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벨시 기록보존소의 문은 아침 여덟 시에 열렸다.
김태오는 일곱 시 사십 분부터 그 앞에 서 있었다. 문을 너무 일찍 두드리면 기록관이 싫어할 것 같고, 그렇다고 돌아가기에는 잠을 너무 적게 잤다.
“이렇게 일찍 오실 줄 알았어요.”
리네아가 종이 봉투를 내밀었다. 따뜻한 빵 냄새가 차가운 아침 공기를 밀어냈다.
“당신은 왜 왔어요?”
“연인을 굶기면 길드에서 경고장을 보내거든요.”
“그런 규정이 있습니까?”
“지금 만들었어요.”
태오는 웃으며 빵을 받았다. 버터가 종이에 스며 있었다. 며칠 동안 서류 위에 엎드려 먹은 차가운 점심들과 달리, 지금은 빵이 손에 온기를 남겼다.
“어제 그 시간표, 다시 보셨어요?” 리네아가 물었다.
“열두 번쯤요.”
“열세 번 보면 날짜가 바뀌나요?”
“아니요. 집주인이 바뀌면 좋겠어요.”
리네아가 빵을 씹다 웃는 바람에 어깨를 움츠렸다.
“못 들은 걸로 할게요.”
“고맙습니다. 제법 위험한 발언이었네요.”
두 사람에게는 이미 분명한 사실이 있었다. 계정 47에 붙은 ‘수취인 정정 검토 보류’라는 임시 표시는 발카스가 처분 보류를 요구하기 이틀 전에 찍혔다. 하지만 그것이 누구의 요청인지, 돈을 막는 명령인지, 단순히 주소를 바로잡는 절차인지는 아직 모른다.
태오는 주머니에서 숫자를 적은 작은 종이를 꺼냈다.
[최초 보증금 300금화. 실제 반환 90금화. 미환급 210금화.]
날짜가 아무리 뒤집혀도 이 세 숫자는 변하지 않았다. 적어도 추가로 돈이 들어오기 전까지는.
문이 열렸다.
“이번에는 일지 뒷면이지요?” 기록관 세딘이 입구에서 물었다.
“네.”
“그 뒷면을 본다고 죄인이 나타나는 건 아닙니다.”
“저도 죄인을 찾으러 온 건 아닙니다. 이름과 그때 맡은 일을 찾으러 왔습니다.”
세딘은 아주 짧게 웃었다.
“다행입니다. 여긴 고문실이 아니라 기록보존소니까요.”
***
안쪽 열람실에는 마르셀과 이벨, 토른이 먼저 와 있었다. 토른의 공구함은 문밖에 놓여 있었다. 보존소에 쇠망치를 들고 들어오지 말라는 규정 때문이다.
“공구를 밖에 두니 몸 한쪽이 잘린 기분이군.”
“저는 가방 검사만 세 번 받았어요.” 태오가 말했다.
“그 가방에 뭘 넣었는데?”
“계약서요.”
“그 정도면 흉기지.”
토른의 투덜거림에 마르셀이 웃음을 삼켰다.
세딘이 나무 상자를 열었다. 안에는 일곱 해 전 제4 확인석에서 작성된 교대 일지의 원본이 있었다. 앞장은 이미 제한 열람을 거쳤다. 문제의 임시 보류 표시는 그 장부의 교대 기록과 함께 남아 있었지만 작성 자격자의 이름은 뒷장 귀퉁이, 오래된 풀 자국 아래에 숨어 있었다.
“풀을 뜯지 않고도 볼 수 있습니까?” 태오가 물었다.
“비추어 읽을 수 있는 범위까지만요. 종이를 떼어 내면 보존 조치부터 다시 받아야 합니다.”
세딘은 얇은 판 위에 장부를 놓고 빛을 비스듬히 비췄다. 종이의 결이 미세하게 솟았다. 흐릿한 잉크 자국들이 하나씩 드러났다.
[제4 확인석 야간 대체 담당.]
