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보완 요청서 원본은 뜻밖에도 금고 속에 있지 않았다.
왕실 남문 별관의 반송 문서 보관대 맨 위 칸, 오래된 장부 사이에 얇은 반송 봉투로 남아 있었다. 내용은 짧았지만 그 종이를 찾기까지 김태오는 거의 백 화 가까운 시간을 보낸 느낌이었다.
“정말 원본입니까?”
세딘은 조심스럽게 고개를 저었다.
“원본으로 보이는 서류입니다. 봉인과 발급 대장, 종이 제작 시기, 인계 흔적을 확인해야 합니다. 지금은 실물 발견 사실부터 기록하죠.”
태오는 숨을 고르고 책상 건너편에 앉았다. 얇은 종이에 찍힌 왕실 문장이 생각보다 소박했다. 기품 있는 금색 글자도 없었다. 사람들의 일상을 뒤흔든 일이 세상에서 가장 평범한 공문처럼 보였다.
세딘이 허가된 범위에서 본문을 읽었다.
[수취 주소 충돌 및 명의 사용 이의 진술이 접수되었으므로, 개인별 동의 근거와 적법한 대리 관계를 각기 소명할 것. 소명 완료 이전에는 권리 정산의 확정 자료로 편철하지 말 것.]
태오는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게 그 일곱 해 전의 보완 요청이라고요?”
“접수번호와 형식은 맞습니다. 최종 진위 감정은 남았지만 일단 해당 내용이 적혀 있습니다.”
리네아가 조용히 말했다.
“그러면 누군가에게 동의하라고 명령한 문서는 아니네요.”
“그렇습니다. 적어도 지금 읽은 문장으로는 동의를 증명하라는 요청이지 동의 자체가 아닙니다.”
태오는 그 차이가 왜 이렇게 중요했는지 새삼 느꼈다. 보완하라는 말이 허락으로 바뀌고, 허락이 모든 사람의 권리 이전으로 바뀌는 동안 누군가는 집을 떠나지 못하고 누군가는 자신의 이름으로 온 편지를 잃어버렸다.
***
서류의 배면에는 작은 반송 표식이 있었다. 최초 수신처는 청산 준비실. 담당 직책 변경으로 다시 제7 우편함 후속 보관 담당에게 보내졌다고 적혀 있었다. 지난번 루카르에게서 확인한 반송 대장과 일치했다.
“그럼 재전달 뒤 누가 받았는지만 찾으면 되겠군요.” 태오가 말했다.
“그것도 중요하지만, 뒤이어 제출된 보완본이 실제 요구 사항에 답했는지부터 대조해야 합니다.” 이벨이 말했다.
현재 조사 중인 후속 위임 확인서는 원 권리자들의 개별 동의가 있었다는 식의 표제를 쓰고 있었다. 그러나 그 아래에 놓인 이의 진술과 서명 없는 보완 신청서를 보면 적어도 전원 일괄 동의라고 단정할 수 없었다.
디아나는 두 문서를 겹쳐 보지 않고 나란히 놓았다.
“작성 시점과 문서 목적이 다릅니다. 한쪽이 다른 한쪽의 답변인지도 아직 확정되지 않았습니다. 다만 이 요청서를 '권리 정산을 진행해도 좋다'는 승인서로 인용했다면 그 해석은 문면과 맞지 않습니다.”
태오는 기록했다. 요청서는 요청서다. 허가는 허가다. 동의는 그 사람의 동의다.
***
발카스가 그 내용을 듣고 조정실에 왔다. 그는 이전처럼 으르렁거리거나 위압을 내세우지 않았다.
“나는 일곱 해 전 이 보완 요청에 답해야 한다는 말을 들었다.”
태오가 물었다.
“누구에게 들었습니까?”
“내 대리인이었던 회계 담당자에게서. 그러나 그때 그의 말을 전부 적어 두지는 않았다.”
