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르반 기록청은 경매원보다 훨씬 조용한 건물이었다.
높은 회색 석벽과 뾰족한 창을 가진 그 건물의 현관에는 도금된 명패 하나 없었다. 대신 입구 계단 양옆에 오래된 비석이 놓여 있었다. 왼쪽에는 왕도 대화재에서 구해 낸 출생부의 수량이, 오른쪽에는 내전 때 분실된 문서의 숫자가 적혀 있었다. 기록청이 자랑하는 것은 보물이 아니라 끝내 잃지 않은 종이였다.
카렌은 계단 앞에서 잠시 숨을 골랐다.
“아버지가 이곳에 왔다는 말을 처음 들었을 때는 거짓말인 줄 알았어요.”
진혁이 옆에 섰다. “왜요?”
“그분은 검으로 해결되는 문제를 좋아했거든요. 복잡한 서류를 읽는 일은 늘 싫어하셨고요.”
“누가 들으면 검사들이 다 똑같은 줄 알겠습니다.”
“검이 무거운 사람일수록 서류를 가볍게 보면 안 된다고, 아버지가 말했어요.”
그녀는 계단을 올랐다. 사실 그 말을 아버지는 평소에도 자주 했다. 다만 카렌이 그 뜻을 받아들이는 데 너무 오랜 시간이 걸렸다.
열람실에서는 낮은 종소리조차 나지 않았다. 서가 사이를 지나는 직원들이 발소리를 줄이기 위해 바닥에 양탄자를 깔아 놓았기 때문이다. 책상마다 작은 녹색 유리등이 켜져 있었고, 종이 냄새와 아주 약한 곰팡이 냄새가 뒤섞여 있었다.
카렌은 레온의 이름으로 남은 입회 기록을 요청했다. 직원은 봉인된 기록의 일부를 열람하려면 관계 증명과 보존 담당자의 동의가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서류를 대조하는 동안 진혁은 밖에서 기다렸다.
“기다리는 게 제일 어렵네요.”
라일이 속삭였다. 그는 벽에 붙은 ‘열람실 내 절도 금지’ 안내를 신중하게 읽고 있었다.
“왜 웃습니까?”
“여기선 제 직업을 정확하게 알고 있네요.”
진혁은 웃다가 라일의 목소리에 조금 힘이 없다는 걸 눈치챘다. 라일은 자신의 어린 시절에 관한 기록이 기록청 안에 있을 수도 있다는 말을 들었다. 하지만 찾고 싶은 이름이 어떤 철자로 쓰였는지조차 알지 못했다. 신원 조회를 신청할 수 없다는 사실이 그를 작게 만들었다.
“이따가 같이 찾아봅시다.” 진혁이 말했다. “도르가 준 배달 조합 기록 있잖아요. 단체 기록부터 조사하면 되죠.”
“그거 멋진 말인데요. 제 이름도 모르면서 뭘 찾는다고.”
“그래서 이름이 아니라 배달표를 찾는 겁니다.”
라일은 턱을 끄덕였다. 그의 손에는 마레온에서 도르가 건넨 황동표가 있었다. 다 닳은 가장자리 안쪽에 아홉 개의 홈이 새겨진 물건. 그 홈을 만질 때마다 기억나지 않는 골목의 냄새가 희미하게 떠올랐다.
대기실 한쪽에는 폐지 수거를 맡은 노인이 작은 수레를 세워 두고 있었다. 라일은 무심코 수레에 실린 낡은 끈들을 바라보다 손이 멈췄다. 짐 꾸러미를 묶은 매듭은 세 번 감아 한 번 교차하는 방식이었다. 마레온의 평범한 배달 조합에서는 쓰지 않는 방법이었다.
“저 매듭을 어디서 배우셨습니까?”
노인이 고개를 들었다. “오래전 왕도 우편 배달인들이 쓰던 방법인데. 요즘 젊은이도 아는가?”
라일은 거짓말을 할까 하다가 그만뒀다. “어디서 봤는지 기억이 안 납니다.”
노인은 손가락으로 묶음을 풀었다. 매듭을 한 번 비틀자 꽉 조였던 줄이 힘없이 느슨해졌다. 소포가 위험해졌을 때 한 손으로도 풀 수 있도록 만든 매듭이라고 했다. 일반 상인이 쓰기엔 지나치게 복잡했지만, 긴급 배달에 익숙한 사람들은 일부러 배웠다.