그 뒤에 이어진 이름은 처음에는 ‘미’ 한 글자로 보였다. 빛이 움직이자 ‘라’가 나타났다.
“미라?” 리네아가 숨죽여 읽었다.
“이름 일부입니다.” 세딘이 말했다. “성이나 정식 서명인지도 아직 모르고요.”
이벨은 옆에 놓인 등록 대장 사본을 펼쳤다.
“당시 제4 확인석에는 정규 담당자와 대체 담당자가 한 명씩 있었습니다. ‘미라’로 시작하는 이름이 명부에 하나 있군요. 미라 시엔. 그 시기에 야간 대체 근무 자격을 받았습니다.”
태오의 가슴이 조금 빨리 뛰었다.
“그럼 미라 시엔이 임시 보류를 쓴 사람입니까?”
“아직 그 결론은 이릅니다. 이 일지는 근무 책임을 넘겨받는 사람의 서명도 같은 칸에 남기도록 돼 있어요. 보류 기재자와 일지 인수자는 다를 수 있습니다.”
태오는 펜 끝으로 세 줄을 따로 적었다.
[해당 시간 근무 가능자: 미라 시엔.]
[교대 일지 귀퉁이 이름 일부: 미라.]
[임시 보류 실제 기재자: 확인 전.]
이벨이 그의 수첩을 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이 세 줄이 나중에 한 줄이 될 수는 있지만, 오늘은 아닙니다.”
***
문서의 반대편에는 더 작은 글씨가 있었다.
‘원 지시문은 동봉된 청색 표지에서 확인’.
세딘이 표정을 굳혔다.
“우리가 확인한 수장함 목록에는 청색 표지가 없었습니다.”
“그럼 사라진 겁니까?”
“아직은 아닙니다. 동봉이란 말이 원본과 같은 상자에 넣었다는 뜻이 아닐 수 있어요. 그 시절 제4 확인석은 신청서와 회신을 서로 다른 보관 번호로 관리했습니다.”
토른이 팔짱을 꼈다.
“문은 세 겹이나 잠가 놓고 정작 종이는 다른 서랍에 둔다니.”
“그렇게 해야 한 서랍이 타도 나머지가 남으니까요.” 세딘이 대답했다.
27화 때 불났던 기록 창고 이야기가 태오의 머리를 스쳤다. 그 화재의 원인은 여전히 밝혀지지 않았다. 하지만 기록을 나눠 보관한다는 원칙 덕분에 살아남은 자료가 있을 수도 있었다.
마르셀이 신청 양식을 꺼냈다.
“우선 ‘청색 표지’의 별도 보존 번호를 조회하겠습니다. 지난번처럼 개인 주소는 지우고 문서 표제와 발신 부서만 확인할 겁니다.”
“제가 찾고 싶은 건 요청자의 실명입니다.”
“실명은 당사자의 권리와 공익상 필요를 심사한 뒤에요.”
태오는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에게 지금 필요한 건 원금이 누구의 돈인지 확인할 길이지, 일곱 해 전 누군가의 집 주소를 거리의 신문에 싣는 일이 아니었다.
***
열람실 밖에서는 작은 소란이 있었다.
마른 체격의 남자가 접수창에서 목소리를 높이고 있었다. 그는 파벨시의 상인이었고, 발카스 대리인 바렌의 이름이 적힌 명함을 들고 있었다.
“발카스 님도 이 기록을 보실 권리가 있습니다.”
직원이 고개를 저었다.
“권리 신청을 막는 게 아닙니다. 신청인이 누구인지 확인할 서류가 필요하다고 말씀드리는 겁니다.”
태오가 가까이 다가가자 남자가 그를 알아봤다.
“김태오 씨. 당신은 계속 들어가면서 왜 우리 쪽은 막습니까?”
태오는 잠시 생각했다.
“저도 처음엔 세 번 반려됐습니다. 네 번째에 양식을 고쳤고요.”
“드래곤께서 직접 오시면?”
“문이 작아질 겁니다.”
