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국의 보물창고 문을 여는 데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묻는다면, 김태오는 이제 대답할 수 있었다.
열쇠도 아니고 주문도 아니었다.
신청서 세 장과 이해관계자 명단 한 장, 입회인 동의서 두 장, 그리고 '함부로 열지 않겠습니다'라는 취지의 확인서였다.
그것들을 모두 준비하고도 문이 열리는 것은 아니었다.
“이건 상자를 열기 위한 신청서가 아닙니다.”
마르셀 등록관이 말했다.
“그럼 뭡니까?”
“상자를 열어도 되는지 판단해 달라는 신청서를 접수하기 위한 사전 협의서입니다.”
태오는 잠시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집주인님이 불을 뿜는 이유를 알 것 같습니다.”
리네아가 옆에서 웃음을 참았다.
“발카스 님은 이런 서류를 읽지 않아서 불을 뿜으시는 걸지도 몰라요.”
“읽으면 더 뿜으실 것 같은데요.”
두 사람 앞에는 동쪽 창고의 제4 보전 통로 수장함에 관한 검증 신청서가 놓여 있었다. 일곱 해 전 수장 목록에는 제4 확인석 당직표와 통지 재발송 대장, 인장 원판 보존갑이 기록돼 있었다. 수장 전날 발급된 수령 확인표는 계정 47의 계약번호를 가리켰다.
그것이 확인된 사실의 전부였다.
함 안에 지금도 목록 그대로 물건이 들어 있는지, 누구의 서명이 있는지, 심지어 봉인이 온전한지도 현장 검증을 해 봐야 알 수 있었다.
“이해관계자가 몇 명입니까?” 마르셀이 물었다.
태오는 손가락을 접었다.
“수장함을 보관하는 창고 측, 옛 조합 청산 관리인단, 발카스 측, 브라운 금고상회…….”
“모두 같은 종류의 권리는 아닙니다.” 이벨 자문관이 끊었다. “보관자와 소유권 주장자와 자료 열람 신청인을 한 줄에 쓰면 안 됩니다.”
“네. 분리하겠습니다.”
태오는 자기 이름도 적으려다 펜을 멈췄다.
“저는 어디에 들어갑니까?”
“계정 47과 연관된 계약 당사자입니다. 따라서 해당 계약의 기록 보존과 필요한 범위의 확인을 요청할 이유는 있지만, 수장함 전체 내용물을 가져갈 권리가 생기는 건 아닙니다.”
“또 조회와 소유권은 다르군요.”
“아주 다릅니다.”
태오는 자기 소지품인 47-B 비늘을 주머니 안에서 만져 보았다. 반년 전만 해도 드래곤의 비늘이면 무엇이든 열 수 있을 줄 알았다. 이제 그 비늘이 증명하는 것은 조회 요청의 경로 하나라는 사실을 알았다.
인생은 원래 기대와 실물이 다른 법이었다. 특히 이세계의 보증금 관련 물건은 더욱 그랬다.
***
동쪽 창고는 아침부터 소란스러웠다.
철제 표식함 앞에는 왕실 기록보존관 세딘과 파벨시 보관인, 드워프 토른이 모여 있었다. 두 명의 경비가 창고 문을 지켰다. 함의 외부를 검증하기 위한 자리이지 아직 뚜껑을 열기 위한 자리는 아니었다.
“안쪽의 공기 압력이 그대로라면 봉인선이 미세하게 움직일 수 있어요.” 토른이 말했다. “억지로 떼면 나중에 누가 손댔는지 확인할 방법도 잃죠.”
태오는 무거운 상자를 바라봤다.
“저 정도면 드래곤도 못 열겠죠?”
“드래곤이 힘으로 열면 함은 열리겠지.”
“그럼 왜…….”
“내용물을 증거로 쓰기 어려워질 거야.”
토른이 태오를 흘겨보았다.
“네가 원하는 건 부서진 철판이냐, 읽을 수 있는 문서냐?”
“문서입니다.”
“그럼 손을 주머니에 넣고 가만히 있어.”
태오는 두 손을 주머니 깊이 넣었다.