“지금 이름을 알 수 있습니까?”
“당시 장부를 찾아볼 수는 있다. 하지만 그 사람이 거짓말했다는 뜻은 아니다.”
태오는 고개를 끄덕였다. 발카스가 이제는 남에게 죄를 떠넘기기 전에 한 번 더 생각하는 듯했다.
“금고를 열 수 없다는 말을 어떻게 이해하셨습니까?”
“내 명의로 처분할 수 없다는 뜻으로 이해했다. 그리고 돌려줘야 할 돈까지 기다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때도 보완 요청서는 지급 의무를 없애는 문서가 아니었겠네요.”
“그렇겠지.”
태오는 잠시 발카스의 얼굴을 바라봤다.
“이제는 제대로 읽으시겠습니까?”
발카스는 대답 대신 세딘에게 서류를 달라고 청했다. 원본은 보존상 직접 건네지지 않았지만, 허가된 사본을 받아 글자를 끝까지 읽었다.
드래곤의 손가락이 종이 위에서 멈췄다.
“인간의 문장은 너무 짧고, 그 뒤에 따라오는 책임은 너무 길군.”
“그건 세입자도 같습니다.” 태오가 말했다.
***
그날 오후 청산 준비실 옛 조직표를 다시 살폈다. 일곱 해 전에는 대리 담당자가 세 번 바뀌었다. 바뀐 이름을 모두 적어 두는 것이 가능했지만 그 가운데 누구를 의심할 근거가 있는지는 별개의 문제였다.
세딘은 당시 부서 인수인계 원부가 아직 공개 범위에 포함되지 않는다고 했다. 태오는 무리하게 요구하지 않았다. 정식 요청서를 만들고 필요한 날짜와 직책만 확인할 수 있도록 범위를 좁혔다.
“당신이 처음 동굴에 찾아왔을 때와 많이 달라졌군요.” 발카스가 말했다.
“그때도 계약서 들고 갔는데요.”
“그때는 내가 계약서를 보지도 않았지.”
“그래서 더 오래 걸렸습니다.”
발카스는 작은 소리로 웃었다. 태오는 그 웃음이 웃음인지 한숨인지 구별하지 못했다.
***
밤에 기록방으로 돌아왔을 때 리네아는 회계 장부를 펴 놓고 있었다. 그녀의 독립 상담 일정과 태오의 기록 작업장 일정이 같은 날 겹쳐 있었다.
“내일 오전에 같이 움직이기 어려울 것 같아요.”
“괜찮아요. 당신도 손님이 있잖아요.”
“섭섭하지 않아요?”
“섭섭합니다.”
“어머, 솔직하네요.”
“당신이 하는 일이 중요하다는 것도 압니다.”
리네아는 잠시 말이 없었다가 손을 내밀었다.
“그럼 저녁에는 만나기로 해요.”
“좋습니다.”
“이번에는 바다 얘기 말고 진짜 갈 날짜도 생각해 봐요.”
태오는 달력을 들여다봤다. 아직 남은 보증금이 100금화이고 금고 조사는 계속되고 있었다. 그러나 인생 전체를 그 숫자가 끝날 때까지 보류할 필요는 없었다.
“기록방이 조금 안정되면 짧게 다녀옵시다. 하루만이라도요.”
“그걸로 충분해요.”
그녀는 웃으며 그의 어깨에 기대었다.
***
원본으로 보이는 보완 요청서를 발견한 뒤 태오는 세딘과 함께 해당 종이의 보존 이력을 정리했다. 봉인 가장자리에는 예전 청산 준비실이 쓰던 붉은 밀랍과 남문 별관이 덧붙인 푸른 실이 남아 있었다. 디아나는 둘의 층위가 어느 시기에 만들어졌는지부터 구분하겠다고 했다.
“이 종이가 오랫동안 보관됐다고 해서 처음부터 지금과 같은 내용이었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럼 글씨를 고친 흔적도 검사하나요?”