리네아가 입술을 깨물었다. 남자는 웃지 않았다.
“농담할 기분이 아닙니다.”
“저도 제 돈 210금화가 묶여 있어서 농담할 기분은 아니죠. 그래도 신청서가 맞는지부터 보셔야 합니다.”
그때 복도 끝에서 낮고 무거운 목소리가 들렸다.
“너는 매번 그 숫자를 말하는군.”
발카스였다. 오늘은 검은 외투 차림의 인간형이었지만, 걸음을 옮길 때마다 은빛 머리칼 사이로 비늘이 잠깐씩 떠올랐다.
“잊지 않으려고요.” 태오가 말했다.
“내가 잊었다는 뜻이냐?”
“그건 확인할 서류가 없습니다.”
드래곤의 입가가 꿈틀했다. 직원은 두 사람을 번갈아 보다 입을 다물었다.
바렌이 허둥지둥 달려와 드래곤에게 자료 접근 자격을 설명했다. 발카스는 듣고 나서 접수대로 고개를 숙였다.
“필요한 문서를 주어라.”
직원이 신청서 두 장을 내밀었다.
“위임과 열람 범위가 서로 다릅니다. 두 장 모두 작성해 주십시오.”
발카스가 한동안 서류를 내려다보았다.
“내가 손가락 한 번 움직이면 이 산맥을 만들었을 때의 계약들을 불러낼 수 있다.”
“그 계약들도 별도 조회 신청이 필요합니다.” 직원이 말했다.
태오는 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웃음을 참다가 어깨가 떨렸다.
***
보존소 뒤편의 복사실에서 태오는 예상하지 못한 질문을 받았다.
“미라 시엔이라는 분을 왜 찾으세요?”
종이의 먼지를 터는 일을 하던 젊은 직원이었다. 그는 기록물 복사 신청을 받아 들다가 이름을 보고 눈길을 멈췄다.
“그분을 아십니까?”
“제 어머니와 같은 부서에서 일하셨다더군요. 오래전 이야기입니다.”
태오는 곧장 직원을 붙들고 말을 캐묻고 싶었지만 마르셀의 표정을 보고 멈췄다. 직무상 얻은 자료를 사적으로 건네는 일이 될 수 있었다.
“그렇다면 정식으로 증언을 요청할 수 있는 방법을 알려 주십시오.”
직원은 뜻밖이라는 듯 눈을 깜빡였다.
“그분이 지금도 왕실에 계신지는 모르겠는데요.”
“괜찮습니다.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을 나눠 주시면 됩니다.”
젊은 직원은 작은 종이에 당시 행정직원 동문회의 연락처를 적었다. 공개된 주소였다. 태오는 개인 거주지가 아닌 공식 연락처만 받았고, 마르셀은 그 경위를 접수 기록에 추가했다.
“그렇게까지 해야 하나요?” 리네아가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나중에 그분이 무슨 말을 해도 ‘몰래 찾아가 겁줬다’는 소리를 듣고 싶지 않아서요.”
“태오 씨가 그런 사람은 아닌데.”
“아무도 모르는 사람 앞에선 증명해야 하잖아요.”
그녀는 잠시 생각하다 그의 옷깃을 매만졌다.
“그런 말을 하고 다니면 가끔 너무 멋있어요.”
“가끔만요?”
“지금은 가끔이라고 해 둘게요. 더 해 드리면 자만할까 봐.”
태오는 귀끝이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때 토른이 두꺼운 봉투를 들고 다가왔다.
“너희 둘이 여기서 낭만을 발굴하는 동안 난 좀 더 현실적인 걸 찾았어.”
그는 일지 원본에 남은 굴곡 사진을 보여 주었다. 한 장을 뒤집어 쓴 흔적이 아니라, 여러 날에 걸쳐 다른 펜으로 추가된 줄이 보였다.
“서명이 한 번에 쓰인 게 아닐 수 있군요.” 태오가 말했다.