“옛날에는 사람을 먼저 꺼내려고 이렇게 묶었어. 짐을 지키는 것보다 배달하는 아이를 살리는 게 급했거든.”
라일은 그 말을 듣자 머릿속 한구석이 시큰해졌다. 비가 내리는 밤, 누군가가 자신의 손목에 끈을 감던 장면이 잠깐 스쳐 지나갔다. 그런데 얼굴은 떠오르지 않았다. 그는 기억을 억지로 붙잡지 않으려 했다. 도르가 말했듯 기억을 되찾는 길에도 숨을 고를 시간이 필요했다.
“혹시 조합 기록은 어디 남아 있습니까?”
“예전 우편 구역도에 있을 거야. 기록청 동쪽의 기초 지도실에 오래된 배송로가 묶여 있지.”
라일은 메모를 꺼내 동쪽 기초 지도실에 동그라미를 그렸다. 진혁은 그 옆에 '아홉 홈'이라고 적었다. 같은 표식을 가진 사람이나 물건을 무조건 하나의 조직으로 묶지는 않기로 했다. 그러나 길을 찾을 단서 하나는 생겼다.
카렌이 열람실에서 나오기 전까지 두 사람은 창가에 앉아 빵을 나누어 먹었다. 라일은 평소처럼 진혁의 몫을 슬쩍 가져갔다. 진혁이 손등을 때리자 웃으며 돌려줬다. 자신도 모르게 할 수 있는 장난이 남아 있다는 사실이 라일에게는 이상하게 안심이 됐다.
정오가 지나 카렌이 안쪽 열람실에서 돌아왔다. 손에 쥔 것은 얇은 접수증 한 장이었다.
“원본은 열람 불가예요. 대신 아버지가 직접 남긴 사전 증언 목록의 일부를 볼 수 있대요. 사흘은 걸린답니다.”
실망한 표정은 아니었다. 오히려 카렌은 안도한 듯했다. 지난 몇 달 동안 아무 기록도 찾지 못했던 때에 비하면, 사흘 뒤 읽을 수 있는 문서가 있다는 사실만으로 큰 변화였다.
그때 세리아가 기록청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의 손에는 초록색 봉투 하나가 들려 있었다. 봉투 앞면에는 보낸 사람 이름이 없었다. 대신 오래된 방식으로 밀랍을 찍고, 그 위에 가느다란 실 두 가닥을 교차해 놓았다.
“여관에 배달됐어.”
진혁은 봉투에 손을 대지 않았다. 여관에서 도착한 영번 통행증을 이미 위조품으로 의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세리아는 봉투를 기록청의 확인석으로 옮겨 보존사 입회 아래 열었다. 안에는 반쯤 색이 바랜 사진 한 장과 설계도 사본이 있었다.
사진 속에는 제복을 입은 젊은 세리아와 다른 여성이 서 있었다. 여자는 작업대에 한 손을 얹고 고개를 약간 기울여 웃고 있었다. 낡은 사진의 한 귀퉁이가 긁혀 있었지만, 그 웃음만큼은 선명했다.
“유나.”
세리아가 조용히 불렀다.
카렌은 사진을 받지 않았다. 기다렸다. 세리아가 스스로 기억을 꺼낼 때까지.
“우리가 처음 왕도로 왔던 겨울이야.” 세리아가 말했다. “그때 유나는 루멘의 젊은 기술 감정사였고, 나는 어떻게 하면 더 큰 경매장을 만들 수 있을지만 생각했어.”
사진 뒤에는 날짜와 장소가 적혀 있었다. ‘왕립 경매원 보존탑 남쪽 출입구.’
설계도에는 두 개의 길이 그려져 있었다. 하나는 지하의 오래된 환기실로, 다른 하나는 경매장 중앙 무대로 이어졌다. 만나는 곳에는 작은 원이 표시되어 있었다. 영번 감정대라는 이름은 없었지만, 마레온에서 보았던 두 가닥 선이 같은 위치에 있었다.
“이 그림을 왜 이제 보내죠?” 진혁이 물었다.
“누군가 우리가 영번에 관심을 갖고 있다는 걸 알고 있는 거겠지.” 세리아가 답했다.
사진 속 유나는 정면이 아니라 조금 옆을 바라보고 있었다. 세리아는 그 시선이 향하는 쪽을 자세히 들여다봤다. 인화지 가장자리에는 사람의 어깨만 조금 찍혀 있었다. 그 옷깃에 붉은 별 모양의 단추가 달려 있었다.
