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철제 함은 겉모습만으로도 사람을 지치게 했다.
김태오는 제4 보전 통로 수장함을 바라보다가, 이것을 만든 드워프에게 진지하게 물었다.
“이 상자에 손잡이를 네 개나 달아 놓은 이유가 뭡니까?”
토른이 수염을 쓸었다.
“네 사람이 들라고.”
“그럼 네 사람이 들면 열리는 겁니까?”
“그건 아니지.”
“아무 쓸모가 없는 질문이었군요.”
“좋은 질문이었어. 네가 이제 힘으로 해결할 수 있는 일과 없는 일을 구분하니까.”
토른이 무심하게 답했다.
오늘은 함을 여는 날이 아니었다. 봉인선과 외관의 제작 이력을 확인하는 날이었다. 그러나 기록관 세딘은 아침부터 창고 주변을 비우라고 요청했고, 두 명의 마법 감정인이 입회했다.
마르셀은 태오가 참여하는 이유를 명확히 적었다. 태오는 계정 47의 계약 당사자로서 보존 요청과 절차 참관을 할 수 있었지만, 함을 만지거나 내부를 촬영할 수는 없었다.
“촬영할 수 없으면 어떻게 기록합니까?”
“공인 감정인이 봉인 흔적과 제작번호를 기록하고, 이해관계자는 그 보고서의 해당 부분에 이의를 낼 수 있습니다.”
태오는 손을 내렸다.
“그럼 저는 눈으로 보기만 하겠습니다.”
“그것도 정해진 위치에서요.”
“네.”
그가 바닥에 그어진 분필선 뒤로 서자 리네아가 옆에서 작게 속삭였다.
“아주 모범적인 피조사자네요.”
“입장료 받는 구경꾼이 된 기분입니다.”
“구경값은 나중에 제가 차 한 잔으로 드릴게요.”
“그럼 두 잔이요. 이 과정이 오래 걸리니까.”
그녀가 참지 못하고 웃었다.
***
감정인은 상자 뚜껑을 열지 않은 상태에서 금속 표면의 세 고리 표식부터 관찰했다. 손잡이 아래에는 제작번호와 다른 각도로 새긴 작은 점 다섯 개가 보였다.
“드워프 작업장 표식입니까?” 태오가 물었다.
토른은 고개를 저었다.
“작업장 표식은 아니야. 보관 과정에서 찍는 검수점일 수도 있어.”
“그럼 누가 찍었습니까?”
“그걸 확인하려면 당시 인수 장부와 맞춰야지.”
태오는 더 묻지 않았다.
감정인은 마법 렌즈를 표면에 대고 봉인선의 굴곡을 측정했다. 낡은 은색 봉랍 위에 회색 물질이 희미하게 겹쳐 있었다. 두 종류의 봉인 재료는 생성된 시기가 달라 보였지만, 어느 쪽이 먼저였는지는 파괴 없는 관찰만으로 확정하기 어렵다고 했다.
“누군가 한 번 열었다는 뜻입니까?”
브라운 상회 측으로 보이는 참관인이 물었다.
“그렇게 단정할 수 없습니다.” 감정인이 답했다. “장기 보관 중 보수한 흔적일 수도 있고, 운송할 때 덧댄 보호층일 수도 있습니다.”
“그럼 왜 검증합니까?”
세딘이 조용히 말했다.
“단정하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태오는 그 대답을 마음속으로 따라 했다. 자신도 얼마 전까지 이상한 흔적만 보면 누가 돈을 빼돌렸을 거라고 생각했다. 이제는 모든 검은 자국이 범죄의 증거가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배웠다.
감정인이 작성한 외관 목록에는 '이중 재료 추정'이라고만 적혔다. 봉인 훼손이나 재개봉의 확정이라는 문구는 없었다.
