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도 남쪽의 오래된 보관소는 강가의 방앗간 옆에 있었다.
겨울에는 강의 흐름이 느려지고 수차가 멈췄다. 물에 잠겨 있던 나무날개가 얼음 밖으로 비죽 튀어나왔고, 큰 통나무는 둑에 붙은 채 서리를 뒤집어썼다. 그 너머로 낮은 붉은 지붕들이 이어졌다. 귀족들이 사는 성벽 안쪽과는 달리 이곳의 집에는 굴뚝이 하나씩만 있었고, 사람들은 빨래를 널기 위해 눈 쌓인 마당을 삽으로 먼저 파냈다.
서진혁은 좁은 골목을 걷다가 한쪽 담장에 붙은 안내문을 읽었다.
‘오만재 보관소. 계약서, 상속증서, 가축 출생부. 귀중품은 맡기지 마시오.’
“돈은 맡기지 말라는 보관소라니.” 라일이 말했다.
“돈을 맡기면 못 돌려주는 일을 겪어 봤겠지.” 카렌이 답했다.
문을 열자 종이가 천장까지 쌓인 방이 나타났다. 서랍장과 나무 상자가 구석마다 들어차 있었고, 난로 가까이에는 습기를 막기 위한 굵은 숯주머니가 놓여 있었다. 책상 뒤의 노인은 지팡이를 짚고 일어났다. 숱이 적은 흰머리 아래로 이마의 긴 흉터가 보였다.
“왕립감정청에서 왔소?” 그가 물었다.
하서린이 조사 명령서를 내밀었다. “열두 해 전 경매원 사고 보상계에서 근무하셨습니까?”
“그렇소. 들어오시오. 다만 책상 옆 상자는 건드리지 마시오. 부러진 다리 대신 받쳐 둔 거라.”
그는 모두에게 의자를 내주려다가 부족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나무 궤짝 두 개를 가져왔다. 카렌은 의자보다 궤짝이 낫다며 먼저 앉았다. 라일은 난로 옆에 웅크렸다. 진혁은 맨 마지막 의자에 앉았다가 의자 다리가 흔들려 조용히 일어났다.
“이곳은 계약서가 사람보다 오래 삽니다.” 오만재가 말했다. “가끔 주인이 죽은 지 삼십 년 된 문서를 찾으러 오는 손자도 있지요. 그럴 때면 내가 그 집안 사정을 살아 있는 사람보다 더 많이 안다는 게 씁쓸해요.”
하서린이 한서겸의 이름을 꺼내자 노인의 손이 멈췄다. 그는 찻잔에 뜨거운 물을 부으려다가 한 방울을 책상에 흘렸다.
“그 아이는 죽지 않았습니다.”
오만재는 창문 쪽을 보며 무릎에 덮은 담요를 고쳐 폈다. 젊은 시절에는 왕립 경매원이 잘되는 것이 곧 왕국이 잘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매년 거래액이 늘어날 때마다 사람들은 새 건물을 세우고 항만과 철도를 넓혔다. 그가 맡은 보상계에도 계약서와 수표가 쌓였다. 그 가운데 어떤 사람은 갑작스러운 사고로 평생 일할 수 없게 되었고, 어떤 사람은 자기 이름으로 지급된 돈조차 찾지 못했다.
“처음에는 계산만 맞추면 된다고 생각했소. 금액을 잘못 적으면 고치고, 받았다는 도장이 없으면 다시 받으면 된다고요. 그런데 사라진 이름 앞에서는 도장만 세 번 찍고 덮어 버리는 사람이 있었소.”
카렌이 손을 모았다. “그 사실을 당시에도 알았습니까?”
“이상하다는 건 알았지만 전부는 몰랐소. 내가 모른 걸 지금 아는 척하고 싶지 않소.”
그는 낡은 공문 한 장을 꺼냈다. 종이에는 보상계의 인장이 찍혔지만 결재란은 비어 있었다. 당시 몇몇 지급 신청이 장부에서 다음 장으로 넘어가다 말았다고 했다. 서류는 누군가의 책상 위에서 오래 멈췄고, 책임자를 물으면 서로 다른 부서 이름만 돌아왔다.
“그때 한서겸이 찾아왔소. 손가락이 온통 상처투성이였지. 어느 사고로 다쳤느냐 물었더니 대답하지 않았소. 대신 돈을 주지 말아 달라고 부탁했지. 돈을 받는 순간 누군가의 침묵을 샀다는 뜻이 된다고.”
