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오는 새 작업장 계약서에 서명하기 전, 또 한 번 집주인의 이름을 확인했다.
“세 번이나 보셨잖아요.” 리네아가 말했다.
“지난번에도 집주인 이름은 확인했어요.”
“발카스가 드래곤인 걸 몰랐죠.”
“이번 집주인도 밤에 비늘이 돋아날지 모르잖아요.”
리네아는 천천히 서류를 가져가 계약 상대의 신원 확인서를 펼쳤다. 젊은 인간 여성 루디아가 점포 주인이었다. 그녀는 표정을 숨기려 애쓰다가 결국 웃었다.
“제 할아버지까지 인간입니다. 더 확인하실 게 있나요?”
태오는 엄숙하게 물었다.
“그럼 계약 종료 후 보증금은 며칠 안에 돌려주십니까?”
“사흘 안에요. 건물 손상이 있다면 점검 기록을 남기고 사전 동의로 정산하고요.”
“좋습니다. 그리고 그 조항을 원본에 적어 주십시오.”
루디아는 이미 적혀 있다고 말했다. 태오는 조항의 위치를 확인한 뒤에야 펜을 들었다. 그가 처음 이세계에 도착했을 때만 해도 계약서란 인장 찍고 돈 내는 종이라고 생각했다. 지금은 한 줄이 사람의 두 해를 묶을 수 있다는 걸 알았다.
작은 기록 작업장 계약은 그렇게 체결되었다. 보증금과 첫 달 임대료는 태오가 실제로 돌려받은 금화 중 사업 준비 몫으로 따로 떼어 둔 금액에서 지급했다. 아직 받지 못한 120금화는 회계 장부의 수입 예정 칸에만 적었다. 예정과 수령은 달랐다.
“이제 진짜 사장님이네요.” 리네아가 말했다.
“아직 손님이 한 명도 없는데요.”
“저 있잖아요.”
“당신한테는 요금을 못 받아요.”
“그럼 손님이 아니라 연인이네요.”
그녀는 그가 서명한 펜을 빼앗아 계약서 맨 아래 빈 메모 칸을 가리켰다.
“다만 연인은 추가 약속이 필요합니다.”
“무슨 약속이요?”
“일을 너무 늦게까지 하지 않기.”
“그건 어느 관할의 규정입니까?”
“제 마음 관할이요.”
태오는 그 말에 웃었다. 서류로 답할 수 없는 약속이 세상에는 더 많았다.
***
토른은 개업 준비 첫날부터 사다리를 가져왔다. 선반과 보관함을 설치하고 습기를 막는 환기구를 손봤다. 그는 태오에게 방을 가로질러 장부를 옮겨 보게 했다.
“통로 폭이 충분한가?”
“넓습니다.”
“그러면 두 사람이 서류 상자를 들고 지날 때는?”
“조금 좁군요.”
“종이만 보는 사람은 사람 몸통을 잊는다.”
토른은 단단한 나무 선반을 벽에서 한 뼘 당겼다. 태오는 공사비를 별도 영수증에 기록했다. 드워프는 눈을 가늘게 뜨더니 말했다.
“내 장부도 검수할 셈인가?”
“믿는 사람일수록 기록이 필요하죠.”
“그 말은 마음에 드는군.”
토른은 도구 상자를 내려놓고 새 간판을 물었다. 리네아가 제안한 이름은 ‘파벨 기록방’으로 바뀌어 있었다. 대신 작은 글씨로 ‘계약 기록, 재고 장부, 송달 정리’라고 적었다.
“드래곤도 받나?”
“고객으로요? 받을 수 있죠.”
“보증금은?”
“선불입니다.”
토른은 또 한 번 큰 소리로 웃었다.
그때 발카스의 사자가 작은 화분을 가져왔다. 검은 흙 위에 은빛 잎사귀가 돋아 있었다. 편지에는 ‘개업 축하’라고만 적혀 있었다. 태오는 화분을 살펴보다가 물었다.
