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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으로던전 경매장의 말단 직원입니다 · 108화
PAYLUA ORIGINAL · 제108화

108화. 사장이 지키지 못한 계약

던전 경매장의 말단 직원입니다 · 5,091자

오프라인 책장
에르반의 겨울밤에는 마차가 적었다. 유명한 왕도의 불빛도 자정이 가까워지면 조금씩 잦아들었다. 귀족가의 저택에서 새어 나오는 음악이 골목을 따라 흘렀지만, 좁은 상점가에는 짐을 운반하는 노동자의 발소리만 남았다. 거리의 가로등은 일정한 간격으로 켜져 있었고, 경비병들은 눈이 내리지 않아도 발을 비비며 순찰했다. 세리아는 숙소 복도 끝에서 오래된 서신을 읽고 있었다. 녹색 봉투가 전달된 뒤 그녀는 유나의 이름을 자주 입에 올리지 않았다. 대신 그 이름이 적힌 날짜와 장소를 차례로 적었다. 기억은 때때로 사람에게 유리한 쪽으로 모양을 바꾼다. 세리아는 그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았다. 한때 자신이 유나를 설득했다고 믿었던 날들이 이제는 유나의 말을 끊었다는 기억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서신에는 열두 해 전 왕도의 설비 보수 계약이 적혀 있었다. 루멘 경매장과 왕립 경매원 사이의 기술 교환 계약. 서명란에는 세리아, 유나, 그리고 왕실 보존 담당자 한 명이 있었다. 마지막 서명은 먹물이 번져 식별할 수 없었다. “사장님.” 진혁이 복도에서 말을 걸었다. 두 잔의 차를 들고 있었다. “잠 안 와?” “월급 계산을 하면 잘 옵니다. 너무 슬퍼서.” 그녀가 웃었다. 진혁은 차 한 잔을 건네고 창가에 앉았다. 찻잔 표면에 올라온 김이 밤의 조용한 유리를 흐렸다. “유나라는 분은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세리아는 대답하기 전에 한참 생각했다. “용감했어. 그런데 이상하게 사소한 일에도 많이 겁을 냈지. 부서진 장치 앞에 혼자 들어가는 건 두려워하지 않으면서, 자기 때문에 누가 다칠 가능성에는 잠을 못 잤어.” “그럼 저랑은 반대네요.” “네가 겁 없는 척하는 건 안 믿어.” 진혁은 차를 마셨다. 쓰디쓴 맛이었다. “제가 겁을 먹지 않았으면 마레온에서 그 많은 물건을 안전 검사부터 하자고 했겠습니까?” “그래. 그래서 널 믿는 거야.” 그 말이 생각보다 무겁게 들렸다. 진혁은 잠시 시선을 내렸다. 세리아는 그에게 정식 감정사의 명함을 줬고, 그는 이제 사장의 오래된 후회를 함께 들여다보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두 사람 사이의 침묵이 길어졌다. 아래층에서는 여관 주인이 식기를 정리하는 소리가 들렸다. 작은 금속 접시가 포개질 때마다 선명한 소리가 났다. 세리아는 그 소리를 듣고 지난겨울이 아니라 열두 해 전의 겨울로 돌아갔다. 그때 유나는 누군가에게 환기실 안전 점검을 맡아 달라고 거듭 부탁했다. 경매 준비가 늦어지면 일꾼들의 일당이 깎인다는 이유로 세리아는 서둘러 확인서를 냈다. 유나가 반대한다는 기록은 회의록의 각주 하나에만 남았다. 세리아는 그날 감정대가 정상 작동했다는 설명을 듣고 기뻐했다. 그러나 유나는 축하하지 않았다. “사람을 지키지 못하는 기록은 아무리 정확해도 거짓말이야.” 유나가 그렇게 말했던 순간이 떠올랐다. 세리아는 그때 대답했다. “계약은 계약이야. 모두가 그 종이에 서명했어.” 지금 생각하면 그 말은 너무 가벼웠다. 유나는 종이 위에 이름이 올라간 사람들 가운데 정말 뜻을 확인받은 이가 몇이나 되는지 묻고 있었다. 세리아는 그 질문을 이해하기 전에 서로의 목소리를 높였다. “그 뒤에 사과하지 못했어.” 세리아가 말했다. “누구나 시간을 되돌리고 싶겠죠.” “지금이라도 말을 걸 수 있다면 좋겠어.” 