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오는 그날 처음으로 증인을 만나러 가면서 질문보다 침묵을 더 많이 준비했다.
그 사람은 공식 연락을 받고 면담에 동의했다. 장소는 파벨 서쪽의 작은 문해 교실이었다. 읽고 쓰는 법을 배우는 어른들이 저녁마다 모이는 곳이라고 했다.
“읽기 보조인이 교실을 운영한다니 잘 어울리네요.” 태오가 말했다.
“옛 직업과 지금의 일이 닮았다는 이유로 같은 사람이라고 확인된 건 아닙니다.” 마르셀이 답했다.
“알고 있습니다.”
“오늘은 그 사람의 사정부터 물을 겁니다. 기억나지 않으면 기억나지 않는다고 답할 수 있어야 해요.”
태오는 고개를 끄덕였다. 리네아는 이번 면담의 공식 관계자는 아니었지만, 코르가 자신의 자료 대조를 위한 제한 면담에 동의하는 과정에서 중개인으로서 필요한 설명을 맡았다.
교실에 들어서자 아이가 아니라 주름진 어른들이 낡은 책상 앞에 앉아 있었다. 누군가는 자기 이름을 반복해서 적었고, 누군가는 가게 간판을 소리 내어 읽었다. 전쟁과 이사, 생계 때문에 배울 기회를 놓친 사람들이었다.
“어서 오세요.”
여인이 분필을 내려놓고 다가왔다. 짙은 갈색 머리를 느슨하게 묶었고 왼쪽 손등에 오래된 잉크 자국이 남아 있었다.
“아델 마린입니다.”
태오는 이름을 들으며 조심스럽게 인사했다. 마르셀이 신분 기록과 과거 조합 자격을 필요한 범위에서 대조한 결과, 당시 읽기 보조인 명부에 적힌 아델 마린과 같은 사람이라는 점까지는 확인됐다. 그러나 그녀가 바로 네 번째 동석자인지는 별도의 자료를 대조해야 했다.
“오랫동안 연락이 없었는데, 갑자기 무슨 일이냐고 여쭤도 될까요?” 아델이 말했다.
“제7 임시 보관 우편함 관련 기록 때문입니다.” 마르셀이 답했다.
여인의 표정이 조금 굳었다. 놀란 것인지 오래된 기억을 떠올리는 것인지 태오는 알 수 없었다.
“그 일로 누가 또 고생하고 있나요?”
그녀가 물었다.
질문은 예상보다 직접적이었다.
***
면담은 교실 뒤편 작은 방에서 진행됐다. 이벨이 면담 기록의 열람 범위를 설명했고, 아델은 자기 진술의 일부만 사건 당사자들에게 전달해도 된다고 동의했다.
“저는 그날 서류를 읽고 설명하는 임시 보조인이었습니다.” 아델이 말했다. “돈을 받으러 간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태오는 펜을 들었다가 놓았다. 면담관이 아닌 자신이 말을 끊고 싶지 않았다.
“누구를 위해 갔습니까?” 이벨이 물었다.
“그때는 서쪽 치료소에 있던 사람의 요청을 받았다고 들었습니다. 이름은 정확히 기억하지 못합니다. 조합이 발행한 안내서에는 대리 서명할 수 없다고 적혀 있었어요.”
“현장에서 무엇을 했습니까?”
“읽었습니다. 접수 서류에 적힌 문장을 소리 내 읽었고, 당사자가 고치고 싶다고 한 부분을 기록했습니다. 제7 우편함은 서류를 잠시 보관하는 시설이라 들었죠.”
“상자를 직접 열었습니까?”
“아니요. 저는 열쇠를 가지고 있지 않았습니다.”
그 진술은 전날 익명의 편지와 비슷했다. 태오는 일치한다는 사실만 기억했다. 누가 익명 편지를 보냈는지는 여전히 알 수 없었다.
“당사자가 어떤 내용을 고치고 싶어 했습니까?”
아델이 눈을 감았다.
“한 사람의 이름으로 다른 사람의 돈에 관한 편지가 도착했다고 했어요. 주소를 바꾸는 문제와 누가 받을 권리가 있는지는 별개라고요. 그 말을 적어 달라고 했던 것 같습니다.”
이벨은 앞에 놓인 종이를 가리켰다.
“그 말이 당시 작성된 거부 진술서와 같은 내용이라고 기억하십니까?”
“내용은 비슷합니다. 하지만 지금 원본을 보지 않고 같은 문서라고 답할 수는 없어요.”
태오는 아델을 바라봤다. 그녀가 가장 확실히 기억하는 것은 자기 역할의 한계였고, 가장 신중하게 대답하는 것은 문서의 정체였다.
***
면담 중간에 리네아가 물을 가져왔다. 아델은 잔을 받으며 고맙다고 말했다.
“오래된 일을 다시 말씀하시기 어렵겠어요.”
“어렵죠. 하지만 그때도 어려웠던 건 읽는 일이 아니라, 아무도 듣고 싶어 하지 않는 말을 적는 일이었어요.”
“무슨 뜻인가요?”