“네. 잉크의 순서와 종이 눌림을 살펴볼 겁니다. 다만 원본을 훼손하지 않는 방식만 허가받았습니다.”
태오는 수락했다. 문장 하나를 확인하려다 전체 자료를 상하게 할 수는 없었다.
세딘은 재전달 기록이 붙은 부분을 가리켰다. 원 요청은 개인별 동의와 적법한 대리 관계를 소명하라는 것이었다. 다음 자료에는 한참 뒤 '권리 정산'이라는 표제가 등장했다. 둘 사이에 어떤 공문이 오갔는지 아직 연결되지 않았다.
“제일 중요한 종이가 빠져 있네요.” 태오가 말했다.
“네. 보완 요구에 어떻게 답했는지를 보여 주는 자료가 필요합니다.”
“그 답변에 개인별 서명이 없었다면요?”
“적법한 권한을 다른 자료로 확인해야 할 수도 있습니다. 없다고 바로 위법이라고 단정할 순 없지만, 있는 것처럼 처리해서도 안 됩니다.”
태오는 그 말을 듣고 보증금 문제의 시작을 떠올렸다. 발카스가 금고를 열 수 없다는 말만 반복했을 때 그는 분명 억울했다. 그러나 이제는 드래곤의 불편한 심정도 어느 정도 이해했다. 모르는 일이 무섭다고 해서 그 안의 모든 빈칸을 자기에게 유리하게 채워서는 안 됐다.
***
다렌 코르와 아델 마린은 이날 발견된 요청서의 비식별 사본을 별도로 볼 수 있었다. 코르는 처음에는 글씨가 너무 작아 잘 보이지 않는다며 돋보기를 빌렸다. 아델은 문장을 천천히 읽어 주었다. 일곱 해 전 자신이 했을지도 모르는 일을 다시 한 번 하는 모습이었다.
“개인별 동의를 확인하라.”
코르는 그 문구를 듣고 고개를 숙였다.
“그럼 그때 내 말을 안 들은 사람도 있었을지 모르겠소.”
“당시 정확히 누가 무엇을 처리했는지는 아직 모르잖아요.” 태오가 말했다.
“그렇지. 그래도 내 이름으로 누가 마음대로 돈을 받는 걸 싫어했다는 말은 남았으면 좋겠소.”
아델이 조용히 대답했다.
“그 말은 제가 지금 듣고 있어요.”
코르는 눈을 들었다. 두 사람 사이에 긴 침묵이 흘렀다. 그 침묵에는 슬픔만 있는 게 아니었다. 오래전에 말했으나 제대로 전달됐는지 알 수 없던 말이 지금은 적어도 누군가에게 또렷하게 닿았다는 사실이 있었다.
태오는 그 장면을 방해하지 않았다.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을 말했는지 정확히 적고, 그 말이 어떤 권한을 만들어 내는지 함부로 결론 내리지 않는 일이었다.
면담이 끝나자 아델은 태오에게 작은 수업 초대장을 건넸다.
“기록방 사장님도 글 읽는 일을 하시잖아요. 아이들에게 장부를 어떻게 쓰는지 한 번 알려 주시면 좋겠어요.”
태오는 잠깐 놀랐다.
“제가요?”
“아이들이 어른이 되었을 때 자기 이름을 잘 쓸 수 있으면 좋겠어서요.”
태오는 초대장을 받았다. 아직 자기 삶도 정리 중인데 다른 사람에게 무엇을 가르칠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그래도 계약서의 첫 줄을 읽는 법 정도는 알려 줄 수 있을 것이다.
“기회가 되면 가겠습니다. 다만 너무 어려운 이야기는 안 할게요.”
아델이 웃었다.
“아이들은 어려운 이야기도 재미있게 듣습니다. 당신이 재미있게 말하기만 하면요.”
