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라운 금고상회는 제4 보전 통로 표식함의 소유자라고 주장하지 않았다.
그보다 교묘한 말을 했다.
“원소유자를 대신하여 확인을 신청했습니다.”
이벨이 신청서의 첫 장을 내려놓았다.
“누구의 대리인입니까?”
상회 직원은 어색하게 웃었다.
“고객 정보라 공개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권한 확인이 끝날 때까지 신청인에게 물건을 인도할 수 없습니다.”
“확인만 하겠다는 겁니다.”
“물건을 열어 보는 것도 처분의 일부가 될 수 있습니다.”
직원은 입술을 깨물었다.
김태오는 그 모습을 보면서 지난달 자기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이름을 가리고, 서류를 가리고, 상대가 지칠 때까지 기다리는 것. 돈 많은 사람들이 시간을 쓰는 방법은 참 비슷했다.
이번 문제는 적어도 그의 전세금과 직접 관련된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조정표의 위치를 알고 있다는 상회가 표식함에도 관심을 보였다는 점은 무시하기 어려웠다.
“대리권을 확인하는 동안 보관함이 움직이지 않게는 할 수 있습니까?”
태오가 묻자 마르셀이 답했다.
“현 보관자가 자발적 보존 조치에 동의했습니다. 물건을 어디에도 인도하지 않고, 봉인 상태를 사진 마법으로 남길 예정입니다.”
“그럼 됐네요.”
“아직 안 됐어요.” 리네아가 낮게 말했다.
그녀는 태오에게 접힌 편지 한 장을 내밀었다. 엘프 중개업 길드의 공문이었다.
[중개인이 이해관계 당사자와 사적 친밀관계에 있는 경우, 관련 확인서의 공정성 및 역할 범위를 재검토할 것.]
태오는 두 번 읽었다.
“사적 친밀관계라고요?”
“네.”
“그럼 우리가 연애하는 걸 길드에서 안다는 겁니까?”
“모르는 게 더 이상하겠죠. 파벨시에서 당신은 고대 드래곤한테 장부를 들이미는 가장 시끄러운 사람이고, 저는 그 옆에 있으니까.”
태오는 웃을 수 없었다. 다른 사람들의 보증금을 조사하다가 리네아의 직업을 위협하는 일이 다시 생겼다.
“제가 빠지면 됩니까?”
“그 말 하지 마요.”
리네아가 곧바로 대답했다.
“제가 하는 일은 제가 책임질게요. 우리 관계 때문에 공개해야 할 이해관계가 있다면 공개하면 돼요. 하지만 제 증언 자체가 거짓이 되는 건 아니잖아요.”
“맞아요.”
“그러니 먼저 자료를 보죠.”
그녀는 공문 뒷장을 펼쳤다. 길드가 문제 삼은 것은 ‘연애 자체’가 아니라 중개인으로서 자신이 체결했던 계약의 공정성을 스스로 확인해 주는 일을 피하라는 것이었다. 이미 그 점을 분리해 왔기에 독립 검사인을 지정하면 되는 문제일 수도 있었다.
“독립 검사 비용은요?” 태오가 물었다.
리네아가 그의 이마를 손가락으로 톡 쳤다.
“이런 때만큼은 돈 얘기 말고 다른 걱정을 먼저 해 줘요.”
“당신이 일을 잃을까 봐 걱정한 겁니다.”
그녀의 표정이 잠시 풀어졌다.
“그럼 반쯤은 합격이에요.”
“나머지 반은요?”
“저를 믿는다고 말해 줘요.”
태오는 그녀를 바라봤다.
“믿습니다.”
리네아는 눈을 내리깔았다가, 웃으며 그의 팔에 자기 팔을 걸었다.
“그런 대답은 서면으로 안 받아도 돼요.”
그날 태오는 리네아에게 심사 결과에 영향을 주지 않는 곳에서 기다리겠다고 말했다. 그녀는 그를 바라보다 작게 웃었다.
