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딘이 찾아낸 것은 정작 사람들이 기대하던 '보완 요청서'의 원본이 아니었다.
왕실 후속 사건 분류부에 남아 있는 두꺼운 발급 대장이었다. 대장에는 일곱 해 전 번호, 발급일, 발행 부서와 짧은 내용이 적혀 있었지만 실제 공문은 다른 곳으로 이관되어 있었다. 태오는 거대한 책이 책상에 내려앉는 소리를 들으며 생각했다. 종이 무게가 진실의 무게와 비례한다면 이미 모든 문제가 끝났을 것이다.
“이것만으로도 당시 요청서가 존재했다는 사실은 확인할 수 있습니다.” 세딘이 말했다.
이벨은 손가락으로 줄 하나를 짚었다.
[수취 경로 정정 관련 이의 진술 접수. 별도 동의 확인 누락. 보완 서류 제출 요구.]
“이건 누구에게 무엇을 보완하라고 했던 건가요?” 태오가 물었다.
“발급 대장에는 수신처가 청산 준비실로 나옵니다. 원본은 아직 보지 못했으니 구체적인 요구 범위는 유보해야 합니다.”
리네아가 조용히 말했다.
“그럼 적어도 이름이 적혀 있다는 이유만으로 권리 이전이 인정된 것은 아니겠네요.”
“그렇게 처리해서는 안 된다는 문제를 제기한 기록일 가능성이 있습니다.” 이벨이 대답했다. “하지만 내용의 정확한 표현은 원본을 봐야 알겠습니다.”
태오는 고개를 끄덕였다. 일곱 해 동안 누구의 서명도 제대로 읽히지 않았던 사건에서, 이제 ‘보완하라’는 지시가 있었을 가능성을 확인한 것이다. 누군가는 그 요청에 답했을까. 아니면 서류의 이름만 가져다가 다른 절차에 붙였을까.
***
발급 대장의 다음 줄에는 ‘반송’이라는 표시가 적혀 있었다. 태오는 저절로 몸을 기울였다.
“청산 준비실로 보낸 게 되돌아온 겁니까?”
“그렇게 단정할 수는 없어요. 반송 대상이 본문인지, 송달 확인표인지 구분돼 있지 않습니다.” 세딘이 말했다. “보관 중인 반송 대장을 함께 봐야 합니다.”
“문서를 보려면 문서를 한 권 더 봐야 하는군요.”
“서류는 서로의 알리바이가 됩니다.”
세딘의 무심한 말에 태오는 웃음이 나왔다. 그가 살던 한국에서 은행 직원이 이 말을 했으면 인터넷에 올렸을 것이다.
왕실 반송 대장은 제4 보전 통로가 아니라 남문 별관에 있었다. 이동 허가를 받은 태오와 리네아, 이벨은 마차를 타고 도시 남쪽으로 향했다. 거리에는 가을 장이 열려 있었다. 과일 상인들이 목소리를 높였고 아이들은 달콤한 향이 나는 과자를 들고 뛰었다. 태오는 그 풍경이 좋아 한참 창밖을 보았다.
“언젠가 장 구경만 하러 나오는 날도 오겠죠?”
“그날은 제가 사고 싶은 걸 전부 사 주세요.” 리네아가 말했다.
“예산이 얼마죠?”
“그 질문부터 하는 남자는 처음 봤어요.”
“드래곤에게 전세금 떼여 본 남자도 처음 보시잖아요.”
그녀는 웃으며 그의 손등 위에 자기 손을 올렸다. 마차가 흔들렸지만 두 사람의 손은 떨어지지 않았다.
***
남문 별관의 담당자는 구부정한 노인이었다. 이름은 루카르. 그는 발급 대장의 번호를 보고 눈썹을 찌푸렸다.
“이 번호는 기억이 납니다.”
태오가 몸을 앞으로 기울이자 이벨이 손바닥을 내보였다.
“기억이 있다는 것과 정확한 내용을 증언하실 수 있다는 것은 구별해야 합니다.”
