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 보전 통로의 문은 오래전 전쟁을 견뎠다고 했다.
김태오는 그 문을 보자마자 다른 생각부터 했다.
“문짝 수리비가 얼마쯤 할까요?”
토른이 미간을 찌푸렸다.
“너는 여기를 와서 그게 첫 질문이냐?”
“아무리 오래된 문이라도 누군가 돈을 내고 고쳐야 하잖아요.”
“그건 맞는 말이다만…”
토른은 문 옆의 드워프 문자를 읽었다. 첫 번째 줄은 문이 언제 세워졌는지, 두 번째 줄은 어떤 하중을 견디는지에 관한 설명이었다. 가장 아래에는 누군가가 한참 뒤에 덧새긴 문장이 있었다.
[보관은 소유가 아니다.]
태오는 글씨를 바라봤다.
“여기 건축가가 철학자였네요.”
“우리 조상들은 건축을 할 때 돈 주인의 성질까지 계산했어.”
“그럼 이 문은 단단하겠네요.”
“인간의 욕심까지 막아야 했으니까.”
두 사람은 함께 웃었다. 하지만 문 앞에 선 기록국 직원들은 웃지 않았다. 오늘 그들이 확인할 자료는 임시 신탁 입금 접수와 실제 수납 기록이 연결되는지 가릴 수 있는 회계 대조 원장이었다.
제4 보전 통로 원판 보존갑은 이번에도 열지 않았다. 원판에는 여러 권리자의 이름과 주소가 담겨 있을 수 있었다. 대신 보관목록상 별도 위치에 있는 회계 원장에 대한 제한 대조가 허가됐다.
“원장을 찾을 수는 있습니까?” 태오가 물었다.
세딘이 대답했다.
“목록에는 있습니다. 다만 훼손 없이 이동할 수 있는지 먼저 확인해야 합니다.”
태오는 고개를 끄덕였다. 드래곤이 지키던 금고가 아니라 왕실의 지하 보전 통로에서 오늘도 문서를 찾아야 했다. 이 사건은 종이와 돌벽 중 어느 쪽이 더 단단한지 겨루는 싸움 같았다.
***
작업은 오전 내내 걸렸다. 토른이 바닥 진동을 확인했고, 세딘이 봉인표의 일련번호를 읽었다. 오래된 책 한 권이 천에 싸인 채 나왔을 때 태오는 두 손을 주머니에 넣었다. 아무것도 만지지 않는 편이 마음이 편했다.
이벨이 먼저 표지를 확인했다.
[계정 47 관련 수납 대조 보조원장.]
“보조원장이군요.” 태오가 말했다.
“원본 회계 원부의 사본 또는 대조용 기록일 수 있습니다. 실제 장부와 어떤 관계인지 먼저 살펴야 합니다.”
원장에는 날짜, 접수 기관, 보관 물품 수량, 확인 책임자, 그리고 비고란이 있었다. 세딘은 해당 날짜의 행만 제한 열람했다. 이름은 가림판으로 덮여 있었다.
태오는 무엇보다 마지막 칸을 확인하고 싶었다.
[보관 대상 실물의 반입 여부: 확인 보류.]
그는 숨을 멈췄다.
임시 신탁 입금 접수 기록이 있었다. 하지만 그날 실제로 돈이 들어왔는지는 확인 보류였다.
“그럼 그동안 금고 안에 돈이 있는 것처럼 말한 건…”
“아직 입증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이벨이 말했다. “없다고 입증된 것도 아닙니다.”
태오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 차이를 배웠다. 입금이 확인되지 않았다고 누군가 훔쳤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단지 '접수'라고 적힌 글씨를 들이밀며 돈이 있다는 식으로 말할 수도 없었다.
더 놀라운 것은 같은 날짜 아래 붙은 작은 부속 표시였다.
[거부 진술과 충돌한 권리 정산 서류. 추가 제출 요청서 발행 대상.]