“당신이 옆에 있으면 든든한데, 위원들이 저를 자기 생각 없이 따라다니는 사람으로 볼까 봐 걱정되기도 해요.”
“그럼 저는 밖에서 기다릴게요.”
“서운하지 않아요?”
“제 일은 저도 직접 하잖아요. 당신 일도 당신이 해야죠.”
그녀가 태오의 소매를 끌어당겨 짧게 포옹했다.
“이런 대답을 하면 제가 더 좋아하게 되잖아요.”
“그것도 심사에 신고해야 합니까?”
“그건 비밀로 할래요.”
태오는 웃으며 문 밖으로 나갔다. 자신이 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응원은 때로 자리를 비워 주는 일이라는 걸 알았다.
***
길드 심사는 생각보다 빠르게 열렸다. 태오는 방청할 수 있었지만, 리네아에 관한 진술 요청이 있을 때만 들어가기로 했다. 위원들 앞에서 그녀는 태오와 사적인 관계라는 사실을 부인하지 않았다.
“그러면 계약 관련 증언의 신뢰성을 어떻게 확보하실 겁니까?”
“제가 직접 확인한 사실과 타인에게서 들은 이야기를 구분했습니다. 제가 중개한 계약 원본에 대해서는 제 설명과 별도로 등록소 인장 대조를 신청했습니다.”
“연애 관계가 판단에 영향을 주지 않는다고 단정할 수 있습니까?”
“판단에 영향을 줄 수 있다는 가능성은 인정합니다. 그래서 독립 확인 절차에 동의하는 겁니다.”
태오는 복도에서 그 말을 듣고 있지 못했다. 하지만 나중에 공개된 심사 요약을 통해 알 수 있었다. 리네아는 모든 것을 자신이 해결하려는 사람이 아니었다. 믿을 수 있게 확인하는 방법을 찾는 사람이었다.
위원 한 명이 태오를 불렀다.
“당신은 중개인 리네아 씨에게 조사 내용을 지시했습니까?”
“아뇨. 오히려 제가 지시를 많이 받았습니다.”
“어떤 지시 말입니까?”
“서류를 식탁에 올려놓지 말라는 지시요.”
위원들의 표정이 묘해졌다. 리네아가 고개를 숙였다.
“그건 사적인 일입니다.”
“그렇군요.” 위원장이 말했다. “우리도 여기서는 사적인 일에 관한 자세한 보고는 필요 없습니다.”
태오는 뺨이 달아올랐다. 법적 위험을 줄이려고 온 자리에서 본인이 가장 불필요한 정보를 제공한 꼴이었다.
심사는 제삼자의 계약 원본 대조를 조건으로 리네아의 활동을 유지하는 방향으로 정리됐다. 최종 세부 조치는 나중에 통지하기로 했다. 잠정적 결론일 뿐이었다.
***
회의를 마치고 두 사람이 계단을 내려올 때, 브라운이 길드 건물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늘 그랬듯 좋은 옷을 입고 있었다. 얼굴은 마치 우연히 산책 중이었다는 듯 자연스러웠다.
“두 분이 함께 나오시는군요.”
“예약이라도 하셨습니까?” 태오가 물었다.
“사업은 우연을 잘 이용하는 법이죠.”
브라운은 리네아에게 얇은 서류철을 내밀었다.
“길드 규정 전문을 검토해 봤습니다. 지금처럼 불안정한 일을 계속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저희 상회 자문으로 오시죠.”
“무슨 일을 합니까?”
“오래된 계약의 효력을 검토하는 일입니다.”
“이해관계 공개는요?”
“가능한 범위에서 하시면 됩니다.”
“그 범위는 누가 정하나요?”
브라운의 웃음이 살짝 흐려졌다.
“당연히 상회입니다.”
리네아는 서류를 받지 않았다.
“고맙지만 거절하겠습니다.”
“김태오 씨 곁에 계시느라 경력을 위험하게 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제 경력은 제가 관리합니다.”
