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오는 자신이 지금까지 얼마나 많은 상자를 열었는지 떠올려 보았다.
한국에서 이사할 때는 냄비가 든 상자를, 이세계에 처음 도착했을 때는 빵 상자를, 드래곤 집에 들어왔을 때는 짐짝을 풀었다.
그런데 오늘 열 상자는 달랐다.
잘못 열면 내용을 모르게 될 수 있고, 잘 열어도 그 내용은 자신이 모두 읽을 수 없었다.
“이렇게 까다로운 상자는 처음입니다.”
세딘 기록관은 서류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그래서 관리 절차가 있는 겁니다.”
“혹시 왕실 보물창고도 이렇게 합니까?”
“보물창고 이야기는 제 업무 범위가 아닙니다.”
“네. 예상했습니다.”
세딘이 태오에게 건넨 문서에는 조건부 허가라고 적혀 있었다. 입회인이 모두 도착하고 개인정보 차폐 계획이 확인되면, 봉인을 훼손하지 않도록 기록하면서 내부 품목 종류와 수량을 검증할 수 있다는 결정이었다. 전체 내용 공개나 누구에게든 상자를 인도한다는 뜻은 아니었다.
태오는 문서 아래에 자기 서명을 하려다 펜을 멈췄다.
“이 서명은 무엇에 동의하는 겁니까?”
“개봉 과정에서 알게 된 제3자 개인정보를 외부에 알리지 않겠다는 약속입니다.”
“제 돈을 포기하겠다는 건 아니고요?”
“그런 내용은 없습니다.”
태오는 처음부터 끝까지 읽었다. 최근의 그는 서류를 의심할수록 이상하게 서류를 더 믿게 됐다. 눈에 쓰인 것은 의심할 수 있었지만, 쓰이지 않은 약속을 나중에 주장하는 사람에게는 적어도 반박할 근거가 남았다.
서명을 마치자 리네아가 물었다.
“이제 얼마나 남았어요?”
“상자 여는 거요, 보증금 받는 거요?”
“둘 다요.”
“상자는 오늘 열고, 돈은…….”
“알아요. 아직 230금화죠.”
태오는 머리를 긁적였다.
“당신도 외웠네요.”
“데이트할 때도 들으니까요.”
“그 얘긴 앞으로 줄이겠습니다.”
“줄이진 말고 저녁밥 먹을 땐 쉬어요.”
그녀는 그의 소매를 정리해 주었다. 서류보다 따뜻한 손길이었다.
***
창고 안은 평소보다 조용했다.
수장함 앞에는 보존기관의 증인 둘, 감정인, 세딘, 마르셀, 토른이 정해진 위치에 섰다. 이벨은 기록 차폐 절차를 점검했다. 청산 관리인단의 대표는 분리된 참관 구역에서 서명했고, 발카스 측의 바렌은 창고 관리 기록과 임대 계약에 관한 부분만 확인할 권한으로 참석했다.
브라운에게는 보존기관의 설명에 대한 의견을 제출할 자리가 마련됐다. 그의 소유자 대리권은 여전히 검증되지 않았기에 상자나 원본을 만질 권리는 없었다.
브라운은 태오를 보며 웃었다.
“오늘은 오래 기다린 날이군요.”
“저는 제 전세금을 더 오래 기다렸습니다.”
“그 돈이 여기 들어 있지 않다면 실망하시겠어요?”
“여긴 기록물 보관함이라는 표시가 있습니다.”
“이제는 그 정도를 구분하시는군요.”
“학습비가 비쌌습니다.”
브라운은 더 말하지 않았다.
토른은 장갑을 끼고 상자 아래에 얇은 받침을 댔다. 금속이 뒤틀리면 표면의 봉인선부터 기록이 달라질 수 있었다. 마법 감정인이 외부 봉랍을 빛으로 비췄다. 보존인들이 그림을 그려 위치를 기록한 뒤, 허가받은 부분에만 작은 도구를 대었다.
