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매장 밖으로 나오자 왕도에 다시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눈송이는 처음에는 희미한 먼지처럼 허공에서 흩날렸지만, 광장의 시계가 네 번 울릴 무렵에는 사람의 어깨에 두껍게 쌓였다. 마차는 느려졌고, 도로를 닦는 인부들은 밤새 일할 준비를 하며 빗자루를 바꿔 들었다. 상점들은 유리창 안쪽에 천을 덧대고 작은 화로를 켰다. 하늘이 일찍 어두워지면서 거리의 황동등이 하나씩 밝아졌다.
한서겸이라는 이름이 적힌 출품표는 하서린의 봉투에 들어 있었다. 카렌은 누군가 그 이름을 적어 놓기만 했다고 해서 본인이 살아 있다는 뜻은 아니라고 말했다. 세리아도 동의했다. 열두 해 전 기억 속에서 그는 영번 감정대를 멈추려던 젊은 직원이었다. 그 뒤 기록에서 사라진 사람의 이름은 위조 문서에 사용하기 좋은 도구가 되기도 했다.
“그럼 어디부터 조사합니까?” 라일이 물었다.
“출품표를 인쇄한 곳.” 진혁이 대답했다. “거짓말도 인쇄할 때는 잉크가 필요하니까.”
왕립 경매원 북쪽에는 작은 활판 인쇄소들이 모인 골목이 있었다. 왕도의 서점과 법원, 군부대까지 계약을 맺는 상점들이라 밤에도 작업을 멈추지 않았다. 문을 열면 따뜻한 금속 냄새와 잉크 냄새가 한꺼번에 흘러나왔다. 커다란 원통에 감긴 종이가 느리게 돌아갔고, 어린 견습공이 납 활자를 정리하고 있었다.
일행은 첫 번째 인쇄소에서 출품표의 종이 결을 확인했다. 두 번째에서는 인쇄된 숫자의 모양을 비교했다. 세 번째에서야 종이 한 귀퉁이에 찍힌 작은 검은 점이 어떤 공방의 교정 표시인지 알 수 있었다.
“우리 집 표시예요.” 인쇄소 주인인 볼이 말했다. 그는 몸집이 작지만 목소리가 크고, 왼쪽 엄지손가락에 오래된 압착 흉터가 있었다. “다만 이건 새로 찍은 게 아닙니다. 낡은 판을 다시 사용한 모양인데요.”
진혁은 눈썹을 올렸다. “그걸 어떻게 알죠?”
“여기 2자 끝이 갈라졌잖아요. 그 활자는 여덟 해 전에 부러졌어요. 지금 쓰는 활자는 모양이 달라요.”
“그럼 인쇄 시각이 오늘이라는 출품표는 거짓인가요?”
“오늘 찍었을 수도 있습니다. 낡은 활자를 버리지 않고 보관해 둔 사람이 다시 끼웠다면요. 제가 증명할 수 있는 건 활자의 종류뿐입니다.”
진혁은 그 답이 마음에 들었다. 확실한 사실과 추측을 나누어 말하는 사람은 드물었다. 그는 볼에게 정식 진술서를 부탁하고, 인쇄비를 지급했다. 볼은 영수증을 적으며 웃었다.
“감정사는 물건 값을 매기는 사람이라고 들었는데, 오늘은 종이 구석을 보려고 돈을 내시는군요.”
“종이 구석 때문에 사람이 감옥에 갈 수도 있거든요.”
라일이 진혁에게 몸을 기울였다. “오늘은 명언이 많아. 장부에 적어 둬.”
볼은 증인용 진술서에 서명하기 전에 옛 활자 서랍을 직접 보여 줬다. 작업장 안쪽에는 문자 하나마다 작은 나무칸이 있었고, 인쇄공들이 밤마다 그것을 손으로 정리했다. 그의 아버지가 쓰던 활자는 표면에 기름이 발라져 있었지만 일부 글자는 가장자리가 패였다.
“왕도에서는 모든 문서가 기계에서 똑같이 찍혀 나온다고 생각하죠.” 볼이 말했다. “하지만 마지막에는 사람이 글자를 집어 넣어요. 피곤한 사람이 실수할 수도 있고, 일부러 잘못 넣을 수도 있지요.”
그는 손바닥만 한 교정지를 꺼내 두 숫자를 인쇄했다. 하나는 현재 활자, 다른 하나는 예전 활자였다. 막연히 보기에는 같아도 종이를 비스듬히 비추자 차이가 드러났다. 낡은 활자의 오른쪽 획은 잉크가 조금 더 번졌고, 바깥 가장자리에는 미세한 홈이 남았다.