“잉크가 다르다고 날짜까지 말할 순 없어. 하지만 같은 일지에 뒤늦게 확인 글을 덧썼는지 감정을 신청할 수 있겠지.”
세딘은 토른의 관찰을 사진과 함께 보존 검사 신청서에 옮겼다. 태오는 그 모습을 보며 이상한 안도감을 느꼈다. 누군가가 지운 것을 추적하는 것만큼, 누군가가 정직하게 덧붙인 기록도 중요했다.
그는 수첩에 한 줄을 추가했다.
[뒷면 이름의 등장 시점은 문서 작성 시점과 다를 수 있음.]
이 사실은 실명을 확인하기 전에 인계 행위부터 나누어 보아야 한다는 것을 뜻했다.
***
점심 무렵, 기록관은 옛 인계 목록에서 ‘청색 표지’에 대응하는 항목을 하나 찾았다.
[북부 통지대행실. 수취인 정보 정정 요청 원문. 청색 철 4-7.]
그 옆에는 예상하지 못한 주석이 붙어 있었다.
[원 지시문은 현물 이관하지 않음. 발신 기록과 확인석의 회신만 별도 보존.]
“원본은 어디에 있다는 뜻입니까?” 태오가 물었다.
세딘은 오래된 보존 규칙집을 펼쳤다.
“당시 요청 원문은 발신 부서가 보관하고, 확인석에는 요약과 수령 번호만 넘겼습니다. 이 항목이 정확하다면 우리는 지금 답장의 일부만 보고 있는 셈입니다.”
“그럼 발신 부서에 남은 기록을 찾아야겠네요.”
“그렇습니다. 다만 북부 통지대행실은 일곱 해 전에 다른 부서로 통합됐습니다.”
“그 부서 이름도 바뀌었겠죠?”
“세 번이나요.”
태오는 천장을 쳐다봤다.
“왕국은 드래곤보다 오래된 서류를 만드는 데 재능이 있군요.”
마르셀이 작은 쪽지를 건넸다. 북부 통지대행실의 후신 기관 세 곳과 이관 보관함 번호가 적혀 있었다.
문득 태오는 발카스가 왜 그렇게 놀랐는지 다시 생각했다. 드래곤은 일곱 해 전 자신이 정정 문제를 듣고 처분 보류를 요청했다고 말했다. 그보다 먼저 표식이 있었다면, 그에게 정정 문제를 전한 사람은 누구였을까.
발카스의 기억이 틀렸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의 말을 거짓말이라고 부를 증거가 없었다.
태오는 발카스를 향해 돌아섰다.
“당시에 누가 명단이 이상하다고 알려줬습니까?”
드래곤은 잠깐 눈을 가늘게 떴다.
“검은 봉투 한 통이었다.”
“누구 이름으로 보냈는데요?”
“이름이 없었다.”
“그 봉투는 아직 있습니까?”
발카스는 대답하기 전에 바렌을 바라봤다. 바렌 역시 처음 듣는 이야기인지 눈썹을 올렸다.
“동굴의 옛 금고에 있을 것이다.” 드래곤이 말했다.
태오는 즉시 질문을 바꿨다.
“그 금고는 열 수 있습니까?”
“내 개인 물품 보관함이다. 계정 47과 다르다.”
태오가 웃었다.
“오늘은 처음으로 그 말이 반갑네요.”
“칭찬하지 마라, 인간.”
“봉투를 보여주시면 잠시 칭찬하겠습니다.”
발카스는 한숨처럼 연기를 뿜었다.
그날 오후, 드래곤의 개인 금고에서 익명 봉투를 찾겠다는 서면 동의가 조정실에 도착했다. 그리고 북부 통지대행실의 청색 철에는 발신 원문이 따로 있다는 사실이 확인되었다.
태오는 두 줄을 나란히 적었다.
[이틀 먼저 남은 임시 보류.]
[그 후 드래곤에게 도착한 검은 봉투.]
서로 다른 길을 따라온 두 장의 종이가, 같은 비밀의 양쪽 끝일지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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