세리아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유나도 비슷한 말을 했었다. 경매의 끝은 망치가 울리는 순간이 아니라고, 물건을 내놓은 사람의 의사가 제대로 기록되었는지 확인해야 한다고. 세리아는 그 말을 늦게 이해한 사람이었다.
오만재는 자신의 손에 남은 오래된 잉크 자국을 바라봤다. “그 뒤 내가 할 수 있는 건 서류를 몰래 고치는 게 아니었소. 거절됐다는 사실을 따로 남기는 일이었지요. 누군가 나중에라도 찾아올 수 있게.”
방안이 잠시 조용해졌다.
“확실합니까?” 세리아가 물었다.
“내가 열두 해 전에 직접 돈을 주려고 했소. 지급 대상자가 와야 주는 돈이었는데, 인사계에서는 퇴직했다고 했고 사고계에서는 죽었다고 했지요. 둘 다 틀렸소. 그 아이는 그 주에 내 앞에 와서 이렇게 말했소. ‘제 이름으로 들어오는 돈은 어떤 것이든 돌려보내 주세요.’”
그는 말을 멈추고 서랍 안에서 누런 봉투 하나를 꺼냈다. 봉투에는 ‘지급 불능, 수령 거절’이라는 글씨가 찍혀 있었다. 하서린이 물었다. “이걸 왜 개인적으로 보관하셨습니까?”
“정상 절차대로 반송했소. 그때 부서에서 사본을 없애라고 했지요. 대신 반송됐다는 사실을 남기기 위해 사적으로 메모를 한 겁니다. 원본을 빼돌린 건 아니오.”
노인은 그 말부터 명확히 했다. 자신의 기억이 법적으로 무엇을 증명할 수 있는지 알고 있는 듯했다.
진혁이 물었다. “왜 보상금을 거절한 겁니까?”
“보상금으로 표시됐지만 금액이 일정하지 않았소. 처음엔 은화 서른 닢, 다음 날엔 금화 세 닢, 사흘 뒤엔 금화 서른 닢. 액수가 변하면 지급 사유를 확인해야 하지 않겠소? 그런데 담당자가 정정을 금지했소.”
카렌의 시선이 봉투로 향했다. “돈을 받은 순간 사고에 동의했다는 증거로 삼으려는 거였군요.”
“그렇게 믿었지. 다만 내가 본 서류에는 그런 문장은 없었소. 한서겸이 직접 그렇게 설명했을 뿐.”
진혁은 그가 사실과 증언을 분리하는 태도에 다시 감탄했다. 노인은 누군가를 비난하려고 과거를 부풀리지 않았다.
“그가 어디로 갔는지 아십니까?” 세리아가 물었다.
“떠나기 전에 짧은 말을 남겼소. ‘이 돈을 받으면 아홉 명 중 여덟 명이 침묵할 겁니다.’ 나는 그때 무슨 뜻인지 몰랐어요. 지금도 다 알지는 못합니다.”
세리아가 유리판 사진을 내밀었다. 오만재는 돋보기를 끼고 얼굴을 살폈다. 얼굴을 오래 보더니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맞소. 그때의 한서겸이오. 하지만 사망 장부에 기록된 사고 당시보다 한참 뒤의 사진이구려.”
“촬영 연도를 어떻게 아십니까?”
“뒤편 건물의 간판. 저 간판은 그 사고 다음해 봄에 바뀌었소. 이전에는 파란 글씨였는데 이 사진에는 붉은 글씨군.”
하서린은 사진의 배경을 확인했다. 세리아 역시 처음 보는 부분이었다. 사진을 잘라 내고 남은 귀퉁이까지 보니 그동안 날짜를 잘못 추정했을 가능성이 있었다. 어떤 기록을 믿을 때, 무엇이 사진 밖으로 잘려 나갔는지도 확인해야 한다는 사실이 분명해졌다.
밖에서는 수차를 고치는 목수들이 쇠망치로 얼음을 깨고 있었다. 반복되는 소리가 좁은 창을 통해 들어왔다. 오만재는 잠깐 그쪽을 바라보다가 작은 상자를 하나 더 꺼냈다.
“나 혼자 위험을 감수할 일은 아니라고 생각했지요. 그래서 봉투를 두 군데 보냈소. 하나는 기록청의 공식 반송함, 다른 하나는 배송조합의 공탁소. 혹시 한 군데가 사라지더라도 나머지가 남도록.”