아델이 말한 오래된 보완 요청과 이어지는 문구였다.
“이 부분은 문서 보전 담당자의 확인을 받아야 합니다.” 세딘이 말했다.
“원본 요청서를 찾으면 작성자가 나오겠죠?”
“적어도 발행 부서와 접수 경로를 확인하는 데 도움이 될 겁니다.”
***
오후에는 제7 우편함 방문기록 감정의 일부 결과가 도착했다. 훼손된 네 번째 동석자의 이름과 아델 마린의 구 자격증에 남아 있는 글씨가 구조적으로 유사하다는 의견이었다. 하지만 훼손 정도 때문에 최종 동일인 판정은 유보됐다.
“아델 씨의 진술과도 맞기는 하네요.” 리네아가 말했다.
“맞습니다. 현장에 있었다는 주장을 뒷받침하는 자료가 하나 생긴 셈이죠.” 태오가 답했다.
이벨은 즉시 대리권과 분리해 기록했다. 현장에 동석했는지, 그때 무엇을 읽었는지, 어떤 문서에 서명했는지, 누구의 권리를 대신 결정했는지는 각각 다른 질문이었다.
그날 오후 다렌 코르도 면담 결과를 들었다.
“아델 씨가 읽어 줬던 말을 제가 정말 했을지도 모르겠소.”
“그 말이 정확히 어떤 문서에 남았는지 아직 대조 중입니다.” 이벨이 말했다.
“알고 있소. 그래도 내 말이 처음부터 없던 건 아니라는 걸 알고 싶소.”
코르는 오른손을 펼쳤다. 손바닥 위의 흉터는 오래전 상처였고, 오늘 그가 하는 말은 현재의 의사였다.
“내 이름으로 누가 돈을 받았다는 말이 더는 멋대로 떠돌지 않았으면 좋겠소.”
태오는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도 그랬다. 드래곤이 그를 영웅이라고 부르는 것보다, 사람들 앞에서 단 한 번도 하지 않은 말을 했다고 기록되지 않는 게 중요했다.
***
발카스가 자료 대조 결과를 듣고 직접 조정실에 왔다. 그는 오늘따라 무척 조용했다.
“내가 일곱 해 전 받은 것은 지급 불가 통지가 아니라 처분 제한에 관한 회신이었다.”
“그렇습니다.” 태오가 말했다.
“그리고 나는 그 문서를 내게 유리하게만 해석했다.”
“일부 반환 의무까지 정지된 것으로 생각하셨죠.”
“그랬다.”
발카스는 손을 움켜쥐었다. 손가락 관절에서 작은 금빛이 비쳤다. 인간의 몸을 하고 있어도 그 안에는 거대한 드래곤이 존재했다.
“나는 내 금고가 열리지 않는 이유만 찾았다. 그 안에 내 돈이 있는지, 인간들의 돈이 있는지 구분하려 하지 않았다.”
태오는 그의 얼굴을 바라봤다.
“그렇다고 모든 걸 일부러 숨겼다는 결론을 내린 건 아닙니다.”
“내가 고의로 그런 게 아니라면 네가 용서하겠느냐?”
“용서와 변제는 다른 문제입니다.”
드래곤은 한참 말이 없었다.
“남은 백스무 닢은 계속 지급 계획을 마련하겠습니다.”
“확정 금액과 날짜를 정하시면 기록하겠습니다.”
“안다.”
발카스의 목소리에는 이전처럼 천둥 같은 위압이 없었다. 태오는 그것이 진정한 변화인지 앞으로의 행동을 보고 판단하기로 했다.
***
태오는 원장의 서명란을 마지막으로 살폈다. 글씨가 보이는 자리는 담당자의 직책만 표시돼 있었다.
“직책만으로 어느 개인이 작성했는지는 모르겠군요.”
“원본 대조가 더 필요합니다.” 세딘이 답했다.
