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도의 동쪽 운하에는 얼음이 닿지 않는 좁은 수로가 있었다.
온천수를 흘려보내기 위해 오래전 만들어 둔 배수로였는데, 겨울이면 상인들은 그 주변에 창고를 세우고 짐을 옮겼다. 다른 강이 꽁꽁 얼어붙어도 이곳에서는 작은 배가 움직일 수 있었다. 건물 사이를 지나던 따뜻한 수증기는 찬 공기와 만나 하얀 장막을 만들었다. 새벽의 운하는 멀리서 보면 도시 전체가 숨을 내쉬는 것처럼 보였다.
배송조합의 옛 공탁소는 그 운하 끝에 있었다. 사람들이 맡기고 찾아가지 않은 편지와 짐이 쌓이는 곳이었다. 본관보다 훨씬 오래된 별관에는 미수령 물품이 연도별로 정리돼 있었고, 직원들은 영수증 한 장을 찾으려고 사다리를 오르내렸다.
서진혁은 그곳에서 뜻밖의 문제를 만났다.
“보관료가 은화 세 닢이라더니, 오늘은 여섯 닢이라고요?”
공탁소 직원이 창구 유리 너머로 장부를 돌려 보였다. “지난주에 장기 보관료가 붙었습니다. 미수령 물품이 열두 해나 지나면 비용이 쌓여요.”
“동화 한 닢짜리 물건을 찾으려고 은화 여섯 닢을 내야 한다니, 세상의 가치 체계가 무너졌군요.”
“전부터 무너져 있었습니다.” 카렌이 말하며 웃었다. “당신만 오늘 알았지.”
하서린은 조합의 비용 규정부터 확인했다. 그들은 정식 권리자가 아니므로 물품을 인수할 수 없었다. 수령 확인과 봉인 상태 점검만 할 수 있었고, 열람도 제한됐다. 오만재가 남긴 사본은 조사에 도움이 되지만 소유권을 대체하지 못했다.
“그럼 경매를 기다려야 합니까?” 진혁이 물었다.
“반드시 그럴 필요는 없습니다. 권리자를 특정하는 절차가 있고, 법원의 보전 명령을 받아 조합이 처분하지 못하게 할 수 있습니다.”
공탁소 관리인은 어깨를 으쓱했다. “하지만 오늘 정오 전에 신청을 넣어야 합니다. 오후에는 오래된 짐을 옮깁니다.”
그 말이 끝나는 순간 건물 안쪽에서 날카로운 금속음이 났다. 이어 두 사람이 다투는 소리와 함께 창고 관리인이 뛰어나왔다.
“동쪽 선반을 비우세요! 배수관이 막혀 바닥으로 물이 역류합니다!”
따뜻한 수증기가 문틈으로 밀려 나왔다. 직원들이 서류함을 위층으로 옮기기 시작했고, 일부는 사람부터 대피시키고 있었다. 동쪽 선반 아래에는 물이 빠르게 차올랐다. 얼음이 녹는 냄새와 오래된 나무가 젖는 냄새가 섞였다.
라일이 달려가 선반을 살폈다. 상자들은 천장 가까이 쌓여 있어 한 번 무너지면 아래의 사람을 덮칠 수 있었다. 그는 금방 위로 올라가려 했지만 카렌이 소매를 붙잡았다.
“누가 구조 책임자인지 먼저 확인해요.”
“저 정도 높이는 혼자 올라갈 수 있는데.”
“당신이 올라가서 다치면 저 직원들이 당신부터 구하러 가야 하잖아요.”
라일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 그 뒤 그는 관리인에게 다가가 작업 순서를 물었다. 사다리는 하나뿐이고, 이미 젖은 바닥에 세우면 미끄러질 위험이 있었다. 누군가는 지지대를 가져와야 했다.
진혁은 배수관이 연결된 구형 밸브를 발견했다. 공탁소의 배관에는 오래전 왕립 경매원에서 사용하던 것과 같은 황동 연결구가 달려 있었다. 한쪽의 안전 핀이 부러져 증기 압력을 조절하지 못하고 있었다. 경매장에서 은화 오십 닢에 산 접속구를 떠올렸지만, 그 물건은 지금 왕립감정청 보존함에 봉인된 증거였다. 마음대로 가져와 쓸 수 없었다.
“시설 담당자, 같은 규격의 예비 부품 없습니까?”
“창고에 있기는 한데, 구형이라 이미 폐기 목록에 올랐습니다.”
“버리기 전에 한번 봐도 됩니까?”
