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카스는 회의실에 들어오자마자 종이 뭉치를 내려놓았다.
“내가 이 집을 유지하는 데 얼마나 썼는지 아느냐, 인간.”
김태오는 종이의 두께를 보고 긴장했다. 드래곤은 거대한 동굴을 소유했고 온 산맥이 자신의 것이라고 말해 왔다. 그런 존재가 영수증을 한 묶음 준비했다는 사실은 사뭇 두려웠다.
“얼마를 쓰셨는데요?”
“안전 경비, 봉인 감시, 우기 배수 관리까지 합하면—”
“그게 제 주택과 관계가 있는지부터 확인하겠습니다.”
발카스가 말을 멈췄다.
“감사할 시간은 충분하다.”
“제 시간은 충분하지 않습니다. 보증금 185금화가 아직 안 왔으니까요.”
마르셀은 회의록을 열었다. 오늘은 새 관리비를 확정하는 자리가 아니었다. 기존 철회·보류 항목과 겹치는지, 실제로 무엇을 누구에게 청구하려는지 확인하는 사전 조정이었다.
토른은 조심스럽게 문서를 펼쳤다.
“이건 주택의 계단 보수비가 아니오. 구 보관시설 외곽의 배수로 정비 내역이군.”
“같은 구역을 보호했다.” 발카스가 말했다.
“같은 구역이란 말로 임차인에게 청구할 수는 없지.”
토른은 지도에 선을 그었다. 태오가 임대한 집의 대지 경계와 고대 금고 배수로는 일부가 겹쳤지만 시설의 소유와 사용 목적은 달랐다.
이벨이 의견을 덧붙였다.
“실제 비용이 발생했는지는 별도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다만 임대계약상의 부담 주체와 채무 상계 가능성은 다른 문제입니다.”
발카스가 눈살을 찌푸렸다.
“그럼 내가 돈을 썼는데도 아무도 내게 돌려주지 않는다는 말이냐?”
태오는 발카스를 보았다. 수천 년 산 드래곤도 남의 돈을 돌려받는 문제 앞에선 감정이 상하는 모양이었다.
“제가 집주인님께 제 돈을 돌려달라고 하는 이유와 비슷합니다.”
발카스가 대답하지 못했다.
***
대리인 바렌은 곧 수정을 제안했다. 기존 126금화 청구는 징수 보류 상태로 유지하고, 별도의 실비 내역을 확인한 뒤 새로운 청구 여부를 판단하겠다는 것이었다. 태오 측도 회계자료를 확인할 기회를 받았다.
“실비가 있으면 별도 논의하겠습니다.” 태오가 말했다. “대신 보증금 원금에서 자동으로 빼지는 마세요.”
“알겠소.” 바렌이 대답했다.
발카스는 영 마음에 들지 않는 듯했다.
“보증금은 내가 책임진다. 그러나 누가 금고에 손을 댔는지도 밝혀야 한다.”
“그건 저도 알고 싶습니다.”
“너는 모든 걸 내가 감춘다고 생각하겠지.”
“처음에는요.”
태오는 잠시 뜸을 들였다.
“하지만 지금은 집주인님도 모르는 서류가 많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드래곤은 그것이 자신에 대한 모욕인지 이해하려는 듯 눈을 가늘게 떴다.
“내 무지를 놀리는 것이냐?”
“아니요. 모르는 부분을 모른다고 하자는 겁니다.”
바렌이 헛기침을 했다. 발카스의 콧김이 길게 흘러나왔다.
***
조정이 끝나고 리네아는 태오에게 빈 상가의 열쇠 하나를 보여 줬다. 파벨 동문의 새 작업장 후보였다.
“관리인이 내일 하루만 내부를 보여 주겠대요.”
“지난번 곰팡이집 말고요?”
“그곳은 이미 다른 사람이 계약했어요.”
“그 용기가 대단하네요.”
“이번 건 지붕이 멀쩡해요.”