“이거 사람 잡아먹는 종류는 아니겠죠?”
토른은 잎을 살짝 건드렸다. 식물은 하얀 꽃망울을 흔들었다.
“그런 종류는 아니네. 오래 사는 식물이야.”
“발카스 님이 보내신 선물이면 최소 삼백 년은 살겠군요.”
“그동안 물을 잘 줘야지.”
태오는 화분 옆에 작은 표지를 붙였다. [받은 것: 축하 화분 한 점. 금전 변제와 무관.] 리네아가 그걸 보고 배를 잡고 웃었다.
***
첫 손님은 로벤이었다. 노인 마부는 오래된 운송일지 여섯 권을 들고 왔다. 자신의 운송 기록을 보관하고 필요한 날짜를 찾아 주면 얼마를 받느냐고 물었다.
“기록 작업은 유료입니다.” 태오가 말했다. “하지만 지금 공동 분쟁 자료로 사용할지 먼저 정해야 해요. 분쟁 자료라면 필요한 부분만 사본을 만들고 다른 날 기록은 공개하지 않겠습니다.”
로벤은 소리를 낮추었다.
“내 장부에는 단골들의 주소가 적혀 있소. 그런 건 남에게 보이고 싶지 않지.”
“동의 없이는 내보내지 않겠습니다.”
“아무리 왕실 기록국에 필요해도?”
“정식 요청이 있으면 해당 범위를 검토하겠습니다. 제가 멋대로 전부 보여 주지는 않아요.”
로벤은 한참 태오를 바라보다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맡겨 보겠소.”
태오는 첫 고객 계약서에 서명했다. 얼마 되지 않는 요금이지만 자기 일을 시작했다는 느낌이 들었다. 이어 헤스가 빵을 한 바구니 보내 왔다. 그녀는 계산서보다 빵으로 축하하는 편이 좋다고 했으나 태오는 빵값만큼의 금전을 손님 수입으로 억지로 적지 않았다. 선물은 선물이었다.
점심때 리네아가 사무실 문을 닫고 두 사람만 남았다.
“축하할까요?”
“빵으로요?”
“그것 말고요.”
그녀가 한 걸음 가까이 왔다. 새 나무 선반에서 햇빛이 반사되어 엘프의 은빛 머리카락을 비췄다. 태오는 말을 잊었다.
“사장님, 왜 그렇게 보세요?”
“기록할 문장이 생각 안 나서요.”
“그럼 말로 하면 되죠.”
태오는 그녀의 손을 잡았다. 리네아가 먼저 그의 볼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그가 무언가 말하기 전에 바깥에서 토른이 문을 두드렸다.
“사장! 선반 설치 확인 서명 안 했어!”
태오가 이마를 짚었다.
“이 세계에는 참 낭만적인 서류가 많군요.”
리네아는 웃음을 참으며 문을 열어 주었다.
***
오후에 예상치 못한 손님이 찾아왔다. 젊은 직물상 마렌이었다. 그는 자신의 이름으로 외상 거래 취소 요청이 접수되었다는 통지를 받았지만 신청한 적이 없다고 했다. 태오는 순간 그 말을 듣고 숨이 막혔다.
“저도 비슷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럼 누가 했는지 아십니까?”
“아직요. 그리고 제 사건과 당신 사건이 같은 원인이라는 근거도 없습니다.”
그는 처음부터 분명히 말했다. 공통점이 있다고 해서 같은 범인을 만들어서는 안 됐다. 마렌이 내민 것은 취소 요청 통지의 사본뿐이었다. 태오는 그가 실제 거래 상대와 원본 신청 기록을 확인하도록 절차를 설명했다. 필요하면 독립 법률 자문을 받으라고도 했다.
“서류를 가져가고 싶은데요.”
“원본은 가지고 계세요. 저는 필요한 범위에서 사본만 만들겠습니다.”