바로 그때 창고 문이 열리고 브라운이 들어왔다. 그는 검정 외투에 손때 하나 없는 장갑을 끼고 있었다. 뒤에는 회색 장갑을 낀 젊은 수행원이 서 있었다.
“보존기관의 검증이 이루어진다기에 왔습니다.”
세딘이 입회 명부를 펼쳤다.
“상회에서는 어떤 자격으로 참석하십니까?”
“수장함 원소유자의 대리인으로서요.”
“그 대리권은 아직 원본 대조가 끝나지 않았습니다.”
브라운의 미소가 얇아졌다.
“그러니 입회가 필요한 것 아닙니까?”
“입회할 수 있는지부터 구분해야 합니다. 보관 현황에 대한 의견서는 접수할 수 있습니다.”
태오는 브라운이 잠시 자신을 쳐다보는 것을 느꼈다. 상대는 태오보다 훨씬 능숙하게 표정을 관리하는 사람이었다.
“김태오 씨. 당신이 이 일을 얼마나 오래 끌고 있는지 압니다. 우리가 대신 처리하면 빠를 텐데요.”
“빠른 처리와 정당한 처리가 같으면 좋겠습니다.”
“언제부터 그렇게 까다로워졌습니까?”
“300금화를 맡긴 날부터였어야 했죠.”
리네아가 옆에서 작은 기침을 했다. 웃음이 새어 나올 뻔했다는 표정이었다.
세딘은 검증 신청서에 참석자들의 실제 신분과 각자의 주장 근거를 따로 적었다. 브라운은 소유자 대리권을 확정받지 못했지만, 자신이 보유한 운송 계약 사본의 보존을 요구하는 의견서를 제출했다. 세딘은 이를 받아 원본 검증과 별개의 부속 자료로 봉인했다.
“의견을 받는다고 해서 소유권을 인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 말은 여러 번 들었습니다.” 브라운이 말했다.
“그렇다면 기록에도 남기겠습니다.”
태오는 세딘이 마음에 들기 시작했다.
***
점심 무렵, 리네아와 태오는 골목의 작은 식당으로 피신했다. 그는 창고에서 두 시간 동안 서 있었지만, 확인된 것은 수장함 손잡이의 제작번호와 봉인선의 일부 도색 상태뿐이었다.
“공복에 증거를 보면 종이까지 먹을 것 같아요.” 태오가 말했다.
“종이는 씹기 어려워요. 이 빵부터 드세요.”
리네아가 빵을 그의 접시에 반쯤 나누어 주었다.
“아니, 제가 더 큰 쪽을 받았네요.”
“오늘은 고생했으니까요.”
“그럼 내일도 고생해도 되나요?”
“그건 제가 허락할 일이 아니죠.”
태오가 웃었다. 리네아는 그의 손등을 손가락으로 두 번 두드렸다.
“어젯밤엔 잠은 잤어요?”
“네. 세 시간 정도.”
“그건 잤다고 하는 게 아니라 잠깐 의식을 잃은 거예요.”
“세 시간 동안 제 돈을 잊었으니 건강에 좋았습니다.”
그녀는 한숨을 쉬더니 몸을 조금 기울였다.
“태오 씨가 언제부터 남의 일까지 다 짊어지게 됐는지는 몰라도, 혼자만 버티려고 하지 마요.”
태오는 잠깐 대답을 고르다가 그녀의 손을 잡았다.
“당신이 있어서 버티는 건데요.”
리네아가 눈을 깜빡였다.
“그런 말은 왜 갑자기 해요?”
“평소에 해 두면 중요한 순간에도 믿어 줄 것 같아서요.”
“이렇게 진지하게 말하면 반칙이에요.”
그녀가 고개를 숙이고 웃었다. 태오는 괜히 물컵을 들었다. 키스보다 더 어려운 것은 상대가 먼저 수줍어할 때 무슨 말을 해야 하는지 결정하는 일이었다.
결국 리네아가 먼저 말했다.
“그런데 다음엔 여관 대신 제대로 된 집에서 데이트해요.”
“집주인이 드래곤이 아닌 집으로요.”
