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튿날 파벨시의 아침은 화창했지만 기록국의 복도는 바람 한 점 통하지 않았다.
김태오는 긴 의자에 앉아 순서를 기다렸다. 전날 제출한 본인성 부인 진술이 접수됐다는 안내를 받았고, 오늘은 새 신청서의 원본 봉투를 외부에서 관찰하는 절차가 잡혀 있었다. 리네아는 빵집에서 사 온 꿀빵을 두 개로 나누었다.
“아무리 기록이 중요해도 배고픈 사람은 글씨를 잘못 읽어요.”
“지금 제가 글씨를 잘못 읽고 싶습니다. 그럼 숫자 120도 0으로 보이지 않을까요?”
“그런 눈을 갖고 있으면 세입자들 상담은 하지 마세요.”
“무섭게 정확하시군요.”
“직업병이죠.”
리네아는 태오의 입가에 묻은 꿀을 가리켰다. 그가 소매로 닦으려 하자 그녀는 손수건을 꺼냈다. 잠깐 손끝이 스쳤고, 태오는 뜻밖에도 전날보다 마음이 편해졌다. 이 작은 행동에는 확인 도장이 필요하지 않았다.
세딘은 먼저 봉투의 겉면과 이송표부터 보여 주었다. 새 신청의 첫 장은 파벨시 기록접수대에서 만들어졌지만, 본문 뒤에 붙은 옛 양식은 왕실 재분류소에서 온 것이었다. 그 아래에는 더 오래된 세 고리 문서조합의 분류번호가 쓰여 있었다. 서로 다른 시기, 다른 기관, 다른 일을 위해 만든 세 장이 한 묶음에 들어 있었다.
“그러면 여기 붙은 '김태오'는 누가 적었습니까?”
“재분류소가 보낸 이송 자료에 수신 대상 이름이 있고, 접수대의 전산 대장에는 그 이름이 신청인으로 복사됐습니다. 대장 담당자는 분류 지침에 따른 처리였다고 진술했습니다.”
“그럼 실수로 끝나는 건가요?”
이벨은 고개를 저었다.
“당신의 직접 신청이라고 보기 어렵다는 사실은 분명해졌지만, 그 안에 첨부된 대리 통지가 누구의 요청으로 들어왔는지는 아직 별개예요. 신청서 표제를 고치더라도 첨부의 출처를 조사해야 하죠.”
태오는 숨을 길게 내쉬었다. 자신을 의심하는 사람이 줄어든 것 같았지만 문제가 끝난 것은 아니었다.
***
왕실 재분류소의 책임자는 큰 안경을 쓴 중년 여성이었다. 이름은 오르벨. 그녀는 밀랍 봉인의 색만 보아도 어느 부서에서 마지막으로 포장했는지 구별한다고 했다.
“이건 최근에 새로 봉한 겁니다.”
태오가 물었다.
“그럼 옛 문서가 위조된 건가요?”
“아닙니다. 오래된 원본을 현재 부서에 제출할 때도 새 겉봉투를 씁니다. 여기에 있는 건 이송 봉인이지, 문서 생성 시기를 증명하는 봉인이 아니에요.”
오르벨은 확대경을 들어 투명 보존판 아래 봉투의 네 모서리를 살폈다. 태오는 세딘의 손길과 똑같이 정중한 태도를 보며 그동안 얼마나 많은 사람이 서류를 함부로 찢고, 거기 적힌 이야기를 함부로 단정했는지 생각했다.
“봉투는 어느 창구로 들어왔습니까?”
“동쪽 후속 사건 분류함입니다. 직접 접수한 사람의 이름은 기록되지 않았지만 운송조합의 배송 일지는 남아 있습니다.”
“그럼 배송인이 제출자일 수도 있습니까?”
“가능성이 있지만, 배송인이 곧 의뢰인이라는 뜻은 아니죠.”
이번에는 태오가 먼저 말을 이었다.
“편지를 옮긴 사람이 편지 내용에 동의한 건 아니니까요.”