진혁은 쉽게 위로하지 않았다. 유나가 살아 있다는 증거는 아직 없었다. 세리아가 원하는 결말을 만들어 주는 건 그의 능력으로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그분이 남긴 문장은 아직 있잖아요.” 세리아는 고개를 들었다. “남은 말을 읽고, 거기 적힌 위험을 막는 게 지금은 할 수 있는 일인 것 같습니다.” 창밖의 눈이 조금씩 녹았다. 등불 빛이 젖은 돌 위로 길게 흘렀다. 세리아는 빈 찻잔을 내려놓고 유나의 서신을 다시 펼쳤다. 이번에는 그 종이를 변명할 기회로 쓰지 않기로 했다. 지워진 선을 하나씩 따라가며 자신이 놓친 질문부터 되찾기로 했다. “저는 그분을 본 적이 없어요.” 그가 말했다. “사장님이 잘못한 일이 있더라도 지금 제가 그때 일을 대신 판단할 수는 없습니다. 대신 내일은 같이 확인할 수 있죠.” 세리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 날 아침 하서린이 찾아왔다. 특별 시연에 사용될 영번 감정대의 전력 공급 기록을 확보했다는 소식이었다. 왕립 경매원의 시설팀은 밤새 보존관 통로와 중앙 무대의 연결 상태를 조사했다. 흥미롭게도 현재 무대에 연결된 선 한 가닥은 열두 해 전 교체된 설비와 다른 경로를 지나고 있었다. “현재 경로라면 낙찰 기록이 영번으로 전달될 수 있습니다.” 하서린이 설명했다. “그걸로 계약을 성립시키는 것은 불가능해야 하지만, 다른 기록 장치와 결합하면 허위 인증을 만들 수 있어요.” 진혁이 물었다. “그걸 누가 설치했나요?” “정비 업체의 하청까지 내려가면 확인 중인 계좌가 세 곳입니다. 최종 승인자는 오스카 총감독관으로 적혀 있네요.” 세리아는 문서를 받았다. 오스카의 이름 아래 붉은 왕실 인장이 있었다. 그러나 세리아는 날짜를 보고 눈썹을 찌푸렸다. “이 인장 양식은 열두 해 전엔 쓰지 않았어.” “현재의 승인 기록입니다.” 하서린이 말했다. “오래된 설비를 재승인하면서 찍은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다면 누군가 오래된 장치를 새 규정에 맞춘 것처럼 꾸몄다는 뜻일 수도 있겠네요.” “예. 아직 단정할 수는 없지만.” 조사 과정에서 더 놀라운 사실이 나왔다. 영번 감정대의 원래 기능은 거래를 취소하는 데 있었지만, 유나가 남긴 한 장의 설계도에는 별도의 ‘반송 경로’가 그려져 있었다. 거래에서 빠져나가려는 사람이 제출한 거절 기록을 원본 장부로 되돌려 보내는 경로였다. 카렌은 그 선을 따라가다 지우개로 지운 흔적을 발견했다. “왜 이 선은 일부러 지웠을까요?” 하서린이 확대경을 들었다. “원래는 공개 장치였는데, 뒤에 누군가 봉인했을 가능성이 있어요.” 그 순간 진혁은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여관에 가짜 통행증이 왔던 이유. 누군가는 그가 영번 자리에 앉으면 자동으로 동의한 것처럼 기록되게 만들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그가 서류를 읽지 않고 기계를 믿는 사람이었다면 쉽게 걸렸을 함정이었다. “시연을 중단시켜야 합니다.” 카렌이 말했다. 그러나 시연 일정은 이미 왕실 후원 계약에 포함되어 있었다. 하서린이 취소 요청을 올렸지만, 상부에서는 계약 위반 배상금이 크다는 이유로 ‘안전 문제가 확인되면 사후 책임을 묻는다’는 애매한 답변을 보냈다. 막을 권한이 있는 사람들이 돈과 체면을 먼저 계산하고 있었다. 세리아가 의자를 밀었다. “그럼 우리 방식으로 해 보죠.” 그녀는 오스카에게 직접 면담을 요청했다. 비서실은 처음에는 거절했지만, 세리아가 열두 해 전 기술 교환 계약의 공동 당사자임을 밝히자 오후 한 시에 약속을 잡았다. 오스카의 사무실은 금박 장식보다 서류가 많은 방이었다. 책상 뒤에는 왕실의 공식 초상화가 있었고, 창문 아래에는 겨울 경매의 입찰 현황이 빼곡히 적힌 대형 판이 놓였다. 