“우선 계약서에 종족부터 확인하죠.”
둘은 동시에 웃었다.
***
오후에는 별도의 회의가 잡혔다. 창고 보관인은 함을 개봉한 뒤 기록물의 소유권을 놓고 분쟁이 생길 경우 자신에게 책임이 돌아올까 봐 걱정했다. 옛 청산 관리인단은 공식적으로 입회할 사람을 지정하겠다고 했지만, 브라운 측이 먼저 제출한 관리인단 명의 신청서는 자신들의 것이 아니라는 종전 입장을 유지했다.
“그럼 같은 이름으로 신청서가 둘인 겁니까?” 태오가 물었다.
“접수된 문서가 둘이 아니라, 관리인단이 제출하지 않았다는 주장과 관리인단 명의로 접수된 문서가 충돌하는 겁니다.” 이벨이 정정했다.
“또 다르군요.”
“그렇습니다. 위조라고 결론 내릴 단계도 아닙니다.”
태오는 이곳에서 배운 가장 유용한 표현을 떠올렸다.
아직 모른다.
처음에는 답답했지만, 그 말 덕분에 죄 없는 사람에게 누명을 씌우지 않을 수 있었다. 자신이 억울하게 보증금을 돌려받지 못한 만큼 다른 사람에게 함부로 억울한 일을 만들고 싶지는 않았다.
마르셀은 보존기관이 단독으로 진행할 수 있는 외관 검증과, 입회하에 진행해야 하는 내부 목록 확인을 나눴다. 내용물의 모든 이름을 공개하는 방식이 아니라 개봉 시각과 봉인 상태, 품목 종류, 원본 수량을 먼저 기록하고 관련성이 확인된 부분만 제한 열람하는 절차가 제안됐다.
“다른 세입자들의 주소가 들어 있으면 어떻게 합니까?” 소피가 물었다.
“허가받지 않은 사람에게 공개되지 않도록 별도 보호 목록을 작성합니다.” 세딘이 답했다.
“브라운 상회에서도 볼 수 있습니까?”
“그 부분은 대리권과 열람 사유 확인 후 별도로 판단합니다.”
소피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며칠 전 그녀에게 연락 및 지급 권리를 함께 위임하라는 서류가 건네졌던 일을 태오는 알고 있었다. 그녀는 서명하지 않았지만, 그 양식이 다른 사람들에게도 갔는지는 아직 확인되지 않았다.
“제가 받은 신청서를 여기 놓아도 될까요?” 소피가 물었다.
“원본 보관자가 누구인지 적고 사본 제출 여부부터 결정합시다.”
태오는 이벨의 대답이 느리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사람마다 지키려는 생활이 있었고, 기록은 그 생활과 연결돼 있었다.
***
오후 협의를 마치기 전에 마르셀은 한 가지 조건을 더 제안했다. 수장함을 열 때 확인되는 원본의 수량이 옛 목록과 다르더라도 그 자리에서 특정 신청인의 소유라고 기재하지 말자는 것이었다.
“그렇게까지 적어야 합니까?” 창고 보관인이 물었다.
“인수 목록은 물건의 소재를 확인한 기록입니다. 소유권 장부와 다를 수 있습니다.”
이벨도 동의했다. 어떤 종이가 상자에서 나왔다고 해서 곧바로 그 종이에 등장하는 사람에게 상자를 넘길 수는 없었다. 반대로 보관자가 오래 가지고 있었다고 그 사람 소유가 되는 것도 아니었다.
브라운은 손가락으로 책상을 두드렸다.
“그럼 정당한 소유자가 와도 이렇게 확인만 반복할 겁니까?”
“대리권이나 소유권을 확인할 자료를 제출하면 별도로 심사합니다.” 마르셀이 답했다.
“고객은 노쇠했습니다.”
태오는 그 말을 듣고 물었다.
“그 고객분이 직접 의사를 밝히기 어려우시면, 위임 범위를 확인하는 안전한 절차부터 정할 수 있을까요?”
“왜 당신이 그분 일을 걱정합니까?”