“왜 그러십니까?”
“남의 종이를 지키는 일이 제 사업이니까요.”
마렌은 그 말을 듣고 어깨를 조금 풀었다. 태오는 자신의 불안을 누군가의 첫 상담에 옮기지 않으려고 애썼다. 그에게 필요한 것은 위로만이 아니라 확인 가능한 다음 행동이었다.
***
계약을 마친 태오는 작업장 앞에 작은 칠판을 걸었다. 칠판에는 이번 주의 업무를 적었다. 선반 설치 확인, 방습 처리, 첫 고객 기록 접수, 영수증 양식 점검. 그리고 마지막 줄에는 자신의 미환급 보증금 100이 아니라 120금화라고 또박또박 적었다. 오늘 지급된 돈은 없었으니 숫자가 바뀔 이유도 없었다.
토른은 그걸 보고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사업장의 칠판에 집주인 채무를 적으면 손님이 겁먹을 걸세.”
“그럼 안쪽 장부로 옮기겠습니다.”
태오는 분필을 지웠다. 그 자리에 ‘첫 달 임대료 지급 완료’라고 적었다. 받은 돈과 아직 못 받은 돈을 섞어 쓰지 않는 일이 자기 사업의 시작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리네아는 빗자루로 바닥을 쓸다 말고 창문 쪽을 바라봤다.
“여기 창가에는 작은 상담 탁자를 놓으면 좋겠어요.”
“고객용이요?”
“네. 다만 사람들이 마주 보면서 이야기하되 옆 사람에게 계약 금액이 들리지 않을 거리면 좋겠어요.”
토른이 자를 꺼냈다. 의자 두 개를 어디에 놓아야 할지, 종이를 가리는 낮은 파티션을 어디에 세울지 함께 의논했다. 태오는 자신이 처음 구상한 작업장이 장부를 쌓아 두는 방에 가까웠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누군가 마음을 놓고 자기 사정을 말할 수 있는 공간까지는 생각하지 못했다.
“당신이 없었으면 저는 창고 하나 더 빌린 셈이었겠네요.”
리네아가 눈을 깜빡였다.
“칭찬하는 거예요?”
“네.”
“그럼 좀 더 해 봐요.”
“계약서도 잘 보시고, 손님 마음도 잘 보시고….”
“그리고?”
“제가 언제 배고픈지도 잘 아십니다.”
“그건 제일 쉬워요. 서류에 얼굴을 묻기 시작하면 배고프다는 뜻이잖아요.”
토른이 기침했다. “두 사람, 벽 세우는 건 오늘 끝낼 수 있겠나?”
리네아는 웃으며 다시 빗자루를 들었다. 태오는 몰래 토른에게 공사비와 설치 완료일이 적힌 영수증을 내밀었다. 드워프는 손가락으로 사인을 하고 나서 그 종이를 오래 바라봤다.
“이제 내 손자가 와도 여기서 일할 수 있겠군.”
“언제든 오라고 하세요.”
“그 녀석은 글씨를 못 쓰는데.”
태오는 잠시 생각했다.
“그러면 적어도 서류를 읽을 수 있도록 가르쳐 주는 분을 소개하겠습니다.”
리네아가 바로 말했다. “아델 마린 씨 문해 교실이 있잖아요.”
그들은 서로 고개를 끄덕였다. 보증금 분쟁에서 만난 사람들이 이제 서로 다른 일로도 도움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이 조금 신기했다.
***
작업장 첫 수입을 어떻게 기록할지 고민하던 때 바렌이 들렀다. 그는 사업장 임대 계약의 보증금과 발카스에게 아직 청구 중인 보증금을 혼동하지 않도록 장부를 따로 쓰는 게 좋겠다고 조언했다. 발카스 측 대리인이 사무실 회계 조언을 하는 상황이 웃기기도 했지만, 말은 타당했다.