***
점심을 앞두고 뜻밖의 방문자가 나타났다. 옛 청산 관리인단의 대표가 직접 왔다. 마른 체구의 중년 여인이었는데, 문 앞에서 두툼한 장부를 꺼내 보이며 말했다.
“우리는 이 함을 가져가 달라고 신청한 적이 없습니다.”
브라운은 반대쪽 복도에 서 있었다. 그는 이미 제출된 관리인단 명의 서류가 자신과 무관하다고 말했다. 두 주장이 동시에 사실일 수도 있었으나, 그렇다고 접수 서류의 진위가 해결되지는 않았다.
이벨이 접수일과 서명란을 대조했다.
“이 문서에 찍힌 단체 표식은 관리인단이 과거 사용한 모양과 유사합니다. 다만 그것만으로 현 대표가 승인한 문서라고 볼 수는 없습니다.”
“현 대표라면 제가 책임을 지겠어요.” 여인이 말했다. “우리가 관리하는 건 청산 후 남은 계약 기록이지, 누구에게서든 금고를 빼앗아 오는 일이 아닙니다.”
태오가 물었다.
“그럼 수장함 안에 있는 기록이 관리인단 것인지도 모르시는 겁니까?”
“보존 책임의 일부가 우리에게 넘어왔을 수는 있어요. 하지만 물건 자체의 소유권과 그 안의 개인정보를 열람할 권리는 다릅니다.”
그 말이 태오에게는 낯익었다.
고대 드래곤에게 전세금을 받아내려고 시작한 일이 이제는 누구에게 어떤 서류를 보여 줄 수 있는지를 확인하는 사건이 됐다. 괴물이 그를 잡아먹는 대신 서류가 매일 조금씩 시간을 먹고 있었다.
토른은 일행을 창고 밖으로 불러냈다.
“그 관리인단 표식 말인데, 옛 도면에는 없었어.”
“그게 이상한가요?”
“이 함을 만들었을 당시에는 청산 관리인단이 존재하지 않았으니까.”
태오는 눈을 크게 떴다.
“그럼 훗날 찍힌 인장이라는 뜻인가요?”
“아마. 그렇다고 누가 사칭했다는 증거는 아니야. 조직이 만들어진 뒤 재등록했을 수도 있으니까.”
“또 한 장이 필요하겠네요.”
“그래. 인장 등록 변경 이력.”
태오는 수첩에 적었다. 사람들은 이세계에 마법이 있으면 모든 게 쉬워질 거라고 생각하겠지만, 그는 이곳에서 오히려 마법 때문에 도장이 하나 더 늘어난다고 확신했다.
***
오후 검증 과정에서 봉인 아래쪽의 작은 번호가 발견됐다.
[47-4 / 보관물 구분: 자료류.]
태오는 숨을 삼켰다.
“돈이 아니라 자료라는 뜻입니까?”
세딘이 답했다.
“외관 표시는 그렇습니다. 다만 내부가 실제로 그 표시에 맞는지 확인하기 전까지 단정하지 마세요.”
“네. 알고 있습니다.”
그는 이제 그 말에 짜증을 내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수장함 자체가 공동 금고의 현금 보관함과는 다른 종류의 물건일 가능성이 높아졌다는 사실이었다. 그렇다면 누군가 이 상자를 가져가려고 한 이유도 안의 돈 때문이 아니라 안의 기록 때문일 수 있었다.
물론 다른 설명도 가능했다. 옛 기록 자체가 유산일 수도 있고, 청산 절차상 보존 의무 때문에 분쟁이 일어났을 수도 있었다.
태오는 브라운을 돌아봤다. 상인은 두 번째 봉랍 층의 사진을 보던 참이었다. 회색 장갑 수행원이 작은 수첩을 내밀었으나 브라운은 고개를 저으며 받아 적지 않았다.
그 행동만으로 숨기는 일이 있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태오는 대신 수행원의 가슴에 달린 금속 표식이 보관증 번호와 비슷한 형태라는 사실만 기억해 두었다.