진혁은 인쇄소의 간판을 살폈다. 이곳은 혼인 계약서와 장례 통지문도 만들어 주는 동네 공방이었다. 작업대 위에는 어린아이의 탄생을 알리는 작은 안내장이 아직 마르지 않은 채 놓여 있었다. 이런 곳에서 찍힌 활자가 누군가를 죽었다고 기록한 거짓 문서에 쓰였을 수 있다는 사실이 서글펐다.
볼은 진혁의 표정을 읽고 말했다. “인쇄한 사람이 문장의 주인은 아닙니다. 하지만 어떤 글자를 사용했는지 설명할 책임은 있겠지요.”
그는 진술서에 오늘 확인한 사실과 확인하지 못한 사실을 분명히 나눠 적었다. 진혁은 그 글씨를 한참 보았다. 뜻을 지키는 사람의 글은 언제나 멋있을 필요가 없었다. 정확하면 되었다.
그때 바깥에서 마차 바퀴가 미끄러지는 소리가 났다. 곧이어 짐이 쏟아지는 굉음과 짧은 비명이 들렸다. 카렌이 먼저 문을 열고 나갔다. 골목 모퉁이에 작은 화물마차가 비스듬히 멈춰 있었고, 양동이들이 눈길에 굴러 떨어졌다. 한 마부가 말고삐를 잡아당기고 있었으며, 회색 외투를 입은 여자가 마차 뒤쪽으로 급히 걸어갔다.
은색 가면이었다.
“도망갑니다.” 라일이 말했다.
카렌은 곧장 쫓으려다가 마차 아래 깔린 견습공을 발견했다. 아이의 다리가 짐칸 밑에 끼어 있었다. 그녀는 검을 뽑지 않았다. 어깨로 마차를 밀어 틈을 만들고, 마부에게 손수레 바퀴를 받치라고 소리쳤다. 진혁도 달려와 아이를 끌어냈다. 눈과 진흙이 소매에 잔뜩 묻었다.
“괜찮니?”
견습공은 울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카렌은 발목을 살폈다. 뼈가 부러진 것 같지는 않았지만 의원이 필요했다. 라일은 잠깐 멀어지는 여자를 바라봤다. 눈 위에 남은 발자국은 금세 다른 사람들의 발자국과 섞였다.
“따라갈까요?”
카렌은 아이의 등을 받치며 답했다. “저 아이를 먼저.”
라일은 말없이 인쇄소의 문을 열어 길을 비켰다. 오래전에는 이런 순간에 다른 선택을 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는 이제 놓친 발자국이 자신이 사람을 버린 대가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다.
의원은 세 거리 떨어진 곳에 있었다. 손님들은 문 앞에서 진료 순서를 기다렸고, 난로에는 물이 끓고 있었다. 의원은 아이의 발목을 붕대로 감아 주며 며칠 쉬라고 했다. 인쇄소 주인은 다친 견습공을 데려가겠다고 약속했다. 바깥에 남은 눈은 점점 더 거세졌다.
사고가 끝난 골목에는 젖은 양동이가 한동안 널려 있었다. 마부는 부러진 바퀴축을 보며 연신 고개를 저었다. 그는 자신의 잘못이 아니라고 주장하지 않았다. 대신 얼음이 얇게 덮인 돌길에서 마차를 급히 돌린 탓이라고 설명했다. 카렌은 관리인에게 사고 위치를 적게 하고, 누군가 바퀴에 손댄 흔적이 있는지 수리공이 확인하도록 했다. 은색 가면의 여자가 있었다는 것과 마차가 미끄러졌다는 사실은 확실했지만 두 일이 연결된다는 증거는 없었다.
진혁은 의원에 들어가기 전 길 건너 노점에서 따뜻한 물을 샀다. 마차 밑에서 구조된 아이는 여전히 손가락을 꼭 움켜쥐고 있었다. 진혁이 물잔을 건네자 아이가 작게 고맙다고 했다. 그는 도망친 여자를 떠올리는 대신 아이의 손이 떨림을 멈출 때까지 잠시 기다렸다.
“도망친 이유가 있을 겁니다.” 카렌이 말했다.
“우리를 유인하려고 일부러 소란을 일으킨 걸 수도 있죠.” 진혁이 대답했다.
“그럴 가능성은 있어요. 하지만 마차 사고가 의도적이라는 증거는 없어요.”