“바렌 씨가 여기서 일하시면 제가 얼마를 드려야 합니까?”
“저는 드래곤 자산 관리인이므로 겸직은 어렵습니다.”
“그럼 발카스 님에게 급여는 제때 받으십니까?”
바렌이 말을 멈췄다.
태오는 바로 손을 저었다. “농담입니다. 아니, 혹시 농담이 아닐 수도 있나요?”
“제 급여는 정해진 날짜에 지급됩니다.”
“좋은 집주인이 아니라 좋은 고용주셨군요.”
바렌은 끝내 웃음을 참지 못했다. 태오는 그가 언제나 무표정했던 이유를 조금 알 것 같았다. 드래곤 밑에서 오래 일하려면 표정을 감추는 재능이 필요했을 것이다.
***
밤에는 루디아가 점포에 잠시 들렀다. 그녀는 임대인으로서 건물 외벽의 누수 책임을 자신이 부담한다고 다시 확인해 주었다. 태오는 그 말을 계약서 부속 점검표와 대조했다.
“이렇게 세세하게 물어보는 세입자는 처음입니다.” 루디아가 말했다.
“저도 보증금을 이렇게 오래 못 돌려받는 경험은 처음이었습니다.”
루디아는 안쓰러운 표정을 지었다. 태오는 그 표정이 동정처럼 느껴지는 게 싫지 않았다. 그녀가 실질적으로 자신의 의무를 설명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서로 불편한 일이 생기면 먼저 문서로 확인합시다.” 루디아가 말했다.
“좋습니다. 말로 이야기하는 것도 꼭 하죠.”
두 사람은 악수했다. 태오는 처음 이세계에 와 계약했던 날과 달리, 이번에는 내가 무엇을 받고 무엇을 해야 하는지 조금은 이해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점포 문을 닫기 전 태오는 손으로 문패를 한번 쓰다듬었다. 오랫동안 남의 집에서 쫓겨나지 않으려고 애썼는데, 오늘은 자기 일의 문을 잠그고 있었다. 마음속에서 조그만 기쁨이 올라왔다. 앞으로도 계약은 어렵겠지만 어려움을 미리 묻고 확인할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이전과는 달랐다.
***
저녁이 되어 마르셀의 사무실에서 연락이 왔다. 어제 제출한 진술과 운송 겉표의 내용이 일치하는 방향으로 정정 초안이 작성됐다고 했다. 다만 제3 대리 통지 첨부의 발행처는 여전히 확인 중이었다. 태오는 첫날 작업장의 촛불을 끄기 전에 이 사실을 개인 사건 장부에 적었다.
리네아는 선반 아래에서 작은 나무 상자를 꺼냈다.
“개업 선물이에요.”
안에는 열쇠 두 개가 들어 있었다. 하나는 작업장 정문, 다른 하나는 기록 금고의 열쇠였다.
“이건 제가 드려야 하는데요.” 태오가 말했다.
“문 자물쇠는 제가 골랐으니까요. 열쇠는 당신이 가져요. 다만 아무에게나 맡기지 않기.”
“당신에게는요?”
“당신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면요. 제가 강제로 가져가진 않을 거예요.”
태오는 두 열쇠를 바라봤다. 검은 비늘 47-B는 몇 달 동안 그의 삶을 묶어 두었다. 이 열쇠는 전혀 다른 의미였다. 누군가의 권리를 대신 얻는 물건이 아니라, 자신이 책임질 작은 문을 여는 물건이었다.
그는 리네아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럼 이 문을 함께 지켜 주세요.”
“내 일도 계속하면서요?”
“당연하죠.”
리네아가 미소 지었다.
“그 조건이면 동의해요.”
태오는 그녀의 손가락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이번에는 토른도, 서류도 방해하지 않았다. 멀리서 저녁 종이 울렸다. 작은 작업장의 첫날은 거창한 매출이 아니라 분명한 약속으로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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