관리인이 허락하자 진혁은 창고 뒤편의 작은 정비실로 갔다. 바닥에는 수리하지 못한 난방기와 밸브가 쌓여 있었다. 진혁은 사방에 떨어진 철제 링을 뒤져 재질과 지름을 비교했다. 그의 손끝에 글자가 연달아 떠올랐지만 대부분은 의미가 없었다.
[황동 링. 나사산 손상.]
[보조 압력계. 측정 오차 큼.]
[구형 전환판. 용도: 배수관 역류 방지.]
마지막 판에서 진혁은 손을 멈췄다. 겉은 녹슬었지만 내부에는 얇은 은합금 탄성판이 남아 있었다. 그는 관리인에게 값과 용도를 물었다.
“동화 열 닢짜리 폐품입니다. 폐기 전에 기술자에게 보여 줄 수는 있소.”
“버리기 전에 지켜야 할 것이 있군요. 기술자를 부르세요.”
공탁소의 정비사는 연결부를 측정하고 재질을 확인했다. 그가 판을 임시 역류 차단 장치로 사용할 수 있다고 판단하자, 사람들은 작업을 나눴다. 라일과 카렌은 물에 젖은 상자를 먼저 옮겼고, 진혁은 배관 주변을 정리해 정비사가 다치지 않도록 도왔다. 밸브를 한 번에 잠그는 대신 압력을 조금씩 낮췄다. 수증기가 줄어들자 선반 아래의 물도 더 이상 차오르지 않았다.
진혁은 손등에 땀이 맺힌 것을 닦았다. 영번 감정대를 다루던 지하보다 작은 창고였지만, 물과 사람이 섞인 현장에서는 순식간에 위험이 커질 수 있었다. 그는 시설을 멈추는 일이 서류에 적힌 명령 한 줄로 해결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다시 느꼈다.
물이 빠지는 동안 사람들은 건물 앞의 돌계단에 모여 잠시 숨을 돌렸다. 인부 하나는 손목을 삐끗했고, 다른 사람은 젖은 양말 때문에 발이 얼었다. 공탁소 관리인은 일한 사람들의 이름을 적어 약값과 추가 수당을 지급할 방법을 찾았다. 경매장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큰 금액의 거래는 없었지만, 이곳에는 한 시간 동안 열다섯 명의 몸과 시간이 들어갔다.
진혁은 임시로 사용한 구형 전환판을 다시 점검했다. 이미 고장 난 물건을 다시 쓰는 것이 언제나 좋은 선택은 아니었다. 이번에는 정비사의 감독 아래 급한 역류만 멈추게 했을 뿐이고, 정상 가동을 위해서는 새 안전 밸브를 교체해야 했다. 그는 공탁소에 정식 수리 견적을 받아 두라고 권했다.
“한 번 고쳤다고 계속 쓰면 되지 않습니까?” 관리인이 물었다.
“그 말은 고장 난 경매장에서도 들었습니다.” 진혁이 대답했다. “문제는 다음번에 누가 여기 서 있을지 모른다는 거죠.”
카렌은 진혁이 부품을 대충 주머니에 넣지 않고 반환 증빙을 적는 모습을 봤다. 사람은 위험한 일을 한 번 해결하면 그 성공에 취하기 쉬웠다. 하지만 진혁은 다음에 같은 사고가 나지 않도록 기록을 남기는 쪽을 택했다. 그 점이 이전과 달라진 것 같았다.
라일은 젖은 장갑을 난로 가까이 걸었다. “그래도 오늘은 뭐 하나 건졌잖아요. 저 사람들 저녁밥은 제대로 먹겠죠.”
카렌이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도 오늘은 혼자 천장에 올라가지 않았고요.”
“그게 그렇게 대단한 일입니까?”
“당신에게는요.”
라일은 웃으며 의자에 앉았다. 잠깐 눈을 감자 어린 시절 비좁은 창고의 사다리를 타고 도망치던 감각이 떠올랐다. 사람을 믿지 못해 항상 혼자 올라가던 아이였다. 누군가 아래에서 사다리를 잡아 줄 수 있다는 사실은 오래전에 배웠어야 했는데, 이제야 알게 된 듯했다.
일이 끝난 뒤, 공탁소 관리인은 젖은 장부를 난로 앞에 펼쳐 말리고 있었다. 그중에는 오래된 반환 물품 목록이 있었다. 관리인이 말했다.