태오는 숨을 삼켰다.
함의 뚜껑이 아주 조금 움직였다.
그 안에서는 금빛도, 붉은 용의 눈도 나타나지 않았다.
그저 오래된 종이 냄새가 났다.
“이럴 줄 알았습니다.” 태오가 속삭였다.
“돈이 아니어서요?” 리네아가 물었다.
“상자에서 냄새까지 서류네요.”
“그래도 이제 찾을 수 있잖아요.”
그녀가 웃었다.
***
품목 검증은 곧바로 시작되지 않았다. 감정인은 안쪽 덮개와 봉인 사이에 얇은 종이가 끼어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겉에 적힌 글자는 훼손되면 복구가 어려울 정도로 바랬다. 세딘은 먼저 그 종이의 위치를 기록하고, 원형을 보존하는 방법으로 분리하도록 했다.
“목록과 별개 물품입니까?” 마르셀이 물었다.
“그건 분리해서 확인해야 알 수 있습니다.”
태오는 이제 답을 예상하고 있었다.
종이를 떼어 보니 '부속 봉인 경위서'라는 제목이 나타났다. 날짜는 원래 수장일보다 삼 년 뒤였다. 태오는 속으로 숫자를 계산했다. 누군가 수장 이후에 함의 외부 봉인을 보수하거나 재검증한 기록을 따로 남겼을 가능성이 있었다.
그러나 경위서의 본문은 보존기관만 읽을 수 있도록 가려졌다. 입회인에게는 제목, 날짜, 매체 종류, 봉인 흔적만 공개됐다.
“나중에 열람 신청이 가능합니까?” 태오가 물었다.
“해당 계약 기록과 연결되는 부분은 심사할 수 있습니다.” 세딘이 답했다.
“그렇군요.”
그는 종이 한 장을 보지 못한 사실이 답답하면서도 이상하게 안심됐다. 누군가 자기 집 주소를 함부로 읽지 못하도록 하는 규칙이 다른 사람에게도 적용되고 있었다.
내부에는 세 묶음이 있었다.
첫 번째는 끈으로 묶인 당직표 묶음.
두 번째는 모서리가 닳은 재발송 장부.
세 번째는 옻칠한 작은 갑이었다.
여기까지는 옛 인수 목록과 맞았다.
그런데 원판 보존갑 아래에 얇은 서류 봉투 하나가 더 놓여 있었다. 봉투에는 번호 대신 희미한 문구가 적혀 있었다.
[추가 경위자료. 수령 확인표 연동.]
태오의 심장이 뛰었다.
“네 번째 물건인가요?”
세딘이 잠시 봉투를 살핀 뒤 말했다.
“목록에 없던 봉투가 존재한다는 사실은 확인할 수 있습니다. 언제 누구의 권한으로 넣었는지는 아직 검증 전입니다.”
토른이 손을 멈췄다.
“그럼 다섯 점인가?”
“경위서는 덮개에 끼워져 있던 부속물이고, 내부는 세 묶음과 봉투 하나입니다. 수량 기록을 나눕니다.”
태오는 수첩에 적었다.
안쪽 덮개 경위서 한 장. 내부 품목 네 종류.
부풀어 오른 기대를 눌렀다. 목록에 없는 봉투가 발견됐다고 해서 곧바로 범죄의 흔적이 되는 것은 아니었다. 추가 이관이나 재봉인 과정에서 정당하게 들어갔을 수도 있었다.
***
당직표 묶음의 바깥쪽 표지에는 '북부 통지대행'이라는 글자가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세딘은 내부 몇 장을 넘겨 보았다. 날짜별 당직자 이름과 대체 근무 표시가 있었지만, 보호할 실명이 포함돼 있어 직접 읽어 줄 수 없다고 했다.
“제4 확인석이라는 직무가 있었습니까?” 마르셀이 물었다.
