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오는 이세계에 와서 가장 무서운 것이 드래곤이라고 생각했다.
그다음은 계약서였고, 그다음은 금고였다.
그런데 지금은 서명이 가장 무서웠다.
이름을 하나 확인하기 위해 파벨시 공무원 셋, 왕실 기록관 둘, 드워프 장인 하나, 엘프 중개인 하나, 법률자문관 하나가 서로 다른 종이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정작 그 이름을 남긴 사람이 누구인지는 아무도 몰랐다.
“그냥 이름을 물어보면 안 됩니까?”
태오가 말했다.
마르셀이 대답했다.
“물어볼 대상을 특정하려고 이 일을 하고 있습니다.”
“그렇군요.”
“이제 이해하셨습니까?”
“네. 그럼 오늘 점심은 제가 살게요.”
“왜 갑자기요?”
“이해했다는 말이 거짓말이 되기 전에 분위기를 바꿔 보려고요.”
이벨이 웃었고, 리네아는 그를 향해 눈을 흘겼다.
“점심 사면 또 돈 걱정할 거잖아요.”
“그건 식사가 끝난 다음에 하겠습니다.”
***
왕실 외부 통지대행 부서의 옛 규칙이 일부 공개됐다. 돈을 맡긴 사람, 돈을 받을 사람, 지급 사실을 통지받을 사람은 같은 이름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었다. 그래서 접수 서류에 실제 사람의 이름 대신 ‘대리 확인명’을 사용한 경우가 있었다.
“대리 확인명은 개인의 별명이 아닙니다.”
세딘 기록관이 설명했다.
“어떤 직무자가 해당 절차를 확인했는지를 추적하기 위한 표기입니다. 기록을 관리한 부서와 그날 실제 서명한 사람을 분리해 확인해야 합니다.”
태오는 수첩에 선을 그었다.
[부서 이름 ≠ 서명자 이름 ≠ 원금 소유자 이름.]
“이걸 처음부터 알려 주셨으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당시 규칙이 현재와 다릅니다.” 세딘이 말했다.
“이세계 행정은 시대를 앞서가는 듯하면서도 가끔 백 년쯤 뒤로 갑니다.”
세딘은 무슨 뜻인지 몰라 고개만 끄덕였다.
제4 보전 통로 수장함에 관한 확인 절차도 진행 중이었다. 동쪽 창고 보관자는 봉인 상태를 유지했고, 브라운 상회와 관리인단 명의 신청은 원본 위임장 확인 전까지 물건을 가져가지 못했다.
토른은 외관에 찍힌 드워프 제작번호가 예전 통지용 원판 보관함의 규격과 같다고 보고했다. 그러나 내부 내용물은 여전히 미확인이었다.
“열면 되잖아요.” 태오가 말했다가 스스로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열어도 되는 사람을 확인해야죠.”
토른이 만족한 얼굴로 수염을 쓰다듬었다.
“잘 배웠군.”
“덕분에 성격만 나빠졌습니다.”
“그건 원래 그랬어.”
리네아가 웃음을 터뜨렸다.
***
발카스는 이번에도 조정실에 직접 오지 않았다. 대신 바렌이 미지급 원금 230금화에 관한 지급 계획 갱신서를 제출했다. 다음 공개 매각 가능한 자산은 감정 중이었고, 지급 예상일은 아직 확정되지 않았다.
태오는 종이를 읽고 한숨을 쉬었다.
“검토 중이라는 말이 또 나왔네요.”
“이번에는 대상 물품과 감정 마감일이 적혀 있습니다.” 바렌이 말했다.
“그건 좋습니다.”
“많이 달라졌죠?”
“네. 이제는 제가 다음에 무엇을 확인해야 할지 알 수 있으니까요.”
“조금이라도 진전이 있다는 말을 그렇게 어렵게 하십니까?”
“그게 제 역할이죠.”