“오늘 잘못하면 여기에 적힌 이름들을 전부 잃을 뻔했습니다. 많은 사람이 자기 물건이 어디 있는지 기억하지 못해요. 그럴 때 우리가 마지막으로 확인하는 게 장부니까요.”
진혁은 잠시 말이 없었다. 경매장에서는 물건 하나의 가치를 놓고 치열하게 싸웠다. 하지만 어떤 창고에서는 이름 하나를 지키기 위해 사람 여러 명이 진흙과 물을 뒤집어쓰고 일하고 있었다.
하서린은 그날 오후 보전 명령을 받아 왔다. 제9입회 관련 물품을 공식 조사 대상으로 지정하고, 공탁소가 임의로 처분하지 못하도록 한 것이었다. 이로써 빈 종이를 경매에 넘기려는 계획은 멈췄다.
그런데 실제 물건을 확인하러 가자 문제가 생겼다. 장부에는 분명 미수령 봉투가 남아 있었지만, 선반에는 다른 봉투가 놓여 있었다. 바깥의 인장과 번호는 일치했다. 다만 실이 새것이었다.
유담이 조심스럽게 봉투를 살폈다. “봉인끈의 꼬임 방향이 다릅니다. 열두 해 전 배송조합은 왼쪽으로 감았는데, 이건 오른쪽으로 감았군요.”
진혁은 봉투를 만지지 않았다. 허가 없이 열면 그들 역시 증거 조작 혐의를 피하기 어려웠다. 대신 봉투 아래에 남은 먼지의 형태를 보았다. 선반에는 직사각형 자국이 두 개 겹쳐 있었다. 누군가 원래 있던 물건을 빼내고 비슷한 크기의 다른 봉투로 바꿔 놓은 흔적이었다.
관리인은 표정이 무너졌다. “아까 물이 차올랐을 때…… 선반을 옮겼는데, 누가 어떤 봉투를 들었는지 전부 기억하지 못합니다.”
카렌은 그의 말을 탓하지 않았다. 물이 차오르던 순간에는 사람부터 구하는 것이 먼저였다. 문제는 그 혼란을 이용한 사람이 있는가였다.
하서린은 출입 시간을 적은 목록을 확인했다. 대피 과정에서 밖으로 나간 사람은 직원 여섯, 인부 넷, 방문객 다섯이었다. 그중 신분 확인이 끝나지 않은 방문객 한 명이 있었다.
라일이 목록을 받아 들었다. 서명 대신 손으로 그린 작은 문양이 있었다. 아홉 개의 홈을 가진 고리, 그중 마지막 홈만 비어 있는 그림이었다.
“누군가 저를 부른 것 같습니다.”
세리아는 눈살을 찌푸렸다. “함정일 수도 있어.”
“알아요. 그래서 오늘은 혼자 가지 않을 겁니다.”
저녁 무렵 공탁소는 손상된 서류의 목록을 따로 만들었다. 종이가 젖었다는 사실만으로 모든 기록을 폐기하지 않았다. 젖은 정도와 훼손된 부분, 원본이 살아 있는지를 세부적으로 기록한 뒤 보존실에 넘겼다. 진혁은 그 과정을 보며 공탁소에 잠시라도 사람이 더 필요하다는 생각을 했다. 하서린은 왕립감정청의 인력 지원을 제안했지만, 공탁소 관리인은 먼저 조합 내부에서 비용과 인원을 검토해야 한다고 대답했다.
카렌은 그 말을 존중했다. 도움이 필요한 사람도 도움받는 방법을 스스로 결정할 권리가 있었다. 라일은 바깥 계단의 미끄러운 얼음을 삽으로 걷어냈다. 진혁이 장갑을 벗으려 하자 그는 고개를 저었다.
“오늘 제 직업은 도둑이 아니라 제설 인부입니다. 저녁값을 받겠습니다.”
“그러면 장부에 올리죠.”
“농담인데요.”
“돈에 관한 농담은 기록이 필요합니다.”
그들은 짧게 웃었다. 위험한 하루를 보낸 뒤라 웃음이 더 크게 들렸다.
그날 밤 공탁소의 오래된 우편 투입구로 편지 하나가 들어왔다. 수신인은 라일이었다. 편지 안에는 주소가 없었다. 대신 왕도의 오래된 경매 일정표가 한 장 들어 있었고, 거기에 하나의 품목이 둥글게 표시돼 있었다.
‘반송되지 않은 편지, 제9회 배송조합 유산 경매.’
그리고 작은 글씨가 덧붙었다.
‘거절을 배달하지 못한 사람에게 마지막 기회를.’
제116화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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