루카르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장부를 보여 드리죠.”
반송 대장에는 세 개의 칸이 있었다. 최초 송달. 수신처 부재. 전달 재시도. 최초 송달에는 청산 준비실 도장이 찍혀 있었지만 담당자 개인의 서명은 없었다. 두 번째 칸에는 '담당직 변경'이라고 쓰여 있었다. 마지막 칸에는 새 주소가 적혀 있었다.
“여기가 어디죠?” 태오가 물었다.
“제7 우편함 후속 보관 담당 주소입니다.”
리네아는 숨을 작게 들이켰다.
“보완 요청이 정작 문제가 된 우편함으로 다시 갔다는 뜻인가요?”
“전달 대상이 바뀌었다는 기록은 있습니다. 실제 원본을 누가 읽었는지는 증빙이 필요합니다.” 루카르가 말했다.
태오는 다시 한 줄을 적었다. 보완 요청의 존재 가능성. 청산 준비실로 최초 송달. 담당직 변경으로 재전달. 제7 우편함 후속 주소. 이렇게 쓰자 미로 같던 길이 조금 선명해졌다.
“그 재전달 봉투는 남아 있습니까?”
“원본은 확인해야 하지만, 당시 인수자가 받은 부본 목록은 있을 겁니다.”
“이쯤 되면 서류끼리 결혼도 하겠네요. 한 쪽을 찾으면 가족이 열 명씩 늘어요.”
루카르는 진지하게 대답했다.
“가끔은 정말 그렇습니다.”
***
오후에는 다렌 베스를 만났다. 베스는 과거 회계 보조인으로 일했고, 다렌 코르와는 다른 인물이었다. 이름이 같아서 생긴 혼란은 이미 여러 번 겪었다. 태오는 이번에는 부르기 전에 성부터 확인했다.
“베스 씨. 당시 청산 준비실에서 담당직이 바뀌었다면, 문서의 최종 처리는 누가 합니까?”
“직책마다 달랐소. 도착한 종이를 정리하는 사람, 내용을 검토하는 사람, 조합에 다시 요구하는 사람이 있었지. 나도 일곱 해 전 일을 전부 기억하진 못해.”
그는 세딘이 만든 비식별 도표를 천천히 읽었다. 그러다 끝부분에서 멈췄다.
“이 번호 배열은 수상하군.”
“왜요?”
“우리가 서류를 번호순으로 묶을 때 쓰던 표기와 비슷한데, 뒤에 붙은 작은 글자가 다르오.”
태오의 심장이 빨라졌다.
“그럼 위조라는 겁니까?”
“아니. 담당 부서가 바뀌면 작은 글자도 바뀌었소. 그때 어떤 부서가 썼는지 알아야지.”
베스는 펜을 들어 두 가지 예시를 적었다. 하나는 단순 반송 문서, 다른 하나는 권리 검토 보완 문서였다. 첫 글자가 같아도 마지막 구분 문자는 달랐다.
“두 가지가 섞이면 어떻게 됩니까?”
“종이를 다시 찾아야지. 장부가 대신 판단해 주진 않소.”
태오는 느릿하게 웃었다. 베스가 하는 말이 결국 자신이 몇 달 동안 배운 교훈이었다.
***
저녁에는 발카스가 태오를 부르지 않고 직접 기록방 후보 점포 앞에 나타났다. 거대한 드래곤의 그림자가 작은 건물 벽을 뒤덮었다. 발카스는 인간형이었지만 골목의 사람들이 일제히 발걸음을 멈췄다.
“이곳이 네 새 둥지인가?”
“작업장입니다. 아직 계약은 안 했습니다.”
“계약도 없이 새 둥지를 보여 주는군.”
“드래곤 님은 계약을 했는데도 보증금을 안 돌려주셨잖아요.”
잠깐 고요가 흘렀다. 발카스가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 이야기를 평생할 셈이냐?”