두 사람은 짧게 눈을 맞췄다. 진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위험한 일을 겪고 나면 우연까지 모두 적의 계획으로 보이는 법이었다.
거리의 상점 문이 하나둘 닫힐 때쯤, 네 사람의 발끝에는 눈과 진흙이 얼어붙어 있었다. 누구도 오늘의 추격을 승리라고 부르지 않았다. 하지만 다친 아이가 집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소식만큼은 확실했다.
그날 저녁 하서린의 사무실에는 볼이 보낸 서면 진술과 출품표 사진, 침묵함 봉인 조서가 모였다. 하서린은 교정 표시의 뜻을 확인하자 별도의 보관함을 열었다. 그 안에는 전날 강제 시연 때 확보한 영번 감정대의 가짜 동의 기록이 있었다.
“보세요.” 그녀가 말했다. “한서겸의 이름이 찍힌 부분은 가짜 동의 기록의 외곽 활자와 같습니다.”
유담도 함께 있었다. 그는 두 종이를 평행하게 놓고 얇은 유리자를 댔다. 글자의 크기와 여백이 닮았지만, 하나는 직선 인쇄이고 다른 하나는 압인 방식이었다. 같은 판을 썼다고 단정할 수는 없었다. 다만 낡은 인쇄판을 복원한 누군가가 왕립 경매원에 접근할 수 있었다는 결론은 내릴 수 있었다.
“한서겸이라는 사람의 신분은 어떻게 확인합니까?” 진혁이 물었다.
유담은 잠시 주저하다가 말했다. “그 이름은 기록청 인명 색인에서 두 번 삭제됐습니다. 한 번은 퇴직자로, 또 한 번은 사고 사망자로요.”
세리아가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같은 사람을 두 번 처리했다고요?”
“그리고 두 기록은 서로 다른 부서에서 작성됐습니다. 하나는 감정청 인사계, 다른 하나는 경매원 사고 보상계예요.”
“그럼 보상금은 누가 받았습니까?” 카렌이 물었다.
“수령인은 없습니다. 사고 당사자에게 지급했다고만 돼 있지요.”
진혁은 어이가 없어서 웃을 뻔했다. 죽었다는 사람에게 직접 돈을 줬다니. 장부를 제대로 쓰려는 사람이라면 해서는 안 될 실수였다. 그런데 그처럼 뻔한 모순이 열두 해 동안 지워지지 않았다는 사실이 더 이상했다.
하서린은 옛 보상계 직원들의 명단을 조회했다. 일부는 사망했고 몇몇은 지방으로 전근 갔다. 퇴직자 중 한 명이 왕도 남쪽에서 작은 보관소를 운영한다는 사실이 확인됐다. 이름은 오만재. 그는 사건 당시 지급 승인 도장을 관리했다.
“내일 그 사람을 만나겠습니다.” 하서린이 말했다.
세리아는 사진을 다시 꺼냈다. 한서겸의 얼굴은 선명하지 않았지만 눈매와 턱선만큼은 분명했다. 그녀는 그가 남긴 말 한마디를 갑자기 떠올렸다.
‘열쇠보다 중요한 건 닫히지 않는 문이야.’
유나는 그 말을 듣고 웃었던가. 아니면 울었던가. 세리아는 끝내 기억하지 못했다.
그날 밤 여관으로 돌아온 진혁은 장갑을 벗고 손바닥을 바라봤다. ‘본질을 본다’는 문구가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 능력이 알려 주는 것은 무엇이 진짜인지에 대한 단서였다. 그러나 누군가 살아 있고, 누군가 억울하게 죽었다는 사실까지 그 글자만으로 결정할 수는 없었다.
여관 문 앞에 새 봉투 하나가 놓여 있었다. 발신인은 없었다. 안에는 동화 한 닢과 접힌 짧은 메모가 들어 있었다.
‘한서겸을 찾으려면 보상금이 아니라 배달되지 않은 돈을 보라.’
동화의 가장자리는 오래 닳아 있었다. 진혁이 손바닥 위에 올려놓자 낯익은 문구가 떴다.
[대상: 회수되지 않은 지급 표식.]
[관련 기록: 제9입회 보상금.]
[최종 수령 확인: 실패.]
진혁은 메모를 반듯이 펴서 책상에 놓았다. 왕도에는 돈이 오가는 길이 너무 많았다. 그중 어떤 돈은 끝까지 주인을 찾지 못한 채, 누군가의 이름만 붙잡아 두고 있었다.
제114화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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