“서류에는 편리한 칸이 있어요. 동의, 거부, 대리인, 전달자. 그런데 사람의 말은 그 칸에 꼭 맞게 들어가지 않거든요. 저는 그날 누군가 '그건 내 뜻이 아니다'라고 한 말을 지워 버리고 싶지 않았어요.”
태오는 말없이 고개를 숙였다. 그는 한국에서도 수많은 계약서를 보았다. 대부분의 사람은 서명란 옆의 작은 글씨를 끝까지 읽지 않았다. 이세계에서도 다르지 않았다.
아델은 말을 이어갔다.
“보조인은 문서의 주인을 대신하는 사람이 아니에요. 주인이 자기 말을 할 수 있도록 옆에서 돕는 사람이지.”
이벨이 그 말을 기록했다. 태오는 리네아를 바라봤다. 그녀도 같은 생각을 하는 듯했다. 지금 이 사건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어떤 누군가의 말을 대신 쓰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이 원래 주인의 뜻을 넘겨짚을 때 문제가 시작됐다.
***
면담 후반에는 제7 우편함 방문등록부의 네 번째 동석자 관련 질문이 나왔다. 아델은 당시 현장에 갔고 방문등록부에 서명한 기억이 있다고 답했다. 그러나 이름 일부가 훼손된 실제 기록이 자신의 서명인지 감정받는 데도 동의했다.
“그날 현장에 저 말고도 누가 있었는지는 기억나는 만큼 말씀드릴게요.”
“말씀하세요.”
“관리인, 봉인 조작자, 기록 확인자. 그리고 청산 준비실에서 왔다고 말한 사람이 잠시 문을 두드렸던 것 같아요.”
태오의 등이 뻣뻣해졌다. 추가 동석자는 아델일 수 있었다. 그러나 그녀가 말하는 청산 준비실 사람은 다섯 번째 방문자였을 가능성도 있었다.
“그 사람 이름을 아십니까?”
“기억나지 않아요. 그런데 그 사람은 제가 쓴 메모를 보고 싶어 했어요.”
“보여 주셨습니까?”
“보존 담당자에게 넘긴 뒤였어요. 제 마음대로 꺼낼 수 없었습니다.”
“그 뒤에 어떤 일이 있었습니까?”
아델은 한참 생각했다.
“나중에 조합으로 편지가 왔어요. 이미 정리된 문서이니 더는 들여다보지 말라고요. 그 편지를 보관했는지는 모르겠어요.”
태오는 손끝이 차가워지는 것을 느꼈다. 뒤늦게 첨부된 권리 정산 서류와 이 편지가 관계있을까? 아직은 너무 이른 연결이었다.
이벨이 질문을 멈췄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기억이 더 나시면 공식 경로로 말씀해 주세요. 협박이나 압박이 있으면 바로 연락해 주시고요.”
아델은 숨을 내쉬었다.
“감사합니다. 일곱 해 전엔 제 말이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했거든요.”
***
면담을 마친 아델은 오래된 교재 한 권을 보여 주었다. 표지에는 글을 처음 배우는 사람을 위해 큰 글씨로 간단한 문장들이 적혀 있었다.
“우리는 학생들에게 먼저 자기 이름을 쓰라고 하지 않아요.” 그녀가 말했다.
“왜요?” 태오가 물었다.
“자기 이름을 오래 남이 써 주던 분들은 글씨를 틀리면 자기 이름도 틀린 것처럼 느끼거든요. 그래서 먼저 읽고 싶은 문장부터 고르게 합니다.”
책 안에는 누군가 아이에게 보낸 짧은 편지, 작은 상점의 주문서, 물건을 빌린 날짜가 적혀 있었다. 태오는 마지막 종이에서 오래 눈을 떼지 못했다. 대단한 법률 문서가 아니라 생활 속에서 누군가를 보호하는 글들이었다.
“그날 코르 씨의 말도 이런 것이었을까요?” 그가 물었다.
“그분인지 확정하기 전에는 이름을 붙일 수 없죠.” 아델이 말했다. “하지만 그날 누가 자기 이름을 다른 용도로 쓰지 말아 달라고 부탁한 일은 기억합니다. 처음엔 단순한 주소 정정인 줄 알았는데, 그분은 반복해서 '받았다고 적지 말아 달라'고 했어요.”
이벨은 그 진술을 별도로 기록했다. 태오는 가슴이 답답해졌다. 사건을 다루는 사람들은 모두 각자 기억을 조금씩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하나의 기억이 전체 사실을 증명하지는 않았다.
“지금도 다른 분들의 글을 대신 써 주시나요?” 태오가 물었다.
“원하면 도와드리죠. 다만 마지막 서명은 본인이 할 수 있게 기다립니다. 손이 불편한 분은 다른 공식 방식으로 확인하고요.”
태오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읽기 보조인이 자신의 역할을 이렇게 세심하게 설명하는데, 일곱 해 전 누군가가 그 역할을 권리 위임으로 바꿔 적었다면 얼마나 큰 차이가 생겼을까.
아델은 교재를 덮었다.