오르벨이 처음으로 미소를 보였다.
“잘 배우셨군요.”
“이 세계에서 가장 비싼 수업료를 냈습니다. 보증금 300금화요.”
“다 돌려받지는 못하셨다면서요?”
“현재 180금화만요. 수업료의 일부는 환불된 셈입니다.”
***
운송조합 기록에서 배송 노선이 드러났다. 봉투는 서쪽 옛 청산 준비실 건물에서 출발한 것이 아니었다. 그 주소는 발신지로 인쇄되어 있었지만, 실제 최초 접수지는 남문 공용 접수함이었다. 남문 접수함은 상인들이 반송 우편을 맡기는 곳으로, 발송인의 신분을 반드시 확인하지는 않았다. 다만 접수 시각과 봉투의 크기, 바깥 인장 상태는 남았다.
“이렇게 하면 아무나 남의 문서를 넣을 수 있잖아요.” 태오가 말했다.
“넣는 것과 인정받는 건 다른 문제예요.” 리네아가 대답했다. “그래서 원본 대조가 중요하죠.”
두 사람은 남문 접수함 관리인을 만나기로 했다. 관리인 살보는 태오가 말한 날짜를 듣고 커다란 장부를 꺼냈다. 페이지 한쪽은 빗물에 젖어 있었지만 해당 줄의 접수 시각은 또렷했다.
“큰 서류봉투 하나. 검은 끈. 발송인 미기재.”
“누가 가져왔는지는요?”
“그날 수많은 사람이 왔지요. 기억만으로 특정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저녁 마감 직전에 맡겼고 수거 마차가 출발한 뒤였어요. 그래서 다음 날 첫 노선으로 움직였습니다.”
태오는 노선표를 내려다보았다. 봉투가 등록소까지 오기까지 사흘이 걸렸다. 누군가 서류를 급히 제출한 것이 아니라 오래된 분류번호를 붙여 조용히 흘려보낸 것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의도를 읽는 것은 쉬웠고 사실을 확인하는 것은 어려웠다.
살보는 옆 칸을 가리켰다.
“접수할 때 제일 겉에 붙은 작은 종이는 다른 사람이 떼어 갔습니다. 제 눈앞에서요.”
“누구였습니까?”
“운송대 조장입니다. 겉표를 새 것으로 바꿨죠. 접수함에 규격이 다른 봉투가 들어오면 그렇게 합니다.”
“그 종이는 남아 있나요?”
“규격 변경 대장에 붙였을 겁니다. 버리는 규정은 없습니다.”
처음으로 새로운 실물이 나올 가능성이 생겼다. 태오는 안도의 숨을 쉬었다. 버려지지 않은 작은 종이가 수많은 추측보다 값질 수도 있었다.
***
운송대 조장에게 규격 변경 대장을 요청하자 그날 쓸 수 있는 열람석이 모두 찼다는 답이 돌아왔다. 기다리는 동안 태오는 새 작업장 후보 점포로 갔다. 토른이 그곳에서 바닥의 습기를 점검하고 있었다.
“장사를 시작하려면 목재 선반을 세우고, 서류를 놓을 벽을 말려야 하오.”
“저는 종이와만 싸우는 사람인데 왜 벽까지 말려야 합니까?”
“종이를 벌레와 곰팡이에게 빼앗기면 더 귀찮아질 테니까.”
태오는 무슨 말인지 알았다. 그가 겪은 가장 큰 분쟁도 오래된 기록을 아무렇게나 쌓아 두면서 시작되었을지 모른다.
점포 주인은 임대 계약서 최종안을 보내왔다. 태오는 보증금과 월세를 별도 장부에 적었다. 돌려받은 180금화는 본래 자기 재산이었다. 그중 일부를 장사 준비에 쓸 생각이었지만, 아직 받을 120금화를 이미 들어온 돈처럼 계산하지 않기로 했다.
리네아는 창가에 걸어 둘 간판을 종이에 그려 보았다.
[태오의 기록방]
“너무 평범해요.” 태오가 말했다.