브라운은 고개를 기울였다.
“굳이 저렇게 가난한 인간을 선택하실 이유가 있습니까?”
태오는 반사적으로 입을 열려다 멈췄다. 리네아가 먼저 말했다.
“가난한 건 일시적인 상황일 수 있어요. 남의 권리를 값으로만 보는 버릇은 오래갈 수도 있고요.”
브라운의 미소가 사라졌다.
태오는 속으로 박수를 쳤다. 다만 실제로 박수를 쳤다가는 시비가 커질 것 같아서 가만있었다.
“두 분 다 후회하실 수도 있습니다.”
브라운이 말했다.
“후회할 자유는 있습니다.” 리네아가 대답했다. “그러니까 계약은 제가 선택할게요.”
***
심사실 밖에서는 리네아의 옛 동료가 기다리고 있었다. 갈색 머리의 엘프 여성이었다. 그는 리네아를 조용히 불러 중개업 조합에서 쌓아 둔 다른 사건 기록을 보여 주었다.
“다른 사람들도 연애 때문에 심사를 받은 건가요?” 태오가 물었다.
“그게 아니라, 자신이 중개한 계약을 자기 이름으로 다시 증명해 줬다가 문제가 생긴 사례들이에요.”
동료는 종이 세 장을 펼쳤다. 첫 번째 사례는 계약 원본이 사라져 중개인의 기억만 남은 사건이었다. 두 번째는 중개인이 가족에게 집을 소개한 뒤 시세를 고의로 높였다는 오해를 받은 사건이었다. 세 번째는 고대 인장 해석을 잘못한 사건이었다.
“이 세 가지가 우리 일과 무슨 관계가 있죠?” 태오가 물었다.
리네아가 대신 대답했다.
“일을 하는 사람이 누구를 좋아하는지와, 어떤 증빙이 필요한지는 나눠서 봐야 한다는 거죠.”
동료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리네아는 계약서 원본과 중개 당시 설명을 제공하고, 그 문서가 현재 유효한지 판단하는 사람은 따로 두면 돼요.”
태오는 한숨을 내쉬었다.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감사할 건 없어요. 우리 길드에도 중요한 일이니까요.”
리네아는 동료의 손을 잡았다. 태오는 둘의 오랜 우정이 조금 부러웠다. 이세계에 와서 그는 일을 통해 사람들을 만났지만, 모든 일에서 벗어나 자기 편을 들어 줄 사람은 많지 않았다.
“저도 그쪽 편입니다.”
리네아가 들은 척 못 들은 척했다.
“누구 편이요?”
“리네아 씨 편이요.”
“그럼 저녁 설거지 부탁해요.”
“그건 별개로 협상하면 안 됩니까?”
“아까 제 편이라고 했잖아요.”
동료가 웃음을 터뜨렸다. 태오는 계약의 무서움을 또 한 번 실감했다.
***
태오와 리네아는 심사 이후 길드 뒤편의 작은 정원을 걸었다. 봄에 심어 둔 꽃들이 낙엽 사이에서 겨우 몇 송이 피어 있었다.
“제가 당신한테 너무 많은 걸 요구하는 건 아닐까요?” 태오가 물었다.
“어떤 걸요?”
“시간도, 서류도, 심지어는 자격을 걸고 다퉈야 할 일까지.”
리네아가 잠시 서 있었다.
“처음에 제가 집을 소개했고, 설명을 충분히 못 한 부분은 제 책임이에요. 하지만 지금 함께 조사하는 건 제가 선택한 일이에요.”
“그러면 언제든 그만두고 싶으면 말씀해 주세요.”
“그건 약속할게요. 대신 당신도 자신이 해야 할 일과 모든 사람의 일을 구분해요.”
태오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드래곤한테 돈 받으러 간 사람이었는데, 지금은 세상의 모든 장부를 뒤지는 기분이거든요.”
“그래도 같이 있으면 재미있어요.”
“저는 가끔 무서운데요.”
“드래곤이요?”