태오는 그대로 수첩을 덮었다. 오늘은 여기까지였다. 하루 동안 모르는 걸 모두 해결할 수는 없었다.
그날의 회계 대조는 생각보다 소란 없이 마무리됐다. 그러나 기록국을 나가는 길에 태오는 게시판 앞에서 한참 멈췄다. 오래된 보관 계정의 공고 아래에 문의를 적은 사람이 많았다. 누구는 조상에게 물려받았다는 채권을 물었고, 누구는 자신의 이름이 전혀 모르는 주소에 붙어 있다는 이야기를 남겼다.
태오는 자기 사정이 특별하다고 생각해 온 때를 떠올렸다. 집주인이 드래곤이라는 사실은 분명 특별했다. 하지만 돈이 돌아오지 않아 이사를 못 하고, 서류의 이름이 바뀌어 자기 권리를 설명해야 하는 일은 이 도시에도 흔했다.
세딘이 그 옆에 섰다.
“게시판 때문에 걱정됩니까?”
“여기 적힌 사람들 모두가 오늘 원장을 볼 수는 없겠죠?”
“각자 필요한 범위를 확인해야겠죠. 보존 담당자도 인력이 모자라서 고민입니다.”
“새 작업장을 열면 소상인들의 기록 정리를 도와주려고 합니다. 이런 분야에도 도움이 될까요?”
“적어도 원본을 함부로 없애지 말라고 알려 주는 것만으로 도움이 됩니다.”
태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시작하려는 일이 단지 자기 생활을 위한 것만은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그 생각을 거창한 사명으로 부르고 싶지는 않았다. 그는 평범한 사람이고, 평범한 사람들이 종이를 잃어버리지 않도록 돕는 일도 충분히 중요했다.
저녁에 태오는 작업장 계약서 최종안을 받았다. 토른의 배수로 보수 항목과 임대인의 부담, 사후 점검 일정이 명확하게 적혀 있었다. 물론 아직 최종 서명을 마친 것은 아니었다. 그는 조항을 하나씩 확인했다.
리네아가 옆에서 팔짱을 끼고 지켜봤다.
“이번에는 드래곤이 집주인이 아니네요.”
“확인했습니다. 가계도까지 받아 봤어요.”
“가계도까지요?”
“혹시 할아버지가 드래곤일 수도 있잖아요.”
리네아가 웃었다.
“그럼 엘프와 연애하는 건 괜찮아요?”
“그건 이미 위험을 감수하기로 했습니다.”
“어머, 제가 그렇게 위험해요?”
“네. 계약서도 안 쓰고 제 심장을 가져가셨거든요.”
그녀가 잠시 멈췄다가 얼굴을 붉혔다.
“그런 말은 어디서 배웠어요?”
“혼자 연습했다고 했잖아요.”
리네아가 가까이 다가와 그의 옷깃을 잡았다. 거리는 손가락 두 마디 정도였다.
“그러면 책임지셔야겠네요.”
“무슨 책임…”
“저녁 약속 지키는 책임.”
그녀는 얼굴을 조금 더 가까이 했다가 일부러 뒤로 물러났다. 태오는 그제야 자신이 놀림받았다는 걸 알았다.
“또 이러십니까.”
“당신이 먼저 시작했잖아요.”
리네아는 웃으며 그의 손을 잡았다. 태오는 더 이상 부끄러워하지 않고 그녀의 손을 꼭 잡았다. 이 세계에서 지켜야 할 약속은 계약서 위에만 있는 게 아니었다.
***
밤이 깊어질 무렵, 제4 확인석의 전달석에서 긴급 통지가 들어왔다. 세딘이 남긴 메시지는 짧았다.
[계정 47 조회 표식 47-B와 동일한 계열의 접수번호를 사용한 새로운 열람 신청 확인. 신청인이 김태오로 표기되어 있음. 본인 직접 접수 여부 확인 요망.]