“잔금 120금화를 받기 전까지만요. 그 뒤엔 추억담으로 바꿉니다.”
발카스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선반 모형과 튼튼해 보이는 바닥, 아직 비어 있는 문패가 보였다.
“인간의 일은 늘 이렇게 작게 시작하느냐?”
“그렇습니다. 큰일은 보통 작게 적힌 약속을 누가 안 지켜서 시작됩니다.”
드래곤은 그 말을 듣고 한동안 문턱을 바라봤다.
“내가 수집한 송달 영수증 중 일부를 세딘에게 내었다. 원본 확인이 끝나면 네가 볼 수 있겠지.”
“고맙습니다. 하지만 그걸로 원금 반환이 끝나는 건 아닙니다.”
“알고 있다.”
태오는 이번에는 그 말이 예전보다 훨씬 믿을 만하게 들렸다. 드래곤이 자신의 불편한 질문을 외면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
태오가 발급 대장을 보고 있는 동안 소피는 리네아와 따로 상담하고 있었다. 소피가 새로 들어간 집에서는 일부러 공과금 안내와 계약서를 서로 다른 봉투에 넣는다고 했다. 소피는 그 이유를 처음엔 이해하지 못했지만 요즘은 구분하는 것이 편하다고 느꼈다.
“보증금 문제 때문에 제가 자꾸 집주인에게 잘못한 사람처럼 보이는 게 싫어요.”
리네아는 그녀에게 이미 확인된 사실만 적힌 요약문을 보여 주었다. 처음 계약 원금과 현재 본인이 주장하는 잔액, 아직 검증 중인 과거 통지 경로를 분리한 문서였다. 태오가 한참 후 들어오자 소피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제가 원하는 건 큰일이 아니에요. 지금 집을 계속 지킬 수 있고, 아이가 더는 저 때문에 부끄러워하지 않는 거예요.”
태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마음을 저희 조사표의 맨 앞에 적지는 않겠지만, 어떤 순서로 자료를 확인해야 하는지 결정할 때는 잊지 않겠습니다.”
소피가 웃었다. 자신이 말한 것을 그대로 크게 내세워 구경거리로 만들지 않는 사람을 만났다는 안도처럼 보였다.
그날 오후 기록방 점포 앞에는 처음 보는 젊은 상인이 서 있었다. 그는 태오가 소피를 도왔다는 소문을 듣고 왔다고 했다. 어느 신문에서 태오를 '드래곤 고발단의 비밀 회계사'라고 부른다는 이야기도 전했다.
“비밀 회계사요?”
“네. 모든 금고의 장부를 열 수 있다던데요.”
태오는 두 눈을 감았다.
“저는 제 집주인에게서 보증금 120금화를 아직 못 받았습니다. 그 정도의 대단한 능력이 있었다면 벌써 받았겠죠.”
상인은 민망한 표정으로 웃었다. 태오는 그를 혼내지 않았다. 대신 진짜 기록방 안내문을 건네주었다. 계약서 정리, 송달 증빙 확인, 소규모 상단 재고 장부 작성. 확정되지 않은 권리 판단이나 강제 집행은 하지 않는다는 안내까지 있었다.
“그런 일이라면 저도 필요합니다.” 상인이 말했다.
“그럼 예약하고 오세요. 오늘은 아직 개업 준비 중입니다.”
상인은 문패를 들여다보더니 진지하게 물었다.
“드래곤이 오면 수수료가 더 비쌉니까?”
“서류가 많으면 더 받습니다.”
상인은 웃었고 태오도 웃었다. 드래곤이라서 요금을 더 받는 건 차별일지도 모르지만, 발카스가 제출할 장부가 얼마나 두꺼울지는 상상만 해도 무서웠다.
