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오의 집에는 사람이 너무 많았다.
거실에는 의자가 네 개뿐이었다. 그래서 토른이 나무 상자를 두 개 가져왔고, 헤스는 빵집에서 접이식 의자를 빌려 왔다. 그래도 자리가 모자라 누군가는 계단에 앉아야 했다.
“다들 말씀드리지만, 제가 돈을 대신 받아 드린다고 약속할 수는 없습니다.”
태오가 말했다.
열한 명의 시선이 그에게 모였다.
“저도 아직 못 받았거든요.”
중년 남자가 손을 들었다.
“그럼 왜 모이라고 했소?”
“모인 건 제가 아니라 여러분이 찾아오신 거잖아요.”
거실에 작은 웃음이 번졌다.
태오는 종이를 펼쳤다.
“우선 각자 계약이 다릅니다. 보증금도 다르고, 퇴거 날짜도 다르고, 증거가 남아 있는 정도도 다르겠죠. 이걸 하나로 묶어 버리면 오히려 손해 보는 분이 생길 수 있습니다.”
그는 각자의 동의를 얻어 계약 기본 사항만 기록했다. 이름을 공개하고 싶지 않은 사람은 번호로 표시했다. 아이가 있는 여자는 집에서 먼 곳에 남의 짐을 맡기고 살고 있다고 했다. 늙은 마부는 보증금을 돌려받지 못해 마차를 팔아야 했다고 했다.
“그때는 발카스 님이 바빠서 그렇다고 했지.”
마부가 턱수염을 문질렀다.
“열두 해를 기다렸소.”
“그동안 계약서가 살아 있습니까?”
“여기 있소.”
마부가 품에서 두껍게 접힌 종이를 꺼냈다. 닳고 헤진 부분도 있었지만 은빛 인장은 남아 있었다.
태오는 조심스럽게 종이를 들었다.
“마법 인장은 아직 유효합니다.”
그 말에 사람들 사이로 작은 술렁임이 일었다.
“정말이오?”
“네. 다만 오래됐다고 해서 지급받는 순서가 어떻게 되는지는 확인이 필요합니다.”
“전부 받을 수는 있겠소?”
그 질문에는 답할 수 없었다.
태오는 침묵 끝에 말했다.
“가능하다고 거짓말하진 않겠습니다. 그래도 확인할 수 있는 건 끝까지 확인해 보겠습니다.”
사람들이 그를 바라봤다. 누군가는 실망한 얼굴이었다. 영웅처럼 나타나 해결해 줄 사람을 기대했을지도 몰랐다. 태오는 그런 기대를 감당할 능력이 없었다. 그는 검을 들 줄도 모르고, 드래곤을 이길 마법도 없었다.
하지만 계약서 하나가 사람의 삶을 얼마나 흔드는지는 알았다.
***
회의가 끝나자 리네아가 태오에게 작은 종이를 내밀었다.
“길드에서 연락이 왔어요.”
“좋은 소식입니까?”
“제 중개 자격을 일시 정지하겠다고요.”
태오는 종이를 읽었다. 사유는 ‘고객 정보의 부적절한 이용 가능성 및 대형 임대인과의 신뢰 훼손’이었다.
“고객 정보는 동의받은 사람만 확인했잖아요.”
“그것도 설명했죠. 그런데 발카스 측에서 항의가 들어왔대요.”
태오는 한동안 말을 잃었다.
자신이 돈을 찾겠다고 움직인 탓에 리네아의 생계까지 흔들리고 있었다. 처음부터 그녀가 집주인의 정체를 명확하게 알리지 않은 건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 뒤에는 위험을 감수하고 증거를 모으는 일을 도왔다.
“미안합니다.”
“태오 씨 잘못은 아니에요.”
“그렇지만 제가 요청했으니까요.”
리네아는 종이를 접었다.
“처음 계약할 때 저는 말해야 할 걸 다 말하지 않았어요. 그건 제 책임이에요.”