태오는 메시지를 여러 번 읽었다. 그날 그는 작업장 계약서를 검토하고 리네아와 저녁을 먹었을 뿐이었다. 계정 47 열람 신청을 낸 적이 없었다.
“누가 제 이름으로 신청했다고요?”
리네아가 그의 얼굴을 보더니 웃음을 거두었다.
“무슨 일이에요?”
태오는 전달문을 보여 주었다. 리네아는 곧바로 말했다.
“접수한 것과 승인된 것은 다르죠.”
“맞아요. 바로 그걸 확인해야 합니다.”
둘은 공식 확인 회신을 작성했다. 태오는 자신이 오늘 신청서를 제출하지 않았다고 밝히되, 접수자가 곧장 위조범이라고 주장하지 않았다. 동명이인이나 잘못된 자동 분류일 가능성도 있었기 때문이다.
마르셀이 늦은 시각에도 답장을 보냈다.
[신청은 아직 심사 대기 중. 열람·인출·관리권 변경 집행 기록 없음. 접수 경로와 신청자 신분 대조 진행.]
태오는 그제야 숨을 조금 돌렸다. 아무런 권리가 넘어가지는 않았다. 적어도 현재 확인된 기록으로는 그렇다.
그러나 왜 그의 이름이 사용됐는지는 설명되지 않았다.
그는 자기 47-B 증표를 꺼내 손바닥 위에 놓았다. 검은 비늘 표면에는 오래된 숫자와 작은 흠집이 있었다. 그것은 조회를 요청하는 표식이지 금고를 여는 열쇠가 아니었다. 그런데 누군가 그 번호를 이용해 새로운 신청을 냈다.
***
세딘의 두 번째 메시지는 자정 가까이 도착했다.
[신규 신청서의 첨부 표제: 제7 우편함 권리 정산 위임 보완본. 접수 유형: 제3 대리 통지.]
태오는 읽던 손을 멈췄다.
또다시 후속 위임 서류였다.
그리고 또다시 누군가 다른 사람의 이름을 빌리려 했다.
그는 메시지 아래 달린 마지막 문장을 보았다.
[첨부 서류에 과거 보완 요청서의 접수번호가 기재되어 있으나, 원본 요청서는 아직 확인되지 않음.]
아델이 말한 보완 요청. 반대 진술과 내용이 달랐던 위임 확인서. 오래전 청산 준비실에서 사라진 요청서. 이제 그 번호가 새로운 신청서에 적혀 있었다.
태오는 잠시 창밖을 바라봤다. 골목에는 불빛이 하나둘 꺼지고 있었다. 세상은 평화로웠다. 그러나 책상 위에는 다시 자신이 하지 않은 신청을 확인해야 할 일이 놓였다.
“내일은 뭐부터 할 거예요?” 리네아가 물었다.
태오는 수첩을 펼쳤다.
[첫째. 새 신청은 내가 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공식 확인한다.]
[둘째. 접수 표식이 진짜 47-B와 어떤 관계인지 검증한다.]
[셋째. 일곱 해 전 보완 요청서의 발행 기관과 원본을 찾는다.]
“그리고 넷째는요?” 리네아가 물었다.
태오는 그녀를 바라봤다.
“당신과 저녁 먹기.”
리네아가 웃었다.
“그건 이제 빼먹지 않네요.”
그는 수첩 맨 아래에 한 줄을 더 적었다.
[잔여 원금 120금화. 아직 누구에게도 위임한 적 없다.]
그리고 책장을 덮었다.
오늘 밤에 당장 누군가의 범죄를 밝혀낼 수는 없었다. 새 신청은 아직 심사 중이었고, 서명 원본도 대조되지 않았다. 하지만 태오는 분명히 알았다.
자신의 이름이 사건의 새로운 입구가 되었다는 것을.
한 번은 돈을 돌려받지 못한 세입자로.
이번에는 신청하지 않은 신청서의 당사자로.
다음 날, 그는 다시 기록국으로 가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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