기록에는 열두 해 전 한서겸의 거절 통지와 함께 분류기 수리 명세서가 묶여 있었다. 수리 명세서는 어느 날 갑자기 취소됐는데, 이유가 이상했다.
‘반송 구획을 증인석으로 전환할 것.’
세리아가 숨을 삼켰다. 지금 왕립 경매원의 영번 감정대가 보이는 잘못된 동의 기록과 너무 닮은 지시였다. 기록을 돌려보낼 통로를 사람이 앉는 자리로 바꾸면, 거절은 어디로 가는가. 누구도 받지 않은 거절이 계속 쌓이다가 결국 동의로 처리된다면 무엇이 남는가.
“그 설계를 승인한 사람이 누구인지 확인해야 해요.” 그녀가 말했다.
하서린은 문서를 뒤집었다. 승인란은 두 개였다. 하나에는 왕립 경매원 사고 보상계의 공용 인장이 찍혀 있었고, 다른 하나는 비어 있었다. 빈자리 아래에는 낯익은 글이 있었다.
‘최종 감정은 외부 감정사가 대신한다.’
진혁은 어깨에 묘한 한기가 스치는 것을 느꼈다. 자신이 왕도로 오기 전부터 이미 최종 감정사 자리에 등록된 사건이 떠올랐다. 누군가는 오래전의 잘못된 구조를 고치지 않은 채, 지금도 다른 사람을 그 자리에 앉히려 하고 있었다.
“제 이름으로 서류를 끝내려던 이유가 이거였군요.”
“가능성이 있습니다.” 하서린이 답했다. “하지만 누가 그렇게 했는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진혁은 곧바로 결론을 내리고 싶은 충동을 참았다. 그 순간 왕도의 감정청에서는 새로운 조사 회의가 열릴 준비를 하고 있었다. 강제 시연 중단 사건의 증거를 검토하는 공개 청문회였다. 청문회에는 사고 당사자와 경매원 관계자뿐 아니라 피해를 주장하는 시민도 참석할 수 있었다.
그날 오후 감정청 앞에서는 서류를 들고 기다리던 시민 몇 사람이 하서린에게 항의했다. 그중에는 오래전 승인 기록 때문에 세금을 두 번 냈다는 행상도 있었다. 그들은 왜 이제 와서야 장치를 조사하느냐고 물었다. 하서린은 증거를 확인하는 데 시간이 걸린다고 설명했지만, 그 말만으로 기다린 사람들의 분노가 사라지지는 않았다.
세리아는 사람들 사이에서 한 젊은 여자를 만났다. 여자는 부모의 사망 이후 가게를 이어받았는데, 본 적 없는 계약에 동의했다고 기록돼 있다고 했다. 그 때문에 가게를 팔지도, 남에게 빌려주지도 못하고 있었다. 세리아는 그녀의 계약서를 직접 가져가지 않았다. 대신 하서린의 안내에 따라 정식 사본을 접수하도록 도왔다.
“경매장에서 물건을 팔던 사람인데 이런 서류는 잘 모른다고 하면 웃기겠죠?” 세리아가 말했다.
여자는 씁쓸하게 웃었다. “저도 가게에서 평생 물건을 팔았어요. 그런데 제 가게를 산 적도 없는 사람이 주인이라고 하는 건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세리아는 대답을 찾지 못했다. 오래된 장치를 조사하는 목적이 기계의 결함을 밝히는 데서 끝나서는 안 된다는 사실이 분명해졌다. 그 오류 때문에 삶이 묶인 사람들이 있었다. 누구의 계약이 실제로 잘못됐는지는 조사해야겠지만, 적어도 의심을 제기할 길은 열어 두어야 했다.
그날 밤 여관에서는 여러 사람이 한 탁자에 모였다. 세리아는 유리판 사진을, 카렌은 레온의 기록을, 라일은 조합의 황동 고리를, 진혁은 자신이 낙찰받은 부품의 감정서를 펼쳤다. 각자의 단서가 한꺼번에 놓이자 탁자가 너무 좁아졌다.
“이럴 줄 알았으면 넓은 방을 잡았죠.” 진혁이 말했다.
“넓은 방값도 당신이 계산할 거잖아요.” 카렌이 받았다.
“방값보다 서류 복사비가 무섭습니다.”
세리아가 조용히 웃었다. 오랫동안 웃음을 잃고 있던 그녀에게는 작은 변화였다. 루멘 경매장에서는 언제나 혼자 모든 책임을 지는 것이 사장의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지금은 각기 다른 사람이 서로의 기록을 확인하고 있었다.
라일은 황동 고리를 탁자 가운데 놓았다. “한서겸이 설계한 장치를 누군가 바꿨다면, 저는 왜 그런 물건을 배달하라는 명령을 받았던 걸까요?”
카렌이 답했다. “아마 거절을 되돌려 보내려는 사람에게 전달하지 못하게 하려 했을 수도 있죠. 하지만 당신이 당시 어디에 있었는지는 확인해야 해요.”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기억은 선명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누군가를 만나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라일은 우체국 경매의 낙찰 명세서에서 작은 항목 하나를 발견했다. 제작자 서명란 아래에 적힌 수령 지점이었다.
‘남관역. 북쪽 화물 출입구.’
왕도에서 남관역까지는 겨울 화물 열차로 반나절 거리였다. 그곳은 왕실의 오래된 물품이 지방으로 분산되던 분기점이었다.
진혁은 그날 확인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장부 맨 뒷장에 따로 정리했다. 장치가 잘못됐다는 사실과 그 장치 때문에 실제 피해가 발생했다는 사실은 서로 다른 질문이었다. 그는 두 질문을 섞지 않겠다고 적었다. 기록이 정확할수록 구제받아야 할 사람이 엉뚱한 주장에 휘말릴 가능성도 줄어들 것이었다.
그날 밤 진혁의 손바닥에 새로운 문구가 떠올랐다.
[기록 연결: 제9반송구와 남관역 화물 원부.]
[미확인 정보: 최초 거절 기록의 실제 수령 여부.]
그는 손바닥을 덮었다. 아직 왕도의 청문회도 시작되지 않았다. 하지만 누군가 반송 통로를 막은 뒤 증거를 다른 곳으로 보냈다면, 그 끝에서 무엇이 기다리는지 확인해야 했다.
제118화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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