태오는 열쇠를 손바닥에 올렸다. 아무 장식도 없는 작고 평범한 쇳조각이었다. 계약서와 금고 증표를 손에 쥐고 다니는 동안, 평범한 열쇠가 얼마나 그리웠는지 몰랐다.
“이 공간에서 뭘 하고 싶으세요?” 리네아가 물었다.
“물류 상단의 작은 정리 업무요. 물건이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기록하고, 분실되면 추적하고.”
리네아는 웃었다.
“이미 매일 하고 있는 일을 돈 받고 하시겠다는 거네요.”
“지금은 제가 돈을 내고 있잖습니까.”
두 사람은 웃었다. 태오는 얼마 되지 않는 자금으로 작업대를 한 개 살 수 있을지 계산했다. 미환급 185금화는 아직 받을 돈이지 현재 쓸 수 있는 돈이 아니었다. 그 차이를 이제는 확실히 알았다.
***
그날 오후 태오는 작업장 내부 점검을 위해 토른을 불렀다. 임대인 측은 외관만 보고도 계약하길 바랐지만, 태오는 지붕과 기초를 확인하지 않은 채 돈을 맡기고 싶지 않았다.
“이 건물은 네가 살던 집과 달라.” 토른이 말했다.
“어떤 점에서요?”
“우선 지하에서 왕국의 비밀 금고가 나올 가능성이 적지.”
“그것만으로도 마음이 편하네요.”
토른은 벽을 두드리고 바닥을 살폈다. 모서리 한쪽에는 습기가 조금 있었지만 기초 자체는 튼튼했다. 문제는 계약서였다. 점검 동의 조항에 '사용 중 발생하는 모든 손상은 임차인의 책임'이라는 문장이 있었다.
“이걸 그대로 받아들이면 오래된 손상까지 제 책임이 될 수 있습니다.” 태오가 말했다.
관리인이 눈썹을 올렸다.
“보통 다 그렇게 씁니다.”
“그럼 보통과 다르게 해야겠네요.”
리네아가 옆에서 웃었다.
“인수 당시 상태를 사진과 장인 점검표로 남기면 됩니다. 수리 책임이 있는 항목을 나누고요.”
관리인은 잠시 고민하더니 동의했다. 불필요한 분쟁을 피하는 게 자신에게도 이익이라고 생각한 듯했다.
태오는 한숨을 내쉬었다. 파벨에서 두 번째 임대계약을 검토하는데 첫 번째 집주인과의 기억이 발목을 잡고 있었다. 그러나 예전과 달리 이번에는 계약서를 이해할 시간이 있었다.
“태오 씨가 드래곤에게서 배운 게 있네요.” 리네아가 말했다.
“그건 아닙니다.”
“왜요?”
“돈 못 받는 법을 배웠거든요.”
토른이 크게 웃었다.
***
토른은 점검표를 정리한 뒤 태오에게 오래된 목재 조각 하나를 건넸다.
“이건 새 작업장 선반에 써. 금고에서는 나온 게 아니라 내 공방에서 남은 거다.”
“값은 얼마입니까?”
“일단 선물이야.”
“정말요?”
“하지만 설치는 네가 도와야 한다.”
태오는 웃었다. 누군가 물건을 주겠다고 하면 먼저 숨은 조건부터 찾게 된 자신이 조금 슬프기도 했다. 이번에는 토른의 말대로 그냥 받아도 좋을 선물이었다.
“감사합니다. 설치할 때 부르겠습니다.”
“좋아. 그리고 앞으로 계약서를 고칠 땐 건축 문제도 적어 둬. 내가 도장 찍기 전에 확인하마.”
태오는 고개를 끄덕였다. 토른에게 의지할 수 있다는 사실은 든든했지만, 영원히 모든 일을 그에게 맡길 수는 없었다. 앞으로는 자신도 새 임대인의 시설 관리 책임을 제대로 이해해야 했다.
그는 장부 옆에 작은 새 노트를 만들었다.