그녀가 쓴웃음을 지었다.
“이참에 길드가 어떤 곳인지 확실히 알게 됐네요.”
태오는 책상에서 빈 서류 한 장을 꺼냈다.
“이의 신청합시다.”
“무슨 근거로요?”
“고객 동의서가 있잖아요. 거기에 등록소 사건 번호도 있습니다. 업무 방해한 게 아니라 정식 절차를 따른 거죠.”
리네아는 서류를 보다가 피식 웃었다.
“태오 씨는 무슨 일만 생기면 종이부터 찾네요.”
“마법 못 쓰는 사람한테는 종이가 무기라서요.”
“이번엔 저도 그 무기 좀 빌릴게요.”
태오는 펜을 건넸다.
***
다음 날, 태오는 열한 명의 세입자 중 여섯 명과 함께 등록소를 찾았다. 모두를 데리고 갈 생각은 없었다. 일하는 사람도 있었고, 아픈 가족을 돌보는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대표 몇 명이 함께 서명할 수는 있었다.
“공동 진정을 내러 왔습니다.”
지난번 서기관은 태오를 보자마자 한숨을 쉬었다.
“또 오셨군요.”
“지난번 사건에 관련 진정이 추가됐습니다.”
“몇 건입니까?”
“현재 확인된 것만 열한 건입니다.”
서기관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열한 건?”
“오늘 서명하러 오신 분은 여섯 분입니다. 나머지는 동의서와 자료를 더 확인하고 있습니다.”
“잠깐만 기다리시오.”
서기관은 뒤쪽 방으로 사라졌다. 잠시 뒤 책임자로 보이는 여자가 나왔다. 그녀는 은색 테가 있는 안경을 쓰고 있었다.
“저는 등록관 마르셀입니다.”
태오는 인사를 했다.
마르셀은 서류를 훑다가 물었다.
“발카스의 재산 문제를 맡을 생각입니까?”
“제가 맡은 건 아닙니다. 당사자들이 직접 신청한 겁니다.”
“그래도 당신이 서류를 정리했군요.”
“그렇습니다.”
마르셀은 한참 계약서와 증거를 비교했다.
“당장 지급을 강제할 권한은 없습니다.”
태오의 옆에 있던 마부가 입술을 깨물었다.
“그럼 오늘도 헛걸음인가?”
“하지만.”
마르셀이 말을 이었다.
“발카스 측의 반환 이행 여부를 조사할 권한은 있습니다. 다만 오랜 계약은 공적 기록을 다시 확인해야 합니다.”
태오는 숨을 죽였다.
“정식 조사로 전환해 주실 수 있습니까?”
마르셀은 서류 아래에 도장을 찍었다.
[공동 분쟁 예비조사 개시.]
순간 방 안에서 누군가 작게 환호했다.
태오는 그 소리에 놀라 뒤를 돌아봤다. 열두 해를 기다린 마부가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당장 돈이 들어온 건 아니었다. 그래도 처음으로 관청에서 이들의 말을 공식적으로 받아 적었다.
“조사 결과는 언제 나옵니까?”
태오가 물었다.
“열흘 안에 1차 확인을 하겠습니다.”
“서류로 통보해 주시겠습니까?”
마르셀의 입가가 살짝 올라갔다.
“당연하지요. 당신이 좋아하는 방식으로요.”
***
등록소를 나왔을 때 사람들은 태오에게 고맙다고 말했다. 그는 손사래를 쳤다. 아직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았다. 보증금이 돌아오려면 조사 결과 이후에도 할 일이 많았다.
그러나 작은 변화는 있었다.
사람들이 서로 이름을 부르기 시작했다.
그동안 각자의 집에서 혼자 기다리던 사람들이었다. 발카스의 이름을 입에 올리는 것조차 두려워했던 사람들이었다. 이제 서로의 계약 날짜를 확인하고, 오래된 정보를 나누었다. 태오는 그 장면을 보며 이상하게 마음이 따뜻해졌다.