바렌은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태오는 서류를 가방에 넣으며 생각했다. 드래곤의 돈이 실제로 돌아오는 일과 계정 47의 진실을 밝히는 일은 서로 얽혀 있었지만 동일한 일이 아니었다. 그는 둘 중 하나를 끝내야만 다른 하나를 시작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
오후에 다렌 코르와 다렌 베스가 나란히 조정실 복도를 지나갔다. 지난 몇 주 동안 태오가 가장 조심하려 했던 장면이었다. 두 사람은 이름만 같을 뿐 삶이 달랐다.
“계속 내가 가짜라는 소리를 듣는 기분이오.” 코르가 말했다.
“당신을 가짜라고 확정한 사람은 없습니다.” 태오가 대답했다.
“하지만 아직 확인도 안 됐지.”
“그렇습니다.”
코르는 벽에 기대어 서 있었다.
“그때 내가 왜 그렇게까지 했는지 기억나기 시작하오. 연락받아야 할 사람들이 통지받지 못했기 때문이오.”
“실제 사례를 기억하세요?”
코르는 눈을 감았다.
“한 여인이 있었소. 남편이 죽은 뒤 주소를 옮겼지. 그런데 명단에는 이전 주소로 ‘통지 완료’라고 적혀 있었소.”
“그분 이름은요?”
“잘 모르겠소. 당시 기록에서는 이름이 가려져 있었으니까.”
태오는 허전한 숨을 내쉬었다.
베스가 끼어들었다.
“그 이야기는 들었소. 옛 주소로 간 편지가 다시 돌아왔는데, 누군가가 재발송 승인 도장을 찍었지.”
“둘 다 같은 일을 기억하는 겁니까?”
“아직 단정할 수 없습니다.” 이벨이 말했다. “서로 다른 경험이 비슷한 제도에 관한 것일 수도 있으니까요.”
태오는 더 묻지 않고 두 사람의 진술을 분리해 적었다.
***
왕실에서 답이 오기 전, 태오와 일행은 제4 보전 통로에 관한 신청서 양식을 다시 검토했다. 수장함이 금고처럼 잠겨 있다고 해서 그 내용물이 곧바로 사유 재산이라는 뜻은 아니었다. 만약 내부가 기록물이라면 보존기관이 내용 목록을 확인할 필요가 있었다.
“서류를 열고도 이름을 가려야 할 수도 있습니다.” 마르셀이 말했다.
“그럼 우리가 왜 그걸 찾고 있습니까?” 태오가 물었다.
“열람할 권한과 보존할 필요는 다르니까요.”
이벨은 기록의 무단 공개가 또 다른 피해를 낳을 수 있다고 설명했다. 세입자의 주소가 적혀 있다면 누구나 볼 수 있게 열어 둘 수는 없었다. 원본의 진위를 먼저 확인하고, 각 당사자에게 필요한 범위만 알려 줘야 했다.
태오는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도 낯선 사람이 집 주소를 들여다보는 걸 좋아하지 않았다. 하물며 돈을 받을 권리가 있는 사람들의 주소라면 더 조심해야 했다.
“그럼 내용 목록만 먼저 확인하고, 그다음에 신청인별로 열람을 나누는 겁니까?”
“그런 방향으로 신청할 수 있습니다.”
리네아가 말했다.
“이제 당신도 기록관처럼 말하네요.”
“그만두고 싶어요.”
“왜요?”
“기록관이 되면 제 전세금보다 남의 서류를 더 많이 보게 될 것 같거든요.”
“지금도 그렇잖아요.”
태오는 대답하지 못했다.
***
토른은 두 장의 도면을 맞춰 보았다. 제4 보전 통로에서 동쪽 창고까지의 옛 운반로, 그리고 수장함에 쓰였던 진동 방지 수레의 설계도였다. 도면의 한 모서리에 작게 표시된 숫자가 서로 일치했다.
“제작번호와 운반 장비의 대응이 맞아.”
“그럼 같은 수레로 옮겼다는 뜻인가요?”