“그럼 뭐라고 할까요?”
“드래곤도 영수증을 끊는 곳.”
토른이 배를 잡고 웃었다.
“손님이 몰리겠구먼.”
리네아는 펜을 들고 작은 글씨를 더했다.
[영수증 분실 시 재발급 문의 가능. 단, 드래곤은 직접 동행해야 함.]
태오는 그녀가 아무렇지도 않게 웃긴 말을 하는 순간이 좋았다. 그 웃음이 발카스에게는 생소한 종류의 공격이겠지만, 자신에게는 긴 하루를 버틸 이유가 되었다.
***
운송조합에서 허가된 대장 사진본이 도착했다. 오래된 겉표는 가로세로가 손바닥만 한 회색 종이였다. 정면에는 ‘원 권리자 대조 자료’라고 적혀 있었다. 그러나 태오를 놀라게 한 것은 아래쪽이었다.
[수신 대상: 김태오.]
[요청 취지: 본인성 확인 요청.]
정작 신청인 칸은 비어 있었다. 새 접수대에서 수신 대상을 신청인으로 옮겨 적은 정황은 강해졌다. 마르셀은 이를 일단 기록 정정 심사의 증거로 접수했다.
태오는 주먹을 꼭 쥐었다.
“그렇다면 제가 신청하지 않았다는 게 확정되는 겁니까?”
“해당 겉표는 그렇게 읽힙니다. 다만 내부 첨부 원본과 다른 접수문서가 있는지도 확인해야 합니다.”
“매번 한 문장씩만 승리하는 기분이네요.”
“한 문장도 헛되게 넘기지 않으셨잖아요.”
리네아가 말했다.
그날 저녁 발카스의 대리인 바렌이 찾아왔다. 그는 공식 회신서 초안을 가지고 있었다. 발카스의 계정에 연결된 후속 서류가 외부로 잘못 분류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협조 요청이었다. 태오는 처음엔 드래곤 쪽이 자신을 또 압박하려는 줄 알았다.
“증표 반납을 요구하시려는 겁니까?”
“아닙니다. 오늘은 그런 내용이 없습니다.” 바렌이 말했다. “발카스 님이 현재까지 확인된 반환 의무와 계정 처분 제한을 별도 절차로 기록하라고 지시하셨습니다.”
“계약서 문구도요?”
“물론입니다.”
태오는 바렌의 서류를 받아 읽었다. 예전에는 드래곤의 대리인이 내놓는 모든 종이가 위협처럼 느껴졌다. 이번에는 적어도 각 항목이 분리돼 있었다. 변한 사람이 태오뿐인 것은 아닌 듯했다.
***
재분류소를 나서기 전 태오는 오르벨에게 우편물의 이름 칸을 보여 달라고 부탁했다. 오르벨은 허가된 빈 양식을 꺼내 수신 대상, 제출 책임자, 단순 운송인을 세 줄로 나누었다.
“가장 흔한 오류는 이것들 모두를 '보낸 사람'이라고 부르는 거예요.”
“그럼 신청인이 없는 서류도 들어올 수 있습니까?”
“자료 확인 요청의 대상이 정해져 있고 제출인이 확인되지 않은 자료라면 접수 자체는 가능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자료로 누군가의 재산권을 바꿀 수 있다는 뜻은 아니에요.”
태오는 빈 양식에 자기 이름을 써 보았다. 수신 대상 칸에 이름을 넣자 아래의 작은 보조 칸에도 이름이 표시되는 마법식 서식이었다. 오르벨은 그 칸을 가리켰다.
“옛 전사 담당자가 이 칸을 신청인으로 오해하기 쉬웠을 겁니다.”
“그럼 그 담당자는 잘못이 없는 건가요?”
“업무 절차가 잘못 설계됐는지, 지침을 어겼는지는 조사해야 합니다. 실수와 책임도 다른 질문이죠.”
리네아는 그 말을 듣고 새 기록방에도 이런 자동 채움 기능을 쓰지 말자고 했다. 태오는 웃었다.