“배송조합이요?” 라일이 고개를 들었다.
“그렇소. 예전에는 국가 기록도 때때로 민간 운송조합을 통해서 보냈소. 왕도 밖에서 급하게 발송해야 할 때 특히 그랬지.”
라일은 주머니에서 아홉 개의 홈이 있는 황동 고리를 꺼냈다. 오만재가 고리를 보자 손을 떨었다.
“이걸 어디서 났소?”
“한 견습 배달원에게서요. 지금 그 아이가 한동안 일을 못 하게 됐습니다.”
노인은 고리 아랫면을 가리켰다. “우리 조합에서는 수령자가 배달을 거절하면 바로 폐기하지 않고 공탁소에 보냈소. 그런데 저 홈은 배달 지시가 아니라 반송 지시를 나타냅니다. 아홉 번째 칸에 넣어서는 안 되는 사람에게, 강제로 물건을 배달하지 말라는 뜻이오.”
라일은 고리를 뒤집어 보았다. 예전에는 이 무늬가 무엇을 뜻하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오늘은 금속의 표면에 남은 마모와 손이 닿은 방향이 눈에 들어왔다. 고리는 오른손으로 잡고 왼손으로 멈추도록 만들어져 있었다.
“그럼 누가 배달을 못 하게 만든 겁니까?”
“모릅니다. 다만 오래된 배송조합은 불필요한 물건을 모아 경매에 내놓았지. 사라진 원본을 찾는다면 그쪽도 살펴보시오.”
오만재는 그제야 따뜻한 차를 다시 내왔다. 유리잔 대신 두꺼운 도자기잔이었다. 오래된 보관소의 창은 제대로 닫히지 않았고, 틈새로 들어온 찬바람이 천천히 방을 식혔다. 라일은 창틀을 살피더니 가방에서 얇은 천 조각을 꺼내 끼웠다. 잠시 후 방 안의 바람 소리가 줄었다.
“훔칠 것도 없는 곳에서 왜 그렇게 친절하오?” 오만재가 물었다.
“제가 뭔가 안 훔치는 법을 배우는 중이라서요.”
노인은 한동안 라일을 바라보다가 웃음을 터뜨렸다. “좋은 공부를 하는군.”
카렌은 노인의 약통을 보았다. 오만재는 건강이 좋지 않아 계단을 오르내리기 어렵다고 했다. 하지만 여전히 하루에 두 번씩 문서를 정리하고 있었다. 오래된 계약서를 찾아오는 사람이 자신보다 먼저 포기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진혁은 그의 일을 돕겠다고 모든 상자를 뒤지려다가 손을 멈췄다. 허락받지 않은 문서까지 열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이제는 알았다. 대신 떨어진 장부의 모서리를 주워 올리고, 통로에 놓인 상자를 옮겨 드렸다. 소소한 일이었지만 노인은 여러 번 고맙다고 말했다.
일행은 오만재의 진술을 받아 적고 봉투의 사진을 남겼다. 진혁은 문을 나서기 전에 노인에게 물었다.
“한서겸이 마지막으로 남긴 말, 그것 말고 더 없었습니까?”
오만재는 잠시 고민했다. “기억이 맞다면 이런 말도 했소. 아홉 번째 증인이란 말은 사람을 더 모으라는 뜻이 아니라고.”
“그럼 무슨 뜻입니까?”
“그 아이가 대답하기 전에 경매원 사람이 와서 데려갔소.”
바깥의 눈발이 잦아들었다. 진혁은 자신들이 몇 주 동안 ‘아홉 번째 사람’을 찾아 헤맨 것이 어쩌면 잘못된 질문이었을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여관으로 돌아가는 길에 카렌은 라일의 손에 들린 황동 고리를 바라봤다.
“예전에는 당신이 훔치지 않은 것에 대해 물었죠. 이제는 어쩌면 당신이 누구에게 전달하지 않았는지 물어야 할 것 같아요.”
라일은 말없이 고리를 쥐었다. 추운 공기 속에서 금속의 차가움이 손바닥에 오래 남았다.
그날 저녁 바깥에 다시 눈이 내리기 시작할 무렵 하서린의 사무실에 배송조합 공탁 목록의 사본이 도착했다. 열두 해 전 반환된 봉투 하나가 아직 미인수 물품으로 남아 있었다.
물품명은 이상했다.
‘최종 거절을 기록한 빈 종이.’
보관료는 은화 세 닢. 예상 경매 시작가는 동화 한 닢.
제115화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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