“그때 그 장비가 필요하다고 기록한 건 맞아. 실제로 그 수레를 썼는지는 운송 대장과 대조해야 해.”
태오는 의자에 기대었다.
“도대체 확실한 건 언제 나옵니까?”
토른이 웃었다.
“네가 처음부터 확실하다고 했으면 지금 여기까지 못 왔겠지.”
“그건 맞습니다.”
리네아가 서류를 내려놓았다.
“어쩌면 우리가 찾는 답은 한 사람의 이름이 아닐 수도 있어요.”
“무슨 뜻이에요?”
“사람 이름을 직접 남기지 않는 제도라면, 누가 그 자리를 맡았는지 알아내는 절차가 있어야 하잖아요.”
태오는 그녀를 바라봤다.
“당직표요.”
“그럴 수도 있죠.”
“그게 상자 안에 있을 수도 있고요.”
“아직은 가능성이에요.”
태오는 한숨을 쉬다가 웃었다. 리네아에게마저 ‘아직은 가능성’이라는 말을 듣게 되자 자신이 이 세계에 얼마나 익숙해졌는지 알 수 있었다.
***
해가 기울 무렵 왕실 자료실에서 제한 열람 결과가 도착했다. 사유부의 임시 대체 항목과 재발송 명부에 같은 대리 확인명이 남아 있었다. 이름은 사람 이름처럼 보이지 않았다.
[북부 통지대행 제4 확인석.]
태오는 문장을 세 번 읽었다.
“사람 이름이 아니라 자리 이름이네요.”
세딘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이 이름이 남았다고 해서 확인석에 앉았던 사람이 누구인지 자동으로 알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그날 당직표와 대조할 수 있습니다.”
“그 당직표는 어디 있습니까?”
“다른 보관기관으로 넘겼습니다.”
태오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설마 그것도 제4 보전 통로입니까?”
“현재 확인된 자료에는 그렇게 적혀 있습니다.”
토른이 낮게 휘파람을 불었다.
“돌고 돌아 그 상자로군.”
태오는 책상을 내려다봤다. 철제 표식함을 열 권한을 다투는 사람들이 있었고, 그 안에 들어 있을지도 모르는 문서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었다. 상자가 텅 비어 있을 가능성도 있었다. 그러나 적어도 옛 기록에는 그쪽으로 이관됐다는 흔적이 남아 있었다.
마르셀은 자료를 정리하다가 작은 접수증 하나를 들어 보였다. 일곱 해 전 자료를 받았던 보관인이 원판 보존갑의 봉인 상태를 직접 확인했다고 적힌 문서였다. 그러나 안에 든 내용물의 글자를 읽었다는 표시까지는 없었다.
“이 사람이 그 서류를 읽은 증인인가요?” 태오가 물었다.
“봉인 상태를 확인한 증인입니다. 둘은 다릅니다.”
태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물건이 이동했다는 사실과 내용이 무엇인지는 나눠야겠군요.”
“그렇습니다.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으려면요.”
리네아는 옆에서 잔잔히 웃었다.
“당신, 이제 대답을 먼저 알고 있네요.”
“실수한 횟수가 많으니까요.”
“다음에는 실수를 좀 적게 할까요?”
“가능하다면요.”
태오는 접수증 번호를 메모했다. 한 장의 문서가 모든 비밀을 풀어 주리라는 기대는 이제 버렸다. 대신 서로 다른 사람이 남긴 기록을 맞춰 보는 일이 언젠가 정확한 그림을 만들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
잠시 뒤 마르셀이 새 통지를 들고 돌아왔다.
“표식함 인도 신청과 관계없이 보존기관이 봉인 검증과 내용 목록 확인을 신청할 수 있다는 검토 의견이 나왔습니다. 다만 관계자의 입회와 기록 보존이 조건입니다.”
“그럼 열 수 있습니까?”
“아직 허가가 나온 건 아닙니다. 신청 경로가 확인된 겁니다.”