[새 작업장 준비 비용] [보증금 반환액]
두 항목은 한 장부에 있어도 서로 섞이면 안 됐다. 원래 보증금을 지키려던 싸움에서 배운 첫 번째 실무였다.
***
오후에는 소피와 헤스가 리네아의 새 상담 창구를 시험 삼아 방문했다. 리네아는 두 사람을 다른 시간에 안내했다. 각자 확인해야 하는 문서가 다르고, 다른 사람에게 자기 계약 내용을 보여 줄 이유도 없었다.
“우리는 같은 피해자니까 한 번에 처리해 주시면 안 되나요?” 소피가 물었다.
“함께 할 수 있는 절차가 있고, 따로 해야 하는 절차가 있어요. 계약마다 금액과 고지 주소가 달라서요.”
리네아는 오해하지 않도록 천천히 설명했다. 본인의 계약서를 바탕으로 실제 반환액을 확인하고, 미수령 통지가 있다면 그 사실만 표시하도록 도왔다. 소피는 이전 주소가 바뀌던 시기를 기억했다. 헤스는 자신의 이름으로 발급된 31-A 증표를 다시 꺼냈다.
“이 돌이 금고에서 돈을 찾아 주는 거라면 얼마나 좋겠니.” 헤스가 말했다.
“지금까지 확인한 용도만으로는 현금 인출 증표라고 볼 수 없습니다.”
“알고 있지. 그래도 오래 갖고 있으니 희망이 되네.”
리네아는 돌을 만지지 않고 외형과 보관 상태만 적었다. 그 작은 신중함이 헤스에게는 안심이 된 듯했다.
태오는 멀리서 두 사람을 지켜봤다. 연인이라는 이유로 리네아의 일을 당연하게 이용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상담이 끝난 뒤 그녀에게 말했다.
“업무로 인정받을 수 있게 조정실에 정식 지원을 요청하겠습니다.”
“당신이 비용을 전부 낼 필요는 없어요.”
“그런 뜻 아닙니다. 계속하려면 지속 가능한 방식이 있어야죠.”
리네아가 미소 지었다.
“그런 생각을 하는 사람이라면 같이 일하기도 좋겠네요.”
***
태오는 새 작업장 관리인에게 계약서 수정안을 다시 보냈다. 처음보다 문서가 길어졌지만 오히려 다툴 부분은 줄어들었다.
“계약서가 이렇게 길면 읽기 귀찮지 않나요?” 관리인이 물었다.
“처음 제대로 읽는 게 나중에 몇 달 다투는 것보다 편합니다.”
관리인은 납득한 듯 서명 날짜를 미뤘다.
태오는 마음이 놓였다. 새 작업장을 구하는 일이 급하더라도 그 조급함 때문에 첫 계약의 실수를 반복하고 싶지는 않았다. 손에 들어온 돈과 아직 받지 못한 돈을 구분하며, 현실적으로 감당할 수 있는 선택만 하려 했다.
***
저녁에는 세입자 모임이 열렸다. 소피는 아이와 함께 왔고, 로벤은 오랜 운송일지를 안고 앉았다. 헤스는 달콤한 빵을 가져왔다.
“요즘 시장에선 브라운 상회가 금고의 주인이 됐다고들 해요.” 소피가 말했다.
“상자나 일부 시설을 양수한 기록은 있습니다.” 태오가 설명했다. “하지만 그 안의 편지나 세입자 돈을 받는 권리까지 샀다고 확인되지는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서류를 다시 써야 합니까?”
“아직 그럴 필요가 있다는 안내는 없습니다. 누구든 새 계약서를 내밀면 혼자 서명하지 말고, 내용부터 확인하세요.”
로벤이 손을 들었다.
“나처럼 글을 천천히 읽는 사람은 어떻게 하나?”
리네아가 대답했다.
“길드 상담 창구를 마련하겠습니다. 저희가 대신 결정하는 게 아니라, 이해할 수 있도록 설명하는 자리요.”