그 순간 태오는 자신이 드래곤과 말싸움하는 이야기가 수업에 어울릴지 잠깐 고민했다. 어쩌면 좋은 소재가 될지도 몰랐다. 단, 드래곤을 화나게 했을 때의 안전수칙도 함께 알려 줘야 할 것이다.
***
그날 마지막 검토에서는 후속 위임 보완본의 작성일과 왕실 보완 요청의 발급일을 나란히 적었다. 표면상 위임 보완본은 나중에 작성되었다. 그러나 문서에 찍힌 날짜가 실제 작성일과 동일한지는 아직 확정되지 않았다. 디아나는 잉크와 봉인층 감정이 끝나기 전까지는 시간순서를 문면 기준으로만 표시해 달라고 했다.
“문서에 적힌 날과 실제로 작성된 날이 다를 수도 있군요.”
“있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꼭 속이려 했다는 뜻은 아니죠.”
태오는 점점 더 많은 칸을 만들어야 한다는 사실에 한숨을 쉬었다. 발급일, 실제 작성 추정일, 송달일, 반송일, 이관일. 다른 사람이 보기에는 복잡할지 몰라도 하나로 뭉치면 또 누군가의 권리가 흐려질 수 있었다.
리네아는 그 표를 보며 말했다.
“이제 당신 장부가 왕실 장부보다 정확해 보이는데요.”
“표만 정확하지 결론은 아직 멀었습니다.”
“그래도 좋아요. 결론을 모른다는 칸이 있다는 게.”
태오는 그녀를 돌아봤다.
“모른다는 걸 인정하는 게 그렇게 좋습니까?”
“거짓으로 안다고 말하지 않는 사람이 좋다는 뜻이에요.”
태오는 잠시 말이 없었다. 그는 리네아에게 고맙다는 말 대신 손을 내밀었다. 그녀는 익숙하게 그 손을 잡았다. 그렇게 둘은 밤늦게까지 빈칸의 이름을 붙이고, 빈칸을 함부로 메우지 않기로 약속했다.
발카스는 그날 기록국에서 나가며 태오에게 짧게 말했다. “네가 내 문서를 읽지 않았다면 나는 아직도 같은 말만 반복하고 있었겠지.” 태오는 조심스럽게 답했다. “저도 처음엔 무조건 돈을 숨기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지금은 실제로 지급하셨던 금액과 확인되지 않은 금고 자료를 구분합니다.” 드래곤은 잠시 고개를 숙였다. 서로의 의도를 온전히 이해한 것은 아니었다. 그래도 적어도 같은 장부를 펼쳐 볼 수는 있게 되었다.
태오는 그 한마디를 수첩 맨 아래 적었다. 오늘 찾아낸 요청서는 모든 답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 종이를 '허락'이라고 잘못 읽을 이유 하나는 사라졌다. 새로 줄어든 오해만큼 다음 질문을 조금 더 정확하게 만들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
잠들기 직전 세딘에게서 새 목록이 도착했다. 발견된 보완 요청서와 같은 날 생성된 부속 번호가 하나 더 있었다. 아직 제목도 완전하지 않은 항목이었다.
[계정 47 현물 반입 대조: 인수 예정 수량 정정 요구.]
태오는 그 문장을 몇 번 읽었다. 명의와 주소 문제만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돈이 실제로 금고에 들어왔는지 확인하는 자료에도 정정 요청이 있었다.
“이제 어디를 봐야 할지 알 것 같아요.” 그가 말했다.
리네아가 졸린 눈으로 물었다.
“또 서류예요?”
“네. 하지만 이번에는 정말 돈이 움직였는지에 관한 기록입니다.”
“그럼 내일 보세요.”
태오는 웃었다.
“그러겠습니다.”
그는 수첩을 덮었다. 보완하라는 말은 허락이 아니었다. 그리고 입금하겠다는 말은 돈이 들어왔다는 뜻이 아니었다. 이제 두 번째 문장의 진실을 확인할 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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