***
검증이 끝나자 세딘이 일행에게 설명했다.
“외관 상태와 품목 구분까지 기록됐습니다. 내부 목록 확인은 별도로 허가받아야 합니다. 보호해야 할 주소와 서명 정보가 있을 가능성이 큽니다.”
“언제 신청합니까?” 태오가 물었다.
“오늘 감정 결과를 붙여 신청합니다.”
“허가에 얼마나 걸립니까?”
“기한을 예측하기 어렵습니다.”
태오는 숨을 길게 내쉬었다. 눈앞에 있는 함은 여전히 닫혀 있었지만, 처음 왔을 때와는 다르게 보였다. 이제 그것은 막연한 비밀 상자가 아니라 품목 구분과 봉인 검증 이력이 남은 기록물이었다.
그때 바렌이 찾아왔다.
“발카스 님께서 새로운 매각 후보를 정했습니다.”
태오의 고개가 번쩍 들렸다.
“얼마나 됩니까?”
“현금화 전입니다. 담보권과 기존 주문 계약을 먼저 걸러야 합니다.”
“그럼 지급액을 말씀하실 단계는 아니군요.”
“네. 하지만 전보다 훨씬 빨리 확인하도록 지시하셨습니다.”
“다른 세입자들도요?”
“각 계약을 나누어 검토 중입니다. 로벤 씨에게는 별도 설명 일정을 잡았습니다.”
태오는 안심하기보다 조심스러워졌다. 계획이 실제 돈으로 바뀌기 전까지는 누군가의 생활을 회복시켜 주지 못했다. 그러나 창고 물품 40금화를 지급한 전례가 있으니 전혀 불가능한 이야기도 아니었다.
“확인할 서류는 내일 주십시오.”
“선생이 그럴 줄 알았습니다.”
바렌이 피곤한 미소를 지었다.
***
봉인 재료의 색을 설명하던 감정인은 태오에게 오래된 그림 한 장을 보여 줬다. 그림에는 수장함과 비슷한 구조의 상자에 봉인선을 덧대는 모습이 그려져 있었다.
“왜 이걸 보여 주시는 겁니까?”
“보호 봉랍을 추가하는 행위 자체가 이례적이지 않았다는 설명입니다. 이중 봉인이라는 사실만으로 재개봉이라고 주장하지 않도록요.”
태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반대로 재개봉된 적이 없었다는 증거도 아니겠네요.”
“그렇습니다. 지금은 외관 흔적만 관찰한 겁니다.”
감정인은 당시 창고 보관 절차에서 봉인 보수 시 책임자와 목격인이 함께 서명하도록 했다는 규정도 보여 줬다. 문제는 수장함의 이번 이중 봉인이 정확히 그 규정에 따라 생겼는지 확인할 자료가 아직 없다는 것이었다.
“보수 기록을 찾으면 날짜를 알 수 있습니까?”
“해당 함의 제작번호와 연결된 문서라면 도움이 되겠지요.”
토른이 장부의 사진을 살폈다.
“함 바닥에 새긴 점 다섯 개가 공방 번호와는 다른데, 보수 담당자가 사용한 검수 표식일 수도 있겠어.”
“그럴 가능성이 있다는 말이군요.” 태오가 말했다.
“잘 배웠다.”
드워프의 목소리에 웃음기가 섞였다.
이벨은 현장 검증 보고서에 봉인의 상태와 그 상태에서 할 수 없는 결론을 함께 쓰도록 요청했다. 같은 사건을 조사할 후임자가 몇 년 뒤에 오더라도, 오늘 사람들이 보지 못한 것을 본 것처럼 읽어서는 안 된다는 이유였다.
태오는 그 말을 듣고 불현듯 자신이 받은 첫 번째 전세금 30금화를 떠올렸다. 당시 지급 확인서가 없었다면 사람들은 몇 달 뒤 그 돈이 보증금의 일부였는지 위로금이었는지 다투었을 수도 있었다.