태오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전 같았으면 그 말을 듣고 괴성을 질렀을지도 몰랐다. 이제는 한 단계가 진행되었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의미가 있었다.
리네아가 옆에서 물었다.
“기뻐요?”
“네.”
“그런 얼굴이 아닌데요.”
“혹시 열었는데 아무것도 없을까 봐요.”
“그럼 또 찾으면 되죠.”
“그렇게 간단하게 말할 수 있어요?”
“당신이 지난번에 그랬잖아요. 없어진 게 뭔지 알아야 찾을 수 있다고.”
태오는 그녀를 바라봤다. 리네아는 늘 그가 제일 지칠 때, 그가 했던 말을 돌려주는 사람이었다.
“정말 제 말은 잘 기억하네요.”
“당신이 중요한 건 말하겠다고 약속했으니까요.”
그녀는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태오는 그 손을 잡았다.
***
그날 밤, 발카스에게서 짧은 사적인 전달이 왔다. 금고 관련 사건에 대해 그가 먼저 연락한 것은 드문 일이었다.
[인간. 제4 확인석이라는 이름은 내게도 낯설지 않다. 일곱 해 전 보류 요구서를 접수할 때 담당자가 그 이름을 사용했다. 그러나 그의 얼굴은 보지 못했다.]
태오는 곧바로 답장을 쓰려다 멈췄다. 드래곤의 기억은 중요한 참고가 될 수 있었다. 그러나 역시 원본 대조가 필요한 진술이었다.
[증언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가능하면 당시 접수 확인서 원본 또는 사본의 소재를 알려 주십시오.]
잠시 뒤 드래곤이 답했다.
[바렌을 통해 제출하겠다. 그리고 잔액은 알고 있다. 이백삼십 닢이다.]
태오는 웃음을 터뜨렸다.
“왜 웃어요?” 리네아가 물었다.
“드래곤이 처음으로 제가 묻지도 않은 잔액을 먼저 적었어요.”
“그럼 아주 큰 발전이네요.”
“세상이 변하고 있죠.”
그 순간 전달석이 다시 울렸다. 발카스가 아니었다. 왕실 자료실의 공식 야간 보존 통지였다.
[제4 보전 통로 수장함 관련 옛 인수 목록 발견. 수장 당시 등록 품목: 대리 확인석 당직표, 통지 재발송 대장, 인장 원판 보존갑.]
태오의 웃음이 사라졌다.
목록 마지막에는 작은 주석이 하나 더 있었다.
[수장 전날 제4 확인석에서 발급된 수령 확인표 1건 존재. 해당 확인표의 대상 계약번호는 계정 47 조사대상 번호와 일치.]
그는 숨을 고르고 날짜를 다시 확인했다.
이상했다.
계정 47의 서류가 보관함으로 옮겨지기 전날, 누군가는 이미 그 서류를 받았다고 확인한 것이다.
그 사람이 실제로 무엇을 받았는지, 누구를 대신한 것인지는 쓰여 있지 않았다.
태오는 리네아에게 종이를 보여 주었다.
“이제는 상자 안을 들여다봐야겠어요.”
“하지만 절차대로요.”
“네. 절차대로.”
그는 마지막 문장을 수첩에 적었다.
[다음 조사에서 확인할 것: 수장 전날 수령 확인표의 서명자, 대상 계약번호, 실제 물품.]
그리고 수첩을 덮었다.
처음 이세계에 왔을 때는 집 한 채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지금은 그 집에서 나가기 위해 왕국의 오래된 기록을 따라다니고 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끝이 조금씩 보이는 것 같았다.
누군가 이름을 대신 쓰는 동안, 누군가의 돈이 돌아오지 않았다.
그 이름을 실제로 쓴 사람이 누구인지 알게 되는 날, 이 싸움은 전혀 다른 얼굴을 보여 줄 것이다.
제50화 댓글 0
댓글·공감·신고는 로그인 후 이용할 수 있습니다. 이전 익명 댓글은 그대로 표시됩니다.
댓글을 불러오는 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