해가 기울 무렵 태오는 자신이 조사하는 보완 요청의 내용이 소피 같은 사람들의 생활에 어떻게 연결되는지 다시 생각했다. 일곱 해 전 누군가는 서류를 더 보완하라고 요구했다. 그 요청이 제대로 처리되지 않았다면 소피가 자신이 받지 못한 편지를 받았다고 취급받은 과정에도 빈틈이 있었을 수 있다. 하지만 아직 그것은 가설이었다.
그는 소피에게 보낼 안내문을 작성하면서 '누락이 확인됐다'는 단정 대신 '통지 기록의 추가 검증이 필요하다'고 적었다. 글자 수는 조금 길어졌다. 그럼에도 그 말이 더 정확했다.
***
이벨은 발견된 발급 대장의 번호를 아무에게나 보내지 말라고 했다. 공적 자료라 하더라도 맥락 없이 번호만 복사되면 다른 사람의 신청을 정당화하는 장식처럼 쓰일 수 있었다.
“저도 처음에는 번호가 있으면 진짜라고 믿었습니다.” 태오가 말했다.
“번호가 진짜인 것과 그 번호를 쓰는 사람이 정당한 권한을 가진 것은 달라요.”
태오는 조심스럽게 대조 결과를 기록방 내부 파일에 보관했다. 외부에 전달할 요약에서는 원본 번호의 일부를 가리고 발급 시기와 요구 취지만 설명했다. 거짓 정보를 막기 위해 진실을 지나치게 공개하다가 또 다른 문제를 만들 수는 없었다.
바깥에서는 상인들이 물건을 실은 마차를 끌고 지나갔다. 각 마차에도 자기 물건의 인계표가 있었다. 태오는 처음 짐꾼으로 일하던 날 인계표 없이 물건을 옮겼다가 수량이 달라져 곤란했던 기억을 떠올렸다. 그때의 작은 실수는 몇 시간 만에 고쳐졌지만, 계정 47의 혼란은 일곱 해를 지나 지금에 이르렀다. 그는 이번에는 확인할 수 있는 것을 하루도 미루지 않겠다고 마음먹었다.
마르셀은 보완 요청의 접수번호를 직접 적어 보라고 했다. 태오가 표기 형식을 이해한 뒤에는 번호가 의미하는 연도와 부서만으로 실제 제출자를 특정할 수 없다는 설명도 덧붙였다. 태오는 종이를 접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숫자는 길을 알려 주지만 범인을 알려 주지는 않는다. 그는 그날도 한 사람을 쉽게 의심하는 대신 다음 자료의 보관 위치를 찾아 나서기로 했다.
***
밤에는 루카르가 보낸 반송 부본 목록이 도착했다. 당시 보완 요청은 청산 준비실에서 우편함 후속 담당에게 재전달되었고, 부본 목록에는 '이의 진술 우선 확인'이라는 짧은 문구가 있었다. 태오는 그 한 줄을 읽다가 펜을 내려놓았다.
이의 진술을 먼저 확인해야 한다. 누군가 거부한다고 말했으면, 그 거부를 누가 기록했고 어떤 방식으로 다시 확인했는지부터 보아야 한다는 뜻처럼 읽혔다. 그러나 목록 자체는 원본 요청서도 아니고 판단문도 아니었다.
리네아는 그가 생각에 빠진 것을 보고 물잔을 내밀었다.
“조금씩 가까워지는 느낌이 들어요?”
“네. 그런데 가까워질수록 누군가 오래전에 실수했거나 무리하게 일을 처리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증거를 볼 때까지는 누군지 정하지 않기로 했잖아요.”
“그래야죠.”
태오는 그녀의 손을 잡았다. 따뜻한 손이었다. 그가 지금 할 수 있는 일은 과거의 사람들에게 함부로 죄를 씌우지 않으면서, 살아 있는 사람들의 돈과 이름이 더 이상 흔들리지 않게 만드는 것이었다.
수첩 마지막에는 다음 줄이 적혔다.
[보완 요청 발급 대장 확인. 원본 미확인. 재전달 경로와 이의 진술 우선 검토 표시 확인.]
그 아래에는 여전히 원금 120금화가 남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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