태오는 그녀를 바라봤다. 그녀는 그가 부탁하기 전에 자기 일의 범위를 분명히 했다. 연인이라고 무조건 그의 뒤를 따르는 사람이 아니었다.
헤스가 손뼉을 쳤다.
“그거 좋구먼. 사람들이 돈을 빌려서라도 법률가를 만나기 전에, 무엇에 동의하는지 알 수는 있어야지.”
회의는 조금 오래 걸렸다. 처음에는 사람들이 모두 같은 서류에 서명하면 빨리 끝날 거라 생각했지만, 각자의 사정은 달랐다. 소피는 미도달 통지를 확인하고 싶었고, 로벤은 자신의 장부에서 어느 날 돈을 받았다고 잘못 기록됐는지를 찾고 싶었다.
태오는 한 사람의 보증금만으로 시작한 일이 열한 사람의 삶을 건드리고 있다는 사실을 새삼 느꼈다.
***
그날 밤 태오는 반환금이 들어올 때마다 다시 계산하는 종이를 펼쳤다. 30, 40, 20, 25. 네 차례에 걸쳐 실제로 받은 115금화가 적혀 있었다.
돈이 생길 때마다 할 수 있는 일이 늘었지만, 돈을 받기까지 기다린 시간은 되돌릴 수 없었다. 그는 앞으로 비슷한 처지의 사람들이 가장 먼저 자신의 계약 조건을 확인할 수 있는 작은 안내서를 만들어 볼까 생각했다.
'계약 기간은 언제 끝나는가. 임대인은 누구인가. 돌려받을 금액은 얼마인가. 이미 받은 돈은 얼마인가.'
단순한 질문들이었다. 한때는 그 역시 이 질문들의 답을 모른 채 살았다.
리네아가 건넨 따뜻한 차를 마시며 태오는 표지 제목을 적었다.
[드래곤과 계약하기 전에 확인할 열 가지.]
“제목이 너무 무서운데요?” 리네아가 말했다.
“실제 경험담이니까요.”
“그럼 첫 번째 항목은요?”
“집주인의 종족을 확인할 것.”
리네아가 얼굴을 붉혔다. 처음 매물을 소개할 때 그 말을 제대로 하지 못한 사람이 바로 그녀였기 때문이다.
태오는 웃으며 펜을 내려놓았다.
“농담입니다. 첫 번째는 반환 약속을 서면으로 확인할 것.”
“그건 정말 좋은 문장이네요.”
그들은 잠시 장부를 덮고 늦은 저녁을 함께 먹었다. 새로운 계약을 체결하는 일은 아직 남아 있었지만, 이번에는 한 사람의 삶이 누군가의 무심함에 묶이지 않기를 바랐다.
***
그날 밤 마르셀에게서 새 공문이 왔다.
[운송 인계표 7-2 및 봉인 키 목록 제한 대조 허가. 물품의 현재 소유자, 당시 운영자, 원 통지 수익권자의 권리 분리 전제.]
태오는 공문을 세 번 읽었다. 리네아는 그의 표정을 보고 말했다.
“좋은 소식이에요?”
“적어도 내일 볼 종이가 생겼네요.”
“그게 태오 씨에게는 좋은 소식이죠.”
태오는 웃으며 그녀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한참 뒤 리네아가 아주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오늘 드래곤 앞에서 멋있었어요.”
“어떤 부분이요?”
“모른다고 하는 용기도 필요하다고 말한 부분.”
그는 잠시 고개를 들었다.
“저도 여전히 무섭습니다. 발카스가 정말 화를 내면 어쩌나 싶거든요.”
리네아가 그의 손을 잡았다.
“무섭다고 말하는 건 부끄러운 일이 아니에요.”
태오는 그녀의 손가락 사이에 자신의 손가락을 끼웠다. 문밖으로 바람이 불었다. 드래곤의 재산도, 왕실의 기록도 움직이지 않았지만, 그 작은 손길은 오늘 하루를 견딜 만하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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