“옛일이 돌아온다고 오늘 학생들을 내버려 둘 수는 없어요. 다음에 필요하면 정식으로 연락 주세요.”
“그렇게 하겠습니다.”
태오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문밖에서는 누군가 서툰 글씨로 쓴 편지를 소중히 접고 있었다.
교실 밖에서는 수업을 마친 사람들이 하나둘 집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나이 든 남자가 책을 끌어안은 채 아델에게 인사했다.
“선생님, 다음 주에는 제가 딸에게 편지 써 보겠소.”
“좋아요. 직접 적은 편지는 받는 사람도 오래 기억할 거예요.”
태오는 그 모습을 바라봤다. 아델이 지금 하는 일은 오래된 사건을 폭로하는 것보다도 중요한지 몰랐다. 누군가 자기 이름과 마음을 직접 남길 수 있도록 돕는 일이었다.
그는 마르셀에게 말했다.
“오늘 나온 말씀은 필요한 부분만 공개해 주세요. 이분이 갑자기 도시 한복판에 끌려 나오지 않게요.”
“그렇게 하겠습니다.”
리네아가 조용히 그의 팔을 잡았다.
“변했네요, 태오 씨.”
“전에도 예의는 있었습니다.”
“있었죠. 다만 예전에는 증인이 나오면 빨리 답을 얻는 것만 생각했잖아요.”
태오는 부정하지 않았다. 그랬다. 빨리 해결하고 싶었다. 지금도 마음 한쪽에서는 당장 발카스에게 남은 155금화를 내놓으라고 소리치고 싶었다. 하지만 속도를 내기 위해 다른 사람을 다치게 할 수는 없었다.
***
돌아오는 길에 발카스가 보내온 봉투가 도착했다. 이번에는 거대한 드래곤 문장이 아니라 바렌의 실무 인장이 찍혀 있었다. 봉투에는 다음 임대수익 결산 일정이 적혀 있었고, 특정 금액을 지급하겠다는 약속은 없었다.
태오는 편지를 접으며 중얼거렸다.
“보증금이 줄어들지 않았군요.”
리네아가 웃었다.
“그래도 이번에는 읽지 않은 문서 때문에 책임이 없다고 하지는 않네요.”
“그건 발전입니다.”
“사람도 드래곤도 천천히 배우나 봐요.”
태오는 다시 아델의 교실을 돌아봤다. 고대 용과 왕실 관리들보다, 낡은 칠판 앞의 여인이 더 중요한 일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
교실을 나서는 길, 아델은 태오에게 조그만 종이띠 하나를 건넸다. 그 위에는 '자신이 읽지 않은 문서에는 서명하지 않는다'는 문구가 적혀 있었다.
“학생들한테 나눠 주는 겁니다. 가져가세요.”
태오는 그것을 받아 지갑 안쪽에 넣었다. 이미 그 원칙을 누구보다 절실히 배우고 있었지만, 잊을 때마다 꺼내 보고 싶었다.
저녁 무렵 다렌 코르에게 면담 결과의 허용된 요지만 전달됐다. 태오는 자리 끝에서 그를 지켜봤다. 아델이 자신을 직접 기억한다고 말하지는 않았지만, 치료소와 문서 읽기 보조 업무가 같은 시기에 있었다는 점은 확인됐다.
코르의 눈가가 젖었다.
“그 여인이 내 말을 제대로 적어 줬다면… 내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던 건 아니군.”
이벨이 고개를 끄덕였다.
“다만 어떤 말이 어느 문서에 기록됐는지는 원본 대조가 더 필요합니다.”
“압니다. 그래도 고맙소.”
코르는 손등의 흉터를 내려다봤다. 태오는 그의 표정에서 안도와 두려움이 함께 지나가는 것을 보았다. 진실이 가까워질수록 그동안 자신을 대신해 말해 온 기록들이 얼마나 멀리 퍼졌는지 알게 되기 때문일 것이다.
***
그날 밤, 세딘이 아델이 언급한 조합 회신 편지의 접수번호를 찾았다는 연락을 해 왔다. 문서는 '보완 대상 자료 추가 제출 요청'이라는 제목이었다. 그러나 실제 원본은 오래전 청산 준비실 이관 이후 소재가 미확인이었다.
태오는 종이를 내려놓았다. 또 한 번 문서의 그림자였다.
그때 이벨이 따로 전한 문구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원본 요청서 발행 사유: 제출된 반대 진술과 후속 위임 확인서의 내용 불일치.]
태오가 읽던 손을 멈췄다.
반대 진술이 먼저 있었고, 뒤에 붙은 위임 확인서와 내용이 달랐다는 뜻이었다. 그렇다면 누군가 처음부터 동의를 받고 움직인 것이 아니라, 반대가 나온 뒤에도 권리 정산을 진행하려 했을 가능성이 있었다.
하지만 아직 발행 사유를 적은 사람과 그 판단의 근거는 확인되지 않았다.
그는 조용히 새 줄을 적었다.
[반대 진술이 사라진 것이 아니라, 뒤늦은 위임 확인서 밑에 가려졌을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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