“있었습니다. 다만 한 사람이 계속 맡은 자리가 아닙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찾는 수령 확인표의 날짜를 대조할 수는 있겠습니까?”
“해당 날짜의 근무 표기 존재 여부부터 확인하겠습니다.”
세딘은 감정인과 함께 장부를 살폈다. 얼마 뒤 그가 표를 가리켰다.
“그날 당직표에는 정규 담당자 한 명과 대체 담당자 한 명의 표기가 있습니다.”
태오는 자세를 고쳐 세웠다.
“그럼 둘 중 한 사람이 서명한 겁니까?”
“아직 모릅니다. 직무를 맡았다는 사실과 실제 서명은 다릅니다.”
태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도 처음보다 한 걸음 더 가까워졌다. 서류에 남은 '제4 확인석'은 이제 유령 같은 이름이 아니라 특정 날짜에 실제로 근무한 사람들이 있던 자리였다.
***
오후의 마지막 작업은 원판 보존갑의 외관 확인이었다. 안쪽에는 유리판 같은 매체가 들어 있는 듯했으나, 별도의 봉인과 사용권 문제가 있어 이번 허가 범위를 넘었다. 감정인은 갑을 봉인된 채 따로 기록했다.
“왜 이것만 못 엽니까?” 태오가 물었다.
“보존갑 내부의 인장 원판은 다른 계약에도 사용할 수 있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이벨이 답했다. “모든 서명과 인증 방식이 노출되면 무관한 사람의 계약도 위험해질 수 있어요.”
“그런 문제도 있군요.”
“그러니 순서가 필요한 겁니다.”
브라운이 그 대목에서 짧게 기침했다.
“그 원판이 특정 계약의 소유자 확인을 위해 보관된 것이라면, 본인이나 대리인의 접근권도 검토해야겠습니다.”
세딘이 말했다.
“그런 주장을 적어 제출하실 수 있습니다. 원판이 어떤 계약에 속하는지는 확인 전입니다.”
태오는 상인의 손을 살폈다. 검은 장갑이 한 번도 벗겨지지 않았다.
그것이 어떤 의미인지는 몰랐다. 그는 그저 브라운이 원판 보존갑에 다른 물건보다 관심을 보였다는 사실만 기록했다.
***
검증이 끝난 뒤, 수장함은 다시 보존기관 봉인 아래 놓였다. 네 번째 봉투와 덮개 경위서 역시 원래 위치와 분리 시각을 기록한 뒤 별도 봉인된 보관함으로 옮겨졌다. 어느 물건도 개인에게 인도되지 않았다.
태오는 예상보다 허탈했다.
“하나쯤은 바로 읽을 줄 알았는데요.”
“아무것도 안 얻은 건 아니잖아요.” 리네아가 말했다.
“그건 그렇죠.”
“목록에 있던 세 가지가 실제로 있다는 걸 확인했고, 없는 줄 알았던 봉투도 찾았고요.”
“읽을 수 있을지도 모르는 당직표도요.”
“맞아요.”
그녀가 그의 어깨에 가볍게 머리를 기댔다.
“오늘은 그만 집에 가요.”
“우리 집이요?”
“아, 그 집주인 문제부터 해결해야겠네요.”
태오는 그녀를 바라봤다.
“보증금 받으면 가장 먼저 계약할 집 조건이 있어요.”
“뭔데요?”
“집주인이 보증금 반환일을 기억하는 사람.”
리네아가 웃었다.
“사람이 아니면요?”
“그럼 기억력이 좋은 종족.”
“저처럼?”
태오는 얼굴이 달아올랐다.
“당신은 중개인이잖아요.”
“그러니까 계약서 잘 쓰겠죠.”
그녀는 능청스럽게 눈을 깜빡였다. 태오는 서류를 들고 있는 양손이 바빠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안 그랬으면 그녀의 손부터 잡았을 테니까.