“당신이요.”
리네아는 웃으며 그에게 한 걸음 다가왔다.
“그렇게 무섭다면 지금 도망갈 기회를 줄까요?”
“사람이 웃으면서 그렇게 말하면 더 못 가는 거 아십니까?”
그녀가 손을 내밀었다. 태오는 그 손을 잡았다. 둘은 말을 줄이고 천천히 걸었다. 복잡한 계약 세계에서 모든 답을 즉시 얻을 수는 없었다. 그러나 누구와 같은 방향으로 걸을지는 스스로 정할 수 있었다.
***
그날 저녁, 표식함 보관자인 동쪽 창고 관리인이 진술하러 왔다. 그는 발카스 측 관리인이면서도 따로 작성한 개인 근무일지를 제출했다. 보관함이 옮겨진 날짜는 7년 전 보존 통로 폐쇄 직후였다. 운반인은 드워프 두 명과 인간 감독 한 명. 이름은 훼손되어 있었다.
토른은 일지의 수레 그림을 보자마자 입을 다물었다.
“왜 그래요?” 태오가 물었다.
“저 형태는 광산용 운반 수레가 아니야. 무게보다 진동에 민감한 물건을 옮길 때 쓰는 설계다.”
“그럼 안에 귀한 게 있습니까?”
“귀한 것보다 깨지면 곤란한 걸 넣는다는 뜻이지.”
“동전은 안 깨지잖아요.”
“맞아.”
둘은 잠시 침묵했다.
이벨은 보관함의 소유권을 확인하기 전 열어 볼 수 없다고 다시 설명했다. 대신 운반인의 신원과 이동 경로를 확인할 근거가 하나 생겼다.
태오는 근무일지 사본에 날짜를 표시했다. 7년 전 처분 보류 신청이 접수된 지 닷새 뒤였다.
“그 기간에 발카스가 직접 물건을 옮기라고 지시했을 가능성은요?”
“가능성만으로 말하지 마.” 토른이 답했다. “주택조합이 자기 물건을 정리했을 수도 있으니까.”
“그럼 누가 옮겼는지부터 확인하죠.”
리네아가 일지 끝에 적힌 작은 문장을 가리켰다.
[보관인 교체 지시. 기존 수령인 서명 결락.]
태오는 무릎 위 수첩을 펼쳤다. 다른 기록에서도 비슷한 빈칸을 본 적이 있었다.
두 지급명단의 중복, 원본 통지 전 찍힌 완료 도장, 그리고 이번에는 서명이 없는 인도 기록.
“이 세계 사람들은 칸을 만들어 놓고 왜 이렇게 서명을 안 합니까?”
“누군가 서명하지 못했을 수도 있습니다.” 이벨이 말했다.
태오는 그 말에 수첩을 닫았다. 빠진 서명은 언제나 속임수의 증거만은 아니었다. 누군가 사라졌다는 흔적일 수도 있었다.
밖은 어두워지고 있었다. 리네아는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태오의 손가락 사이에 자기 손가락을 끼웠다.
“아까 길드에서 했던 말, 마음에 걸려요?”
“어떤 말이요?”
“저를 믿는다는 말.”
“그건 참말이었어요.”
“그럼 오늘 저녁은 제가 고를게요.”
“뭘 먹는데요?”
“아주 비싼 곳.”
태오가 놀라 걸음을 멈췄다.
리네아가 웃었다.
“표정 좀 봐요. 농담이에요.”
“드래곤보다 무서워요.”
“그런 사람이 절 좋아한다고요?”
“네. 그러니까 더 큰일이죠.”
그녀는 태오의 팔에 기대며 잠시 고개를 숙였다. 두 사람의 그림자가 길게 이어졌다. 그리고 뒤쪽 골목에서 또 하나의 그림자가 멈춰 섰다.
태오가 돌아보았을 때 그곳에는 아무도 없었다.
길드 건물 앞에 있던 검은 마차만 천천히 반대편으로 사라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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