“저는 다른 사람이 제 돈을 대신 받아 갈까 봐 걱정해 본 적이 있습니다. 그분도 그럴 수 있잖아요.”
브라운은 짧게 입술을 다물었다. 그의 고객이 실제로 누구인지, 어떤 상태인지, 위임 의사가 있는지는 아직 제출된 검증 자료가 없었다.
그때 청산 관리인단의 대표가 조용히 말했다.
“우리도 분실된 문서가 더 있을까 봐 걱정입니다. 그러나 잘못된 사람에게 기록을 내주는 것도 잃어버리는 것과 다르지 않죠.”
태오는 고개를 끄덕였다. 서로 다른 사람의 이해관계가 완전히 같을 수는 없었다. 그럼에도 최소한 원본이 훼손되지 않아야 한다는 목표만큼은 함께 세울 수 있었다.
마르셀은 입회인별로 개봉 결과를 공개할 범위를 정리했다. 함의 외부 구조와 품목 수량은 참석자에게 공통으로 알리고, 계약번호가 연결된 자료는 해당 계약 당사자별로 분리해 판단하며, 주소와 인장 원판은 별도 보호 절차를 밟는 방식이었다.
“이제 정말 신청할 수 있습니까?” 태오가 물었다.
“필요한 준비사항은 갖췄습니다.”
태오는 조심스럽게 웃었다. '신청할 수 있다'는 말이 이렇게 반가울 줄 몰랐다.
***
해 질 무렵 발카스가 보낸 검은 봉투가 도착했다. 안에는 계정 47 관련 옛 접수 확인서의 사본과 짧은 메모가 들어 있었다.
[내 원본은 검은 산맥 서고에서 따로 보존 중이다. 이번 자료는 대조용 사본으로만 사용해라.]
태오는 봉투의 인장과 함께 발카스의 글씨를 살폈다.
“드래곤이 사본과 원본을 구분하다니.”
바렌이 무표정하게 말했다.
“요즘은 그렇게 하십니다. 선생 때문에요.”
“제가 좋은 영향을 끼쳤군요.”
“그렇다고 생각하시는군요.”
바렌은 옆에 작은 쪽지를 하나 더 놓았다. 다음 매각 후보 자산의 감정이 늦어지고 있었지만, 일정과 담보 여부를 확인할 보고서가 정해진 날 제출될 예정이라는 내용이었다.
“잔금은 아직 이백삼십 금화입니다.” 바렌이 먼저 말했다.
태오는 가방에서 수첩을 꺼내려다 멈췄다.
“저보다 먼저 말씀하시네요.”
“매일 들으니 외웠습니다.”
“안 잊어 주셔서 고맙습니다.”
바렌은 입가를 아주 조금 올렸다.
회의가 끝난 뒤 태오는 발카스의 사본에서 한 줄을 발견했다. 오래된 접수 확인서 아래에 필기로 남겨진 문구였다.
[제4 확인석 접수. 사본과 원판은 분리 보존할 것.]
태오는 그 말의 의미를 선뜻 알 수 없었다. 사본은 무엇의 사본이고, 원판은 무엇을 가리키는가. 한 가지는 분명했다. 수장함을 열어도 모든 것이 한꺼번에 나오리라는 보장은 없었다.
그는 마르셀에게 종이를 보여 주었다.
“분리 보존이라고 되어 있네요.”
“그렇다면 두 보관 위치를 대조해야 할 수 있겠군요.”
“한 상자만 열면 끝날 줄 알았는데요.”
“기대하신 건 압니다.”
마르셀은 한숨을 쉬는 태오에게 서류 한 장을 건넸다.
[내부 품목 종류 및 수량 검증 신청 접수 완료. 이해관계자 의견 청취 예정.]
아직 허가는 아니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신청서가 실제로 접수됐다.
태오는 그 종이를 차곡차곡 접어 수첩 속에 넣었다. 절차가 느릴 때도, 누군가 그것을 멈추게 하지 못하도록 기록을 남기는 일은 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가 가진 47-B 비늘에는 여전히 어떤 금화도 들어 있지 않았다.
그건 변하지 않는 사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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