***
품목 검증 보고서에 서명하기 직전, 청산 관리인단 대표가 한 가지 질문을 했다.
“이 상자 안에 원판이 있다는 목록은 확인했지만, 원판의 복제품이 밖에 돌아다니는지까지 알 수 있나요?”
세딘은 고개를 저었다.
“이번 절차는 수장함 내부 품목 확인에 한정됩니다. 복제 여부를 판단하려면 별도 제작·사용 기록을 확인해야 합니다.”
“그럼 누군가 원판 견본으로 새로운 문서를 만들었을 수도 있겠군요.”
태오는 그 말을 듣고 긴장했다. 하지만 세딘이 바로 덧붙였다.
“가능성을 떠올리는 것과 그런 일이 실제 있었다고 입증하는 것은 다릅니다.”
관리인단 대표도 고개를 끄덕였다.
이벨은 원판의 사용 기록을 보존해 달라는 별도 신청을 접수했다. 인장의 모양을 외부에 공개하자는 게 아니었다. 일정 기간에 어떤 부서가 해당 유형의 인장을 사용할 권한을 가졌는지 확인해 달라는 내용이었다.
“인장의 사용 권한만 확인해도 도움이 될까요?” 태오가 물었다.
“어떤 문서가 어떤 업무 범위 안에서 작성될 수 있었는지 가늠할 수 있겠죠. 그러나 도장을 찍은 실제 사람을 단정하는 근거는 아닙니다.”
태오는 수첩에 적었다. 업무 권한, 근무 여부, 실제 행위. 서로 다른 세 칸이었다.
옆에서 리네아가 말했다.
“이제 당신 수첩은 작은 기록소 같아요.”
“나중에 입장료를 받을까요?”
“기록소라면 무료 열람일 수도 있죠.”
“제 전세금 얘기만 빼면 무료로 하겠습니다.”
리네아가 미소 지었다.
그때 창고 바깥에서 작은 실랑이가 들렸다. 한 기자가 상자 속에 '왕국의 숨겨진 금화'가 있다는 소문을 들었다며 들어오려 했다. 창고 보관인은 아직 내부 품목도 공개되지 않았다며 막았다.
태오는 문 앞으로 가서 설명했다.
“자료 보존용 상자입니다. 오늘 확인한 건 종이 묶음과 보존갑 같은 물건들이에요.”
“그럼 황금은 없습니까?”
“금화가 들어 있다는 증거는 확인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쓰면 재미없는데요.”
“그래도 사실대로 써 주세요.”
기자는 아쉬운 얼굴로 돌아갔다.
태오는 자신의 돈이 걸린 사건이 남의 구경거리가 되는 일이 익숙해졌지만, 여전히 기분 좋지는 않았다. 그러나 정확히 알려야 할 내용은 알리고, 보호해야 할 내용은 남겨 두는 일도 사건을 해결하는 한 부분이라고 생각했다.
***
해가 진 뒤 세딘에게서 임시 보고서가 도착했다.
[당직표 해당 날짜에 정규·대체 근무 표기 모두 존재. 실명과 개별 행위는 보호 심사 중. 수장함 내부에서 수령 확인표 연동 봉투 1건 추가 발견. 봉투의 적법한 편철 시점·연동 대상은 미확인.]
그 아래에는 작은 부속 문장이 있었다.
[주의: 수령 확인과 지급 승인은 동일 행위가 아님.]
태오는 그 문장을 두 번 읽었다.
서류를 받았다는 사람과 돈을 지급하라고 승인한 사람은 다를 수 있었다. 누군가 무엇을 받았다고 확인한 것이 곧 돈을 빼갔다는 뜻도 아니었다.
그는 수첩에 선을 세 개 그었다.
받음. 확인함. 지급함.
세 단어 사이의 간격이 오늘 처음보다 멀어 보였다.
그리고 사건의 중심에는 아직 열지 못한 작은 봉투가 하나 남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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