“저 제복은 왕립감정청 초기 감정단이 입던 거야.”
하서린은 오후에 합류했다. 그녀는 사진을 검토하더니 고개를 저었다.
“현재 왕립감정청 제복과는 다릅니다. 오래된 양식이네요. 하지만 이 단추는 왕실 보존관에게도 지급됐습니다. 감정단 사람이라고 확정할 수는 없어요.”
“원본 사진의 보관처를 찾아야겠군요.” 진혁이 말했다.
하서린이 설계도를 자세히 살펴봤다. “이건 출입 동선도가 아닙니다. 전력 차단 순서도예요.”
그녀는 차가운 손가락으로 선을 따라갔다. 환기실, 감정대, 중앙 무대. 세 점이 연결되는 순서가 화살표로 표시되어 있었다.
“누군가 강제로 감정대를 작동시키면 무대 장치를 먼저 차단하라는 뜻으로 보입니다. 반대로 이 선을 바꾸면 무대가 감정대를 살리는 전력원이 될 수도 있죠.”
진혁의 머릿속에 어제 구입했던 열 회수관이 떠올랐다. 영번 감정대의 환기실에서 나온 물건. 누군가 오래된 시설의 부품을 제거하며 전력 흐름을 바꾸려 했다면 단지 방을 청소하는 게 아니었다.
“경매 무대의 장치가 사람들의 입찰을 기록하는 데 쓰인다면…….”
“영번에서 그 기록을 이용하려는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하서린이 말을 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바로 덧붙였다. “지금은 가능성입니다. 경매원 시설 담당자가 참여한 현장 확인이 필요합니다. 그 전에 우리가 임의로 지하에 들어가면 확보한 증거가 모두 무너질 수도 있어요.”
진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곳에는 규칙을 지키지 않으면 잃을 것이 많았다. 그러나 규칙만 믿어도 위험했다.
카렌은 설계도의 가장자리에 적힌 작은 글씨를 발견했다.
‘첫 번째 망치가 울리기 전에, 본 사람이 반드시 말할 것.’
그 글씨를 보는 순간 세리아의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졌다.
“유나의 글씨야.”
“확실합니까?”
“이 문장은 나도 들었어. 그날 우리가 다퉜거든.”
세리아는 손가락으로 종이 모서리를 눌렀다. 오래전 유나는 빠르게 글씨를 쓸 때 '첫'이라는 글자의 아랫부분을 지나치게 길게 그렸다. 이 글씨에도 같은 습관이 있었다. 그러나 습관 하나만으로 작성자를 확정할 수 없다는 말을 세리아는 누구보다 잘 알았다. 그녀는 하서린에게 필적 대조를 요청했다. 오래된 친구를 믿고 싶다는 마음과 그 친구가 남긴 것이라 단정하지 않겠다는 태도가 함께 필요했다.
세리아는 잠시 눈을 감았다. 열두 해 전, 겨울 경매를 준비하던 유나는 무대의 아름다운 조명 뒤에 감춰진 배관을 확인하자고 했다. 세리아는 시간을 낭비하지 말라고 했다. 손님들은 금으로 꾸민 천장을 보러 오지, 배관을 보러 오는 게 아니라고.
그날 밤 두 사람은 멀리 떨어진 숙소에서 잠을 잤다. 그리고 다음 날부터 유나는 왕도 기록에서 사라지기 시작했다.
“그때 내가 한 시간만 더 들었더라면.” 세리아가 말했다.
카렌이 천천히 대답했다. “지금은 들을 수 있잖아요. 그때 못 들은 얘기라도.”
세리아가 눈을 떴다. 유나는 어쩌면 아직 살아 있을 수도 있고, 오래전에 죽었을 수도 있었다. 어느 쪽이든 남아 있는 문장을 외면하지 않겠다고 그녀는 마음먹었다.
그날 저녁 왕립 경매원에서 초청장 한 장이 추가로 도착했다.
‘겨울 첫 경매. 무대 개시 전 특별 시연. 영번 감정대 복원 시연에 참관하시기 바랍니다.’
참관인 명단에는 네 사람이 적혀 있었다. 세리아, 카렌, 라일, 그리고 서진혁.
하지만 네 사람의 명단 위, 유난히 큰 글씨로 한 줄이 쓰여 있었다.
‘기록상 이미 입회한 사람: 유나.’
제104화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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