“서류에는 쓰지 못한 사실을 쓸 수 없군요.”
“반대로 쓴 사실은 나중에 다시 확인할 수 있죠.” 이벨이 답했다.
마르셀은 작은 종이를 건넸다. 새 자료를 찾기 위한 요청 목록이었다. 봉인 보수 작업대장, 검수 표식 등록부, 관리인단 설립 후 인장 변경 기록이 따로 적혀 있었다.
태오는 문서를 받아 들었다.
“이 목록은 누가 관리합니까?”
“각 기관에 공식 조회를 보낼 예정입니다.”
“또 제가 직접 찾아가야 합니까?”
“이번에는 저희가 발송합니다.”
태오는 두 손을 모았다.
“오늘 가장 좋은 소식입니다.”
리네아가 옆에서 웃었다. 태오에게는 복잡한 사건의 진실만큼이나, 자신의 발품을 조금 줄여 주는 일이 중요했다.
***
저녁 무렵 리네아는 길드 사무실에 들러야 했다. 과거 중개 당시의 고지 의무와 관련된 감독 확인서를 제출하는 날이었다. 태오는 건물 밖에서 그녀를 기다렸다.
“함께 들어가 주지 않아도 괜찮아요.” 리네아가 말했다.
“같이 들어갈 생각은 없었습니다.”
“그래요?”
“당신 직업 문제니까요. 저는 밖에서 밥집만 고르고 있겠습니다.”
“좋아요. 대신 제가 나오면 한마디 해 주세요.”
“뭐라고요?”
“오늘도 잘했다고.”
태오는 그녀의 눈을 봤다.
“잘하고 있어요. 아직 다 끝나지 않았다는 것도 알고요.”
리네아는 잠깐 멈칫하더니 그에게 다가와 가볍게 안겼다. 차가운 길드 건물 벽 옆에서 엘프의 머리카락에서 희미한 풀 향기가 났다.
“이런 보상은 좋네요.” 태오가 작게 말했다.
“서류 제출에 따른 보상금이에요.”
“제 이름으로 신청해도 됩니까?”
“당사자만 가능합니다.”
그녀는 웃으며 안으로 들어갔다.
태오는 사람 없는 골목에서 혼자 웃었다. 여태까지 받지 못한 돈이 230금화였지만, 잃고 싶지 않은 사람이 생겼다는 사실은 그 숫자와는 다른 무게로 다가왔다.
***
밤에 마르셀로부터 새 전달이 도착했다.
외관 검증 때 발견된 '자료류' 표시의 제작 당시 등록 원본이 확인됐다. 본래 품목은 세 종류로 적혀 있었다.
첫째, 당직표 묶음.
둘째, 통지 재발송 장부.
셋째, 원판 보존갑.
그러나 등록 원본 아래에는 작은 빈칸 하나가 남아 있었다. 후일 '추가 봉인 물품'을 적도록 만든 칸이었다. 지금은 글씨가 지워져 정확히 읽을 수 없었다.
마르셀은 사진만으로 복원할 수 없다며 원본 보존 신청을 준비했다.
태오는 그 빈칸을 오래 보았다.
무엇이 추가됐는지 아직 알 수 없었다. 안에 정말 네 번째 물건이 있다는 보장도 없었다. 그래도 누군가 나중에 무엇인가를 따로 기록하려 했다는 사실은 확인할 가치가 있었다.
그가 수첩에 마지막 문장을 적을 때 전달석이 한 번 더 울렸다.
[왕실 기록보존국: 수장함 내부 품목 목록 확인에 관한 조건부 허가 심사 개시. 입회 명단 및 개인정보 차폐 계획 제출 요청.]
태오는 종이를 접었다.
문은 여전히 닫혀 있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문고리를 만져 볼 수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 그 사람의 이름을 적으라는 통지가 온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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