오스카는 사람을 환영하는 대신 값어치를 계산하듯 세리아를 바라봤다. “오랜만입니다, 세리아 사장.” “우린 초면인 줄 알았는데요.” “당신은 나를 모를 수 있죠. 나는 왕도에서 오래전부터 루멘의 성장을 지켜봤으니까.” 세리아는 서류를 펼쳤다. “영번 감정대 시연을 중단하십시오.” 오스카는 눈을 가늘게 떴다. “안전 검사는 하고 있소.” “현재의 연결선이 원래 도면과 다릅니다. 거절 경로가 빠졌어요. 그 상태로 낙찰 기록을 읽게 하면 당사자 의사와 상관없이 기록이 생성될 수 있습니다.” “감정 기술의 발전을 방해하려는 겁니까?” “기술은 사람을 보호해야 발전이라고 부를 수 있어요.” 오스카는 느리게 미소 지었다. “유나도 같은 말을 했었지.” 세리아의 손가락이 멈췄다. “그 사람을 아십니까?” “열두 해 전 그분은 왕도에 와서 중요한 연구를 했소. 그리고 어느 날 책임을 다하지 못하고 떠났지.” “그게 무슨 뜻이죠?” “당신이 알고 있는 이야기와 다르다는 뜻입니다.” 오스카는 서류함에서 얇은 복사본 한 장을 꺼냈다. ‘특별 보존 실험 참여 철회서.’ 서명란에는 유나의 이름이 있었다. 세리아가 종이를 집으려 하자 진혁이 손을 들어 막았다. “잠깐만요. 먼저 출처를 확인합시다.” 오스카는 불쾌한 얼굴을 했다. “감정사가 자기 사장의 신뢰도 의심하나?” “사장님을 믿으니까 종이를 의심하는 겁니다.” 카렌이 복사본의 기록번호를 적었다. 원본이 어디 있는지 묻자 오스카는 왕립 보존관의 봉인실에 있다고 답했다. 그러나 원본 열람 신청은 이미 오래전 거절된 상태였다. 세리아는 오랫동안 종이를 바라보다가 일어났다. “유나는 그런 식으로 도망칠 사람이 아니에요.” “사람은 누구나 떠날 수 있소.” “그건 맞아요.” 그녀가 말했다. “그래서 떠났는지, 떠나게 됐는지 확인하겠다는 겁니다.” 복도를 나온 뒤 세리아는 한참 말을 하지 않았다. 찻잔을 잡은 손이 아주 조금 떨렸다. 카렌은 곁에서 걷기만 했다. 진혁도 농담을 하지 않았다. 여관에 도착하자 라일이 소식을 전했다. 배달 수습생 루카가 오늘 새벽 경매원에서 해고됐다는 것이었다. 이유는 귀빈실 입찰표 분실 신고를 재조사할 때 자신의 눈으로 본 것을 말했다는 것. 세리아는 그 말을 듣고 얼굴을 들었다. 오래전 유나가 당했을지도 모를 일을 지금 또 다른 아이가 당하고 있었다. “루카부터 찾읍시다.” 그녀의 목소리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라일은 바로 외투를 집어 들었다. 진혁은 허겁지겁 장갑을 끼다가 손가락 두 개를 한 구멍에 넣어 버렸다. 카렌은 그 모습을 보고 말없이 장갑을 고쳐 줬다. 세리아는 문 앞에서 한 번 뒤돌아보며 불 꺼진 복도를 살폈다. 그날 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위대한 유물도, 왕실의 허가도 아니었다. 추운 골목을 같이 걸을 사람 세 명과 아이의 말을 들어 줄 시간이었다. 카렌은 마을 지도를 펼쳐 경매원 주변의 야간 급식소와 견습생 숙소를 표시했다. 라일은 지름길을 세 개 적었고, 진혁은 여관에 남은 빵을 챙겼다. 복잡한 장치의 비밀을 풀기 위해 모였던 네 사람은 어느새 한 아이가 추운 밤을 어디서 보낼지 걱정하고 있었다. 세리아는 그 모습을 보며 마음 한편이 조금 나아지는 것을 느꼈다. 유나가 지키려 했던 일이 아마 이런 것부터 시작됐을지도 몰랐다. 그날 밤, 일행은 영번 감정대의 비밀보다 먼저 지켜야 할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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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8화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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