“태오 씨.”
리네아가 불렀다.
“아까 보셨어요? 헤스 할머니 웃는 거.”
“봤어요.”
“저도 오랜만에 봤어요.”
두 사람은 잠시 말없이 걸었다.
***
회의를 마친 사람들은 곧바로 흩어지지 않았다. 등록소 앞의 나무 그늘에 모여 서로의 연락처를 적었다. 종이에 글씨를 쓰지 못하는 노인은 옆 사람이 대신 주소를 적어 주었다. 태오는 그런 작은 장면이 마음에 남았다.
아이가 있는 소피는 서류를 든 채 우두커니 서 있었다.
“무슨 일 있으세요?”
태오가 물었다.
“등록관님이 자료를 더 내라고 하셨어요. 퇴거할 때 벽지가 손상되지 않았다는 증거요.”
“기록이 없다고 하셨죠?”
“네. 그런데 그때 이웃 아주머니가 이삿짐을 같이 정리해 주셨어요.”
“그분이 집 상태를 보셨겠네요.”
소피가 눈을 들었다.
“증언만으로도 괜찮을까요?”
“확실히 된다고는 못 하지만, 직접 본 사람의 설명은 도움이 될 수 있겠죠.”
태오는 이웃 아주머니의 이름과 연락 가능 여부를 기록했다. 단정할 수 없는 사실을 없는 것처럼 취급할 필요는 없었다. 확인할 수 있는 길이 있다면 해 보면 됐다.
그때 마부가 다가왔다.
“내 계약서는 오래돼서 무효가 된 게 아니겠소?”
태오는 그의 손에 들린 종이를 살폈다. 낡았어도 마법 인장은 선명했다.
“오래됐다는 이유만으로 사라지는지는 등록소 판단을 받아야겠죠. 아무도 지금까지 무효라고 통보한 적은 없습니까?”
“없소.”
“그럼 기록을 남기세요. 언제 누구에게 반환을 요청했는지도요.”
마부는 오래된 주머니에서 조그만 일기장을 꺼냈다. 볼품없는 가죽 표지였지만 안쪽에는 빼곡한 글씨가 있었다.
“내가 요구한 날은 다 적어 놨지.”
태오는 놀랐다.
“잘하셨습니다.”
“어린 손녀가 시켜서 했소. 나중에 할아버지가 언제부터 기다렸는지 알아야 한다고.”
마부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 애가 어느새 다 컸다오.”
태오는 일기장을 잠시 내려다봤다. 금화가 몇 닢인지보다 더 무거운 것이 그 안에 있었다. 기다린 날들의 숫자였다.
그날 저녁에는 헤스가 빵을 한 바구니 가져왔다. 참석자들이 나눠 먹으라는 것이었다. 빵을 받은 사람들은 고맙다며 차례로 인사했다. 태오는 헤스에게 물었다.
“할머니도 서류를 다시 내실 거죠?”
“그럴 거야. 오래된 일이니까 당장 큰 기대는 안 해.”
“그래도 기록은 남겨 두세요.”
“그래. 이제는 기다리기만 하지 않으려고.”
헤스의 말투는 담담했지만 어딘가 달라져 있었다.
***
리네아는 중개 길드에서 또 다른 회신을 받았다. 이번에는 정지 심사 출석 요구였다. 그녀는 봉투를 읽고 조용히 접었다.
“내일 혼자 다녀올게요.”
태오가 물었다.
“증거 자료는 다 챙기셨습니까?”
“네. 고객 동의서하고 분쟁 접수증도요.”
“혹시 제가 증인으로 가도 됩니까?”
리네아는 고개를 저었다.
“제가 한 행동에 대한 문제니까 제가 설명할게요.”
그녀의 눈빛은 단단했다.
태오는 더 붙잡지 않았다. 누군가를 돕는다는 건 그 사람 대신 모든 말을 해 주는 일이 아니었다. 자신의 문제를 직접 설명할 수 있게 옆에 서 주는 것도 도움일 수 있었다.