“가난한 사장이라 그런 마법 서식은 살 돈도 없습니다.”
“그럼 오히려 안전하네요.”
“가난이 보안 기능이었다니 놀랍군요.”
두 사람은 오르벨의 설명을 마친 뒤 운송대 대장을 확인하러 다시 이동했다. 길에는 오래된 표지판들이 서 있었다. 같은 길인데도 왕실 표기와 상인조합 표기가 달랐다. 서로 다른 기관이 같은 대상을 다르게 부르는 일이 사건의 핵심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남문 공용 접수함 앞에서 리네아는 현장 바닥의 높이를 살폈다. 비가 많이 오는 날에는 접수함 발판에 물이 고일 수 있었다. 관리인 살보는 최근 바닥을 보수했다고 했지만 일곱 해 전에도 같은 구조였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날 봉투가 젖었다고 했죠?” 리네아가 물었다.
“이번에 온 봉투는 모서리만 살짝 젖었습니다. 누가 가져왔는지는 보지 못했고요.”
“그렇다면 그때 떨어진 인쇄 글자가 서류 내용 자체의 손상이라고 생각하면 안 되겠네요.”
“맞습니다.” 세딘이 말했다. “겉표와 원본의 보존 위치가 다르니까요.”
태오는 젖은 종이에서 생긴 얼룩을 가리켰다. 이름이 흐려진 자리 옆에 남은 접수 도장은 선명했다. 단순한 물리적 흔적이 의도나 범행을 설명하지는 못한다. 그러나 물이 묻은 시점과 서류가 다시 봉해진 시점을 나누는 데는 도움이 될 수 있다.
잠시 뒤 살보가 조용히 말했다.
“저도 사실 걱정이었습니다. 서류를 접수한 제가 무슨 잘못을 했다고 지목될까 봐서요.”
태오는 고개를 저었다.
“오늘 확인된 건 당신이 정해진 절차에 따라 봉투를 기록했다는 사실뿐입니다. 누군가의 의도를 추측하는 말은 적지 않겠습니다.”
살보는 한참 만에 웃었다. 그가 맡은 수많은 편지에도 각각 사정이 있었다. 태오는 이제 그 편지를 옮기는 사람까지 사건 속에 함부로 가두고 싶지 않았다.
***
운송대 기록을 접하며 태오는 한 가지를 결심했다. 새 기록방에서는 누가 종이를 전달했는지와 누가 내용을 작성했는지 절대로 같은 칸에 쓰지 않을 것이다. 사소한 차이지만, 누군가의 인생을 틀리게 설명하는 일은 그 사소한 칸에서 시작될 수 있었다. 리네아는 그 결심을 듣고 간판 아래에 '이름과 권한을 확인합니다'라는 작은 문장을 더하자고 했다.
***
잠들기 전 세딘의 메시지가 다시 도착했다.
[접수대에 기재된 신청인 김태오는 본인 직접 신청으로 볼 자료가 현재 없음. 기록 정정 심사 예정. 첨부된 제3 대리 통지는 별도 출처 확인 필요.]
태오는 수첩 첫 번째 줄 옆에 조그만 원을 그렸다.
자신의 이름은 조금씩 제자리로 돌아오고 있었다. 그러나 빈칸이 하나 남았다. ‘본인성 확인’을 요청한 사람은 누구인가. 그 사람이 단순히 행정오류를 발견한 사람인지, 오래된 위임 문서를 이용하려는 사람인지 아직 아무도 몰랐다.
리네아가 침대 맞은편에서 물었다.
“오늘은 좀 잘 수 있겠어요?”
“당신이 자는 동안 조용히 서류가 들어오지만 않으면요.”
“그럼 제가 문 앞에 표지판 붙일게요. 서류 출입 금지.”
“가능합니까?”
“꿈에서는요.”
태오는 웃었다. 긴장을 풀고 눈을 감았다. 어두운 창 너머 파벨시에서 다른 사람들의 이름도 제자리에 돌아갈 수 있기를 바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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