“끝나고 오시면 저녁이나 드시죠.”
“태오 씨가 사요?”
“보증금 돌려받으면요.”
“그럼 오래 기다려야겠네요.”
리네아가 웃었다.
“아니요. 오늘은 제가 살게요.”
그날 밤 둘은 시장 끝 작은 식당에서 수프와 구운 채소를 먹었다. 리네아는 자신이 중개업에 처음 들어왔을 때 이야기를 해 주었다. 엘프들 중에도 거주지를 잃고 떠도는 사람이 많았다고 했다. 안정된 집을 찾아 주는 일이 좋아서 이 일을 시작했다고 했다.
“처음에는 정말 좋은 직업이라고 생각했어요.”
“지금은요?”
“좋은 직업인데, 제가 제대로 하지 못한 게 있죠.”
태오는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그건 고치면 됩니다.”
“태오 씨가 그런 말씀을 하니까 좀 이상하네요.”
“왜요?”
“처음 만났을 때는 집에 쥐가 있는지만 물어보던 분이었잖아요.”
“지금도 궁금합니다. 그때 정말 쥐였을까요?”
리네아가 웃음을 터뜨렸다.
“아마 집정령이었을 거예요.”
“그 집정령이 보증금 반환에 도움이나 주면 좋겠네요.”
“기대는 하지 마세요.”
둘은 식당을 나와 어두워진 시장 거리를 걸었다. 가로등으로 쓰는 발광석이 하나둘 켜졌다. 태오는 저녁 바람을 맞으며 생각했다. 지금 하는 일이 단순한 돈 싸움으로 끝나지 않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렇다고 스스로 영웅이 된 것처럼 행동할 생각은 없었다.
금화를 돌려받아야 할 사람이 있고, 돌려주기로 약속한 사람이 있다.
그 사실은 분명했다.
또 하나 분명한 건, 혼자였다면 여기까지 오지 못했을 거라는 사실이었다. 리네아가 계약서를 확인해 주고, 토른이 집 아래를 조사하고, 마르셀이 기록을 받아 줬다. 헤스와 다른 세입자들이 자신의 이야기를 꺼낸 덕분에 하나의 사건이 모습을 드러냈다.
태오는 집으로 돌아가며 새로운 수첩을 샀다. 표지에 짧게 적었다.
[확인된 사실 / 아직 모르는 일.]
앞쪽에는 증거를, 뒤쪽에는 질문을 쓸 생각이었다.
그가 더 큰 문제에 휘말리더라도 두 가지를 혼동하지 않기 위해서였다.
***
그때 골목 반대편에서 검은 옷을 입은 남자 두 명이 나타났다. 그들은 태오 앞을 막아섰다. 허리에는 발카스 가문의 문장이 달린 칼이 있었다.
“김태오.”
“맞습니다.”
“주인께서 부르신다.”
태오는 걸음을 멈췄다.
“발카스 씨가요?”
“그렇다. 지금 당장 산맥으로 가야 한다.”
리네아가 얼굴을 굳혔다.
“공식 통지서가 있습니까?”
남자가 눈살을 찌푸렸다.
“주인의 명령이다.”
태오는 손을 내밀었다.
“명령인지 초대인지부터 확인하겠습니다.”
“무슨 차이가 있지?”
“명령이면 거절할 수 없다는 뜻이고, 초대면 시간부터 조율해야 하니까요.”
남자는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넌 정말 죽고 싶으냐?”
태오는 웃지 않았다.
“살고 싶어서 확인하는 겁니다.”
검은 옷의 남자는 잠시 그를 노려보다가 봉인된 편지를 내밀었다.
[발카스 가문의 정식 초대장. 임차인 대표 김태오, 보증금 정산 관련 회의에 참석 바람.]
회의 장소는 산맥이 아니었다.
파벨시 중앙 상단회관.
태오가 눈썹을 올렸다.
드래곤이 드디어 도시로 나오려는 모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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